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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三國遺事 駕洛國記

花受紛-동아줄 2009. 1. 30. 01:14

駕洛國記(가락국기)  解題(해제)

 

  (1978년 世譜의  金沅泰 族丈 後서)

 

  駕洛國記는 高麗 文宗30년(1076)에 金官(지금金海) 知州事가 지은 것이니, 실로 三國史記에 앞서기 69년인 古典文獻입니다. 그러나 이 駕洛國記를 지은이의 姓名이 전하지 않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은 그 記事가운데 『芬苾孝祀, 於是乎, 在於我』곧 『향기로운제사는 이제야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귀절이 있는 바, 여기에서 일컫은 『我』라는 글자는 그 撰者가 駕洛의 後孫임을 분명히 立證한 것이며, 近者에 와서 혹은 金良鎰이 지은 글이라는 말도 있으나, 신빙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인 忠烈王7年(1281) 경에 一然國師가 이 駕洛國記를 4,464字로 要約에서 三國遺事에 싣고는 거기에 83字의 註書를 붙여서 전하게 하였고, 다시 330餘年 후인 朝鮮 中宗7년(明나라 武宗正德7년:1512)에 이르러, 당시 慶州府尹 李繼福이 府庫에 所藏된 三國遺事를 改刊하려 했었으나, 거의 殘缺되여 겨우 남은 것은 1行에 4. 5字정도 이었는데 마침 星州牧使  權輳가 구하여 보내준 完本에 의하여 重刊하게 되었으니 바로 『正德本 三國遺事』(보물제19호}입니다. 그러나 駕洛國記 가운데는 무릇 30餘字의 誤字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星州本의 殘缺로 인한 것일 듯합니다.

 이 밖에 또 二本의 駕洛國記가 전하는데 그 하나는 眉수記言에 실려진 駕洛國記로써 仁祖24년(1647)경에 許穆이 지은 것이니 全文 731字에 小註 15字이요 다른 하나는 東國歷代總目 중에 있는 駕洛國記로써 肅宗31年(1701)에 洪萬宗이 지은 것이니 全文 670餘字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駕洛國記 가락국기 (1)

國譯 : 1978. 11.  金 沅 泰

駕洛國記-01)

文廟朝, 大康年間, 金官知州事(2) 文人(3) 所撰也. 今,(4) 略而載之.

 

 고려 문종30년, 요(遼)나라 대강2년(1076)에, 금관(지금金海) 지주사인 문인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대략 간추려 싣는다.

 

駕洛國記-02)

開闢之後, 此地,(5) 未有邦國之號,(6)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 汝刀干. 彼刀干. 五刀干. 留水干. 留天干. 神天干. 五天干. 神鬼干等 九干者,(7)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萬]戶,(8)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변한시대의 부락국가 형태】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에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무릇 1만호에  7만 5천인 이었다.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곡식을 지어먹었다.

주해

(1) 駕洛國記; 가락국의 역사사실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문헌으로, 고려 제11대 문종30년(1076)에, 金官(지금金海)知州事인 文人이 지은 것이다. 인종23년(1145)에 太史金富軾이 지은 三國史記보다도, 69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그후 약 200년 동안을 單行本으로 전해오다가, 충렬왕 때에 一然國師가 이를 간추려 三國遺事(卷二)에 실었다.    

(2) 金官知州事; 金海 沿革으로서 보건데, 金州防禦使가 옳을 것이다.

(3) 文人; 성명이 미상하다. 고종21년(1884)에 이조판서 許傳이 지은 駕洛太祖陵 崇善殿碑文에는 『知金州事 金良鎰이 가락국기 銘文을 찬술하다』고 말한바 있으나 확증되지 않는다.

(4) 今; 고려 충렬왕 7년(1281)경에 일연 국사가, 가락국기를 간추려 삼국유사에 실은 때를 일컬은 것임.  

(5) 此地; 지금 金海地方으로, 三國志 東夷列傳 韓傳에는 『弁辰狗邪國』, 그리고 同書 倭人傳에는 『狗邪韓國』이라고 했으니, 狗邪는 『가라』(加羅, 伽耶,駕洛)의 對稱인 것 같다.   

(6) 邦國之號; 三國志 韓傳에 『馬韓은 五十四國이요, 辰弁韓은 二十四國이 있다. 弁辰十二國은,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지금密陽),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지금陜川?),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지금固城),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지금尙州郡咸昌),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지금 星州), 변진낙로국(弁辰樂奴國;지금永川?), 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지금 高靈), 변진감로국(弁辰甘露國;지금金陵郡開寧?), 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지금金海),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지금大邱?), 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지금咸安),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지금東來?巨濟?)이 있다』고 했는데, 三韓시대의 邦國은 모두 부락국가 이어서 지금의 고을(郡)과 같았다.     

(7) 九干; 九村長. 신라 초기의 六村長과 같았음. 三國史記(卷四一)『登龜峰, 望駕洛九村...』

(8) 一百戶; 一萬戶의 誤記인 것 같다. 一백 호에 七만 五천 인이 살았을까?

 

 

駕洛國記-03)

屬後漢世祖, 光武帝, 建武十八年壬寅,(9) 三月계浴之日, 所居北, 龜旨(10) [是,峯巒之稱, 若十朋(11) 伏之狀, 故云 也.],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 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 爲何?』 對云, 『龜旨也.』又曰, 『皇天, 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爾等, 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12)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용躍之也.』九干等, 如其言, 咸흔而歌舞, 未幾, 仰而觀之. 唯紫繩. 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 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裏著, 抱持而歸乃我刀家,(13) 치榻上, 其衆各散.

 

【하늘이 대왕을 보내심】

후한의 시조인 광무제 건무18년 임인(서기42년) 3월 상사일에, 그들이 사는 곳에서 북쪽이 되는 구지(龜旨; 이것은 산의 봉우리를 일컫는 바로써 十朋의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으므로 이르는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있어, 사람들을 불렀다. 九干들과 마을사람 2 .3백인이 이 곳에 모이었다.  사람의 음성이 나는 듯 했으나, 그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 음성만 내었다. 『여기 누구가 있느냐 ?』고 하였다. 九干들은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가로되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고 물었다. 또 대답하기를 『구지로 소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되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건립하여 임금이 되라고  하시기에 하강했느니라.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 마루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노래를 하되, 「신(神龜)이여 신이여, 마리 (首, 宗, 王)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을 것 같으면, 굽고 구워 먹으리라」하고 춤을 추어라.  이렇게 함은,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는 너희들의 즐거운  춤이 될 것이다. 』고 하였다.  9간들은  그 말씀대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쳐다보니 자주빛깔의 밧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는 것이었다. 그 밧줄 끝을 찾아보니, 분홍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싸여 있었다. 금합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태양같이 둥글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을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안고와서, 탁자위에 모셔두고, 여러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갔다.

주해

(9) 建武十八年; 신라 유리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백제 다루왕 15년, 서기 42년에 해당함.

(10) 龜旨; 龜峰, 龜旨峰이라 쓰기도 하며, 鄕言에는 『개라봉』(狗邪峰)이라 일컫기도 한다. 김해북쪽 三里에 있으니, 지금 김해시 龜山洞 山81의 1번지로, 면적은 3,930평, 높이는 200미터쯤 된다. 봉우리 위에는 駕洛國太祖王 誕降碑와 聖蹟碑와 龜旨峰이라 刻字한 자연석이 있다.

(11) 十朋, 伏之狀; 十朋은 주역의 이른바 『十朋之龜』를 줄인 것이다. 龜旨峰 西쪽에서, 南으로 鳳凰臺까지 약 4里를 뻗은 野麓이, 굴곡을 이루고 있다. 이 小丘陵地帶의 구비 구비에는 10개쯤 되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를 가리켜 『열 마리의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다』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12) 龜何龜何; 우리 나라의 고대가요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이 가요는 龜旨歌. 迎神君歌로 불려져 연구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가요는, 멀리 신라의 성덕왕(702∼736)때까지 전해지기도 하였다. 삼국유사(권2) 水路夫人 條를 보면, 海龍에게 납치된 美夫人을 내어놓으라고, 군중들이 노래한 海歌는 실로 龜旨歌 연구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3) 我刀家; 구지봉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駕洛國記-04)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 復相聚集, 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 則殷之天乙, 顔如龍焉, 則漢之高祖, 眉之八彩, 則有唐之高, 眼之重瞳, 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 卽位也. 始現故, 諱首路, 或云首陵. [首陵是, 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 六伽耶之一也. 餘五人, 各歸爲五伽耶主,(14) 東以黃山江,(15)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비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始祖왕과 가락국 건립】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금합(金盒)을 여니,  여섯 알은 모두 어린 동자로 화신(化身)했는 데, 용모가 매우 거룩하여, 이내 평상에서 좌정 하셨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경하(慶賀)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장성하여 10일이 지났다. 신장이 9척임은 은(殷)나라 탕(湯)임금과 같으시고, 얼굴이 용안(龍顔)임은 한(漢)나라 고조(高祖;劉邦)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唐)나라 요(堯)임금과 같았었고, 눈 동자가 중동(重瞳)임은 우(虞)나라 순(舜)임금과 같으셨다. 그 달 보름날에 즉위하시니, 세상에 처음 나타나셨다고 하서, 어휘(御諱)를 수로(首露)라 하시고, 혹은 수능(首陵; 수능은 붕어하신 후의 시호이시다) 이라고도 하셨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 일컬었으니, 곧 육가야(六伽倻)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서 오가야(五伽倻)의 임금이 되셨다. 육가야의 동쪽은 황산강(黃山江;지금洛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智異山),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으로 써 국경을 삼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가궁(假宮)을 세우게 하여 거처 하셨는데, 특히 질박하고 검소함에 중점을 두었으니, 집의 이엉은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계단의 높이는 삼척(三尺)이었다.

주해

(14) 五伽倻=아라가야(阿羅伽倻;지금咸安), 고녕가야(古寧伽倻;지금尙州郡 咸昌面), 대가야(大伽倻;지금高靈), 성산가야(星山伽倻;지금星州), 소가야(小伽倻;지금固城) 등이요, 그 밖에 비화가야(非火伽倻;지금昌寧)의 이름도 전한다.

(15) 東以黃山江=가야의 국경을, 동쪽은 낙동강이라 했는데, 그것은 대개만을 말한 것일 뿐이며, 실재에 있어서는 낙동강의 동쪽에도 여러 고을이 있었던 것이다.   

 

駕洛國記-05)

二年癸卯, 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16). 新畓坪(17) [是 古來閑田 新耕作 故云也 畓乃俗文也.] 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18) 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19) 何황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21) 固合于是, 托土開彊,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 周廻羅城. 宮禁. 殿宇. 及諸有司屋宇. 庫. 倉품之地 事訖還宮. 편徵國內丁壯. 人夫. 工匠, 以其月二十日, 資始金陽{=湯},(22) 기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侯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涓吉辰. 御新宮, 理萬機而懃庶務.

 

【궁궐 건립 사업】

시조왕 2년 계묘(서기43년) 봄철 정월에,  왕은 말씀하시기를 『짐(朕)이 도읍(京都)을 정하려 한다』하시고, 이내 가궁(假宮)의 남쪽인 신답평(新沓坪;지금 논실/마을) [이곳은 옛날부터 묵밭이다. 새로이 경작하기 때문에 이르는 것이다. 논(畓)은 이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이다.] 에 행차하시어 사방(四方) 산세를 바라보시고,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이 지형(地形)이 여뀌잎(蓼葉)처럼 협소하기는 하나, 특이하게 수려하여 가히 16나한(十六羅漢) 이라도 살만한 곳이다. 하물며 일(一)에서 삼(三)을 이루고, 삼(三)에서 칠(七)을 이루었으니 칠성(七聖君)이 주거할 도읍(京都)으로도 가장 적합하다. 이 곳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마침내 좋은 곳이 됨에서랴』....

 이에 1천 500보(步) 둘레의 외성(外城). 궁궐(宮闕). 전당(殿堂)과 그리고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지을 장소를 마련한 후에, 일이 끝나자 가궁(假宮)으로 돌아오셨다. 널리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기술자)들을 불러모아서, 그 달(正月) 20일에 성곽(城郭)과 궁지(宮地)의 일을 시작하니, 3월10일에 이르러 공사가 일단 끝났다. 궁궐과 옥사만은 농한기를 기다려 지었으므로, 그 해 10월에 시작하여, 갑진년(서기44년) 2월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택해 새 궁궐로 옮겨서, 국정을 다스리고, 모든 일에 부지런 하셨다.

주해

(16) 假宮; 지금 金海市 大成洞 논실(沓谷) 마을의 北쪽인 龜旨峰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17) 新沓坪; 龜旨峰 南쪽이자, 納陵의 北쪽인 大成洞 沓谷(논실) 마을.

(18) 此地; 龜旨峰에서 鳳凰臺까지 南쪽으로 뻗은 野中의 狹小한 丘陵地帶인 듯하다. 沓谷(논실)마을 西쪽에는 『若十朋,伏之狀, 故云也』(열마리의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음으로 이르는 것)이라고한 산맥이 연결되어 있다.(주해 11참조)

(19) 十六羅漢住地; 釋迦의 제자인 十六羅漢도 살만한 좋은 基地.

(20) 自一成三, 自三成七; 龍馬河圖(先天八卦)에 이른바 『一.六 水는 居北하고, 二.七 火는 居南하고, 三.八 木은 居東하고, 四.九 金은 居西하고, 五.十 土는 居中한다』는 데서 一.三.七 등 數字를 가지고, 山勢의 方位와 五行의 相生을 論한 것이다.

     一은 沓谷마을 西편에 있는 俗稱『애구지』峰으로, 北쪽 龜旨峰의 連脈이요, 三은 納陵 西쪽에 있었던 俗稱『말무덤嶝』으로, 金海運動場을 설치할 때에 없어졌으며, 七은 鳳凰洞(狐峴里.會賢里)의 뒷 산인 鳳凰臺를 指稱한 것으로 推定된다.

     北쪽 龜旨峯에서 뻗은 一의 『애구지』峯이, 東쪽으로 左回龍하여 三의 『말무덤嶝』을 形成하고, 三의 『말무덤嶝』은 다시 南쪽으로 右回龍하여 七의 鳳凰臺를 形成했으니, 半月形의 山勢를 이루어 『自一成三, 自三成七』과 合致하게 된다. 한편 一은 水요, 三은 木이요, 七은 火이니, 五行相生으로는 『水生木, 木生火』가 되기도 한다. 金海邑誌『首露王宮遺址, 諺傳, 古宮遺址, 在今古西門外.狐峴里』(주해63 참조)  

(21) 七聖住地; 『自一成三, 自三成七』의 訣辭임으로, 이 七聖住地는 가락국 역사중에서 七聖君의 궁궐이 될 곳이라는 내용인 듯함.

(22) 虎庫; 무기를 넣어 두는 창고임. 고려 제3대 光宗의 이름이 『武』字임을 피하기 위하여 『虎』字를 대용한 것임.

(23) 金陽; 金湯의 誤記인 듯하다. 金湯은 金城湯池의 준말이니, 매우 튼튼한 城池의 뜻이다. 金海邑誌『舊土城, 周八千六百八十三尺, 俗傳, 首露王, 開國初, 蒸土隔築,仍號盆城 今幾頹落』

 

駕洛國記-06)

忽有琓夏國(24)含達王之夫人姙娠, 彌月生卵, 化爲人, 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 頭圍一尺, 悅焉詣闕, 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 故來耳,  王答曰, 天命我, 비卽于位, 將令安中國,(25) 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 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 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26) 王曰可也.  俄頃之間, 解化爲鷹, 王化爲鷲, 又解化爲雀, 王化爲전, 于此際也, 寸陰未移, 解還本身, 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 適於角術之場, 鷹之<於>鷲, 雀之於전, 獲免焉, 此盖聖人, 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 爭位良難, 便拜辭而出, 到郊(27)外渡頭, 將中朝(28)來泊之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소而追之. 解糞入계林地界,(29) 舟師盡還. 事記所載, 多異與新羅.

 

【시조왕, 탈해의 도전을 물리침】

 완화국 함달왕의 부인이, 문득 임신하여,  달이 차매 큰 알을 낳았던 일이 있었다. 그 알이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탈해는 바다를 쫓아서, 가락국에 오니, 신장은 3척(三尺)이요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그는 웃으며 대궐에 들어오더니,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대답하시되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은,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인 즉,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거니와, 또 내 나라 내 백성을 너에게 맡기지 못할 것이니라"하셨다.

 탈해는 이르기를 "그렇다면 술법으로 승부를 겨루어 보시렵니까?"하니, 왕은 "좋다"고 하셨다. 삽시간에 탈해가 변하여 『매』가 되니 왕은 변하여 『독수리』가 되고, 탈해가 또 변하여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하여 『새매』가 되셨다. 그 동안이 잠깐 사이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니,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셨다. 탈해는 이에 엎드려 항복하였다.

  "제가 술법을 겨루는 장소에 있어, 『매』가 『독수리』에게,  그리고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아마도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싫어하신 어진 마음을 가지신 연유입니다. 제의 술법으로 대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는 것은 진실로 어렵겠습니다."라고 하며 곧 하직 절을 드리고 나갔다. 인교(麟郊)밖 나룻가에 이르러 중조(中朝)의 배들이 와서 대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이 곳에 머물면서 반란을 꾸밀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어 추격하였다. 탈해가 신라(鷄林)의 경계로 도망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 왔다. 이 기사에 적힌 일은 신라의 기록과 더불어 많이 다르다.

주해

(24) 琓夏國; 三國史記 新羅本紀의 脫解尼師今 條에는 『多婆那國』, 그리고 三國遺事의 第四脫解王 條에는 『正明國, 龍城國, 花厦國』등으로 적혀 있으나, 그 위치는 미상하다.

(25) 中國; 國中과 같은 뜻. 중앙 정권을 가진 나라.

(26) 可爭其術; 불가사이한 신통력으로 재주를 겨루는 術法. 고구려 건국설화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東國李相國集(卷三) 東明王篇에 『高朱蒙의 아버지인 北夫餘國 解慕수王과 그의 妻父가 될 河伯과의 일이 기록으로 전한다. 하백이 잉어(鯉魚)가 되니, 해모수왕은 물개(獺)가 되고, 하백이 꿩(雉)이 되자, 해모수왕은 매(鷹)가 되고, 하백이 사슴(鹿)이 되니, 해모수왕은 늑대(豺)가 되었다. 하백은 해모수왕의 신술을 알고, 그 딸 柳花의 혼인을 승낙하여 東明王을 탄생했다』함.   

(27) 麟郊; 가락국 왕도의 근처에 있었던 들 이름 같으나 어디인지 미상하다.

(28) 中朝; 중국의 뜻. 駕洛國記銘『中朝累世, 東國分京』

(29) 鷄林地界; 신라의 영토. 지금 陽南面 羅兒里에는 憲宗11年(1845)에 건립한 『昔脫解王 遺墟碑』가 있는데, 그 곳은 新羅初期의 金山加利村이자, 후에 개칭한 漢祗部의 阿珍浦라고 한다.

 

駕洛國記-07)  

屬建武二十四年(30)戊申 七月二十七<=九>日(31), 九干等 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己來, 好仇未得, 請, 臣等所有. 處女絶好者, 選入宮위, 비爲伉儷".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 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32), 立待, 申命神鬼干, 就乘岾(33). [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천旗, 而指乎北, 留天等, 先擧火(34)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而迎之, 旋欲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 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 返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필, 從闕下西南六十<=千>步許地(35), 山邊設만殿(36)祗候.

 

【시조왕께서, 아유타국 공주를 맞이하심】

건무24년  무신(서기48년) 7월 27(9)일에 九간들이 조알(朝謁)하는 자리에서 말씀을 아뢰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아직 구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들여, 왕후를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왕께서 말씀 하셨다. "짐(朕)이 이곳에 하강함은 하늘의 명령이다. 짐의 짝이 되어 왕후를 삼는 일도, 하늘이 명령할 것인 즉, 경들은 염려하지 말지어다."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령하여, 배와 빠른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대기하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으로 나가게 하였다. 망산도는 왕도(王都)의 남쪽 섬이요. 승점(乘岾)은 기내(幾內)의 나라다.

 문득 바다의 서남쪽에서, 배 한척이 붉은 �을 달고, 붉은 기(旗)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것이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상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육지로 내려왔다. 「승점」에서 바라보던 신귀간이 대궐로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다. 왕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기쁘하셨다. 즉시 九간들을 보내어, 목련(木蓮)의 돛대를 바로잡고, 계수나무의 노를 저어서, 곧 대궐로 모시어 오도록 하였다.

 그 때 배 안에 계시던 왕후는 말씀하시되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평소에 모르는 터인바,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느냐?"고 하셨다.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왕후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왕께서도 그렇게 여기시고 백관을 인솔하여 거동하셨다.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 六천보(步)쯤 되는 곳에 납시어, 산 산 기슭에 장막으로 임시궁전을 설치케 하여 기다리셨다.

주해

(30) 建武二十四年; 가락 시조왕 7년에 해당함.

(31) 七月二十七日; 七月 二十九日의 誤字인 듯하다. 七月 二十七日에 만殿에서 왕후를 맞아하여『兩過淸宵, 一經白晝하고 八月一日還宮』은 날짜의 계산에 차질이 있는 것 같다. 駕洛國記『此中更有戱樂追慕之事, 每以 七月二十九日....』(주해 74 참조)

(32) 望山島; 지금 경상남도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 앞 바닷가에 있는바, 그 면적은 약 百坪쯤 된다.

(33) 乘岾; 지금 김해시의 남쪽에 있었을 것이나 어디인지 미상이다.

(34) 擧火; 횃불을 들어 신호하는 烽火로서, 駕洛國記에 실린 이 기사가 우리나라 역사상 첫 기록일 것이다. 그 후 고려 이종3년(1149)에 국방용으로 됐으며, 조선 세종5년(1423)에 제도화 했다가, 고종22년(1885년)에 전신 전화가 가설된 후로부터 봉화제도는 없어졌다.

(35) 六十步許地; 六千步許地의 誤字일 것이다. 예를 들면, 遂安에서 平壤까지의 거리를 三國史記에는 三萬六千步라 했고, 東國與地勝覽에는 一百六十二里로 나탄나 있다. 이러한 비례로서 보건데, 六十步는 겨우 108미터 이고, 六千步라야 二十七里 곧 10, 八키로미터가 된다. 질知王二年(452)에 세웠던 王后寺의 옛터가 長遊山에 있다는 東國與地勝覽의 기록으로 미루어 본 것임.(주해 79참조)

(36) 만殿; 임금님이 순행할 때에 임시로 머물기 위하여 설치한 비단 장막으로, 유宮. 行宮. 行在所라 쓰기도 했음. 三國志『弁辰, 作廣幅細布』

 

駕洛國記-08)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他}侍從잉臣(37)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 慕良. 或臧獲(38)竝計二十餘口, 所賚錦繡綾羅, 衣裳疋段. 金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유宮, 잉臣己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잉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 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서,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린集而護之.

 

왕후는 산밖의 별포(別浦) 나룻터에  배(舟)를 매게하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휴식하는데, 거기에서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으로 폐백(幣帛)삼아 산신령에게 바치었다. 그 외에 시종해 온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요,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칭호는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었다. 그리고 노비들까지 합하면 모두 20명이며, 갖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段)과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폐물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왕후 행차가 점점 행재소(行在所)에 가까우니, 임금님은 출영하여 함께 유궁(유宮;만殿)으로 납시었다. 잉신(잉臣)이하 여러 사람은 뜰 아래 나아가 배알하고 즉시 물러났다. 임금님은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잉신 부처(잉臣夫妻)를 인도하게 하시고 말씀하셨다. 임신은 사람마다 각방에 머물며,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있게 하고, 난초로서 만든 음료수와 혜초로서 빚은 술을 주는 동시에, 무늬있는 자리와 채색있는 방석에 재우며, 의복과 보물 등은 군인을 많이 모아서 지키도록 하였다.

주해

(37) 잉臣; 시집갈 때 따라가는 시종신(侍從臣)을 이르는 말.

(38) 臧獲; 奴婢. 男奴를 『臧』이라 하고, 女奴를 『獲』이라 함.

 

 

駕洛國記-09)

於是 王與后 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39)是阿踰타國(40)公主(41)也, 姓許. 名黃玉(42),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 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비御大寶(43),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리家邦, 未定匹偶, 卿等 須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니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 浮海遐尋於蒸棗(44), 移天형赴於蟠桃(45), 진首(46)敢도, 龍顔(47)是近."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 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 淑質自臻, 묘躬(48)多幸."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계시었다.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씀하셨다.  "제는 아유타국(阿踰타國) 공주(公主)입니다. 성은 허(許)라고 하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十六歲) 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금년 5월중에 부왕(父王)과 모후(母后)께서 제를 보고 이러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 내외가 다 같이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오니 상제께서 이르시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 보낸 바로서 임금자리에 오르도록 했으니, 이에 신령하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이 되도록 하라』하시고, 말씀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 꿈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에 가서 아득하게 반도(蟠桃)를 구하여, 지금 머리를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 용안(龍顔)을 뵙게 되었습니다."

 왕은 대답하셨다. "짐(朕)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 간택의 청이 있었으나 듣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으로선 다행하오."

주해

(39) 妾; 신첩(臣妾). 『제』라는 뜻임. 왕후가 국왕 앞에서 말할 때 쓰는 말임.  

(40) 阿踰타國; 인도(印度) 중부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지금 갠지즈江(恒河)의 북안에 위치한 『아요오디아市』인 듯하다. 記言(卷41) 駕洛國 普州許太后墓 碑陰記에는 『阿踰타國, 南天竺國, 西域許國(許黃國)』으로 기록되었다.  

(41) 公主; 國王의 正妃가 낳은 따님.

(42) 黃玉;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碑에는 『皇玉』이라 했음.

(43) 大寶; 제왕의 자리를 일컬는 말. 寶位, 王位.

(44) 蒸棗; 신선이 먹는 좋은 과실.

(45) 蟠桃; 仙桃. 三千年에 한 번씩 열매가 연다고 한다.

(46) 진首; 매미의 머리와 같이, 네모가 반듯하게 단장한 미인의 머리 모양.

(47) 龍顔; 天顔. 임금의 얼굴.

(48) 묘躬; 묘身, 寡人. 국왕이 자신을 겸사로 쓰는 말.

 

駕洛國記-10)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 遂還來船, 고工楫師 共有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 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廻란, 與后同輦, 잉臣夫妻, 齊표병駕, 其漢肆雜物, 感{=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49)欲午. 王后爰處中宮(50), 勅賜잉臣夫妻. 私屬 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 以賓관(51)一坐. 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豊羨.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드디어 혼인을 맺으셨다.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내셨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는 돌려보내었는데, 뱃사공은 모두 15명이었다.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잉신 부처도 나란히 수레를 탔었다. 외국의 각종 물품도 모두 실어서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시각은 정오가 되려 했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서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처와 노비들은 한적한 두 집을 주어, 나누어 있게 하였다. 나머지 종자(從者)들은 20여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인원수에 따라 적당히 나누어 있게 하고 날마다 주는 물품도 풍족하였다. 그들이 싣고 온 보물은 내장고(內藏庫)에 넣어 두고,  왕후의 4철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주해

(49) 銅壺; 물시계 라는 말.

(50) 中宮; 中殿, 中宮殿, 坤殿. 왕후가 거처하는 궁궐임.

(51) 賓관; 客室. 손님을 맞이하는 건물.

 

駕洛國記-11)

一日, 上, 語臣下曰, "九干等, 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 皆是, 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52)職位之稱, 당化外(53)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方{=刀}爲五常, 留水. 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宇 <爲>留功, 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계林職儀, 置角干. 阿叱干. 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判{=制}(54)漢儀(55), 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新, 設官分職之道歟.

 

【제도의 정돈】

하루는 왕께서 신하들에게 말씀하였다. "九간들은, 모두 백관의 장(長官)들이나, 그 이름과 명칭이 다 소인. 농부의 별호(別號)이며,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답지 못하다. 만약 외국인이 전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시고,  드디어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라 하고,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이라 하고,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 .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글자는 움직이지 않고, 아랫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 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라 하고, 오천(五天)을 오능(五能)이라 하고,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글자 뜻(訓)만을 고쳐서 신귀(臣貴)라 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직제를 취택하여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사간(沙干). 급간(級干)의 직품을 두었고, 그 이하의 관료는 주(周)나라 관제와 한(漢)나라 직제로써 분정하였다. 이것은 곧 옛 제도를 고치고, 새 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한 방법이었다.

주해

(52) 簪履; 簪纓. 고관과 귀인의 관복(官服)을 일컬은 것임.

(53) 化外; 왕의 덕화가 미치는 이외의 지방, 곧 외국의 뜻임.

(54) 周判; 중국 주(周)나라 관제 중의 천부경(泉府卿:財務官)의 뜻.

(55) 漢儀; 진(秦)나라 직제인 종정감(宗正監:宗簿寺)과 한(漢)의 관직인 사농경(司農卿:農政官)을 말한 것.

 

駕洛國記-12)

於是乎, 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況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 日之有月, 陽之有陰, 其功也, 塗山翼夏, 唐煖{=媛}嬌, 頻年有得, 熊비之兆, 誕生太子居登公.

 

【새정치와 허왕후의 내조】

이제야 나라와 집안을 잘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준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 졌다. 하물며 왕께서 왕후와 함께 거처하심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음에랴!!

 그 내조(內助)의 공은 도산씨(途山氏)가 하(夏)나라 우왕(禹王)을 도운 일과, 그리고 당(唐)나라 요(堯)임금의 딸(娥皇.女英)이 순(舜)임금을 도와서 순(舜)의 후손인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어느 해 왕후께서는 곰(熊비)의 꿈을 얻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탄생하셨다.

 

駕洛國記-13)

靈帝中平六年(56)己巳 三月一日, 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57), 遂欲<不>愛子下民之惠, 因號初來纜渡頭村, 曰主浦村(58), 解陵袴高岡曰綾峴(59), 천旗行入海涯, 曰旗出邊(60) . 잉臣泉府卿申輔. 宗正監趙匡等, 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 而皆면{=抛}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生, 唯抱懷士之悲, 皆首丘(61)而沒, 所舍賓館, 圓{격}其無人.

 

【허왕후, 세상을 떠나심】

영제 중평6년 기사(189) 3월1일에 시조왕후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보수(寶壽)는 157세 이셨다. 나라안 사람들은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였고,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드디어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던 왕후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하여, 처음 오실 때 닻줄을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이름하여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쳤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기(천旗) 가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인신(잉臣)인 천부경 신보(泉府卿申輔)와 종정감 조광(宗正監趙匡)등은 가락국에 온 30년 후에 각 각 딸 둘씩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 2년을 지나서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비들은 온 후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해서, 조국을 그리워하던 슬픔만 품은 채 모두 죽으니, 그들이 살던 빈관(賓관)은 텅 비어져 사람이 없었다.

주해

(56) 中平六年; 가락 시조왕 146년에 해당함.

(57) 龜旨東北塢; 자금 金海市 龜山洞 山 八十의 一番地 墳墓地 三町一反六畝. 史蹟 第74號  

(58) 主浦村; 지금 昌原市 熊東面 佳主里 主浦마을. 東國與地勝覽 金海府『主浦, 在府南四十里, 源出明月山, 南流入海』. 同書 熊川縣 『主浦, 在縣三十里金海府界』

(59) 綾峴; 지금 창원시 웅동면과 김해시 녹산면 사이의 사이의 고개(鳩峴), 東國與地勝覽 金海府『 綾峴, 在府南三十里』.

(60) 旗出邊; 主浦의 왼편에 있다.

(61) 首丘; 고향을 잊지 아니한다는 말. 여우가 죽을 때는 그 머리를 고향쪽으로 돌린다 한데서 유래한 것.(狐死正首丘)

 

駕洛國記-14)

元君乃每歌{=奇+欠}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 安四年己卯 三月二十三日, 而조落(62), 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 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63),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 계九代孫仇衝{衡}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 七之日. 仲夏五之日. 仲秋初五之日. 十五之日, 豊潔之奠, 相繼不絶.

 

【시조왕께서 세상을 떠나심】

원군(元君:시조왕)께서는 매양 외로운 벼개를 의지하여 슬퍼함이 많으셨다. 10년을 지낸 헌제(獻帝) 건안(建安)4년 기묘(199)년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보수(寶壽)는 158세 이셨다. 나라안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했으며, 슬퍼함이 왕후의 돌아가시던 때보다 훨씬 더하였다. 마침내 궁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건립하니, 높이는 일장(一丈)이요, 주위는 삼백보(三百步)이었다. 이 곳에 장례를 모시고, 이름하여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하였다.  아드님 거등왕(居登王)으로 부터,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왕묘(王廟)의 향사를 모실 때 까지는, 모름지기 해마다 정월의 3일. 7일과, 5월  5일과, 8월 5일. 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奠)을 서로 계승하여 끊어지지 않았다.

주해

(62)조落; 제왕(帝王)의 별세. 書經『帝乃조落』

(63)闕之艮方平地; 궁궐의 간방(艮方:동북쪽)에 있는 평탄한 지대임. 당시의 궁궐은 지금 봉항동(鳳凰洞:狐峴里)에 있었는바, 거기에서 동북쪽 평지는, 곧 김해시 서상동 312번지에 위치한 駕洛國 始祖王陵 소재지로서, 능림면적은 16,028평이나 되는 곳이다. 史蹟 제73호

   【참고】지금 김해읍 동상동 盆城臺 위에는 『駕洛古都宮墟』란 碑石이 세워져 있다. 世宗實錄(卷150 地理志 金海 條) 및 東國與地勝覽(卷32 金海府 古跡 條)에 이른바, 『首露王宮遺基 在府內』라고 했음은, 그릇된 기록인 것을 指摘한다. 盆城臺의 뒷산은 打鼓峰의 落脈으로, 駕洛國記에 일컬은 『此地, 狹小如蓼葉』이 아니라 高峰泰山의 落脈이며, 또 『自一成三 自三成七』도 부합되지 않는 地形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始祖王 때의 別宮이 아니면 後代의 王宮址일 것으로 推定된다.(주해 2, 16, 20 참조)

 

駕洛國記-15)

계新羅第三十王法敏, 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 伽耶國元君. 九代孫仇衝{衡}(64)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 世宗(65)之子. 率友(66)公之子. 庶云(67)잡干之女. 文明皇后, 寔生我者, 玆故, 元君於幼충人, 乃爲十五{=三}代始祖也. 所御國者, 已曾敗, 所葬廟者, 今尙存, 合于宗조,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址}, □<=納>近廟上上田三十,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68),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갱世(69)級干, 祗품朝旨, 主掌厥田, 每歲時, 釀료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 其祭日, 不失居登王之所定. 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 在於我. 自居登王(70)卽位己卯年. 置便房, 降及仇衝{衡}朝,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典}, 永無違者, 其乃仇衡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一百三十}年之間, 享是廟禮, 或闕如也. 美矣哉, 文武王[法敏王諡也] 先奉尊祖, 孝乎惟孝, 繼泯絶之祀, 復行之也 .

 

【신라 문무왕이, 수능왕묘를 종묘로 모심】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문무왕)은 용삭元년 신유(661) 3월 어느 날에 조서를 내렸다. "짐(朕)은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께서  우리 니라에 항복하실 무�, 거느리고 온 왕자인 세종(世宗)의 아들,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舒玄) 갑간(匣干:蘇判)의 따님 문명황후(文明皇后:文姬)는 진실로 나를 낳으신 분이다. 이러므로 시조왕(=수로왕)은 나에게 15(=13)대 시조가 되신다. 그 나라는 이미 패망했으나, 그 사당은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로 모시어 제사를 계속하게 하리라." 이내 사자(使者)를 가야(伽倻)의 옛터에 파견하여 수릉왕묘(首陵王廟) 근방의 상상전 삼십경(三十頃:九만평)을 바쳐, 제사를 마련할 토지로 삼고, 왕위전(王位田)이라 이름해서 본토(本土:伽倻郡)에 소속시켰다.

 시조왕의 17대손인 갱세(갱世) 급간(級干:九등관)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그 왕위전을 주관하였다.  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과 차와 과자와 여러가지 제물 등을 진설하여 제사를 드렸는데, 해마다 빠뜨리지를 않았으며,  그 제사날도 거등왕이  정하신 연중 오일(年中五日)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향기롭고 효성스러운 제사는 이제야 우리 (가락후손)에게 맡겨졌다.

 거등왕께서 즉위하신  기묘년(199)년에 편방(便房:祭閣)을 설치한 이후부터, 내려와 구형왕 말기(532)에 이르기까지 334년 동안에는, 왕묘의 제사가 영구히 변경되지 않았으나, 구형왕께서 왕위를 잃고 나라를 버리신 때(532)로부터, 용삭元년 신유(661)에 이르기까지 六十(=一百 三十)년 사이에는, 수로왕묘의 향례가 간혹 빠뜨러지기도 했던 것이다. 아름답도다. 무무왕[법민왕의 시호]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서 다시 이를 행함이여!!

주해

(64) 仇衡王; 시조왕의 9대손이자 가락국 제10대 왕으로서, 十二년(521-532)동안을 재위하시다가 신라에 병합되시다. 正德本 三國遺事에는 仇衡이라 씌였고, 三國史記 金庾信傳에는 仇亥 혹은 仇次休라고 씌였다.

(65) 世宗; 구형왕의 맏아드님. 三國史記에는 奴宗이라 씌였다. 『世』의 옛 말은 『누리』또는 『뉘』이므로 『奴』는 『뉘』(世)의 寫音한 것.

(66) 率友; 駕洛國記의 曆數에는 졸지(卒支)라고 씌였다.

(67) 庶云; 三國史記 金庾信傳에는 서현(舒玄). 소연(逍衍)이라고 쓰였는데, 庶云. 舒玄. 逍衍은 모두  동일한 字音으로 표기한 것임. 原書의 世系는 『世宗之弟. 武力公之子. 庶云匣干之女, 文明皇后...』라고 是正되어야 한다.

(68) 王位田; 수능왕묘의 근처에 있었을 것이나, 그 위치는 미상하다. 지금 김해시 주촌면 삼래리 저수지 근처에 『가락국 시대의 헌곡전(獻穀田)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는 김해시 서쪽 35리를 상거한 곳임.  

(69) 갱世; 시조왕 17대손. 다른 문헌에는 나타나지 안음.

(70) 居登王; 駕洛國 제2대 道王의 御諱. 54년(199-253)간을 재위히시다.

 

駕洛國記-16)

新羅季末(71), 有忠至잡干者(72), 攻取金官高城, 而爲城主將軍(73), 爰有英規阿干, 假威於將軍, 奪廟享而淫祀, 當端午而致告祠, 堂梁無故折墜, 因覆壓而死焉. 於是 將軍自謂, "宿因多幸, 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 宜我화其眞影, 香燈供之, 以酬玄恩." 遂以鮫絹三尺, 摸出眞影, 安於壁上, 旦夕膏炷, 瞻仰虔至, 才三日, 影之二日, 流下血淚, 而貯於地上, 幾一斗矣. 將軍大懼, 捧持其眞, 就廟而焚之,

 

【수능왕묘의 영검】

신라의 말기에 충지 잡간(忠至잡干)이란 자가 있었다. 높은 금관성(金官城)을 쳐 뺏아, 성주 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그 부하에 영규 아간(英規阿干)이란 자가 있어, 성주장군의 세력을 등 대고 왕묘(王廟)의 제향을 가로 뺏아, 음사(淫祀)하였다.  단오날의 고사(告祠)를 치르는 중에, 사당의 문 중방이 까닭 없이 부러져, 영규는 치어 죽었다. 이에 성주장군은 혼자 말했다. "다행히 전생의 인연으로, 외람되게 성왕(聖王)께서 다스리시던 국성(國城)에서 제전(祭奠)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마땅히 그 화상을 그려서, 향불과 등(燈)으로 받들어, 깊은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

 드디어 교견(鮫絹) 三척에 화상을 그려서, 벽 위에 봉안하고, 아침 저녁 촛불을 켜서,  정성껏 우러러 받들었다. 겨우 3일만에 화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려, 땅 위에 고인 것이 거의 한말쯤 되었다. 성주장군은 크게 두려워서, 그 화상을 모시고는 왕묘에 나아가 불살라 없앴다.

주해

(71) 新羅季末; 연대는 미상하나 대개 경명왕 8년(924) 이후, 경순왕 8년(935), 곧 신라의 역사가 없어진 때까지의 사이로, 추측된다. 이보다 앞서 진성왕(887-) 때부터 효공왕(-897) 초기에는, 金海 進禮城諸軍事 金律熙가 있었고, 그후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 明義將軍 金仁匡이 있어, 昌原 鳳林寺를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72) 忠至잡干; 忠至의 이름은 다른 문헌에 나타나지 않으며, 잡干(蘇判)은 신라 三等官

(73) 城主將軍; 城主는 外官인 太守를 이르는 것이요, 將軍은 軍官의 칭호이다. 신라의 말기, 곧 後三國시대에는 지방의 豪族들이 그 지방을 지배하면서 私兵을 양성하여 스스로 將軍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駕洛國記-17)

卽召王之眞孫圭林, 而謂曰, "昨有不祥事, 一何重疊, 是必廟之威靈, 震怒余之圖화, 而供養不孫, 英規旣死, 余甚<怪>畏, 影已燒矣, 必受陰誅. 卿是王之眞孫, 信合依舊以祭之."  圭林繼世奠뢰, 年及八十八歲而卒, 其子間元卿, 續而克인, 端午日, 謁廟之祭, 英規之子俊必, 又發狂, 來詣廟, 비徹間元之奠, 以已奠陳享, 三獻未終, 得暴疾, 歸家而斃, 然古人有言, "淫祀無福, 反受其殃," 前有英規, 後有俊必, 父子之謂乎.

 

즉시 왕의 진손(眞孫)이 되는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도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가?. 이는 왕묘의 위령(威靈)이, 내가 화상을 그려서 공양하는 일이 불손한 소행이라고 크게 노하신 듯하다. 영규(英圭)가 이미 죽음에 나는 매우 놀라고 두려웠는데, 화상을 이미 불에 태웠으니,  나는 필연코 왕령(王靈)의 벌을 크게 받을 것이다.  경(卿)은  수로왕의 진손이니, 그전대로 제향을 받드는 것이 합당할 줄 믿는다."

 규림(圭林)은 대(代)를 이어 제향을 받들다가 나이 88세에 세상을 여의셨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하여 제사를 잘 모시었다. 단오날의 알묘(謁廟)하는 제향에, 영규(英圭)의 아들인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가 일어나 왕묘에 와서는, 간원(間元)이 차려 둔 제전(祭奠)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려, 행사하더니 삼헌(三獻)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급작스러운 병을 얻어 , 집에 돌아가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에 "음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앙화을 받는다"고 했는데, 전에는 영규(英圭)의 일이 있었고, 후에는 준필(俊必)의 일이 있었으니 그들 부자를  두고 말한 것인가?

 

駕洛國記-18)

又有賊徒, 謂廟中多有金玉, 將來盜焉. 初之來也, 有躬환甲胄, 張弓挾矢, 猛士一人, 從廟中出, 四面射, 中殺七八人, 賊徒奔走. 數日再來, 有大망, 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八九人, 粗得完免者, 皆강부而散, 故知陵園表裡, 必有神物護之, 自安四年己卯始造, 逮今上御圖{=國}三十一載. 大康二年丙辰, 凡八百七十八年, 所封美土, 不騫不崩, 所植佳木, 不枯不朽. 황所排列 萬蘊玉之片片, 亦不頹坼, 由是觀之, 辛替否曰, "自古흘今. 豈有不之國.  不破之墳,"  唯此駕洛國之昔曾亡, 則替否之言, 有徵矣, 首露廟之不毁, 則替否之言, 未足信也 .

 

【수능왕묘의 영검 二】

 또. 도둑의 무리가 있어, 능묘(陵廟)의 가운데는, 금과 옥이 많이 있을 것이라 하고는 몰래와 훔쳐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오니.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을 당기고, 화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능묘 가운데서 나와, 사면(四面)으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7. 8명을 맞추어 죽임에, 나머지 도둑의 무리는 달아났다. 몇 일 후에 다시 오니, 큰 구렁이가 나타나는데, 길이는 30여 척이요,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 능묘 곁에서 나와 8. 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죽음을 면한 자들도 모두 엎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러므로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필연코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함을 알게되었다.

 건안(建安) 4년 기묘(199)에 처음 능묘를 축조한 때 부터, 금상(今上:文宗) 즉위 31년이자, 대강(大康) 2년 병진(1076)에 이르기까지 무릇 878년 이다.

 봉축의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으며, 심은 바 아름다운 나무들도 마르거나 썩지를 않았고 더구나 배열(排列)해, 둔 많은 옥돌 조각들도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

 이로써 본다면, 당(唐)나라의 시어사(侍御使)이던 신체부(辛替否)의 말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패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 했지마는,  오직 이 가락국이 예전에 이미 패망한 일이야 신 체부의 말이 들어 맞았다고 하겠지만,  수로왕의 능묘가 허물어지지 않은데는 신체부(辛替否)의 말도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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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國記-19)

此中, 更有희樂思慕之事, 每以七月二十九日(74), 土人吏卒, 陟乘岾, 設유幕, 酒食歡呼, 而東西送目, 壯健人夫, 分類以左右之, 自望山島, 駿蹄침침, 而競湊於陸, 익首(75)泛泛, 而相推於水, 北指古浦而爭趨, 盖此, 昔留天. 神鬼等, 望后之來, 急促告君之遺跡也.

 

【시조왕 사모하는 놀이】

이 가운데 다시 즐거운 놀이로 옛날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 매년 7월 29일에 이 지방의 백성과 아전과 군졸들은, 승점(乘岾)에 올라가 장막을 쳐 놓고, 술과 음식으로 환호성을 올리면서, 이리 저리 바라본다. 건장한 사람들은 좌우 두 편을 갈라 망산도(望山島)에서, 날랜 말굽으로 육지를 향해 달리며, 제바른 뱃머리를 두둥실 바다에 밀어서 북쪽으로 고포(古浦)를 향해, 앞을 다투며 달아난다. 대개 이 놀이는 옛날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이 왕후의 오시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시조왕께 아뢰었던 옛 풍속이다.

주해

(74) 七月二十九日; 시조왕후께서 처음 오신 날로써, 前揭 七月二十九日은 誤字인 듯하다. (주해 31참조)

(75) 익首; 뱃모리에 익조(익鳥)를 그렸기 때문에 배를 일컬어 익수라고 함.

 

駕洛國記-20)

國亡之後, 代代稱號不一, 新羅, 第三十一政明王卽位, 開耀元年辛巳, 號爲金官京, 置太守. 後二百五十九年, 屬我太祖統合之後, 代代爲臨海縣, 置排岸使, 四十八年也, 次爲臨海郡, 或爲金海府, 置都護府, 二十七年也, 又置防禦使, 六十四年也.

 

【가락국이 없어진 후의 연혁】

가락국이 없어진 후에, 대대로 고을 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신라 31대 정명왕(政明王:神文王)이 즉위한 개요元년 신사(681)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여 태수(太守)를 두었고, 그 후 259년에 우리 고려 태조(太祖)께서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후에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해서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48년이다가, 다음에 임해군(臨海郡)이라 하였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 해서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둔 것이 27년이며,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은 6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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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國記-21)

淳化二年, 金海府量田使 . 中大夫趙文善申省狀稱, "首露陵王廟, 屬田結數多也, 宜以十五結, 仍舊貫, 其餘, 分折於府之役丁."  所司, 傳狀奏聞, 時廟朝, 宣旨曰, "天所降卵, 化爲聖君, 居位而延齡, 則一百五十八年也, 自彼三皇而下, 鮮克比肩者歟, 崩後 自先代, 비屬廟之롱畝, 而今減除, 良堪疑懼, 而不允."  使又申省, 朝廷然之, 半不動於陵廟中, 半分給於鄕人之丁也, 節使[量田使稚{=稱}也], 受朝旨, 乃以半屬於陵園, 半以支給於府之요役戶丁也, 幾臨事畢, 而甚勞倦, 忽一夕夢, 見七八介鬼神, 執류설, 握而至, 云이有大대, 故加斬戮, 其使以謂, 受刑而慟楚, 驚懼而覺, 仍有疾채, 勿令人知之, 宵遁而行, 其病不間, 渡關(76)而死. 是故, 量田都帳, 不著印也. 後人, 奉使來, 審檢厥田(77), 才{=十}結十二負九束也, 不足者, 三結八十七負一束矣. 乃推鞫斜入處, 報告內外官, 勅理足支給焉.

 

【벌받아 죽은 양전사 조 문선】

순화(淳化) 2년, 고려 성종10년(991)에, 김해부 양전사(量田使:측량사)인 중대부(中大夫) 조선문(趙文善)은 조사 보고했다. "수로왕 능묘(陵廟)에 소속된 왕위전(王位田:三十頃)의 면적이 많습니다. 마땅히 십오결(十五結)은 그 전대로 두고, 그 나머지 십오결(十五結)은 김해부의 요역을 맡은 호정(戶丁)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관  관서(官署)에서 그 보고서를 전해 아뢰니, 당시 조정에서 지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 온 황금알(黃金卵)이 화하여 성군(聖君)이 되시었고, 왕위에 계시어 연령이 158세나 누렸으니, 저 삼황(三皇)이후로 이에 견줄만한 이가 드물다. 세상을 떠나신 후 선대(先代:新羅文武王)로부터 왕묘(王廟)에 소속됐던 왕위전(王位田)을 지금 감소시키는 것은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는 또 거듭 아뢰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겨, 그 절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절반만을 김해부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 양전사의 별칭이다 )는 조정의 지령을 받아, 이에 절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절반은 김해부에 요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지급하였다.

 이 사무가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는 매우 피로하였다. 문득 하루밤 꿈에 7.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너는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겠노라". 양전사는 꿈에서 형벌을 받자, 아프다고 하면서 놀라 잠을 깨었다. 이내 병이 나서 남에게 알리지 못하고, 밤에 도망쳐 갔다. 그 병이 낫지 않으므로 관문(關門)을 건너서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전 도장(量田都帳:測量臺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질 않았다.

  그 후에 조정의 명령을 받은 사자(使者)가 와서 그 밭을 검사하여 보았더니 11결(結) 12짐(負) 9못(束)으로, 부족한 것이 3결 87짐 1못 이었다. 이에 부족한 면적의 행방을 추궁하여 내외 관서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칙령으로 그 부족한 면적을 충당하여 주게 하였다.

주해

(76) 渡關; 金海市 生林面 都要津인 듯? 그 앞에는 洛東江이 있음.

(77) 審檢厥田; 十一結十二負九束에 三結八十七負一束을 더하면. 三十結의 절반인 十五結이 됨.

 

駕洛國記-22)

又有古今所嘆息者, 元君八{=七}代孫金질王, 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 后奉資冥福, 以元嘉(78)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 合婚之地, 創寺, 額曰王后寺(79), 遣使, 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載)後, 置長遊寺(80), 所納田柴, 幷三百結, 於是 右寺三剛{=綱}, 以王后寺, 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말馬養牛之廐, 悲夫.  

 

【금질왕의 착한 정치】

 또한 고금으로 탄식할 바 있었다. 원군(元君:시조왕)의 7대손 금질왕(金질王:질知王)께서, 부지런히 정치를 하였고, 또 진리(佛敎)를 매우 숭상하셨다. 시조모(世祖母) 허황후(許皇后)의 명복(冥福)을 봉축하기 위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452)에, 옛날 시조왕께서 황후와 더불어 혼인하신 곳에 절을 세우게 하여  액호(額號)를 왕후사(王后寺)라고 하셨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의 평전(平田) 십결(十結)을 지정해서, 삼보(三寶:佛.法.僧)  공양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 왕후사가 있음으로부터 500년 이후(고려 광종3년:952頃)에, 장유사(長遺寺)가 설치 됐는데, 받아들이는 전지(田地)와 임야는 삼백결(三百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上座.寺主.維那)이, 『왕후사』가 장유사 소유 임야의 동남쪽 표계(標界)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헐어 없애고, 장사(莊舍)를 만들어, 추수(秋收) 동장(冬臧)하는 장소와 말 먹이고 소 기르는 외양간을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주해

(78) 元嘉; 南宋 文帝의 연호. 원가29년은 질知王2년(452)에 해당함. 우리나라 창사년에는, 고구려 소수림왕5년(375)에 肖門寺 伊弗蘭寺를, 백제 침류왕2년(382)에 漢山佛寺, 가락질지왕2년(452)에 王后寺를, 신라 법흥왕14년(527)에 刺楸寺를 세웠던 것임.

(79) 王后寺; 옛터는 지금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臨江寺(一名苔長寺)의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東國與地勝覽 金海府 古跡 『王后寺舊址, 在長遊山....』(주해35, 36참조)

(80) 長遊寺; 長遊鄕土誌에 『長有菴은 長有面 大淸里 佛母山에 있다』고 했으며, 또 『舊長有菴址는 現長有里 溪谷에 一小寺芷가 있는데, 現長有菴의 前身』이라 했음.

 

駕洛國記-23)

世祖已下, 九代孫曆數, 委錄于下. 銘曰.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 鷄林先定, 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玆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

內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群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

風吹雲卷, 空碧天靑. 下六圓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맹.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玆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德, 爲世作程. 寶位初陟, 환區欲淸.

華構徵古, 土階尙平. 萬機始勉, 庶政施行. 無偏無당, 惟一惟精. 行者讓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아衡. 俄晞해露, 靡保椿齡. 乾坤變氣, 朝野痛情. 金相其촉, 玉振其聲.

來苗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規儀不傾

 

【가락국기 명문】

 시조왕 이하 9대손 까지의 역수(歷數)를 아래에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명문(銘文)을 지어서 말한다.

천지가 개벽후에, 일월이 밝았도다. 人倫은 생겼으나, 왕위는 없었도다.

中國이 오랜후에, 東國은 초장기라. 신라가 먼저이고, 가락은 뒤에 섰다.

임금이 없었으니, 백성은 갈망했네. 하늘의 사랑으로, 창생을 보살폈다.

符命을 수여하여, 精靈을 보내시니. 山中에 알내리고, 안개속 몸감추다.

안으로 아득하고, 밖으로 캄캄하니. 형상은 보이잖고, 음성만 들리었다.

군중들 노래하고, 무리들 춤추었네, 한가닥의 紫色끈에, 六卵이 하강하다.

생소한 지방에서, 기와집이 즐비하다. 관람자 담장쌓듯, 구경군은 국물끊듯.

五가야왕 다보내고, 한분만이 남으시다. 때도같고 자취같고, 아우같고,형같았다.

하늘이 보낸임금, 세상위에 법내시다. 왕위에 오르시니, 나라일이 평화롭다.

궁궐은 검소하고, 흙계단 평평하다. 萬 機를 힘쓰시니, 정사가 어질도다.

편당이란 전혀없고, 한결같이 정묘로워. 길을 서로 양보하며, 땅을 서로 양보하네.

사방은 안정되고, 만백성은 태평하네. 해露歌 슬퍼하니, 大椿長壽 못누리라.

天地기운 변해지고, 온국민이 통곡하다. 金과같은 자취였고, 玉과 같은 名聲이라.

후손이 범영함에, 제사가 향기롭다. 세월은 흘러가도 옛법은 영원하리.

 

 

駕洛國記-24)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立{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卽位, 治三十九{=五十四}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 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81)云, 姓金氏, 盖國{=因}世祖, 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八)年, 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 宗正監趙匡. 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五)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 阿{=我}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一)年, 義熙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 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坐知王  一云金叱. 義熙三年卽位. 娶傭女, 以女黨爲官, 國內擾亂, 鷄林國. 以謀欲伐, 有一臣, 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亦含羽(82), 황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 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拇, 朋至, 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빈傭女, 貶於荷{=前}山島(83),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四)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 道寧大阿干女「福壽」, 生<王>子吹希 .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三十)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 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질知 .

 

 

질知王(84) 一云金질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母)許王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 創寺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一)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 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二十九)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 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脫知).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一)年. 保定二年壬午九月(85), 新羅第二十四君 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66)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爾叱(今)女「桂花」, 生三子, 一世宗(65)角干, 二茂刀{=力}(86)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81)云, 梁中大通四年壬子(87),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 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一>年矣, 若以此記考之(88), 納土 在元魏{=後周}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總五百二十<=一>年矣, 今兩存之(89).

 

 

【시조왕이하 9대손 역수】

거등왕 아버님은 수로왕 이시고, 어머님은 허 왕후 이셨다. 건안4년 기묘(199) 3월 23일에 즉위하여 54년을 다스리시고 가평5년 계유(253) 9월 17일에 붕어(崩御)하셨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따님, 모정(慕貞)이시니, 태자 마품(麻品)을 탄생하셨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은 김(金)씨니, 대개 시조왕께서, 금알(金卵)을 쫓아, 탄생하신 연유로, 인해 김(金)으로써 성을 삼으셨다』고 했다.

 

마품왕 혹은 마품(馬品)이라 쓰기도 했으니, 김(金)씨 이셨다. 가평5년 계유(253)에 즉위하여, 38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원년 신해(291) 1월 29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시니, 태자 거즐미(居叱彌)를 탄생하셨다.

 

거즐미왕 혹은 금물(今勿)이라 했으니, 김(金)씨 이셨다. 영평원년(291)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시고, 영화(永和)2년 병오(346) 7월8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아궁(我躬:我刀)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이시니. 왕자 이품(伊品)을 탄생하셨다.

 

이시품왕 김(金)씨 이셨다. 영화2년(346)에 즉위하여, 61년을 다스리시고, 의희(義熙)3년 정미(407) 4월 7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따님, 정신(貞信)이시니, 왕자 좌지(坐知)를 탄생하셨다.

 

좌지왕   혹은 금즐(金叱:金吐)이라 했으니, 의희3년(407)에 즉위하셨다. 용녀(庸女)를 사랑하여, 그 녀의 척당으로 관리에 등용하니, 국내가 요란해 졌다. 그 틈을 타서, 신라가 가락국을 쳐 오려고 모의하였다. 한 신하가 있으니, 이름은 박원도(朴元道)였다. 국왕께 직간하여 아뢰었다. "유초(遺草:沛澤의 雜草)를 열람하고 열람하건데, 또한 우족(羽族:禽獸)이 몰려 들어, 큰 난리(大亂)가 일어날 듯 하거든, 하물며 요란한 민심에 있어서랴? 만약 난리가 일어나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백성들은 어느 곳에서 보전하오리까?" ....

          또 복사(卜士)가 육효(六爻)를 쳐서, 해패(雷水解卦:  )를 얻었다. 그 괘사(卦辭)에 이르기를, 『네(而:汝) 손가락(拇:小人)을 해제(解除)하면 어진 사람(朋:君子)이 와(至)서, 이(斯)에 신임(孚:信任)하리라』고 했으니, 『임금님(君)은 주역 괘사(卦辭)를 살피소서』하였다. 왕은 사과하고, 그 말이 옳다 하시고는, 용녀(庸女)를 물리쳐, 하산도(荷山島:前山島?)에 귀양보내고, 그 정치를 고쳐서, 길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리셨다. 14년을 재위하시고, 영초(永初)2년 신유(421) 5월 20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도녕(道寧) 대아찬(大阿干)의 따님 복수(福壽)이시니, 왕자 취희(吹希)를 탄생하셨다.

 

 

취희왕   혹은 즐가(叱嘉:金喜)라 했으니. 김(金)씨 이셨다.  영초2년(421)에 즉위하여,  31년을 다스리시고, 원가(元嘉)28년 신묘(451) 2월3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의 따님 인덕(仁德) 이시니, 왕자 질지(질知)를 탄생하셨다.

 

질지왕   혹은 금질왕(金질王:荷知王)이라 했으니, 원가28년(451)에 즉위하셨다. 이듬해(452)에 시조모 허 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왕과 함께 혼인을 하셨던 곳에, 절을 세워서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십결(十結)을 바쳐서, 공양비에 충당토록 하셨다. 41년을 재위하시고, 영명(永明)10년 임신(492) 10월 4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금상(金相) 사간(沙干)의 따님, 방원(邦媛)이시니, 왕자 겸지(鉗知)를 탄생하셨다.

 

 겸지왕  혹은 금겸왕(金鉗王)이라 했으니, 영명10년(492)에 즉위하여, 29년을 다스리시고, 정광(正光)2년 신축(521) 4월 7일에 붕어하셨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의 따님,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 탈지(脫知)를 탄생하셨다.

 

구형왕   김(金)씨 이셨다. 정광2년(521)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리다가, 후주(後周) 보정(保定)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므로, 구형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대전할 수 없었다. 이내 동기(同氣:兄弟)인 탈지(脫知) 이즐금(爾叱今)을 보내어, 본국에 머물러 있도록 하고, 왕자(王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率友公)등은 신라에 항복하여 들어가게 하셨다. 왕비는 분즐수(分叱水) 이즐금(爾叱今)의 따님, 계화(桂花)이시니, 왕자 세 분을 탄생하셨는데, 첫째는 세종(世宗:奴宗) 각간(角干)이요, 둘째는 무력(茂力:武力) 각간이요, 셋째는 무득(茂得:武德) 각간이었다.

 

개황록(開皇錄)에 이르기를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에  신라에게 항복하다』고 하였다.

  논평해서 말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상고 하건데,『구형왕께서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국토를 바쳐서, 신라에 항복하다』고 했으니, 수로왕께서 처음 즉위하신 후한(後漢) 건무18년 임인(서기42년)부터,  구형왕 말년인 임자(532)에 이르기까지를 계산하면 490(1)년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가락국기의 기록에만 고람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이, 원위(元魏:실은 後周) 보정(保定) 2년 임오(562)에 있었다』고 했으니 , 다시 30년을 더해서 모두 521(五百二十[一]년이 된다.

  지금 두 기록을 다 적어 둔다.

주해

(81) 開皇曆. 開皇錄; 옛날의 책 이름이나, 지금은 전해 있지를 않으며, 겨우 가락관계 기사만 조금 인용되어 올 뿐이므로, 그 解題마저 모르는 터이다.

    ○三國遺事 卷一 王曆 『駕洛國 首露王. 壬寅三月卵生, 是月卽位 理一百五十八年. 因金卵而生, 故姓金氏 開皇曆載』

    ○駕洛國記 曆數 居登王 『開皇曆云, 姓金氏, 盖國{=因}世祖, 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駕洛國記 曆數 仇衡王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82) 遺草閱閱亦含羽; 천하대란(天下大亂)이라는 은(殷)나라 말년 주왕(紂王)때의 옛 기사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초(遺草)는 잡초가 늘어난 뜻의 패(沛)를 일컬은 것이요, 우(羽)는 우족(羽族:鳥類)을 가리킨 말임.

     孟子 膝文公章句(下) 夫子好辯章 第九 『요순(堯舜)의 시대가 끝나자 성인(聖人)의 도(道)는 점차로 쇠미해지고, 폭군(暴君)이 번갈아 일어났다. 그들은 민가(民家)를 헐어, 못(오池)을 만들었다. 백성들은 안식(安息)할 집이 없어졌다. 또 밭(田地)을 치워서, 동산(園유)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의식(衣食)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 사설(邪說)과 폭행이 또 일어났다. 동산(園유)과 못(오池)과 잡초(沛;遺草)가 늘어나서 새(禽:羽族)와 짐승(獸)떼가 몰려들었다. 은 나라 주왕(紂王)때에 이르러, 천하는 또 크게 요란하였다.』

(83) 荷山島; 그 소재지가 미상하다. 적으기 생각하건데, 김해군 가락면 전산리(前山島)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金海府 山川 『前山島, 在府南五里』

(84) 荷知; 남제서 동남이전(南齊書 東南夷傳)에 기록된 『建元元年 (질知王二十九年:四七九), 伽羅國王 荷知, 遺使來獻,』의 하지왕(荷知王)은, 곧 질지왕(질知王)의 의역(意譯)일 것이다. 荷는 『짐질하』

(85)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진흥왕 23년 임오(562)에 고령의 대가야(大加耶)가 신라에게 병합된 때의 기사이다. 그런데 이 駕洛國記에는, 임오년(562)을 가락국(駕洛國)의 말년이라고 오인(誤認)한 것은, 커다란 불찰이라 하겠다. 따라서 『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 九月, 新羅第二十四君 眞興王, 興兵薄伐....』이라 한 것을 아래와 같이 했어야, 옳을 것이다.

     『仇衡王, 一云仇亥 或云仇次休,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中大通四年壬子, 冬, 新羅第二十三君 法興王, 興兵薄伐....』- 구형왕. 혹은 구해(仇亥)또는 구차휴(仇次休)라 했으니, 김(金)씨 이셨다.  정광2년(521)에 즉위하여 12년을 다스리셨다.양(梁)의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 겨울에,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므로, 구형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대전할 수 없었다.-

(86)  茂力. 茂得; 武力. 武德의 이름이니, 고려 제2대 혜종(惠宗)의 이름인 무(武)자를 피하기 위하여, 무(茂)자를 쓴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이라 해서, 차례가 서로 바뀌어져 있다.

(87) 梁中大通四年壬子; 가락국 구형왕12년이자, 신라 법흥왕19년(532)에 해당된다.

(88) 若以此記考之; 여기서부터 今兩存之까지의 34자는 연문(衍文)임.

(89) 今兩存之; 구형왕 12년(532)에는 가락국이 신라에게 병합되었고, 그 후 22년째 되는 진흥왕14년(553) 7월에, 무력(武力)께서 신라의 벼슬을 하셨고, 그 후 10년째인 진흥왕23년 임오(562) 9월에는 고령의 대가야(大加耶)가 신라에 병합된 해이었다. 만약 가락국의 역사가, 진흥왕 23년(562)까지 존속하였다고 가정하면, 그 보다 10년전인 진흥왕14년(553)에 무력(武力)께서, 신라에 벼슬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것은 개황록의 가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今兩存之』는 연문인 것이다.   

 

 

駕洛記(가락기)   허목 저(許穆 著)

1999. 1. 25 발행 崇善殿誌

 

1) 해설

 이 글은 허목(許穆)이 쓴 『미수기언(眉수記言)』에서 전재한 것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에 보이는 관련 기록을 토대로 仁祖24년(1647)경에 全文 731字에 小註 15字로 가락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다.

 허목은 1595년(선조 28)에 태어났으며, 자(字)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미수(眉수),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과거를 거치지 않았으나 문명(文名)이 높아 수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고, 숙종대에는 마침내 조정 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허적과 더불어 남인의 영수로서 추앙을 받았으며, 특히 현종대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송시열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이 논쟁에서 허목은 군왕의 입장을 강화하는 예론을 펼쳤고, 결국 1674년(현종 15) 서인을 밀어내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서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허적과 마찰을 빚은 후, 1679년(숙종 5) 고향으로 낙향하여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였으며, 1682년(숙종 8)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학(古學)에 밝았으며, 특히 전서(篆書)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사망후 7년째 되던 1688년(숙종 14) 관작이 회복되었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제사하게 하였으며, 자손을 등용하게 하고 문집을 간행하였다. 『미수기언(眉수記言)』은 그의 문집이다.

 

2) 원문

駕洛者 新羅南境海上別國 初無君長 始祖化生 當東漢建武十八年 有九落九干 神明之 推其始出者 立爲君 號曰首露 姓曰金 建國號曰駕洛 亦曰伽倻 此所謂駕洛伽倻者也 其次五人 各爲五伽倻主 一曰阿那伽倻[今咸安] 二曰古寧伽倻[今咸昌] 三曰大伽倻[今高靈] 四曰碧珍伽倻[今星州] 五曰小伽倻[今固城] 首露王七年得阿유陀國君之女 立爲妃 是爲皇玉夫人 亦曰普州太后 姓許氏 或曰南天竺國君之女 或曰西域許國君之女 亦曰許黃之國 誌記 其先君之命曰 東方有駕洛元君 得女爲配 浮海而至云 首露之世 黎民太康 四方來則之 有音汁伐與悉直谷 爭地相攻伐 兩國爭質於新羅 新羅以爲首露神明之治 召問之 首露至以所爭地 屬之音汁伐 而兩國之難解 新羅國君婆娑 命六部大人 享首露諸部畏之 皆使伊손主客 而獨漢祗部主客 不使貴人 首露以爲慢禮不恪 擊殺其大人保齊 駕洛有得罪亡者 依音汁伐 首露遺使索之 音汁伐不與 首露擧兵攻之 音汁伐降 後新羅祗摩立 伐駕洛 敗於黃山河 於是國益强 其地 東至黃山河 北至大良州 西南際海 西北至居陀州百濟之界

 孝靈中平六年 太后許氏卒 壽百五十七 太后有十南 得母姓者二人云 孝獻建安四年 首露卒 壽百五十八 葬納陵 子居登立 召七點山人참始 作招賢臺 傳麻品 居叱彌 伊尸品 至坐知 得傭女而嬖之  女黨用事 國大亂 其臣元道諫 筮之得解 解之繇曰 解而拇朋至斯孚 坐知謝之 빈女于荷山 國以治强 傳吹希 질智 질智祀國母皇玉夫人 질智卒 鉗知立 鉗知卒 仇衡立 新羅法興王元年 仇衡降 新羅王待以客禮 以其國爲金官郡 封之食邑 至文武王立  置金官小京 駕洛凡十世 四百九十一年而國亡

 贊曰 古初海隅 生人物最後 堯時 始有檀君 至漢時 有赫居世 金蛙 朱蒙 閼智 毛羅良高夫 改無人道而化生 建武世 有六伽倻主 其生亦然 上古有熊氏婦 感大電 生軒轅契之生 簡狄呑玄鳥墮卵 后稷之生 姜嫄踐巨人跡 自古生民之祖 其生固然 釋利貞傳曰 大伽倻厥初有神女 感夷毗訶 生腦室朱日 腦室靑裔 此天地之氣生之也 朱日者 大伽倻主伊진阿致也 靑裔者 駕洛始祖金首露云 此不可知也[崔致遠作利貞傳]

 

3) 번역문

 가락은 신라 남쪽 경계의 바닷가에 있었던 나라이다.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그 시조가 알에서 태어나시니, 후한의 건무 18년(A.D. 42)에 아홉 촌락의 아홉 우두머리가 이를 신명스럽게 여기고 맨처음 알에서 태어난 분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으며, 성을 '김(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라이름을 '가락'이라고 하였는데, 혹은 '가야'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가락가야(駕洛伽倻)'인 것이다. 그 다음에 태어난 다섯 사람은 각기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으니, 첫 번째는 아나가야(阿那伽倻:지금의 함안), 두 번째는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함창), 세 번째는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 네 번째는 벽진가야(碧珍伽倻:지금의 성주), 다섯 번째는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이다.

 

 수로왕 7년에 아유타국왕(阿유陀國王)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이 분이 황옥부인(皇玉夫人)이다.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도 하는데, 성은 허씨이다. 혹은 말하기를 남천축국왕(南天竺國王)의 딸이라고도 하고, 혹은 말하기를 서역(西域) 허왕국(許王國) 또는 허황국왕(許黃國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 부왕이 "동방의 가락국 시조가 너를 배필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셔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수로왕이 다스리는 동안 백성들은 태평하였으며, 사방에서 찾아와 본받고자 하였다. 이때 음즙벌국(音汁伐國 : 지금의 안강이다)과 실직곡국(悉直谷國 : 지금의 삼척이다)이 영토를 다투며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두 나라가 신라에 가서 분쟁의 해결을 의뢰하였다. 신라에서는 수로왕이 신명(神明)있는 분이라고 하여 불러서 물어보았다. 수로왕이 신라에 이르러 분쟁지역을 음즙벌곡에 속하게 하니, 이에 양국간의 분란이 해결되었다.

 

 신라의 파사왕(婆娑王)은 육부(六部)1)의 대인들에게 명령하여 수로왕을 잘 대접하게 하였다. 모든 부들이 두려워하여 죄다 이찬(伊손)2)으로 하여금 접대하도록 하였으나, 유독 한지부(漢祗部)만은 귀인이 접대하지 않았다. 수로왕은 한지부가 거만하고 예를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 대인인 보제(保齊)를 쳐서 죽였다.3)

 

주해

1) 육부(六部)는 신라의 수도에 자리잡고 있던 여섯 개의 정치세력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양부(梁部), 사량부(沙梁部), 본피부(本彼部), 점량부(漸梁部), 습비부(習比部), 한지부(漢祗部) 등 여섯개의 부가 있었다고 한다.

2) 이찬(伊손)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관등이지만, 여기서는 각부(部)의 우두머리를 가르킨다.

3)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기사부터 이 부분까지는 『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 23년조의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가락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간 자가 음즙벌국에 숨어 있었다. 수로왕이 사람을 보내어 찾았는데, 음즙벌곡에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수로왕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니 음즙벌곡이 항복하였다.4)

 그 후 신라의 지마왕(祗摩王)이 즉위하여 가락국을 정벌하였는데, 수로왕이 이를 황산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5) 이에 가락국은 더욱 강성하게 되었으니, 그 땅이 동쪽으로는 황산하(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대량주(大良州:합천지역)에 이르며 서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은 거타주(居陀州:거창지역))의 백제와의 경계선에 이르렀다.6)

 

주해

4) 이 부분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잘못 옮겨적은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한지부의 홀대에 분개한 수로왕이 자신의 노복을 시켜 한지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는데, 그 노복이 음즙벌국으로 달아났고, 이에 분노한 신라의 파사왕이 음즙벌곡의 왕에게 수로왕의 노복을 붙잡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음즙벌곡이 거부하자 군대를 보내어 정벌한 것으로 나온다. 허목은 이 기사를 수로왕의 음즙벌곡 정벌기사로 오해하여 이 곳에 실은 것으로 여겨진다.

5) 『삼국사기』신라본기 지마왕 4년 7월조에, "왕이 가야를 정벌하고자 하여 황산하를 건너다가 가야의 복병에 포위되었다. 힘껏 싸워 포위를 풀고 달아나 돌아왔다."라고 하는 관련 기록이 있다.

6) 황산하는 오늘날의 낙동강, 대량주는 합천지역, 거타주는 거창지역이다. 『삼국유사』에는 '동쪽의 황산하, 북쪽의 가야산, 서쪽의 지리산'으로 나온다.

 

 

후한 영제 중평 6년(189)에 태후 허씨가 돌아가니, 그때 나이 157세였다. 태후는 열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두 아들이 어머니의 성을 얻었다고 한다. 후한 헌제 건안 4년(199)에는 수로왕이 돌아갔다. 향수 158세였다. 납능(納陵)에 장례하였다. 태자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칠점산(七點山)의 참시선인(참始仙人)을 불러 초현대(招賢臺)를 지었다. 왕위는 마품왕(麻品王), 거질미왕(居叱彌王), 이시품왕(伊尸品王)에게 전해졌다. 좌지왕(坐知王)에 이르러 용녀(傭女)7)를 얻어 총애하니, 그 여자의 무리가 나랏일을 멋대로 처리하여 나라가 크게 혼란해졌다. 신하인 원도(元道)가 간언(諫言)을 올렸다. 또 무당이 점을 쳤는데, 그 점괘에 이르기를, "너의 엄지발가락을 잘라버리면 나머지 무리들은 저절로 두려워하여 악을 고치리라"라고 하였다. 좌지왕이 이에 사례하고 용녀를 하산(荷山)으로 내치니, 나라가 다시 잘 다스려지고 강해졌다.  왕위는 취희왕(吹希王)을 거쳐 질지왕(질智王)에게 전해졌는데, 질지왕은 국모인 황옥부인(皇玉夫人)의 제사를 받들었다. 질지왕이 돌아가니 겸지왕(鉗知王)이 즉위하였으며, 겸지왕이 돌아가자 구형왕(仇衡王)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 원년(514)에 8)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왕은 구형왕을 신하가 아닌 객(客)을 대하는 예로 대우하였으며, 그 나라를 금관군(金官郡)으로 삼고서 구형왕의 식읍(食邑)으로 봉하였다. 문무왕이 즉위하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가락국은 대저 10대, 491년을 지속하다가 나라가 망하였다.

주해

7) 용녀(傭女);신분이 천하고 행실이 나븐 여자를 가리킴.

8) 이 부분도 법흥왕 19년(532)을 잘못 적어 놓은 것이다.

 

 찬(贊)한다. 먼 옛날 태초에 바다 모퉁이에서 사람이 가장 늦게 생겨났다. 중국의 요임금 시절에 처음으로 단군이 있었으며,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신라의 혁거세, 부여의 금와,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알지, 모라(毛羅)의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가 있었으니, 이들 모두는 사람에게서 잉태하지 아니하고 저절로 태어났다. 후한의 건무 연간에 여섯 가야의 임금이 있었는데, 그들의 탄생 또한 그러하였다. 상고시대에 중국의 유웅씨(有熊氏)의 부인은 번개에 감응되어 헌원씨(軒轅氏)를 낳았고, 설(契)이 태어날 때는 간적(簡狄)이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삼켰으며, 후직(后稷)이 탄생할 때는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았던 것이니, 예부터 백성을 다스릴 시조는 그 출생이 진실로 그러했던 것이다.

  승려 이정(利貞)의 전기9) 에 이르기를, "대가야는 그 처음에 신녀(神女)가 있었는데, 천신(天神)인 이비가(夷毗訶)에게 감응되어 뇌질주일(腦窒朱日)과 뇌질청예(腦窒靑裔)를 낳았다. 이들은 천지의 기운으로 태어난 것이니, 뇌질주일은 대가야왕 이진아치(伊珍阿致)이고, 뇌질청예는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다."라고 하였는데 잘 알지 못하겠다.

 

주해

9) 『동국여지승람』 고령군(高靈郡)조에 최치원이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 옮겨놓은 것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 (洪萬宗 編)

                               1999. 1. 25 발행 崇善殿誌, 段落編輯

1) 해설

이 글은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 부분을 전재해 놓은 것이다. 역대총목』은 홍만종(洪萬宗)이 1705년(숙종 31)에  지은 역사책으로, 단군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엮은 책이다. 원래 가락국기는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篇)에 수록된 것인데, 홍만종이 肅宗31年(1701)에 全文 670餘字로 그 내용을 간추려 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1075년에서 1084년 사이에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를 지낸 문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락사에 관한 문헌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 가락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원문

 漢光武皇帝 建武十八年 壬寅 三月 駕洛九干 我刀. 汝刀. 彼刀. 五刀. 留水. 留天. 神天. 五天. 神鬼等 率其民 계飮于水瀕 望見龜旨峯 有異氣 且聞空中語 乃就而視之 有紫纓懸金盒 自天而下 開而視之 有金色六卵 圓如日輪

 乃奉置我刀之家 翌日九人 咸會開盒 六卵剖殼 化爲六童子 年可十五 容貌奇偉 衆皆拜賀 日就岐억 歷十餘日 身長九尺 遂奉始生者一人 推立爲王 餘皆分封五伽倻王 生于金盒 故因姓金氏 首出於世 故因名首露 國號駕洛伽倻  

 王理國七年 戊申 七月 九干等 朝謁而言曰 大王未有 伉儷 請揀入處女於宮中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作后亦天命也 卿等勿慮焉 遂命留天干望於望山島 神鬼干望於桑峴以候之 果有大船緋帆천旗 從西南指北而至 有잉臣男女數十人 侍一仙女 幷載石塔而到 留天等 馳走以聞 王乃於宮西設만殿 仙女乃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 贄遺山靈 王備儀仗 出迎同入만殿 越二日 同輦還宮 立以爲后

 后嘗從容語王曰 妾是阿유陀國公主也 姓許氏 名皇玉 年十六 同年五月 父王與母后 顧妾而語曰 夢中同見皇天上帝 命曰 駕洛元君 新리家邦 未定配우 宜遺公主而配之 夢覺言猶在耳 爾其往矣 因載石塔曰 可鎭風濤 妾是故 浮海遐尋而至

 旣配誕生十子 以元子居登爲嗣 后請於王曰 妾受天命 奉父敎 涉海來侍於此 妾於東土客也 妾之死 悲姓之不傳於東土也 王亦憐之 錫二子爲許 傳母姓於後 東方之許 源于此 其餘七子 志絶塵환 從寶玉仙人 入伽倻山 學道秉仙云

 王理國一百五十八年 漢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新羅奈解王四年]葬于龜旨峯南 號納陵 又曰首陵

 侯生于建武癸巳七月七日 漢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薨 壽一百五十七 葬于龜旨峯東北 號普州太后陵 后之宗國曰 阿유陀 或曰許黃國 或曰南天竺

 歷居登王 麻品王 居叱彌王 伊尸品王 坐知王 吹希王 질知王 鉗知王 至仇衡王 以國降于新羅 降爲金官郡

 駕洛國 始於東漢建武十八年壬寅[新羅儒理王十八年 百濟多婁王 高句麗閔中王時] 亡于梁武帝大通四年壬子[新羅法興王十九年] 凡十世 合四百九十一年

 

 

3) 번역문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壬寅年:AD. 42) 삼월에 가락의 아홉 간(干)인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吾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吾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이 백성들을 이끌고 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과 함께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에 가서 보니 금합이 자줏빛 줄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열어보니 금색의 알 여섯개가 있어 해처럼 둥굴었다.

 

  이에 아도간의 집에 안치하였는데, 다음날 아홉사람이 모두 모여 금합을 열어 보니 여섯개의 알이 깨지면서 여섯명의 동자가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열다섯 정도였는데, 용모가 자못 뛰어났다. 무리들이 모두 엎드려 절하며 하례하였다. 날마다 쑥쑥 자라나서, 십여일이 지나니 키가 9척이나 되었다. 이에 제일 먼저 태어난 자를 받들어 왕으로 추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섯 가야의 왕으로 나누어 봉하였다. 금합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성을 김씨라 하고, 세상에 먼저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며, 나라이름은 가락가야(駕洛伽倻)라고 하였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7년째 되던 무신년(AD. 48) 7월에 9간들이 왕을 찾아뵙고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아직 짝이 없으시니, 청컨데 좋은 처녀를 가려뽑아 궁중으로 들이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짐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라. 짐의 배필을 찾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을 좇을 따름이다.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고, 유천간에게 망산도(望山島)1)로 유천간에게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바라보게 하고, 신귀간에게는 상현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과연 붉은 돛과 빨간 깃발을 단 큰 배가 서남쪽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남녀 10여인의 시중을 받는 한 선녀가 있었고, 석탑하나가 함께 실려 있었다. 유천간 등이 말을 달려 왕께 보고하니, 왕은 궁의 서쪽에 만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선녀는 배를 매어놓고, 육지에 올라 높은 산고개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풀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왕께서는 의장을 갖추고, 출영하여 함께 만전에 들어갔다. 이틀이 지난 후 수레를 함께 타고 궁으로 돌아와, 왕후로 삼았다.

 

  왕후가 한 번은 조용히 왕께말하기를, "첩은 본시 아유타국(阿踰陀國)2)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許氏)이며, 이름은 황옥(皇玉)이라 합니다. 나이는 열여섯인데, 금년 오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첩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꿈속에서 똑같이 황천상제를 뵈었는데 명하시기를 가락국의 임금은 새로이 나라를 세웠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공주를 보내어 그의 배필로 삼도록 하라고 하셨다. 꿈을 깨어보니 그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그곳으로 가도록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석탑을 실어주시며 이것은 바람과 파도를 진정시켜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첩은 이런 연고로 배를 타고 멀리서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후 왕후는 열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큰아들 거등(居登)을 후사로 삼았다. 왕후께서 왕께 청하여 말하기를, "첩은 천명을 받고 부왕의 교시를 받들어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첩은 이곳에 객(客)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첩이 죽으면, 저의 성이 이곳에서는 전해지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왕께서도 그것을 가련히 여겨 두 아들에게 허성(許姓)을 내려 후세에 모성(母姓)을 전하게 하였다. 동방의 허씨는 이로부터 시원(始原)한 것이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풍진세상을 끊고자 하여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도(道)를 배우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신지 158년 되던 해인 후한(後漢)의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년(己卯年) 3월 23일에 세상을 뜨셨다(이 해는 신라의 내해왕 4년이다). 구지봉의 남쪽에 장사를 지내고 납릉(納陵)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왕후께서는 건무(建武) 연간의 계사년(癸巳年) 7월 7일에 태어나셔서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년(己巳年) 삼월 초하루에 돌아가시니, 그때 나이가 157년이었다. 구지봉의 동북쪽에 장사지내고, '보주태후릉(普州太后陵)'이라고 이름하였다. 왕후의 본국은 아유타(阿踰陀) 혹은 허황국(許黃國) 또는 남왕후의 본국은 아유타(阿踰陀) 혹은 허황국(許黃國) 또는 남천축(南天竺)이라고 한다.

 

  거등왕(居登王), 마품왕(麻品王), 거질미왕(居叱彌王), 이시품왕(伊尸品王), 좌지왕(坐知王), 취희왕(吹希王), 질지왕(질知王),겸지왕(鉗知王)을 거쳐 구형왕(仇衡王)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니. 그 땅은 신라의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가락국은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년(壬寅年:신라의 유리왕 18년, 백제의 다루왕, 고구려의 민중왕 때이다.)에 처음 세워져, 양(梁) 무제(武帝) 대통(大通) 4년 임자년(壬子年:신라 법흥왕 19년)에 망하였으니, 도합 10왕 491년을 누린 셈이다.

 

주해

1) 망산도(望山島); 경상남도 창원군 용동면 용원리 앞 바다에 있는 섬.

2) 아유타국(阿踰陀國); 인도 중부에 있었던 고대 왕국

 

출처 : 얼추하르방 鏡潭 秘望錄
글쓴이 : 鏡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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