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樂♪ 오락♧/사물놀이.민요..

[스크랩] 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花受紛-동아줄 2008. 12. 15. 23:21

.. **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권은하-

*1. 소리의 현상적 성격 몇 개의 소리나 몇 개의 음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생각해 보자.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때 일어나는 일을 언어로서 서술할 수 있는 지가 우선 의문이다.
음악을 듣고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것까지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우리는 음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느낀다.
이 때 움직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음들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물체들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운동하는 것일까?
음악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 현상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음향학, 심리학 다음에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이면 또한 관심사일 것이다.
*2. 청현상(akumena)
음악의 현상이 인간의 의식 내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과 똑 같은 것이 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존재하는 소리는 외계에 있는 공기의 진동과는 다른 모습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식 내의 소리가 외계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기의 진동이 귀를 자극해야 한다.
음악을 들을 때의 우리의 의식 내에 존재하고 있는 음악적 존재는 외계의 물리적 변화에 기대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음악을 듣고 파악한 지각 내용은 그 자체로 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귀에 의해 변환되고 주체의 경험에 비추어 파악된 바의 것이기 때문에 외계의 음향상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질서를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외계의 음향에서는 수궁되는 질서일지라도 그 질서가 모두 우리 청각적 경험에서는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2만 이상의 진동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진동으로서는 존재하지만 소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외계의 진동은 어느 부분만 우리에게 소리로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의식 내에 소유하고 있는 소리의 감각 내용은 그 원인이 외계에 존재하지만 그 감각내용이 현재의 우리가 지나고 있는 지각 내용이 되는 이유가 외계의 상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현상학은 외계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일단 보류한 다음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현상(phenomena)을 다룬다.
현상학의 방법인 현상적 환원(eidetic reduction)은 의식 내의 현상의 모든 비본질적 요소를 배제해 나감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근본적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다.
현상학자들은 의식 내의 현상에서 모든 일시적인 군더더기를 떨쳐내고 나면 의식의 본래의 성격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현상학은 의식의 본래적 성격을 지향성(intention)이라고 정의한다.
지향은 의식의 본질이다.
의식은 무엇에 대한 지향일 때에 그 존재가 성립된다.
음악은 우리가 음악에 부여한 감정, 의미, 상징 등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우리의 의식 내의 현상으로 남아있다.
말하자면 소리나 음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바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 난 다음의 사물 그 자체로 되돌아갈 수 있다.
철학이 형상적 환원을 거쳐 규명한 것이 지향성이라고 한다면 음악은 청상적 환원(akumenic reduction)을 거쳐 모든 것을 제거하고 난 다음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훗설, 사르트르, 하이덱거 등의 거의 모든 현상학자들은 현상을 시각현상에 제한해 왔다.
메를로 퐁티에 의해 현상은 그 범위가 확대되어 청각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전통적 현상학자들은 시각과 빛의 은유에 현상학 연구의 논의를 제한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철학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각과 빛에 묶여 있다.
사물이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이며 그 모습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접근 방법이었다.
그 보임이 눈에 의해서 보이건 또는 마음에 의해서이건 간에 보임이 접근의 출발점이었다.
빛의 세계 속에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한 연구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의 열쇠였고 플라톤에서 훗설에 이르기까지 형상(eidos)은 본질 발견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현상학의 보다 넓은 시야를 위해서 빛과 시각적 비유를 넘어선 개념과 언어의 확대가 필요하다.
이 확대는 현상학의 재 정의를 뜻하게 될 뿐 아니라 철학에 있어서의 음악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보모든 소리는 그 바탕에 음악을 가지고 있다.
목소리는 음악적인 소리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 환원은 형상적(eidetic) 환원이 아니고 울림(echotic)의 환원이다.
우리가 하는 말의 근원적 청상은 마음 깊숙한 곳에 음악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음악적 소리의 형상(eidos)에 관심이 잇는 것이 아니고 소리의 에코스(echos)에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환원해야 찰 것은 현상이 아니라 청상이다.
우리가 하는 말과 근원에는 울리밍 있다.

*3. 말(.logos)의 근원으로서의 음악 메를로 퐁티는 "지각현상학" 서문에서 현상학의 의무를 이성과 객관성의 보다 근본적인 그리고 근원적인 로고스(logos)를 발견함으로써 근원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미스에 의하면 최초의 로고스는 빛이 아니고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는 눈이 아니고 귀가 헤아려 나간다.
빛이 아니고 살아 있는 목소리가 의미를 운반한다.
예언은 언제나 음성을 통해서 이루어 졌고 음성을 들음으로써 신의 뜻을 듣는 것이 성경 예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와 이집트에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근원적 로고스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현상의 형상적 측면을 괄호 안에 넣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에코스(echos)에 그리고 청상(akumena)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청상의 발견은 에코스가 아이도스(형상)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 안에서의 청현상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이 에코스 발견의 본래의 목적이다.
청각 현상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일은 시각/청각/촉각의 변증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결과는 현상학 그 자체를 충실하게 할뿐만 아니라 예술의 세계 안에서 보다 의미 있게 그 결과를 수용하려는 중요성을 지닌다. 그 예술의 세계는 음악과 춤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이 시각, 청각, 촉각의 변증법이라고 한다면 인생은 존재의 춤이다.
춤과 음악은 그런 의미에서 보다 중요하게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근원적 로고스로서의 말은 '존재론적인 말'로서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와 시간"에서 레데(Rede)라고 청하고 있다.
레데는 존재론적 말로서 존재적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레데는 침묵의 존재론적 언어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음악적 침 묵이다.
그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소리와 말과 사고의 자궁으로서의 침묵이다.
그것은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의 말이다.
소리의 현상학이 기초를 갖기 위해서 음향의 소리는 괄호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소리의 현상학에서 청상(akumena)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음악적 소리이다.
음악적 소리는 그 자체로서 논리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이상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Derrida)는 대상의 이상성(ideality)은, 그것의 현상이 세계내의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말소리(phone)가 그 이상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뜻을 알기 전에 그 말소리가 "가"인지 "나"인지를 알아듣는다. 그 말소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그 말소리를 성립시키고 있는 나의 목소리는 살아 있다.
목소리는 나의 존재, 나의 숨결을 벗어나거나, 나를 떠나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표현하려는 바가 목소리(phone)와 밀착될 경우 우리는 나 자신과 나의 숨결 사이의 사슬 안에서 목소리의 현상학적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 자신, 내 숨결, 표현의 셋이 사슬로 얽히게 된다.
이때의 음소적 표현은 괄호 안에 넣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의미 있는 표현은 항상 현상학적 소리와 밀접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소리에 대한 이와 같은 새로운 이해는 현상학의 시야를 넓힌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각에 집중되어 있던 현상학의 불균형을 시정해 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해는 음악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음악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음악학은 지금까지 자연적 시야 내에 묶여 있었으며 주지주의적 철학의 전통 아래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폭넓은 현상학적 시야는 음악이론의 이론 즉 음악의 메타 이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현상학적 이해는 음악사와 음악 일반에 대한 근본적 이해의 바탕이 될 것이다.
또한 음악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는 음악미학의 연구를 보다 분명하게 확립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음악 미학은 지금까지 시각 예술로부터 거의 전적으로 그 구조와 용어를 빌려 왔기 때문이다.
음악현상학의 중요성은 지금까지 철학이나 음악에서 무관심했던 한 영역이 인간에 대한 인식의 전면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빛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뚜렷한 모습을 갖는 개념의 영역인 반면, 음악 현상학은 어둠과 황혼 속에 놓여 있는 인간 존재의 광활한 부분이다.
어둠과 미명의 세계는 빛과 분명성의 반대의 세계가 아니라 현상학 자체의 자궁의 역할을 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시각은 무력해진다. 우리는 어두운 밤 속으로 길을 느끼며 걸어가야 하며 펼쳐진 어둠 속에서 우리의 길들 들어야 한다.
그것 은 거리가 없어져 가기 시작하는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움이다. 그 사라져 가는 공간을 산책하는 것이 바로 음악을 듣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빛과 동등한 자격으로 소리의 철학을 포함시켜야 한다.
형상학은 사물을 드러나게 해야 할뿐만 아니라 사물을 들리게 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살아 있는 말과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소통의 현상학이 차지할 자리를 알게 된다.
그것은 노래와 시가 차지해야 할 자리이고 연극과 구슬 동화가 차지할 자리이다.
사랑은 바로 이 때의 소통이며 그 이야기는 목소리, 입술, 표정으로 그리고 온 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근원적 로고스로서의 음악이란 개념을 이해하고 나면 왜 그리스 시대에서 음악과 사고가 지금처럼 분명히 나누어져 있지 않았는가를 이해할수 있다.
음악이 가졌던 넓은 의미는 아직도 서구의 언어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4. 음악의 경험과 형식 음악의 형식은 동일한 것과 대조가 되는 것의 나타남을 우리는 기호로 표시한다.
소나타의 1악장 형식을 ABA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음악적 형식은 도표나 그림이 아닌 음악을 들음으로서 청각적 경험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도표는 보조적 수단일 따름이다. ABA의 구조는 그것이 내적인 긴장감과 역동성으로서 체험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 형식 체험은 시각적으로 표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음악적 형식의 경험은 청각적 경험을 통한 성취이다.
시각적인 것에서 형식을 경험하듯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들음으로서 경험하는 "만들어 나가는 것"의 체험이다.
따라서 음악 형식에 대한 설명은 시각적 도표보다는 언어적 서술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음악의 형식은 "이야기"의 구조나 이야기하는 방법에 비유해 설명되거나 식물과 동물의 자라남, 사건의 발생/발전/결말 등에 비유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적 경험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능동성과 수동성을 설정하는 것은 서구의 형이상학이 남겨 놓은 이분법적 개념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음악적 지각에 있어서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의 대립은 양극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일견 해결되지 않을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동적 종합(passice synthesis)의 개념이 이원론의 중간층을 마련한다.
훗설의 설명에 의하면 지각에 있어서 수동성은 단순한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음악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오케스트라나 악기 연주자의 능동성은 청중의 수동성에 중첩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연주되는 음악은 능동적 이론가의 분석적 활동을 위해 수동적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음악적 소리의 순수한 앎은 단순한 수동적 과정 이상이다.
비록 감각적 지각이 감각 재료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취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지각은 그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유형인 형상학적 지향성, 바꾸어 말하면 능동적 추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각이 취하는 이 종합적 과정에서 사상(事象)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의식 안에 자신의 모습을 확립한다.
이 모든 일은 반성적이기 때문에 수동적 종합은 자유적이고 인식적이다.
수동적 종합은 그러므로 능동성과 수동성의 양극 사이의 중간층을 형성한다.
의식 내에 형성된 음악적 존재는 물리적인 상태에서 결정되어 우리에게 단순히 주어짐으로써 수동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jt도 아니고 또한 물리적 상태의 음향과는 전혀 관계없이 우리는 능동적 노력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그 지각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의 파악은 수동적 종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음악을 지각하여 우리가 의식내에 소유하고 있는 바의 경험 내용을 만드는 것은 수동적이고 동시에 능동적인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말이나 음악의 청취과정에서 말과 음악이 자신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능동과 수동의 중간층에서 성립된다.
이 앎의 세계안에서 말이나 음악은 자신의 모습을 구성하지만 그 활동은 우리를 구속하는 활동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적으로 만드는 활동이다.

*5. 음악적 현상의 서술 음악현상에 대한 클리프톤의 설명은 퍽 흥미롭다.
그러나 그의 모든 서술은 음악의 공간을 시각적 공간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의 서술은 현상학과 무관한 자의적 서술이라고 말한다.
그는 음악의 현상을 음악적 경험의 사간, 공간, 유희 느낌의 충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그러나 시간 또는 시간성이라는 말 직접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운동 안에서의 시간이라는 용어 운동 안에서의 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라 '운동'이라는 용어를 시간과 공간 앞에 붙이는 이유는 시간과 공간의 정의에 대한 논쟁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식안의 음악현상에서 운동의 모습을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공각, 유희, 느낌의 충을 설명하는 세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시간(time in motion) 시작 /연속/ 끝/시간층
2. 공간(time in motion) 일차원(음악적 선)/이차원(표면 변화)/삼차원(공간의 변화)
3. 유희(play element) 놀이(ludus)/그외의 놀이
4. 느낌(stratum of feeling) 신념/소유와 자유/소유와 언어/소유와 문화

*6. 음악적 공간의 위상적 설명 음악의 공간은 무엇일까?

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마음속에서 노는 것을 본다. 두 개의 소리도 듣고 세 걔의 소리도 듣는다.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음들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움직이는 것일까?
어떤 학자는 멀리서 나에게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런 문제에 대답하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음악이 움직이고 있는 공간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수학에서 말하는 위상공간의 개념을 잠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위상공간 위상학 또는 위상수학은 topology의 번역어로서 수학의 한 분야이다.
이 수학은 위치와 크기에 관계없는 상대적 위치를 유발하는 기하학적 도형을 연구하는 위치 분석(analysis situs)으로 알려진 분야이다.
그래서 찢거나 자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구부리고 늘이고 뒤트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위상기하학을 "고무판 기하학"이라는 유행어로 부르기도 한다.
위상수학은 점-집합 위상(point-set topology)에서 조합위상(combinatorial topology)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갈래와 대수 위상(combinatorial topology)이라는 다른 한 갈래로 나누어진다.
점-집합 위상은 도형을 점의 집합이 개-집합, 폐-집합, 컴팩트(compact), 연결(connected)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본다. 조합위상은 점-집합 위상과는 달리 도형은 단순(simplexes)의 조합(complexes)으로 생각한다.
대수위상(algebraic topology)은 대수학, 특히 집합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위상 수학이다.
음악적 위상공간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공간이 위상으로 설명해야 함을 느낀다.
다르게 말하면 음악적 공간은 위상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앞서 예를 든 세 개의 지하철역과 같은 공간이 음악에 적용될 경우 그 공간은 순차적 진행의 멜로디만 허용한다.
그러나 음악은 간단한 선율일 경우에도 순차적 진행만을 하는 선적 공간을 넘어서 있다.
do에서 sol로 음이 움직이면 do-sol이 연결되는 공간이 정의되어야 한다.
또 그 연결이 앞의 음과 위의 음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몇 음 전의 음까지 소급해서 연결 감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연결을 이루어주는 시간은 단선이 아니라 복선이 된다.
음악현상의 공간이 위상 공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먼저 음악을 듣고 있을 때에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것들이 집합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귀에 들어오는 공기 진동은 단선적 변화량이지만 우리의 의식에는 몇 개의 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집합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음들은 원소로서의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음들이 원소로서 존재한다면 위의 정의에 의해 음악의 공간을 위상공간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음 길이의 관계 역시 공간을 만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의 원소는 구별되는 음 길이의 단위일 것이다.
음 길이의 단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두 음 길이의 비례로서 존재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의문은 앞서 말한 음 높이 이의경우에도 해당된다.
즉 음 높이는 개별적 존재인가 아니면 두 음 높이의 관계로서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만일 음정과 리듬(음길이의 관계)가 집합의 원소라고 한다면 음악적 공간의 위상은 점-집합의 위상이 아니라 단순도형(simplexes)의 조합(complexes)으로 이루어지는 조합위상(combinatorial topology)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정원기의 국악 아카데미
글쓴이 : 사물노리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