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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존중감이란[나를존중하는삶]

花受紛-동아줄 2011. 5. 22. 13:53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콜 중독인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성적으로 학대받거나 또는 물리적으로 폭력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이말의 뜻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 상황과 현실 부정,  부모님의 거짓말,  부적절한 존중 등으로 특징지워진 가정에서 자라왔다는 뜻이다.  즉,  나는 극히 정상적인 보통 가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하여 유명한 가족문제 상담자인 버지니아 세터와 함께 토론한 것이 생각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성장 환경이 끔찍하게 무분별한 점을 한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 했다.

 

 

 

 

아이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일어난 한 장면을 상상해보자.  어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 아이는, "어머니, 무슨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아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굳은 목소리로, "아무 일도 없어. 나는 기분이 좋아." 하고 대답했다. 그때, 아버지는 화를 내며, "엄마를 귀찮게 하지마!"하고 말한다.  아이는 그 꾸지람을 이해할 수 없어서 몹시 당황하여,  휘둥그래진 눈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그러다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자, 당신이 한 짓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하며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나는 이 평범한 이야기에서 무엇인가를 찾게 되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아이는 무언가 어머니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아서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아마도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잘못된 욕구로 아이에게 그렇게 대했거나 아니면 그녀 자신이 자신의 편치않은 마음을 어떻게 처리할 줄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마 그 어머니가 "응,  엄마 기분이 지금 좀 않좋아.  알아줘서 고맙다." 라고 말했더라면,  그녀는 아이의 느낌을 인정한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좋지 않은 마음 상태를 단순하게 또는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그녀는 아이의 감정을 더욱 북돋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건전한 태도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중요한 어떤 것을 가르치게 되었을지도 모든다. 즉,  그는 고통을 재앙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는 어머니의 슬픔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죄의식에서 아이를 꾸짖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가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든 셈이다.  만약 어머니가 기분이 좋은 상태였더라면,  아이의 단순한 궁금증을 그렇게 황당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만약 어머니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왜 그것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잘못되었으며,  또 왜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까? 여기에서 아이를 훨씬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아이를 왜 꾸짓느냐고 소리지르는 것이었다.

 

 

모순의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즉, 부조화 위에 부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그 아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였겠는가?  아이는 자신의 감정과 인식을 억누르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사건에 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할 일을 찾거나 또는 같이 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악몽으로 시달리고 있는 무서운 장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무의식 속으로 도망갔다면,  우리는 그 장면이 위험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부모들(악의가 없었지만)을 책망해야 하는가?

 

 

 

 

 

 

 

 

 

악의 없는 이야기

 

 

위의 이야기는 악의없는 보통 이야기다.  어떤 사람도 부모가 자식에게 파괴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실을 부인하는 행동을 했을때는 그 아이에게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고,  또 그 세계에서 지각한 것은 믿을 수 없고,  생각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사건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아이는 몇년 후에는 그것을 잊게 되지만,  그것은 분명하게 아이의 성장 발달에 누적되어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러한 경험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만약 아이가 자신의 뜻이나 마음은 쓸모가 없다거나 자신의 잠재력을 의심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그가 어떻게 건강한 자기존중감을 형성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에게 그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삶을 어떻게 살아 갔을까? 

 

 

 

 

 

 

 

 

 

복합적인 요인이 자기존중감을 만든다

 

 

나는 부모님들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의 자기존중감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을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역활을 결정한다.  우리의 외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거나 형성되는 단순한 수동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과학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맞지 않은 생각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권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들이다.  즉,  우리는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서로가 활동적인 경쟁자들이다.  즉,  단순히 대응하는 사람이 아닌 독창적인 활동가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정 환경은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심각하게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부모들은 자기 신뢰감이나 자기존중감을 길러줄 수도 있는 반면에, 오히려 크나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아이들의 능력과 좋은 점에 대한 믿음을 전달할 수도 있으며,  그와 반대로 정반대의 것을 전달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아이들이 안전함을 느끼는 환경을 조성하여 줄 수도 있는 반면에, 공포의 분위기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그들은 건강한 자기존중감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그것을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활을 할 수도 있다.

 

 

 

 

 

 

 

자기 존중감 형성의 장애물

 

 

부모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할 때에,  아이들은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형성하는데 큰 지장을 받는다.

 

 

 

- '아이가 뭔거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해지는 경우

 

-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했다고 야단을 치는 경우

 

- 아이를 놀리거나 비웃는 경우

 

- '아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가 전해지는 경우

 

- 창피나 벌로서 아이를 통제하려고 하는 경우

 

- 아이를 과잉 보호하여 자만심을 키워서 정상적인 학습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

 

- 아이를 어떤 규칙 없이 키워서 자신들을 일관성 있게 유지시켜줄 만한 일정한 규범이 없거나  정상적인 성장을 억누르는 규칙으로 기르는 경우, 즉 모순되고, 혼란스럽고, 토론의 여지를 주지 않고,  억압적인 규칙으로 기르는 경우. 

 

- 아이가 가지고 있는 성품을 부정하고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과 인격에 의심을 품도록 기르는 경우

 

-  분명한 사실들을 허구로 취급하여 오히려 아이가 가지고 있는 합리성을 혼란시키는 경우.   예를 들면,  알콜 중독인 아버지가 저녁 식탁에서 넘어져 의자를 쓰러뜨리고 마루에 떨어졌는데도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

 

- 아이에게 물리적인 폭력이나 위협을 가하여 위험을 느끼게 하고,  아이의 마음 속에 심한 공포감을 주입시키는 경우

 

-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대하는 경우

 

- 천성적으로 아이들은 선하지 않고 죄가 있는 존재이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고 가르치는 경우

 

 

 

오늘날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자란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들의 상처를 고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결핍된 자기존중감으로 부담스럽게 성인 생활을 맞게 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들이 그 문제를 기술하는 데 어떤 단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존재라는 감각, 창피함과 죄의식,  일반화된 자기 불신 또는 무력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나는 잘 안다.  그들은 내적으로 자기존중감을 기르거나 강화시키는 방법같은 것은 버려둔 채로,  정확하게 자기존중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부족감을 느낀다.

 

 

 

 

 

자기 존중감의 뜻

 

 

심리치료자이며 또한 교사로서 역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생기를 불러 일으킬 어떤 활력을 찾고 있다.  아마 그것은 사람에게 천부인권으로 주어진 생존권으로서,  자기 존중감을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활력은 단지 자기 존중감으로 가는 임시대기실일 뿐이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자기 가치에 관한 느낌을 풍부하게 해주는 자기 존중감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자기 존중감은 우리의 인생 생활에서 필수적이며 마땅히 가져야 할 경험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자기존중감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우리 자신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며,  인생의 역경에 맞서 이겨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2. 우리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주장할 자격이 있으며, 행복해질 수 있고, 또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를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의 강력한 인간적 욕구

 

 

자기 존중감은 강력한 인간적인 욕구의 일종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인간의 기본 욕구이다.  그것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발달에 필수적이며 생존을 위한 결정적인 가치이다.

 

 

긍정적인 자기존중감이 부족하면 우리의 심리적 성장에 방해를 받는다.  실제로 긍정적인 자기존중감의 의식이 항체로서 작용하면 우리는 재생력과 원기와 저항력을 제공받게 된다.

 

 

자기 존중감이 낮을 때는 인생의 역경에 직면하게 되면 복원력이 줄어든다.  우리는 더욱 건강한 자아감을 만회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서 그만 무너저버리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는 기쁨을 즐기기보다는 고통을 피하려는 욕구에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  적극적인 것보다 소극적인 것이 우리에게 더 큰 힘으로 작용하기 쉽다.

 

 

 

 

 

 

중독 상태와 자기 존중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통하여 일반적인 중독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알콜, 약품, 파괴적인 행위에 빠지게 될 때에는 무의식 상태가 되어 근심과 고통이 덜어진다.  중독되게 하는 것은 안정제와 진통제이다.  우리가 피해 가려는 '적'은 공포와 고통이다.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 문제를 악화시키면 시킬수록,  우리를 죽이게 될 독약에  더욱더 의존하게 된다.

 

 

중독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두려움이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욱 두려워 한다.  그들의 고통은 완화되기는 커녕 보다 심해진다.  우리가 도취되어 한 길에 빠지게 된다면 자기 존중감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또한 자기혐오를 일으키는 일을 통해서는 자기 존중감을 획득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 우리의 잠재력을 믿지 못하거나 선한 품성을 믿지 못한다면 - 우주는 두려움의 터가 된다.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 말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어떤 진실한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들 중 약간의 사람들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빈약한 자아개념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달성하려고 전력을 다 할 수도 있다.  마치 내 아들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치를 애써 인정받기 위해서 높은 생산성을 가지고 있는 일벌레처럼 많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며 창조적이지도 못하다.  그것은 성취하면서도 정상적인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는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만족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가치를 진실로 신뢰한다면,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내적인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열려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다가오는 도전과 기회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하게 될 것이다.  자기 존중감은 권한을 부여하고,  활기룰 북돋우고,  동기를 일으킨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성취하도록 자극하고 그 성과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도록 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만족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오늘날 어떤 작가들은 자기의 가치에 대한 건강한 감각은 행복과 성공을 확보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 이상의 요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존재에 관한 모든 문제에 단일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잘 발달된 자아감은 우리의 안녕에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가 충분히 발달된 자아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만족감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핍된 상태이면 어느 정도의 근심과 좌절과 절망이 뒤따르게 된다.

 

 

자기 존중감의 상대적인 결핍은 능력 발휘를 약화시킨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중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생존에 필요한 구급적 가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에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우리는 자기 존중감이  항상 가장 중요한 심리적 요구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구 즉, 점점 더 경쟁적이며 복잡하고 도전적이 되어가는 세게에 적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인 태도라는 점을 알게 된 역사적 순간에 와 있다.

 

 

 

 

 

 

미래를 위한 심리적 자원

 

 

수공업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의 급진전,  육체 노동에서 정신 노동으로 고용형태 전환,  그리고 급속한 변화 즉,  가속화된 과학과 기술과 전례없는 경쟁으로 특징화된 국제 경제의 출현은 앞 세대에게 요구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교육과 훈련을 새롭게 요구하고 있다.  산업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모두 이점을 알고 있다.  반면에,  그만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사회적 발달이 우리 심리학적 차원에 대해서 새로운 요구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발달은 혃신과 자기 관리,  개인적 책임,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위해서 더 큰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꼭대기"에서가 아닌 사업계획의 모든 수준 즉,  상급 경영자로부터 말단 감독자와 심지어는 신참 직원에 이르기까지 요구된다. 

 

 

현대 산업은 소수의 생각하는 사람과 그들의 말에 따라 실천하는 다수의 사람,  즉, 전통적인 군대식 명령-통제 형식에 의해서는 더 이상 경영할 수 없다.  오늘날 조직들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고도의 개인적 자율성과 자기신뢰와 주도권 행사력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 산업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 자기 존중감이다.  바로 이것은 적당한 수준의 자기존중감을 가진 사람이 경제적인 면에서도 대량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을 뜻한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다

 

 

 

 

 

 

 

현명한 선택에는 자기 존중감을 요구한다

 

 

과거보다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세계에서,  어떤 방향이든지간에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의 개인적 자율을 필요로 한다.  개인적 자율은 독립적인 판단을 행사하기 위해서 더 필요하며,  우리 자신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실천과 가치와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갖기 위하여 더욱더 요청된다. 

 

 

지각있는 선택이나 결정을 많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존중감에 대한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진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복잡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자신이 믿고 있는 만큼 - 생각할 수 있고 배우고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 자신을 이겨내게 된다.  우리의 능력을 확신하고 강화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보다 더 많이 성공하게 된다.

 

 

어느 정도 우리가 우리 정신의 효력을 의심하고 사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면 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다.  포기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자주 실패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부정적으로 자기를 평가하게 되고 부정적 자아를 더욱 심화시킨다.

 

 

높은 자기 존중감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고 또한,  그 목적 달성은 좋은 자기 존중감을 형성시키게 된다.  자기 존중감이 약한 사람은 가정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되며 스스로 가정에 틀어박히게 하고 목표를 설정하지도 못하게 하여 결국 자기존중감을 심하게 약화시키게 된다.

 

 

우리에게 자기 존중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적인 삶이나 직업 세계의 역경을 이겨나갈 준비 태세를 더욱 잘 갖추게 되며,  실패한 후에도 우리 자신을 빨리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더욱더 새롭게 착수할 에너지를 더 많이 갖게 된다.

 

 

우리는 자기 존중감이 높으면 높을수록,  직업이나 재정적인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정서적으로,  창의적으로,  정신적으로 풍부하게 된다.  자기 존중감이 낮으면 낮을수록 욕망도 줄어들고 성취하려는 의욕도 줄어든다.  여하튼 어느 한 쪽으로 자기강화와 자기영구화가 이루어 진다.  자기 존중감이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관계를 나쁘게 만들어가기 보다도 좋게 만들어 가려고 한다.  애정은 애정을 만들고 건강은 건강을 유도하게 된다. 그리고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지닌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포용력을 행사하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값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비슷한 수준의 자기 존중감을 가진 사람끼리 어울린다

 

 

인간 관계에서의 원칙은 우리 자신의 수준과 유사한 자기 존중감을 지닌 사람과 함께 할 때에 마음이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자기 존중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존중감이 높은 사람과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자기 존중감이 중간인 사람은 전형적으로 자기 존중감이 중간인 사람에게 이끌린다.  자기 존중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존중감을 낮게 가진 사람을 찾게 된다.  가장 불행한 관계는 서로가 그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관계이다.  깊은 두 개의 계곡이 결합하여서는 정상의 높은 고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스스로를 좋지 못환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친절할 줄도 모르고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부인이 생각난다.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알았고,   그리고 역시 자기혐오로 인생을 소모하던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무례하게 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먼저 무레하게 보임으로써 자신을 보호했다.  그녀는 그의 학대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학대를 그녀의 운명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그녀가 점점 움츠러들고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자신에 대한 대우가 합당하다고 수긍하면서,  서로가 괴로워하며 20년을 보냈다.  내가 "당신은 큰 행복을 몰랐었다."고 그 부인에게 말하였을 때에 그녀는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도대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높은 자기 존중감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더 잘 존중하려고 하며 다른 사람을 자애로움과 선한 마음과 공손으로 대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기 존중감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낮은 자기 존중감이라는 시한폭탄

 

 

적절치 못한 자기 존중감이 개인의 포부수준과 성취를 상당히 제한할 수 있는 반면에,  문제의 결말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결말은 더욱 간접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약한 자아개념이라는 시한폭탄은 성공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서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고 그의 직업에 있어 좀더 높은 위치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조용하게 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인 필요와 상관 없이 자신의 능숙함을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도덕적으로나 합법적으로 마구 돌진하기 시작하여 마치 스스로를 파멸시킬 운명에 대항하듯이 그는 선과 악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더욱더 거친 공격을 시도하다가,  그 삶과 경력이 굴욕과 파멸 속에서 폭발할 때 결국,  우리는 그가 세살 때부터 쓰기 시작했을지 모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생 대본의 마지막 장면을 향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무자비하게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자아 능력감과 자아 가치감

 

 

자기 존중감은 두 가지 면의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1. 개인적 능력에 대한 감각(자아 능력감)

 

2. 개인적 가치에 대한 감각(자아 가치감)

 

 

자기 존중감은 완전하게 실현된 심리적 경험으로서,  위의 두 가지 면이 통합된 것이다.

 

 

자아 능력감이란 내 정신의 기능에 대한 신뢰와 사고의 능력,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즉,  나의 관심과 필요의 범위,  다시 말하면,  지적 자기 신뢰의 한계 내에서 실제적 사실을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자아 가치감은 나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생존할 수 있는 권리와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말하며,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적절하게 주장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개인이 삶의 역경을 헤쳐 나가기에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고,  근본적으로 자기 신뢰감, 즉 자신의 마음에 대한 믿음이 약하다면, 아무리 그 사람이 자기 존중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자기 존중감이 결핍되어 있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또,  어떤 개인이 자기 존중감이 본래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사랑이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행복하게 될 수도 없으며,  생각하고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주장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그의 자기 존중감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자기 존중감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하게 될 것이다.

 

 

 

 

 

 

자아 능력감과 자아 가치감

 

 

자아 능력감과 자아 가치감은 건전한 자기 존중감의 양대 축이다.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자기 존중감은 손상을 입는다.  이는 그들의 본질적인 성질이다.  그것들은 자기 존중감의 파생적 의미나 부차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인 것이다.

 

 

자기 능력을 체험하는 일은 심리적 편안함 즉,  사건의 희생자나 피동적인 관객과 대조되는 개인적인 존재의 핵심과 연관하여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감각을 만들어 준다.

 

 

자기 존중감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과 공동체의식을 갖게 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즉,  서로 관심을 갖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인류의 소외와 종족간에 종속되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기 존중감의 수준에 따라서 어쩔 수 없는 불안정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물론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일반적인 수준의 자기 존중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존중감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우리가 때때로 자신에 대한 신뢰로서의 자기 존중감을 말하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 경험한 것을 말하게 되면 더욱더 정확해 진다.  어떠한 방식인지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능력으로서,  말하자면 자신의 정신을 믿고 그 과정을 믿는 일, 즉 자기 효능감과,

 

2.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이 적절하게, 다른 사람과 우정을 나누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업적을 달성하고 성공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일, 즉, 자아 가치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존중감의 공식적 정의

 

 

공식적인 정의를 요약하면,  자기 존중감은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는 능력으로서 그리고 행복을 누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 경험하는 성향이다.

 

 

이 정의는 건전한 자기 존중감을 지원해 주는 어린 시절 환경의 영향(신체적 안정, 양육 등)을 상술하는 것도 아니고, 훗날의 내적 복원력(책임성, 양심적인 삶 등)도 아니며,  정서적 또는 행동적 결과(동정, 솔선하여 책임지는 일 등)도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지 자기 평가가 무엇과 관계되고 무엇으로 구성되고 있는가를 상세화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자기 존중감에 대한 정의가 돌에 새겨져서 결코 바뀔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정의는 주어진 지식 수준과 관계가 있다. 즉 지식이 확장되고 증대됨에 따라 정의는 더욱더 정확하게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생에 동안에 이 개념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더 분명하고 완전한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 내에서,  우리가 자기 존중감이라고 일컫는 독특한 인간 경험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다른 대안적 형식을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내 정의에서 사용하고 있는 '능력'의 개념은 서양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사물의 본질-진실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문화에 "편향된 가치"에서 나온 부산물이 아니다. 세상에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도전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나 자연과 세계에 적절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도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간 관계를 포함한 근본적인 면에서 효능감에 대한 아이디어는, 지금까지 내가 들어온 바로는, '서구적인 가공물'만은 아니다.

 

 

우리가 삶을 적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도전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나 문화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는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존중하는 삶] p.3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