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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중감

花受紛-동아줄 2011. 5. 22. 13:44

나는 자기 능력과 자기 존중을 희망이나 찬미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하여 논의하고 있다.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가진 사람들의 특성 중의 하나는 사실대로 스스로의 능력과 성취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즉, 그것을 과장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중감은 우리가 의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했을 때에 길러진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어떤 종족인가, 피부색이 어떤가, 조상들의 업적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참된 자기 존중감을 얻는 것이 부담스러워 이를 회피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소위 내가 말하는 '거짓된 자기 존중감'을 지닌 장본인 들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치들에 대해서 흡족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가치들은 허약한 자아를 일시적으로라도 지탱해 줄 수 있는가?  아마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양심,  책임감,  그리고 성실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 상태가 자기능력과 자기존중의 원천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기기만의 원천이다.

 

 

 

 

 

참된 것이란 무엇인가 

 

 

가끔 우리는 , 세속적 성공을 즐기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불안함을 보이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존중감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 이제 참된 자기 존중감을 개발시키지 못하여 여러 가지의 불안과 불안정과 자기불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실제로 자신의 존재를 부적절하게 여기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상태는 심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고,  두려움을 부정하려고 하고,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하며,  가지고 있지 않은 자기 존중감을 겉치레로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내가 말한,  거짓된 자기 존중감을 발전시킬지도 모른다.

 

 

왜곡된 자기 존중감은 진실이 없는 자기 존중감이며 허황된 자기 능력감이다.  그것은 비이성적이며 불안을 제거하여 거짓 안정감을 갖기 위한 자기 보호 장치이다.  즉,  그것은 자기 존중감이 부족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참된 자기 존중감에 대한 갈망을 감소시키는 자기보호 장치이다.  그것은 적절하기도 하고 부적절하기도 한 가치에 근거하고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참된 자기능력감과 참된 자기가치감에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의식이나 책임감 그리고 성실성을 통해 자기 존중감을 찾는 대신에 우리는 인기,  명성,  제물 또는 성적 탐닉을 통하여 자기 존중감을 찾을지도 모른다. 

 

고유한 개인적인 진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신에 우리는 합법적인 정당이나 합법적인 클럽이나 합법적인 교회에 소속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절하게 자기 확신을 실행하는 대신에 특정 단체에 맹목적으로 충성 할지도 모른다. 

 

정직을 통한 자기 존중감을 찾는 대신에 우리는 어떤 자선을 통해 그것을 찾을지 모른다(나는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좋은 일을 한다는 식). 

 

능력을 발휘하는 대신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힘'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자기 기만에 대한 가능성은 거의 끝이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위조화폐로 사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잃을 수도 있는 막다른 길에 맹목적으로 빠져든다.

 

 

자기 존중감은 개인적인 은밀한 경험이다.  즉,  그것은 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대체로 인지되지 않고 있다.

 

 

나는 내 가족에 의해서,  그리고 내 친구나 동료들에 의해 사랑받을 수 있으나,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나는 무한정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의 동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실제로 모든 사람을 무력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나 정작 나 자신의 부적절함에 대해서는 몰래 불안해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나 자신은 실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는 모든 명예를 잡을 수 있으나,  나 자신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수백만명에 의해서 숭배를 받을 수 있으나, 매일 아침이면 기만과 공허감에 병든 생각으로 눈을 뜬다.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성공하는 일은,  마치 어떤 협잡군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까봐 불안해 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

 

 

 

 

 

 

 

갈채는 자기 존중감이 아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갈채로는 자기 존중감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지식,  재능,  재물의 획득,  결혼,  자선운동,  친자 관계,  성적 복수, 안면 성형수술 등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일시적으로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특별한 경우에 좀더 편안하게 해 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편안함이 자기 존중감은 아니다.

 

 

불행스럽게도,  자기 존중감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거짓으로 신을 숭배하고 있는 점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무디다. 자기 존중감에 관한 세미나를 하는 사람의 강의가 기억난다.  그는 우리의 자기 존중감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우리를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약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과,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운석들처럼 칭찬과 아첨으로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의외로 자기 존중감이 약한 사람을 발견하는 악몽을 가정할 수 있다. 

 

 

나는 자기 존중감이 없는 사람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때에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자기존중감을 높여주기 위해서 늘 칭찬해 주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회사에 들어가라고 말한다는 것이 쓸모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분명히 자기 존중감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자기 존중감이 있는 동료를 찾는 것이 현명하다. 좋은 관게를 유지하는 것은 해로운 관계보다 낫다.  그러나 자기 존중감의 기본적 원천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렇게 되지도 않으며, 둘째, 정신적-정서적 안정에 치명적인 작용을 하는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습관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반응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사회적인 인간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명히 자기 인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간에는 서로 주고 받는 피드백이 그들의 자기 존중감을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을 유일한 주요 요소라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 중요성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자율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서 30년이상 일해 왔다면,  그 사람이 자유스럽게 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인식하는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데에 이의가 있을수 없다.  자신의 내적인 신호음의 높이를 올릴수록 외적인 신호음은 더 적절한 균형을 찾아서 점점 물러나게 된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 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신체에 용의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  자신의 감정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  혼자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참된 자랑

 

 

만약 자기 존중감이 우리의 근본적인 능력과 가치의 경험에 관계한다면 자랑은 우리의 행동과 성취로 인해서 얻은 즐거움을 더 분명하게표현한 것과 관계된다.  자기 존중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관계되며,  자랑은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과 달성한 것에 관계된다.

 

 

참된 자랑은 보통 뽐내는 것,  허풍을 떠는 것,  오만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정반대의 뿌리에서 시작된다.  공허하지 않는 만족은 참된 자랑의 원천이다. 참된 자랑은 인정받으려고 줄곧 애쓰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자랑은 달성한 일에 대한 감정적인 보상이다.  그것은 극복되어져야 할 악이 아니고 획득해야 할 선이다.   달성은 항상 자랑이라는 결과를 초래할까?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중소 기업의 사장이 나에게 자문을 해 왔는데,  그는 자신의 사업에서 크게 성공하였지만 기분이 좋지 않고 만족을 못 느끼는데 왜 그러한가라는 문제였다.  그는 어렸을 때의 꿈은 늘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사업 쪽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일에 대해서 아주 피상적인 종류의 자랑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기 존중감에 크게 상처를 받았었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가 사랑받고 싶고 소속되고 싶다는 희망에서 자신의 마음과 기대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바의 기대에 합치된 가치와 정신에 굴복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백한 것은,  아주 일찍부터 그의 자기 존중감의 문제는 그런식으로 항복문서화되어 있었다.

 

 

그의 좌절감으로 자신의 깊은 내면의 욕구를 경시하면서 화려하게 일을 성취하는 생애를 만들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틀 속에서 생활하면서 자부심과 만족같은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가 그러한 틀에 도전하여 겪게 될 두려움에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한 그의 문제는 해결될 가능성이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나는 많은 것을 이룩해 놓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왜 자존감을 느끼지 못할까?" 하는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들이 달성한 일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에 답을 찾기 위해서 다음의 질문으로 대신할 수 있다.  즉, "당신의 목표를 누가 선택했는가?  당신의 내부에 힘이 있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자리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진실을 반영해 줄 수 없는 차용한 가치를 추구하는 한 우리의 자부심이나 자기 존중감은 지탱될 수 없다.

 

 


 

 

 

 

의지적인 선택 :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행동에 관한 한,  자기 존중감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우리는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쉽게 가질 수도 있고 어렵게 가질 수도 있는데 이는 거의 천성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의지적인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즉, 사람들은 인생을즐기는 성향이나 삶에 대한 탄력과 에너지가 다르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유전적인 요소는 이런 다양성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앞으로도 배우게 될 것인지 나는 반신반의한다. 확실히 교육이 강력한 역활을 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개인들이 정신이 완전히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자기 존중감에 손상을 입는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집중적인 심리치료가 없다면 그 후에 건강한 자기존중감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하다.

 

 

높은 자기 존중감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좋은 자기 존중감을 소유한 부모를 만나서 그를 모델로 하여 따르는 일이라는 연구가 있다.  스탠리 쿠퍼스미스는 그의 저서 [자기 존중감의 선행 조건] 에서 이를 잘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만약 사랑과 존경으로 우리를 길러 주고,  일관성 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자애롭게 인정해 주고,  합리적인 규칙이 작용하는 구조를 경험하게 하며,  모순들로 휩싸이지 않게 하고,  비웃음이나 창피감 또는 신체적 학대가 없이 보호해 주고,  사람들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믿고 인간의 선한 면에 대한 믿음을 투사해 주는 부모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틀을 얻게 되고 그러한 태도를 내면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라고 밝힌 연구는 없다.  쿠퍼스미스의 연구에서는 명백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지시된 기준에 의해 훌륭하게 양육된 것처럼 보이는 사림이 있는데도,  여전히 불안정하고 자기를 의심하는 성인들도 있다. 한편, 모든 것이 잘못된 사람들에 의해서 길러진 생활배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학교에서 잘 하고 있으며 안정되고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자신의 가치와 권위에 대해서도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치 심리학자들을 혼돈시키고 좌절시키기 위해서 이 지구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이다.

 

 

우리는 자기 존중감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생물학적인 요소나 발육상의 요소를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자기 존중감을 향상시킬 수도 있고 낮출 수도 있는 특별한 실제 훈련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정직함이 자기신뢰를 북돋우며 고취시키고,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무의식 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도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더 잘 깨닫는다는 것을 안다.  성실성이 자기 존중을 불러일으키며 위선적인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안다.  비록 그러한 문제들이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기 존중감을 지키는 일

 

 

우리는 자신의 자기 존중감이든 다른 사람의 자기 존중감이든간에,  이를 직접적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존중감은 노력의 결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즉,  내적으로 생성되어진 실천의 산물인데,  이는 의식적으로 책임감 있게,  그리고 목적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결과로서 얻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실천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의 자기 존중감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타인의 자기 존중감을 북돋우거나 촉발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정,  학교 또는 직장에서 자기 존중감을 북돋우려면,  자기 존중감을 키워 줄 수 있는 실천적인 일을 지지해주고 강화시키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건전한 자기 존중감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우리에게 내적으로 건전한 가지 존중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아주 간단하고 명백한 방법들이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항목들이다. 

 

 

- 생활 자체에서 얻은 기쁨이 투사된 태도,  말씨,  얼굴 표정,  행동을 지닌다.

 

- 그는 실제 일어나는 사실에 호의적이므로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부족함과 성취수준을 편안한 마음으로 말한다.

 

- 칭찬을 주고 받는 것,  좋아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  애정을 주고 받는 일을 자연스럽게 행한다.

 

- 상황에 적합하게 조율하는 듯한 분명한 발음의 목소리.

 

 

유의해야 할 점은, '긴장하지 않는다' 는 말과 '편안하다'는 말이 되풀이하여 나타난 점이다.  긴장하지 않거나 편한 상태는 우리 스스로와 싸우지 않거나 자신을 숨기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상습적인 긴장은 내적 분열,  자기 회피,  자기 부정을 암시하며,  결박되어 있거나 포기된 자아 현상을 표출하는 것이다.

 

 

나는 서로가 다른 입장의 이론을 가진 심리치료자들에게 고객의 자기 존중감을 직관으로 알 수 있는 간단한 기준이 무엇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높은 수준에서는 서로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자기 존중감은 어느 정도로 충분한가

 

 

지나치게 너무 많은 자기 존중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신체적 건강을 지나치게 지녔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과 같다.  때때로 자기 존중감을 오만, 허풍, 거만과 혼동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존중감이 지나치게 없거나 거의 지니고 있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다.  그런 특성은 자기 존중감의 결핍 현상을 반향해 주는 것이다.

 

 

자기 존중감이 높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어떤 표준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여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보다 우월한 자신의 모습에서 어떤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에서 기쁨을 찾는다.

 

 

 

 

 

 

 

불안정은 적개심을 유발한다

 

 

사실 자기 존중감에 문제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가끔 자기 존중감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불안해 하거나,  또는 "그들은 너무 많은 자기 존중감을 가졌다"고 단언하면서 적의를 품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불안한 남성들은 자신감을 가진 여성들의 면전에서는 더 많은 불안감을 느낀다.  자기 존중감이 낮은 사람은 생활을 열심히 해나가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가끔 짜증을 부린다. 만약,  자기 존중감이 잘못 형성된 배우자라면 상대방의 자기 존중감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드물긴 하지만 가끔 화를 내거나 그 성장을 중지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슬픈 사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표적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 놓은 업적이 적은 사람들은 종종 행복한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그들에게 적의를 품기도 한다.  자기 존중감이 결핍된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존중감을 지나치게 많이 갖는 것은 위험하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즐긴다.

 

 

 

-[나를 존중하는 삶]  P.7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