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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중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花受紛-동아줄 2011. 5. 22. 13:41

우리 모두는 인생 행로에서 좌절하여 방황한 시절을 기억하며,  당시 느낀 무기력과 무능함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순간들이 과연 우리를 규정지을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당하지 않거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러한 경험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한때 앓았던 병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한 고통과 두려움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삶의 본질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감 있고 성실하며 지각있는 생활

 

 

자기 존중에 대한 욕구는 삶의 역경을 적절하게 이겨나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각 개인에게는 독특한 임무가 부과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삶이란 것을 깨닫고,  책임있게,  성실히 살아 가면서 자기 존중감을 얻게 된다.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자신의 의지적인 통제로 행동의 방향을 판단해야 한다.  타인의 의지와 선택에 좌우되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존중감 형성을 그르치게 한다.  바로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타인의 의지에 의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자기 존중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적절성에 관계되며,  우리의 행동을 통괄하고 지시하는 정신적 작용에 관계된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인기,  영향력,  획득한 부,  겉모습,  세력 등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측정하려고 하는 일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어느 정도는 타인으로부터 존중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타인이 좋게 보아주는 의견에 따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판단하려 하는 것은,  남의 손아귀에 자신을 가장 비굴한 형태로 떠맡기는 꼴이 된다.  "남의 마음에 들기"(그리고 비난받기를 피하려는 것)를 원한다면 이는 바로 자기 존중감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된다.  자신을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대를 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우리는 매력적인 외모에서 위안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존중감을 외모에서 찾는 일이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피할 수 없이 허망한 짓이며,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포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외모가 설령 그 사람의 행동을 능가한다 하더라도,  그럴듯한 겉모습으로는 부정직이나 무책임 또는 비합리성으로 침해 받은 정신적 상처를 결코 치유하지 못한다.

 

 

 

 

 

 

 

 

알려고 하는 의지

 

 

높은 자기 존중감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매사를 이끌어 간다.

 

 

그들은 행동을 할 때에 자신의 주위와 자신을 지각하면서(자신이 받는 피드백까지를 지각하면서) 행동한다. 그래서 자신이 목표와 목적에 관련된어 있는지 아닌지를 분별한다.  나는 이런 태도를 [자아를 귀중하게 여기는 일] 이란 책에서 "알려고 하는 의지"라고 표현했다.

 

 

우리 의식의 폭은 지성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이를테면,  사물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는 추상적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잠재적 의식의 범위도 정해진다.  그러나 의식에 의지하는 원칙 또는 이해하려는 의지는 모든 지적 수준과 일치한다. 

 

 

자기 주장을 시도하려는 것은 바로 의식의 표현이며,  우리가 본 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들은 것을 이해하려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삶 자체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건전한 자기 존중감의 기본이다.

 

 

 

 

 

 

 

 

 

어른들의 당혹스런 세계

 

 

이러한 태도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는 도중에 많은 아이들은 큰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  어린이는 부모의 세계와 다른 어른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자아는 길러지기 보다는 침해를 받는다.  어른들의 말, 생각,  행동을 이해하려면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후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어른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며 자신들의 무력감을 책망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주 나이 든 사람들에게나 또는 자신들에게 심각하게 잘못된 어떤 것을 꼬집어 말할 수도 없으며 몹시 절망적인 상황을 감지하게 된다.  그들은 "나는 결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으며,  결코 알지도 못할거야"라고 지각할지도 모른다.

 

 

 

 

 

 

 

 

내적 의지의 발견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은,  비록 당혹스런 고통을 겪기는 하지만,  강한 추진력을 개발하게 된다. 특히 절망적이고 불합리하고 참담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따돌림 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며 심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무능력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런 불행을 비켜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의식에 의존하여 자라난 개인들은 실체를 파악하고,  기술을 습득하고,  과제를 수행하고,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다.  물론 이런 성공을 확인하는 과정에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여 선택한 일에 대해 인정받게 되면 이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삶에 대한 적절감을 느끼게 된다.

 

 

삶의 한 방식으로,  합리성과 자각과 사실 존중에 의존하는 삶, 즉, 의식에 의지하는 삶은 적극적인 자기 존중감의 표현이자 원천이 된다.

 

 

우리는 종종 적극적인 자기 존중감을 오직 지식이나 성공,  칭찬,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연결시키는데,  이렇게 하면 결국 그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되고 만다.  즉,  소위 말하는 '의식에 의존하는 삶'이나 '알려고 하는 의지'가 쌓이고 이것이 결합되어 선택이 이루어지는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존중감을 형성해 주는 진실된 근원을 스스로 놓쳐버릴 수 있다.

 

 

 

 

 

 

 

 

유능해지려는 의지

 

 

자기 존중감을 알게 되면,  이른바 '유능해지려는 의지'를 알게 된다.  '유능해지려는 의지'의 뜻은 '알려고 하는 의지'를 확대한 개념이다.  이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인내력을 발휘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즉,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경우일지라도 지속적으로 알아내려고 하고,  좌절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과 방법을 익히려 애쓴다.  도중에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지속적으로 목표를 추구해 나간다.

 

 

'유능해지려는 의지'를 가지면,  우리는 자아와 자신들을 무기력이나 좌절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게 할 수 있다. 

 

 

수년 전에 나는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 두사람의 만남을 보았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친사촌이었고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들은 모두 친척과 어른들의 행동에 대한 많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다.

 

 

"나는 견디지 못했는데,  너는 그것을 모두 견뎌냈어."하고 정신과 의사는 심리학자에게 말했다.  "그들은 너에게까지는 상처를 주지 못했어. 나는 항상 네가 얼마나 견디어낼까 하고 걱정했어.  왜냐하면 난 그렇게 하지 못했거든.  나는 어느 정도 포기했었단다."

 

 

심리학자가 대답했다.  "여러 차례 나에게도 완전히 절망적인 때가 있었지.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이 어딘가에서 '포기하지 말아라! 인내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어.  계속해서 '의식을 지켜라.  의식의 세계에 귀를 기울여라.  꾹참고 이해하도록 해라.  네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말라.' 분명히 이것들은 내가 어린시절에 썼던 말은 아니지만 그러한 뜻이 담긴 말이었어. 그것은 내가 고수해야 할 것이었어."

 

 

"유능해지려는 의지"를 나는 충동적으로 자진하여 선택했다.  "유능해지려는 의지" 이것이 바로 내가 내담자나 학생에게 말해주고자 했던 것을 집약해 주는 개념이었다.  이것은 바로 생활에 근본적인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원리이다.

 

 

"유능해지려는 의지"  이것은 무기력한 상태로 영원히 남으려는 인간의 의식을 거부한다.

 

 

 

 

 

 

 

 

전략적 초연 : 문제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인생의 여러 행로에서,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많은 고난으로 상처를 입어 자신의 가능성까지도 박탈당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다 더 성숙한 자신에 이르기 위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애쓰면서 "내 문제보다 나"에 관하여 더 잘 이해하려는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큰 감명을 받는다.

 

 

매우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어 온 어린이들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맥락과 관계있는 특별한 생존방법을 배워 온 셈이다.  나는 그것을 "전략적 초연"이라고 부른다.  심리적인 장애와 혼란을 일으키는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과 세계를 초연하게 벗어나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일련의 삶으로부터 직관적으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해결 방법을 찾게 되어,  더 좋은 선택이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이것을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여자의 모두가 아니며, 아버지 또한 남자의 모두가 아니고,  우리 식구가 가능한 인간 관계를 다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니며,  내 이웃의 생활과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당면한 문제에 고통받지 않도록 하며,  바로 그것이 그들을 파멸되지 않도록 해 준다.

 

 

그들의 "전략적 초연"은 그들을 무기력하다고 깨닫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대로 얽매여 있지 않도록 해준다.

 

 

"유능해지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어른이든 어린이든,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무기력을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무기력 속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실패했음을 확인하지 않고도 일시적으로 좌절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무력감을 느낄지라도,  일정한 휴식기를 거친 후에,  최선을 다하여 버려진 파편조각들을 모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순간적 감정을 초월하여 인생에 대한 전망을 키워 간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현재의 역경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이는 의지적 의식을 가진 자에게만이 가능한 일종의 불굴의 영웅적 용기이다.

 

 

 

 

 

 

 

자기 존중감과 지능

 

 

건전한 자기 존중감과 지능이 관계있다고 제시한 논문은 없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기 존중감은 하나의 기능이다.  이는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세계의 상태에 관계된 기능이다. 이는 의식이 관여한 선택,  사실에 기초한 정직성,  개인의 성실성 정도에 관계된다.

 

 

자기 존중감은 경쟁적인 것도 아니며 상대적인 것도 아니다.  자기 존중감은 자아와 개인의 관계,  자아의 선택과 개인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존재한다.  높은 수준의 자기 존중감과 지성을 지닌 사람은,  보다 더 고상한 지성과 더 많은 자기 존중감을 지닌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거나 더 적절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비유를 해보자. 건강이나 물질 면에서 똑같은 두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  더 강한 사람은 높은 수준의 신체적 행복감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무엇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때,  우리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확실히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내면 세계의 생동감이나 만족감에서 차이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독자적 사고

 

 

지적 독자성은 '의식에 의존하는 삶' 과, '알려고 하는 의지'와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타인의 정신으로 사고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서로 배울 수는 있는데,  단순한 모방이나 반복이 아닌,  이해를 수반하는 지식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실행해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평가의 책임을 넘기고 다소 무비판적으로 그들의 판단을 받아 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삶의 형태나 스스로 체험한 인생 행로는 우리가 한 선택이다.

 

 

 

 

 

 

 

목적과 의도가 중요하다

 

 

우리는 때때로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의 힘으로 사고하고 알아내려 하고 혼자의 힘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도와 개인의 목표이다.

 

 

치료중인 환자가 한 번은 나를 방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왜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에만 의지하는지 알 수 없어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당신이 자라면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원한 적이 이었습니까?  독자적인 당신의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습니까?"

 

 

그녀는 잠시 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나는 "놀랄 것은 없지만,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내가 생각한 것"이라고 한 것은 거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다시 반복하는 경우가 더 많다.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이,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익하다.  우리가 해야할 일과 인간 관계,  그리고 삶을 안내해 줄 가치관과 자신을 이끌어 줄 인생목표에 대해서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바로 자기 존중감을 생성시킨다.  건전한 자기 존중감은 당연히 독자적 사고로 귀결된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다

 

 

내가 말한 끝부분만을 받아들이게 되면,  "나는 쉽게 독자적으로 사고한다.  그러니 나는 높은 수준의 자기 존중감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존중감은 주어진느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자기 존중감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쉽게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경우에라도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위협적인 상황이나 불확신과 불안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 처해 있어서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곤란한 경우에라도 독자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자기 존중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쉽게 이루어졌다면 그것 자체가 심리적인 효과에 불과한 것인데,  이는 그 이전에는 줄곧 판단을 쉽게 내릴 수가 없었고,  독자적 사고를 가로막는 압력이 대단했으며,  불안한 상태를 극복해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은 후의 심리적인 승리감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의식과 자신의 느낌,  자신의 판단을 가질 때쯤이면 부모나 다른 가족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라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아내가 어떤 근본적인 문제에 관하여 남편이 틀렸다고 믿었을 때,  그녀의 생각을 표현해야 하는가 아니면 억제하여 '친한관계'를 견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느 예술가나 과학자가 우연하게도 동료들의 합법적인 신념과 가치와는 먼 방향으로 길을 갑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었을때에, 그리고 동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의견과는 먼 방향으로 길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외로이 그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모든 상황에서 논쟁과 도전은 같은 결과를 남긴다.  자신 내면의 신호를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아니면 이를 포기해 버려야 할 것인가?  이럴 경우 다음과 같은 갈등 상태를 만나게 된다.

 

 

- 독립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응적인 타협을 해야 하는가?

 

- 자기표현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부정을 해야 하는가?

 

- 자기주장을 견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굴복을 해야 하는가?

 

 

 

 

 

 

 

굴복하지 않는 의식

 

 

때로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생각으로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상태를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불굴의 용기의 가장 중요한 형태 중 하나가 의식의 영웅성과 사고의 영웅성인데,  이는 다름아닌 솔선하여 고독함을 참아낼 수 있는 성향이다. 

 

 

각자의 심리적 특성들과 같이 독립성도 정도의 문제이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독립적이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늘 의존적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독립성이 강하고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솔선성이 강할수록 자기 존중감의 수준이 높은 경향을 띤다.

 

 

 

 

 

 

 

 

 

분별력

 

 

사실과 희망 그리고 두려움을 분간하는 일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기본적인 역경에 맞싸워 이겨낼 적절한 능력을 가질 수가 없다.

 

 

사고는 느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때때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어떤 행동이 실행되기를 갈망한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실행시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한 예로,  한창 논쟁 중에 흥분하게 되면 우리는 그 곳에서 뛰쳐나가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곧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병의 징후가 있을 때에 진단을 받으러 의사에게 가는 일은 또 다른 좋은 예가 된다. 

 

 

만약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여유가 없으면서도 물건을 구입하려 한다면 우리는 욕망의 의식에 굴복한 셈이다.  만약 우리가 위험스러움을 알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결혼을 했는데 결국 파혼에 이르렀을 경우에 당황하거나 겁먹는다면,  두려움에 이르는 의식에 희생되는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의도와 목적을 부각시킨다

 

 

자기 존중감이 작용하고 있는 한, 사실과 희망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차이를 구별하고 도피 기제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목적한 바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것과 두려움의 영향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 아는 바대로의 확실한 바람과 의도를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항상 불합리하고 부정직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만족스런 상태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항상 자유롭게 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누적되면 기본적인 정직이나 부정직이라는 내면세게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실존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나 무책임에 관계된다.  어릴 때부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진실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흥미를 쏟는다.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실이 아닌 듯이 작용한다.  단지 누군가 그것들을 찾아낸다면 진실은 무관하고 거짓은 거짓을 뿐이라는 듯이 작용한다. 최선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의식의 주요 임무이다.  사실을 존중하는 것 - 실존을 인식하는 것 - 은 의식을 높이는 것이며,  의식을 높이는 것은 자기 존중감을 높이는 것이다.

 

 

 

 

 

 

성실성 

 

 

개인이 주장하는 가치, 신념, 확신과 일치되는 행동에서 자기 존중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성실성이다.

 

 

우리가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했을 때는 마음으로는 이미 자기 자신을 잃은 셈이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런 행동이 습관화 되면 자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며 결국에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일반적인 정신은 물론 특수 상황의 윤리에서도 스스로를 분리시키려고 하고,  심리적 안정이나 정신요법이라는 맥락에서 언급하는 도덕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성실성이라는 점도 간과하게 되며,  스스로에게 '긍정적 관심'을 갖는 일이란 성실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순전히 자기만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라는 오도된 믿음을 형성하게 된다.

 

 

 

 

 

 

 

원리와 기준 그리고 가치 

 

 

때때로 사람들은 모든 가치와 기준을 부정해버리고 '성실성이라는 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인간이라는 존재는 저급의 단계로 후퇴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사색이 없는 상태로 복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미래의 장기적 전망이 열려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이며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밖에 달리 작용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행동을 이끌 가치가 필요하고 우리의 삶을 이끌 원칙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삶의 안녕과 필요에 적합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나,  어떤 형태이든 기준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와 원리와 기준을 무시하려 들면서 일간 본성에 반하는 상태로의 변질이 심하면 심할수록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바로 이는 자기 존중감의 허약함을 표출하는 것이다.

 

 

기준에 따라 생활한다는 문제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기준이 잘못되었거나 불합리하다면 어떻게 될까?

 

 

 

 

 

 

도덕적 규범 

 

 

우리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므로 유해한 도덕률을 수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로,  어떤 종교적 훈계는 음으로 양으로 성을 비난하고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지상의 모든 즐거움과 야망, 물질적 성공과 쾌락을 저주한다.   그런데 삶을 부정하는 기준을 수용하는 일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나는 [자기 존중감의 심리학] 과 [자아를 귀중하게 여기는 일] 이란 저서에서 이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단지 강조하는 것 뿐이다.  우리를 자기파괴의 방향으로 이끌 우려가 있는 기준에 따라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점을 한번 점검해보아야 한다. 시간은 성실성이 없이 살아가게끔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가 설정한 기준에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선이라고 여기고 가르쳤던 것들이 의도하고 있는 '숨은 뜻(기본 전제)'을 새롭게 검토하는 도전적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자기 긍정 

 

 

자기 존중감을 찾은 사람은 자기 긍정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 존중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약 우리가 성장하여 변화하려고 한다면,  자기를 인정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자기 긍정이란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 [자기 존중감을 어떻게 올릴 수 있는가] 라는 저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긍정이란 말을 개인이 가진 여러 가지 개인적 특성(혹은 외모)을 인정하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나 개선은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자기를 긍정한다는 말은 개선되고, 향상되고,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뜻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자신의 존재나 자신에게 진실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관한 사실,  즉 우리 존재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당시의 자아를 나타내는 모든 표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행동의 특성을 만족스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음 속으로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며,  따라서 우리는 변화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내가 인정해야 할 것인가 부정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려는 명상의 태도가 요청된다.  그것은 곧 깨달음에 대한 욕구이다.

 

 

 

 

 

 

 

 

 

무조건적 자기 긍정 

 

 

아직도 더 깊은 수준의 자기 긍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자기 긍정은 나는 살아 있고 의식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자기에 대한 가치 인식과 자기 실현이다.  이것은 자기 존중감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합리성보다 선행되는 윤리 이전의 자기 긍정적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을 지닌 모든 유기체에게 천부적으로 부여된 일종의 원초적 이기심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이렇게 중대한 자기 긍정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이에 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심리치료가들이 자기 존중감이 결핍된 사람들에게 불어 넣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 긍정적 태도이다.  자기 긍정적 태도는 삶을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  자기혐오와 자기에 대한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운명에 굴복하지 않도록 북돋아 준다.  그러므로 자기 존중감을 충분히 지니지 못해서 불행한 사람은 자기 불신의 태도와 죄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나는 자신이 행한 행동의 일부분으로서 자신을 의심하는 태도와 죄책감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이런 수준의 자기 긍정은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존중감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나는 치료받고 있는 내담자에게 자기 긍정의 개념을 전달하려고 할 경우에,  가끔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지금의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달라지기를 원한다.  내가 찬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힘이 있고,  신념에 차 있고,  주장이 확실한 사람들이다. 바로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상이다.  그런데 왜 나는 보잘 것 없는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두 가지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면 그밖의 모든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이며,  둘째는, '있는 그대로' 의 모습과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변화나 개선과는 무관하다는 잘못된 신념이다.

 

 

 

 

 

 

 

 

자기 긍정은 변화를 촉진시킨다 

 

 

언젠가 남자들의 성적 요구를 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혐오감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환자가 생각난다.  나는 그녀에게 한 여성으로서 누구에게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울면서 "예"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여하튼 그녀가 그렇게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고 사실을 수긍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후에야 마지 못해서,  "나는 한 여성으로서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시인했다.

 

 

나는 질문을 하면서 그녀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할 수 없는 한 여자로서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격분하면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시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왜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현재 상태를 그녀가 수긍할 수 있기 위한 몇가지 심리적 치료를 받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과거에 했던 그녀의 행동을 재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느낌을 버린 것이다.  그녀는 '현재의 자기 생활이 참된 자신의 모습임'을 거북스럽지 않게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실로 감탄하며 말했는데,  "정말로 이상해요. 사실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직도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편안함을 느끼고,  내 자신을 부정하려고 내 자신과 싸우지 않아요.  현재의 나는 나의 진짜 모습이고,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인정해요.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단지 말로써가 아니라 당신도 알다시피 진정한 사실로써,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 자신을 이전보다 더욱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게 됐어요."라는 응답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더욱 의미있는 말을 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과 지금까지 살아 왔던 생활방식의 사실적인 면을 인정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러한 삶을 계속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어요.  즉 내 의지가 동의하지 않고는 혐오스러워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아마 내가 그러한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것 같아요.  당신도 싸우지 말고 수긍하세요.  그러면 뭔가 달라질 거에요."

 

 

 

 

 

 

 

 

자기 긍정은 변화를 촉진시킨다 

 

 

내담자와 심리치료 과정에서 나는 상대방에게서 갑작스럽게 자아성장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목격한다.  그런데 그 급격한 변화는 흔히 어떤 사람도 자신을 치료해 줄 수 없다는 내담자의 깨달음 이후에 발생한다.

 

 

"마침내 내 인생에 관하여 전적인 책임을 내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을 때,  나는 성장하고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한 나의 자기 존중감도 향상됐어요."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진실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도덕적 비난이나 죄악의 수임자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행위에 관한 주요한 원인 제공자로서의 책임을 가진다.

 

 

내 얘기는 사람들이 사고나 타인의 실수 때문에 고통받지 말아야 한다거나 또는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각자가 그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지하는 않는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하지만 자기 책임감은 좋은 자기 존중감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삶에 관한 비극적 감상을 갖고 싶지 않다면,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다음은 자아 책임의 고취를 위한 격언들이다.

 

 

"나는 나의 욕구와 목표 달성에 책임이 있다."

 

"나는 나의 선택과 행위에 책임이 있다."

 

"나는 내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에 책임이 있다."

 

"나는 내가 수행하는 일에 관한 성실성과 양심에 책임이 있다."

 

"나는 내 삶의 결정에 책임이 있다."

 

"나는 내 개인적 행복에 책임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성공적인 자기 존중감의 조건으로서 언급되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한 부분은 단지 몇 개의 기본적인 일반적 진술이다.

 

 

 

 

 

 

 

 

 

자기 존중감의 근원은 내부에 있다 

 

 

자기 존중감은 외적인 성공이나 실패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정신적 기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점이 자기 존중감의 이해를 위한 요체이다. 

 

 

사람들은 이런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많은 분노와 자기불신에 빠지게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의지조절과 무관한 요소들로 된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불가피하게도 수시로 변하는 인정받지 못할 자기 존중감을 가지게 되는 위험한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특별한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의 자기 존중감은 손상되지도 영향을 받을 필요도 없다.  비록 우리가 성공했다면 느낄 수 있는 자부심 같은 것은 경험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나아가 자아는 고정되고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변화 창조되면서,  선택 - 결정 - 판단 - 책임 - 행동으로 표현된 잠재적인 어떤 것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함 없이 선하다 또는 악하다고 보는 것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특별한 가능성과는 관계없이 자유,  자기 결심,  자기 책임과 같은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는 결코 과거에 했던 선택에 매달려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나를 존중하는 삶] P. 9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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