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0"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며 흥겹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되찾아 주고 싶습니다."
해가 어스름하게 지는 저녁 무렵, 동네 친구들과 모여 술래잡기를 하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던 때가 있었다.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내일을 약속하는 유년의 기억 속에는 가볍게 흥얼거리는 우리의 노래가락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골목문화가 사라진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노래가 남아있을까?
글 박수경 기자 / 사진 한정선 기자
아이들 노래를 만들고 부른 15년
어릴적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긴긴 잠을 청할 때면 으레 할머니가 나직하게 불러주시던 노래가 있었다. 음도 가사도 잘 알지 못하는 노래지만 어쩐지 할머니의 노랫가락을 들으면 달콤하게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뿐이 아니다. 동네 친구들과 모여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갖가지 놀이를 해가며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뛰어놀던 우리의 어린 시절,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골목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렸다. 이제 아이들은 음도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대기보다는 잘 짜여진 유행가에 고개를 흔들고 좋아라 하는 동안에, 진정 그 아이들의 노래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즈음, '삽살개'라는 어린이전문음반사에서 만들어낸 음반 두장이 눈에 띄었다. 삽살개, 굴렁쇠, 전래동요, 이원수의 시... 한동안 잊고 살았던 몇몇의 단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순수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정겨운 음반이었다.
도서출판 보림에서 올여름 새롭게 선보인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와 <이원수 시에 붙인 노래들>로 구성된 두장의 음반과 악보집은 어린이전문음반사 '삽살개'에서 기획하고, 굴렁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른 총 59곡의 우리동요로 꾸며져 있다. 양악기와 국악기가 어우러져 흥겨움이 있고,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우리말을 그대로 살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따라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이번 음반의 특징이다. 20년이 넘게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을 해온 백창우의 또다른 이름은 '아이들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겠네요. 그 당시 달동네라고 불리는 곳에서 아이들과 한 5년쯤 함께 지낸 적이 있었어요. 그곳의 아이들은 다른 동네 아이들에 비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은 만큼 놀 수 있는 문화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죠.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뛰어 놀면서 이 아이들에게 문화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처음 만든 것이 '굴렁쇠 아이들'이라는 아이들 문화모임입니다."
아이들 노래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 무렵부터 그는 틈틈이 아이들이 즐겨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보다 많은 아이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노래모임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지금의 '굴렁쇠 아이들'을 있게 했다.
이원수 시에서 찾아낸 아이들의 다양한 세계
아이들의 노래를 만들어오는 동안 백창우는 "우리 아이들의 노래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주제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TV를 틀면 나오는 유행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한 문제의 해답은 결국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동요에서 찾아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래동요가 지금 우리 아이들의 노래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동요로 만들어진 곡이 1만곡이 넘습니다. 하지만 현재 아이들의 입으로 불려지는 노래는 과연 몇 곡이나 남아 있을까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지요. 왜 우리의 좋은 노래들이 있으면서도 잘 불리어지지 않는지를.... 결국은 동요가 아이들의 정서와 취향을 잘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죠."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그는 먼저 교과서식의 정형화된 노래 틀을 지적한다. 음악교과서에 실린 노래들의 일정한 틀. 언제나 아이들은 밝고, 명랑하고, 희망에 가득찬, 그런 것들만이 아이들의 세계이고 정서인 듯 담아낸 동요들은 더 이상 아이들의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이 쓰는 언어가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강아지가 출렁출렁 뛸 수도 있고, 개구리가 끼꿀끼꿀하고 울 수도 있는데, 어른들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오히려 한가지 정답만을 고집합니다. 결국 창의성도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에서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열린 사고에서 찾아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뜻에서 <이원수 시에 붙인 노래들>은 백창우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 아동문학사에 길이 남을 여러 작가들의 작품 중에 가장 첫 자리로 이원수 선생님의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바로 그분의 작품 속에는 아이들의 다양한 세계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원수 선생님은 아이들의 밝고 환한 모습뿐만 아니라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정서까지도 다 표현하셨죠. 열여섯 살 때 고향의 봄을 발표한 이래로 평생동안 아이들의 세계에 머물고자 했던 그분의 사랑을 노래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90년대 초반, <이원수 아동문학의 밤>에서 그의 시에 곡을 붙인 20여 곡의 노래를 굴렁쇠 아이들과 초연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편이 넘는 이원수 선생의 시에 곡을 붙여왔다.
"이제 우리의 노래를 들려줄 때입니다."
최근들어 우리 사회에 달라진 면이 있다면, 바로 '우리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카피처럼 우리의 정서를 담아낸 영화며 소품들이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고 재평가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이제는 아이들 노래에서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할 때임을 백창우는 몇 번이고 강조해서 이야기 한다. "음식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밥과 김치, 된장찌개를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식탁에 올려진 음식이 국대신 수프로, 밥대신 빵으로 바뀐다면 어떨까요? 며칠동안은 맛있다고 먹을 수 있겠지만 그게 지속된다면 그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문화라는 것도 우리의 것이 든든하게 받침이 된 후에 남의 것을 받아들여야 중심이 잡히는 것인데, 지금 우리의 문화는 우리의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남의 것들만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노래문화는 저기 박물관 한 쪽에 놓아둔 도자기처럼 그저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남아있어요. 이제는 우리의 노래를 찾아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때이지요."
박물관에 두고 온 우리의 노래문화, 왜 우리는 그것들을 꺼내어 새로 다듬어 생활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던 것일까? 설사 꺼내어 온 노래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입에서 불리어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지 않았을까?
"문화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힘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나 교사들이 좋은 문화를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접해주려는 노력,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지면 잃어버린 우리 아이들의 문화도 언젠가 되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백창우가 만들어 굴렁쇠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는 우리의 가락이 묻어난다. 흔히 동요라고 불리는 노래와는 조금 다른 가락을 지닌 노래들. 그 노래를 자세히 듣다보면 그 안에 숨겨진 다양한 국악기의 리듬과 가락을 찾아낼 수 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기타의 반주에 장구와 북, 가야금의 조화, 전래동요가 지닌 가사의 반복적 구성과 독특한 가락이 어우러져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편곡한 전래동요는 국악과 민요를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다.
"거창하게 국악과 민요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아이들이 들어서 좋은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전통을 전통적인 것 그대로만 보전하기보다는 현대적인 감각을 곁들여 생활 가까이에서 쓰이고, 또 다른 형태로 변형시켜 가는 것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업이지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설립된 어린이전문음반사 '삽살개'에서는 하고픈, 그리고 아직 해야할 많은 작업들이 남겨져 있다. 우리 자연의 소리를 담은 태교음악부터 연령별, 주제별로 나눠진 음악문고를 만들고 싶지만 백창우는 결코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노래문화를 남겨주고픈 마음으로 시작된 백창우의 아이들 노래만들기. 어느덧 세월이 더해져 15년이라는 시간만큼의 노래가 그의 악보에 녹녹하게 쌓여져 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스턴트 노래가 아닌,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그 아이들의 아이에게로 전해질 수 있는 노래를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굴렁쇠 아이들의 순수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정서와 가슴속 울림으로 잔잔히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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