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는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1978년 5월에 처음으로 만든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물놀이가 농악이나 풍물굿을 밀어내고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이라는 말은 절이나 남사당패에서 네 가지 악기를 두루 통칭해서 일컫던 말인데. 사물놀이는 네 명의 연주자들이 실내에서 연주하는 형태를 일컫는 신조어이다. 그러므로 사물놀이라 함은 1978년 이전에는 없었으며 여러 명이 연주하는 풍물놀이를 사물놀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사물놀이라는 말을 만든 심우성은 일찍이 남사당패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실날같은 명맥을 유지하던 남사당패를 남형우 연희자를 중심으로 규합하고, 이들의 문화적 소중함을 일깨운 장본인이 곧 심우성이다. 남사당패의 후예나 남사당패를 거친 김용배와 김덕수가 심우성의 눈에 띈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김덕수와 김용배는 1978년 2월에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제1회 공간 전통 음악의 밤’이 개최되고 이 자리에서 웃다리풍물(경기, 충청가락)이 발표된 것이다. 이때에 발표한 인물이 김덕수, 김용배, 최태현, 이종대 등이었다. 김덕수와 김용배가 아주 익숙하게 남사당패에서 익힌 가락을 판에 꼭 맞게끔 짜서 발표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따라서 사물놀이라는 명칭은 갖지 않은 채 1978년 2월에 가진 ‘제1회 공간 전통 음악의 밤’은 사물놀이 탄생의 서곡이라고 하겠다.
이후, 1978년 4월에 사물놀이의 성립을 알리는 제2회 연주가 있었다.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경상지방 농악 12차 36가락을 발표하게 된다. 이때에 구성 멤버에 차이가 생기는데 이종대가 나가고 새로이 최종실이 참여한다. 그래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최태현이 서로 호흡을 맞추게 된다. 다시 1978년 5월에 이전의 작업을 종합적으로 발표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에 다시 구성 멤버에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최태현이 나가고 이광수가 보강되어서 이후에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 이라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는 사물놀이의 4인이 손은 맞추게 된다.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은 내력이 깊은 뼈대 있는 집안의 후예이다.
김덕수는 남사당패 법고놀이의 명수였던 김문학의 둘째 아들이며. 어릴 때부터 장구를 잘 쳤으며 양도일, 남형우 등 쟁쟁한 스승에게 장구와 쇳가락을 배웠다. 그의 특기는 천예가 깃들었다 할 장구솜씨이다.
김용배는 유랑극단 단원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집을 나와 사당패의 유명한 쇠잡이 최성구 밑에서 쇠를 익히는 등 전국을 다니며 온갖 무속장단과 삼도농악가락을 터득했다. 특히 어느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던 김석출씨의 ‘푸너리가락’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유일한 풍물잡이이기도 했다. 꽹과리를 칠 때의 김용배는 흡사 신들린 사람이며 그 소리는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김용배의 꽹과리 소리는 언제나 관중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들린 꽹과리’에 대한 묘사는 이제는 과거시제이다. 그는 1986년 5월 1일 그의 아파트에서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시체로 발견되었다. 숱한 의구심만을 남긴 채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한 것이다. 그때의 나이34세
이광수는 이점식의 아들이다. 이점식은 충남 예산에서 북만주 일대까지 전문 연희패를 이끌고 다니던 이름난 뜬쇠였다. 이광수는 이점식, 남형우, 최성구 등에게 풍물을 사사 받았으며 비나리와 꽹과리가 그의 특기이다.
최종실의 아버지는 12차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단장이었던 최재명이다. 징소리에는 최종실을 따를 사람이 없으며 법고춤도 일품이다.
이후 김용배 대신 김덕수패에서 북을 치는 강민석만은 예외로 금산 농고를 다니며 뒤늦게 풍물을 익혔으나 정인섭, 신기남, 김병섭에게 북, 장구를 비롯한 갖가지 기예를 배워 솜씨가 뛰어나다.
이들은 모두 예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인물이었음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예인적 기질을 바탕으로 공간사랑에서 만난 네 명의 치배들은 각기 개성이 뚜렷해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이들도 인간이니 그러한 불협화음의 발생은 필연적인 것이라 하겠으나 이들의 뚜렷한 개성은 결코 사물의 화음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물놀이는 각 악기 구성의 특성상 개체의 특징이 한껏 드러나야 제대로 화음이 된다. 또한 이들의 화음은 생래적이면서도 이른 시기에 갖추어져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네 명의 치배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 타악의 가락을 코게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가장먼저 민중들이 즐기고 놀았던 풍물굿을 각 지역별로 습득하고 체계화하는데 힘썼다. 경기 충청의 웃다리가락, 호남 지역의 우도농악, 경상도 일대의 삼천포 12차 등을 주력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다음으로 삼도설장구이다. 설장구는 장구의 으뜸을 뜻하기도 하고 판굿의 구정놀이에서 장구가락의 기교를 한층 더 자랑하는 것인데, 네 대의 장구가 혼연일체가 되어 장구 가락을 몰아가는 미적 감흥은 사물놀이의 그것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속음악에 힘을 쏟았는데 무속음악은 전국적인 무풍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나며, 이들이 크게 힘썼던 무속음악은 경기도 도당굿의 무속음악이었다.
사물놀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징을 지닌다. 하나의 형식이 창출되었다고 해서 그 형식이 매번의 연주마다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연주상황, 치배들의 그 날 분위기 등에 따라서 거시적인 형식을 넘나들기 때문에 가변적인 생성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들 음악의 특징이 된다. 이를테면 서양음악의 악보처럼 모든 것이 기록되고 정착되어 있어서 연주자가 연주할 때에 변화을 시킬 수 있는 부분이 지극히 제약되어 있는 반면에, 우리네 전통음악은 연주자의 임의적인 창작이 가능하고 필요에 따라서 형식이나 시간적 길이가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서도 사물놀이는 특히 순발력이 중요한 음악이므로 항시 변화되는 특성을 지닌다.
네 명의 치배들이 연주하는 이 음악은 임의적인 변개가 가능하므로 즉석의 작곡과 연주가 치배들의 전적인 몫이 된다. 연주자와 작곡자가 일치하는 황홀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서양 음악은 연주자와 작곡자가 따로이고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 점이 우리 음악과 사물놀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1978년 사물놀이 창단을 맞이한 이래로 우리 음악계뿐만 아니라, 세계음악에 있어서 커다란 가능성으로 제시된 범례로 김덕수패 사물놀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사물놀이는 몇 가지 의미에서 모범적 사례로 손꼽히는데, 첫째는 조상들이 물려준 풍물놀이의 전통을 온전히 계승했다는 점, 둘째는 민족 음악의 특수성이 세계 음악의 보편성으로 각광받게 된 점등이 바로 우리 음악의 새삼스러운 가능성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던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놀이의 가능성은 크게 느껴지면서도 불안한 측면이 없지가 않다. 좀더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사물놀이는 어디에서 유래되었으며, 장차 어떻게 또는 어디로 진행될 것인가? 사물놀이는 어떠한 음악적 구조와 원리로 되어 있는가? 현재 연주되는 사물놀이의 곡목은 단지 정태적, 고정적 양식에 불과할 따름인가? 우후 죽순처럼 생겨나는 사물놀이패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사물놀이와 서양 음악의 만남은 진실로 가능한 것인가? 이토록 숱한 물음이 제기되는 터에 사물놀이가 그렇게 가능성은 지닌 음악으로 제시되는 것은 성급하게 보이게 된다.
사물놀이에 대한 회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첫째는, 조선후기 이래로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판소리의 흥망성쇠가 증거하듯 이론적 취약성이 내재된 예술 갈래는 아무리 커다란 전성기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깊은 문제 제기에서 이상과 같은 물음이 비롯된다. 사물놀이가 벅찬 감동과 신명을 자아낼 지라도, 그것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는 ‘논리적 앎’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신명 놀음에 그치고 말아, 판소리나 그에 파생된 산조와 같은 궤적을 그릴 수 있다는 우려와 일맥 상통하게 된다. 판소리의 급격한 퇴장 이유를 갈래 자체의 관용적 경지와 이론적 취약성으로 치부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없으며, 그렇게 단일화할 수 없다고 부정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판소리의 운명이 점철된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자생력이 취약한 틈에 일본을 매개로한 서양 음악이 이 땅에 밀려와서 급격하게 판소리가 멸망되었고, 판소리 자체는 창극과 다시 경쟁에 놓이게 되면서 지리멸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문화 변동의 논리도 일견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판소리를 구전 심수의 경지로 몰아봍이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를 뒷전으로 내몬 것이 결국 이상과 같은 외적 변동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 안목을 갖추는 것은 부질없는 말싸움이 아니고, 새로운 실천을 위한 지침이 된다. 판소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물놀이는 이론적 토대가 다져지지 않았거니와 그에 비해 무척 가다듬어진 예술 갈래로 정착 향유되니 판소리의 운명에 그리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서 사물놀이는 전문 예능인의 기량과 연행력에 힘입어서 정착된 갈래이므로 판소리처럼 전개도리 위험이 내재되어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사물놀이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시금히 요구된다. 실제로 김덕수패 사물놀이에서는 사물놀이 교칙본을 꾸준하게 진행시키고, 자체의 이론 개발에 적지 않게 노력하고 있으나, 예컨대 언어적 가시화, 소리의 기본화, 음악의 원리 등이 매우 추상적으로 진술되고 있어서 이해에 곤란한 감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사물놀이 연주자로서 안에서 보는 관점과 사물놀이를 듣는 청중으로서 밖에서 보는 관점은 명백하고도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 안에서 바라보는 이론적 탐구도 소중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이론적 탐구는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론적 작업도 필요하다. 판소리가 자꾸 실기인들에 의해서 추상화된 것과 유사한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된다.
둘째는, 사물놀이의 연주 곡목이 한정되어 대부분 가락에 대한 탐구부족, 창조성의 결여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사물놀이는 1978년에 공간극장을 무대로 한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이 연주함으로써 유래되었는데, 네 명이 탐구한 가락을 그대로 답습했음은 이후에 생겨난 사물놀이 패의 연주 실황을 보더라도 쉽사리 확인된다. 가락에 대한 창조가 결여되어 다양한 우리 풍물가락을 고착시키니 아쉬움이 남는다. 판소리나 산조를 보더라도 다양한 유파, 법제, ~류가 존재하듯이 독특한 탐구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면 사물놀이의 페쇄성과 고착성이 쉽사리 드러난다. 아무튼 사물놀이의 이론적 탐구와 더불어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이다. 특히 창조적 역량이 창작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유사한 형태의 음악을 범람시켜서 진실로 좋은 음악이 되지 못한다. 같은 음악의 틀을 사용하면서도 새삼스러운 변형과 창조가 이룩되어야 하겠다.
셋째는, 사물놀이가 진정한 민족음악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사물놀이의 판도와 주변음악에의 제휴 관게를 날카롭고도 비판적으로 따져 보는 일이 필요하다. 창작은 고유한 영역이니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으나, 음악이나 소리가 청중에게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서며 수용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 문제야말로 첫째 문제와 둘째 문제를 바탕으로 새롭게 제기되는 우리의 과제이다. 본디 사물놀이는 우리의 풍물을 짜서 실내 연주용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하기에 무악, 서양음악과의 연대가 타진되면서 온전한 민족 음악으로 장착될 수 있다.
이제 사물놀이는 온갖 행사에 빼놓을 수 없는 레퍼토리로써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여러 사물놀이패가 생겨났으니 다행스런 일 이겠다. 예전에 천대받던 풍물을 많이 이 들이 배운다는 것은 나무랄데가 없지만은, 문제는 이러한 기호의 이면에 존재한다. 유행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지나간 뒤에 관심을 되살리기는 진실로 어렵다. 따라서 문제의 이면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사물놀이가 진부한 음악이 되는 요인중 하나는 창조적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앞의 요인의 당연한 결과이지만은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기존의 곡들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곡들로서 청중들의 요구을 충족시켜주고 있지만은 청중의 기호는 바뀌기 마련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기호에 의지 한 채로 사물놀이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김덕수 사물놀이패 이후에 여러 사물놀이패가 등장하였다. ‘국립국악원패’, ‘뜬쇠패’, ‘두레패’, ‘풍물놀이 마당’ 등이 그들이다. 이후에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거니와, 한울림이 사단법인으로 창조되어 이들에게 귀속되었다. 이들은 각기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이나 이념을 지니고 있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새로움이란 전혀 없다. 오히려 ‘김덕수네’가 짜놓은 음악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세대 교체라는 긍정적 측면을 감내할 수 있겠으나, 그것도 발전적인 경우라야 붙여질 이름이 아닌가 싶다. 놀이패 나름의 독자적 특징을 보여주지 못한 채, 전대에서 힘들여 개척한 짜임새를 해치면서 오로지 인기에 영합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나친 말이 아니라 사물놀이의 보전을 위해서 전대의 그늘에서 조속히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놀이패 나름의 독특함을 본보기로 제시해 주고 전대의 업적을 규범으로 공유하는 것이 우리의 음악을 더욱 발전 시키는 일이리라 믿는다. 이러한 연후라야 모방이나 흉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을 것이며 놀이패의 존재 의의도 자명해진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창조적 작업의 요망이다. 우리의 음악적 유산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먼저 사물놀이가 본보기로 삼았던 풍물은 극히 편협하고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들의 음악적 아름다움이 강도 높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들 형식에 대한 필수적인 창조가 이루어졌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론에 자각하여 그것을 터득한 끝에 풍물을 새롭게 짠다면 매우 의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테면, 호남좌도굿이나 삼도풍물을 앞에서 분석한 것에 힘입어 다시 짠다면 아주 색다른 맛이 나며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풍물에 대한 천착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이를 토대로 새로이 사물놀이를 짜야 마땅하리라 본다.
다음으로 살필 일은 주변 음악과의 제휴 관계이다. 이 문제는 자못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일방적으로 서구 음악 듣기를 강요당하였으며, 아직도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 음악을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교육, 대중매체, 문화의 형태가 서구 음악을 가장 추켜세우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세 부득이할 따름이다. 사물놀이의 가능성은 고착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사물놀이가 시도한 서구 음악과의 몇 가지 전례를 검토해본다.
‘사물놀이와 재즈’, ‘사물놀이와 피아노’, ‘사물놀이와 교향악’, ‘사물놀이와 대중가요’등이 바로 서구 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한 전례이다. 또한 사물놀이의 가능성을 드높인 박범훈의 ‘신모듬’도 있어서 아주 색다르고 성공적인 갈래를 창안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
사물놀이와 피아노. 강준일이 작곡한 ‘열두거리’, ‘푸리’가 곧 피아노와의 만남을 시도한 작품이다. 피아노는 건반 악기이기에 타악기와 선율 악기의 특성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사물놀이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마련된 셈이다. 이외에도 임동창의 ‘놀이’를 꼽을수 있겠다. 음악적 어법이나 형식도 사물놀이의 호흡과 일치하고 어느정도 일치하고 있다.
사물놀이와 재즈의 만남. 사물놀이는 재즈의 어법에 맞추기 위해서 동일한 장단만을 구사하였고, 사물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리듬의 변화가 전혀 들리지가 않는다. 여러 재즈팀과의 합주가 행하여 졌으나 음악에 주종관계가 성립되어 사물이 없어도 이와 같은 음악은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이외에서 교향악과의 만남 등이 시도되었으나 두 음악이 공존은 하고 있으나 서로 용해되어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물놀이와 서양 음악의 제휴관계를 온전히 하려면 우선 사물놀이를 깊이 있게 체득하여야 한다. 어설프게 적당히 둘을 버무린다면 이도 저도 아니될 것이다. 사물놀이의 원리와 짜임새를 자각하고, 서양 음악을 꿰뚫고 나가는 통찰력과 능히 그것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은 뒤에 라야 둘을 용해시킨 음악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사물놀이라는 말을 만든 심우성은 일찍이 남사당패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실날같은 명맥을 유지하던 남사당패를 남형우 연희자를 중심으로 규합하고, 이들의 문화적 소중함을 일깨운 장본인이 곧 심우성이다. 남사당패의 후예나 남사당패를 거친 김용배와 김덕수가 심우성의 눈에 띈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김덕수와 김용배는 1978년 2월에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제1회 공간 전통 음악의 밤’이 개최되고 이 자리에서 웃다리풍물(경기, 충청가락)이 발표된 것이다. 이때에 발표한 인물이 김덕수, 김용배, 최태현, 이종대 등이었다. 김덕수와 김용배가 아주 익숙하게 남사당패에서 익힌 가락을 판에 꼭 맞게끔 짜서 발표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따라서 사물놀이라는 명칭은 갖지 않은 채 1978년 2월에 가진 ‘제1회 공간 전통 음악의 밤’은 사물놀이 탄생의 서곡이라고 하겠다.
이후, 1978년 4월에 사물놀이의 성립을 알리는 제2회 연주가 있었다.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경상지방 농악 12차 36가락을 발표하게 된다. 이때에 구성 멤버에 차이가 생기는데 이종대가 나가고 새로이 최종실이 참여한다. 그래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최태현이 서로 호흡을 맞추게 된다. 다시 1978년 5월에 이전의 작업을 종합적으로 발표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에 다시 구성 멤버에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최태현이 나가고 이광수가 보강되어서 이후에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 이라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는 사물놀이의 4인이 손은 맞추게 된다.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은 내력이 깊은 뼈대 있는 집안의 후예이다.
김덕수는 남사당패 법고놀이의 명수였던 김문학의 둘째 아들이며. 어릴 때부터 장구를 잘 쳤으며 양도일, 남형우 등 쟁쟁한 스승에게 장구와 쇳가락을 배웠다. 그의 특기는 천예가 깃들었다 할 장구솜씨이다.
김용배는 유랑극단 단원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집을 나와 사당패의 유명한 쇠잡이 최성구 밑에서 쇠를 익히는 등 전국을 다니며 온갖 무속장단과 삼도농악가락을 터득했다. 특히 어느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던 김석출씨의 ‘푸너리가락’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유일한 풍물잡이이기도 했다. 꽹과리를 칠 때의 김용배는 흡사 신들린 사람이며 그 소리는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김용배의 꽹과리 소리는 언제나 관중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들린 꽹과리’에 대한 묘사는 이제는 과거시제이다. 그는 1986년 5월 1일 그의 아파트에서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시체로 발견되었다. 숱한 의구심만을 남긴 채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한 것이다. 그때의 나이34세
이광수는 이점식의 아들이다. 이점식은 충남 예산에서 북만주 일대까지 전문 연희패를 이끌고 다니던 이름난 뜬쇠였다. 이광수는 이점식, 남형우, 최성구 등에게 풍물을 사사 받았으며 비나리와 꽹과리가 그의 특기이다.
최종실의 아버지는 12차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단장이었던 최재명이다. 징소리에는 최종실을 따를 사람이 없으며 법고춤도 일품이다.
이후 김용배 대신 김덕수패에서 북을 치는 강민석만은 예외로 금산 농고를 다니며 뒤늦게 풍물을 익혔으나 정인섭, 신기남, 김병섭에게 북, 장구를 비롯한 갖가지 기예를 배워 솜씨가 뛰어나다.
이들은 모두 예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인물이었음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예인적 기질을 바탕으로 공간사랑에서 만난 네 명의 치배들은 각기 개성이 뚜렷해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이들도 인간이니 그러한 불협화음의 발생은 필연적인 것이라 하겠으나 이들의 뚜렷한 개성은 결코 사물의 화음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물놀이는 각 악기 구성의 특성상 개체의 특징이 한껏 드러나야 제대로 화음이 된다. 또한 이들의 화음은 생래적이면서도 이른 시기에 갖추어져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네 명의 치배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 타악의 가락을 코게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가장먼저 민중들이 즐기고 놀았던 풍물굿을 각 지역별로 습득하고 체계화하는데 힘썼다. 경기 충청의 웃다리가락, 호남 지역의 우도농악, 경상도 일대의 삼천포 12차 등을 주력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다음으로 삼도설장구이다. 설장구는 장구의 으뜸을 뜻하기도 하고 판굿의 구정놀이에서 장구가락의 기교를 한층 더 자랑하는 것인데, 네 대의 장구가 혼연일체가 되어 장구 가락을 몰아가는 미적 감흥은 사물놀이의 그것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속음악에 힘을 쏟았는데 무속음악은 전국적인 무풍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나며, 이들이 크게 힘썼던 무속음악은 경기도 도당굿의 무속음악이었다.
사물놀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징을 지닌다. 하나의 형식이 창출되었다고 해서 그 형식이 매번의 연주마다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연주상황, 치배들의 그 날 분위기 등에 따라서 거시적인 형식을 넘나들기 때문에 가변적인 생성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들 음악의 특징이 된다. 이를테면 서양음악의 악보처럼 모든 것이 기록되고 정착되어 있어서 연주자가 연주할 때에 변화을 시킬 수 있는 부분이 지극히 제약되어 있는 반면에, 우리네 전통음악은 연주자의 임의적인 창작이 가능하고 필요에 따라서 형식이나 시간적 길이가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서도 사물놀이는 특히 순발력이 중요한 음악이므로 항시 변화되는 특성을 지닌다.
네 명의 치배들이 연주하는 이 음악은 임의적인 변개가 가능하므로 즉석의 작곡과 연주가 치배들의 전적인 몫이 된다. 연주자와 작곡자가 일치하는 황홀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서양 음악은 연주자와 작곡자가 따로이고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 점이 우리 음악과 사물놀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1978년 사물놀이 창단을 맞이한 이래로 우리 음악계뿐만 아니라, 세계음악에 있어서 커다란 가능성으로 제시된 범례로 김덕수패 사물놀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사물놀이는 몇 가지 의미에서 모범적 사례로 손꼽히는데, 첫째는 조상들이 물려준 풍물놀이의 전통을 온전히 계승했다는 점, 둘째는 민족 음악의 특수성이 세계 음악의 보편성으로 각광받게 된 점등이 바로 우리 음악의 새삼스러운 가능성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던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놀이의 가능성은 크게 느껴지면서도 불안한 측면이 없지가 않다. 좀더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사물놀이는 어디에서 유래되었으며, 장차 어떻게 또는 어디로 진행될 것인가? 사물놀이는 어떠한 음악적 구조와 원리로 되어 있는가? 현재 연주되는 사물놀이의 곡목은 단지 정태적, 고정적 양식에 불과할 따름인가? 우후 죽순처럼 생겨나는 사물놀이패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사물놀이와 서양 음악의 만남은 진실로 가능한 것인가? 이토록 숱한 물음이 제기되는 터에 사물놀이가 그렇게 가능성은 지닌 음악으로 제시되는 것은 성급하게 보이게 된다.
사물놀이에 대한 회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첫째는, 조선후기 이래로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판소리의 흥망성쇠가 증거하듯 이론적 취약성이 내재된 예술 갈래는 아무리 커다란 전성기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깊은 문제 제기에서 이상과 같은 물음이 비롯된다. 사물놀이가 벅찬 감동과 신명을 자아낼 지라도, 그것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는 ‘논리적 앎’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신명 놀음에 그치고 말아, 판소리나 그에 파생된 산조와 같은 궤적을 그릴 수 있다는 우려와 일맥 상통하게 된다. 판소리의 급격한 퇴장 이유를 갈래 자체의 관용적 경지와 이론적 취약성으로 치부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없으며, 그렇게 단일화할 수 없다고 부정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판소리의 운명이 점철된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자생력이 취약한 틈에 일본을 매개로한 서양 음악이 이 땅에 밀려와서 급격하게 판소리가 멸망되었고, 판소리 자체는 창극과 다시 경쟁에 놓이게 되면서 지리멸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문화 변동의 논리도 일견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판소리를 구전 심수의 경지로 몰아봍이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를 뒷전으로 내몬 것이 결국 이상과 같은 외적 변동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 안목을 갖추는 것은 부질없는 말싸움이 아니고, 새로운 실천을 위한 지침이 된다. 판소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물놀이는 이론적 토대가 다져지지 않았거니와 그에 비해 무척 가다듬어진 예술 갈래로 정착 향유되니 판소리의 운명에 그리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서 사물놀이는 전문 예능인의 기량과 연행력에 힘입어서 정착된 갈래이므로 판소리처럼 전개도리 위험이 내재되어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사물놀이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시금히 요구된다. 실제로 김덕수패 사물놀이에서는 사물놀이 교칙본을 꾸준하게 진행시키고, 자체의 이론 개발에 적지 않게 노력하고 있으나, 예컨대 언어적 가시화, 소리의 기본화, 음악의 원리 등이 매우 추상적으로 진술되고 있어서 이해에 곤란한 감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사물놀이 연주자로서 안에서 보는 관점과 사물놀이를 듣는 청중으로서 밖에서 보는 관점은 명백하고도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 안에서 바라보는 이론적 탐구도 소중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이론적 탐구는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론적 작업도 필요하다. 판소리가 자꾸 실기인들에 의해서 추상화된 것과 유사한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된다.
둘째는, 사물놀이의 연주 곡목이 한정되어 대부분 가락에 대한 탐구부족, 창조성의 결여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사물놀이는 1978년에 공간극장을 무대로 한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이 연주함으로써 유래되었는데, 네 명이 탐구한 가락을 그대로 답습했음은 이후에 생겨난 사물놀이 패의 연주 실황을 보더라도 쉽사리 확인된다. 가락에 대한 창조가 결여되어 다양한 우리 풍물가락을 고착시키니 아쉬움이 남는다. 판소리나 산조를 보더라도 다양한 유파, 법제, ~류가 존재하듯이 독특한 탐구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면 사물놀이의 페쇄성과 고착성이 쉽사리 드러난다. 아무튼 사물놀이의 이론적 탐구와 더불어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이다. 특히 창조적 역량이 창작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유사한 형태의 음악을 범람시켜서 진실로 좋은 음악이 되지 못한다. 같은 음악의 틀을 사용하면서도 새삼스러운 변형과 창조가 이룩되어야 하겠다.
셋째는, 사물놀이가 진정한 민족음악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사물놀이의 판도와 주변음악에의 제휴 관게를 날카롭고도 비판적으로 따져 보는 일이 필요하다. 창작은 고유한 영역이니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으나, 음악이나 소리가 청중에게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서며 수용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 문제야말로 첫째 문제와 둘째 문제를 바탕으로 새롭게 제기되는 우리의 과제이다. 본디 사물놀이는 우리의 풍물을 짜서 실내 연주용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하기에 무악, 서양음악과의 연대가 타진되면서 온전한 민족 음악으로 장착될 수 있다.
이제 사물놀이는 온갖 행사에 빼놓을 수 없는 레퍼토리로써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여러 사물놀이패가 생겨났으니 다행스런 일 이겠다. 예전에 천대받던 풍물을 많이 이 들이 배운다는 것은 나무랄데가 없지만은, 문제는 이러한 기호의 이면에 존재한다. 유행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지나간 뒤에 관심을 되살리기는 진실로 어렵다. 따라서 문제의 이면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사물놀이가 진부한 음악이 되는 요인중 하나는 창조적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앞의 요인의 당연한 결과이지만은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기존의 곡들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곡들로서 청중들의 요구을 충족시켜주고 있지만은 청중의 기호는 바뀌기 마련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기호에 의지 한 채로 사물놀이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김덕수 사물놀이패 이후에 여러 사물놀이패가 등장하였다. ‘국립국악원패’, ‘뜬쇠패’, ‘두레패’, ‘풍물놀이 마당’ 등이 그들이다. 이후에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거니와, 한울림이 사단법인으로 창조되어 이들에게 귀속되었다. 이들은 각기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이나 이념을 지니고 있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새로움이란 전혀 없다. 오히려 ‘김덕수네’가 짜놓은 음악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세대 교체라는 긍정적 측면을 감내할 수 있겠으나, 그것도 발전적인 경우라야 붙여질 이름이 아닌가 싶다. 놀이패 나름의 독자적 특징을 보여주지 못한 채, 전대에서 힘들여 개척한 짜임새를 해치면서 오로지 인기에 영합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나친 말이 아니라 사물놀이의 보전을 위해서 전대의 그늘에서 조속히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놀이패 나름의 독특함을 본보기로 제시해 주고 전대의 업적을 규범으로 공유하는 것이 우리의 음악을 더욱 발전 시키는 일이리라 믿는다. 이러한 연후라야 모방이나 흉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을 것이며 놀이패의 존재 의의도 자명해진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창조적 작업의 요망이다. 우리의 음악적 유산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먼저 사물놀이가 본보기로 삼았던 풍물은 극히 편협하고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들의 음악적 아름다움이 강도 높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들 형식에 대한 필수적인 창조가 이루어졌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론에 자각하여 그것을 터득한 끝에 풍물을 새롭게 짠다면 매우 의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테면, 호남좌도굿이나 삼도풍물을 앞에서 분석한 것에 힘입어 다시 짠다면 아주 색다른 맛이 나며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풍물에 대한 천착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이를 토대로 새로이 사물놀이를 짜야 마땅하리라 본다.
다음으로 살필 일은 주변 음악과의 제휴 관계이다. 이 문제는 자못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일방적으로 서구 음악 듣기를 강요당하였으며, 아직도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 음악을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교육, 대중매체, 문화의 형태가 서구 음악을 가장 추켜세우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세 부득이할 따름이다. 사물놀이의 가능성은 고착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사물놀이가 시도한 서구 음악과의 몇 가지 전례를 검토해본다.
‘사물놀이와 재즈’, ‘사물놀이와 피아노’, ‘사물놀이와 교향악’, ‘사물놀이와 대중가요’등이 바로 서구 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한 전례이다. 또한 사물놀이의 가능성을 드높인 박범훈의 ‘신모듬’도 있어서 아주 색다르고 성공적인 갈래를 창안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
사물놀이와 피아노. 강준일이 작곡한 ‘열두거리’, ‘푸리’가 곧 피아노와의 만남을 시도한 작품이다. 피아노는 건반 악기이기에 타악기와 선율 악기의 특성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사물놀이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마련된 셈이다. 이외에도 임동창의 ‘놀이’를 꼽을수 있겠다. 음악적 어법이나 형식도 사물놀이의 호흡과 일치하고 어느정도 일치하고 있다.
사물놀이와 재즈의 만남. 사물놀이는 재즈의 어법에 맞추기 위해서 동일한 장단만을 구사하였고, 사물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리듬의 변화가 전혀 들리지가 않는다. 여러 재즈팀과의 합주가 행하여 졌으나 음악에 주종관계가 성립되어 사물이 없어도 이와 같은 음악은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이외에서 교향악과의 만남 등이 시도되었으나 두 음악이 공존은 하고 있으나 서로 용해되어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물놀이와 서양 음악의 제휴관계를 온전히 하려면 우선 사물놀이를 깊이 있게 체득하여야 한다. 어설프게 적당히 둘을 버무린다면 이도 저도 아니될 것이다. 사물놀이의 원리와 짜임새를 자각하고, 서양 음악을 꿰뚫고 나가는 통찰력과 능히 그것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은 뒤에 라야 둘을 용해시킨 음악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출처 : 정원기의 국악 아카데미
글쓴이 : 정은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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