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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프로필/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속박하는 말

花受紛-동아줄 2011. 5. 22. 12:51

프로이트(Freud,1856-1939) 프로필
이름 :  지그문트 프로이트
평가 :  무의식, 인간의 주인
약력 :
1856년 오스트리아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남
1865년 김나지움(중등학교 과정)에 입학하다.
1873년 빈 대학 의학부 입학
1877년 해부학과 생리학에 관한 첫번째 논문 출판
1887년 최면 암시 요법을 치료에 사용하기 시작
1896년 '정신분석'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소개
1908년 잘쯔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열림.
1936년 80세 생일, 영국 학술원 객원 회원으로 선출됨.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사망(83세)
저서 : <히스테리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1901)> <성(性)이론에 관한 3가지 평론(1905)> <토템과 터부(1913)> <정신분석입문(1917)> <쾌감원칙을 넘어서(1920)> <자아와 이드(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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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과 상담심리학은 심리학 분야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분야입니다. 임상(clinical)심리학은 대개 정신병, 청소년 비행, 알콜중독, 정신지체, 결혼, 가정문제 중 심각한 정서적/행동적 문제를 연구하거나 심리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진단하고 치료하는 분야입니다. 주로 정신병원에서 활동을 하며 정신과 의사와 협력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나라는 아직 종속관계). 정신과 의사는 면접이외에 약물치료나 전기충격요법을 많이 쓰는데 비해, 임상심리학자는 정신분석이나 기타 심리치료방법(예:행동수정등)을 사용합니다. 상담(counseling)심리학은 임상심리학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데, 보통 임상심리학자 보다는 가벼운 정서적/행동적 문제를 다룹니다. 예를 들어, 직업 및 진로상담, 학업지도, 대인관계의 문제등등 즉 카운셀링이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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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심리학, 프로이드는 극장의 우상이다.

단지 어떤 "의견"에 불과한것이다.

세계, 인간에 대한 단지 의견에 불과하다.

프로이드이론을 안다고 하는것보다는 믿는다고 하는게 옳겠지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존재에 대한 반증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것이다.

단지 설명만 하는 이론이다. 그것도 자신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인간의 정신을 설명해 놓은것이다. 이런것을 유사과학(과학처럼 보이는 실제로 과학이아닌)

이라고 한다. 칼포퍼가 지적했듯이,,,,,,

난 작은 철학자로서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세계관(형이상학)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것에 불과하다는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심리학을 믿지 말라.

그것을 믿는것은 신을 믿는것과 같고

또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을 믿는것과 똑같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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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적당한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 그러나 공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피해자의 제어 능력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과격해진다. 제어 능력이 압도당한 것이다. 제어의 실패는 엄청난 결과를 낳으며 특히 피해자가 어린아이일 때에는 더욱 심각해 진다. 어린 아이의 정신적 방어 체계는 점진적으로 발달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당한 심각한 외상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취약한 존재라고 하며 공격이 어떤 형태를 띠든 강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어머니의 개입(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온은 그것은 '꿈꿀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불렀다)이 아이의 나약함을 메워주고 파괴적인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갖는 능력이 부재할 때도 있다. 어머니의 애정이나 관심이 부족할 수도 있고 자녀가 겪는 외상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아예 무관심할 수도 있다. 또 어머니 본인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받은 정신적 상처는 희석되지 못해 지워지지 않고 계속 피해를 입는다.

주위에서 능력은 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누구는 능력이 없는 것 같은데도 좋은 자리에서 꿋꿋이 버티고, 누구는 사랑을 할 때마다 배신당하거나 버림받아서 번번이 실패를 맛본다. 또 누구는 의사들이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병이란 병은 다 앓고 사고란 사고는 다 당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어머니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야 했다.(때로는 부당하게)

성인의 실패(혹은 절반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어린아이(혹은 과거 어린아이 : 나이가 몇 살이건 간에 우리 안에 있는 상처입는 존재는 공격에 늘 무방비 상태인 어린아이다)에게 가해진 악의적 공격에서 비롯된 원인들을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른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부모를 탓하는 일은 없다. 아이는 자신이 완벽하지 못해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믿는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건 내가 나쁜 애(바보, 못생긴 애, 재미없는 애)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난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어"

다른 고등동물의 새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새끼도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의 말에 복종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종족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부모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새끼 영양이나 사자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아마 금세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부모가 항상 옳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이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죄의식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엄하게 벌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면 그 기원에는 위와 같은 논리가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벌해야 하는 당위성에 사로잡힌 피해자는 그런 제동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주로 다음과 같다. 피에르가 폴에게 상처를 입힌다. 폴은 피에르를 원망한다. 만약 피에르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폴은 가해자인 피에르를 미워하고 복수까지 할지 모른다.

문제는 아이(혹은 그 아이가 자란 어른)가 피해자일 때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이는 가해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혹은 부모의 대체물)는 사랑하는 존재이므로 부모는 원칙적으로 죄를 씻는다.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금기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미움은 쏟아부을 수 있는 또 다른 외부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사그라지지도 않는 적대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이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적대감은 강력하고 매몰차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그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딱 한 가지이다. 자기 자신이 유일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격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데 적대감은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으니 결국 독은 피해자에게 돌아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피해자는 진짜 죄인을 놔두고 스스로를 잔인하게 벌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다이아몬드를 깰 수 있는 건 다이아몬드밖에 없다. 이처럼 가장 격정적인 감정인 미움을 물리칠 수 있는 것도 미움밖엔 없다. 피해자는 자신을 좀먹는 스스로에 대한 미움(일반적으로 그 원인은 무의식적이다)을 가해자에게 되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짜 죄인이 미움을 받고 피해자는 자신에 대한 미움을 거둘 수 있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가해자를 '벌하자는 것'도 아니요 그에게 복수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효과도 없다.

가해자가 세상을 떠났든 아직 살아 있든 어린아이를 고문했던 과거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는 성장했고 가해자였던 사람은 더 이상 아이에게 아무 짓도 못한다. 아이에게는 더 이상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가해자는 과거로 사라진 존재다. 아직도 파괴적인 힘을 그대로 갖고 있는 가해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옛 피해자가 기억과 의식 그리고 무의식에 담고 있는 '그'이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바고 '그' 가해자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엄청난 힘을 갖는 망령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가족이 야기한 부당한 고통은 어쩔 수 없이 한을 남긴다. 그 한은 시간이흘러도 희석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되돌려 벗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떨까? 여기서 말하는 용서란 가해자에 대한 용서가 아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면서 죄의식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용서다.

타인의 비열한 행동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지만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때에만 효과가 있고 용서를 인정할 수 있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때까지 피해자가 가슴에 품고 살았던 회한과 죄의식을 가해자에게 지울 수 있다.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피해자는 내면에서 미움이 엄청난 파괴력을 갖게 되면 단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런 용서는 허상에 불과하다. 용서란 자아와 자아의 문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했던 기억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넣고는 진정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잊고 평화를 되찾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때부터 침묵하기 시작한 외상은 언젠가 가면을 쓰고 나타나 신경증이나 신체장애로 발현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큰 상처를 받았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원망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더 힘들다.

그보다 더 복잡한 상황을 대면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며 우리에게 주었던 고통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원망과 나아가 적대감을 느낄 때다. 우리가 사랑하는 무고한 사람에게 원망이라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초자아가 반응하여 강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어질고 애정이 넘치는 어머니(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영향은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도 '무의식적으로 전혀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다. 어머니가 죽고 싶었거나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아이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아이에게 준 고통은 엄청나다.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부모가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그에 대한 기억조차 견딜 수 없을 때(자신이 받는 사랑 때문에) 그 기억이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거부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힘을 갖도록 할 때가 있다. 이는 전쟁중 수용소로 끌려가 처첨한 경험을 한 유대인의 자녀에게서 나타난다. 수용소에서 겪은 일이 워낙 끔찍하다보니 자녀는 거기서 살아남은 부모를 애지중지하게 되고 끔찍이 아끼고 더 많은 애정 표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토록 많은 고통을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자녀는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적대감을 느끼기 시작하다가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스스로를 벌하기에 이른다.

막다른 상황에 놓였을 때 유일한 해결책은 금지된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무의식 속에서 강한 죄의식을 느껴(때로는 반쯤 의식하지만 인정하지 못한다)스스로를 처벌하게 된다.

이렇게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사랑을 주었을 사람이 고통을 준 경우다. 이때 가해자는 백퍼센트 책임이 있다.

두번째 유형은 가해자가 고의가 아니거나 무의식적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경우다. 예를 들면 딸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느라 청춘을 바친 뒤 병을 얻었을 때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절반쯤 책임이 있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조금 만 더 있었더라도 이기심을 억눌러 자식의 불행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 유형은 무고한 가해자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혹은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사망한 부모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과거에 극심한 고통을 겪어서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우는 부모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게 된다. 아이는 부모 탓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일찍 어른이 되게 만든 부모를 탓하게 되며 또 그런 부모를 탓하는 자신을 자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가해자의 책임이 아닌데도 그를 미워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친구는 40년 전에 입양되었는데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느꼈다. 그때는 전쟁중이었고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나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경찰 단속이 두려웠던 어머니가 그를 사회복지기관에 맡긴 것이 아니었겠냐고 말했다. 버린 것이 아니라 신변이 안전해지면 다시 찾아오려고, 결국 그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 아니었겠냐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많은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나는 내 생각을 설명하면서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그를 구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말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친구는 더 화를 냈다. 그의 역정은 뼈아픈 고통에서 우러나왔으리라. 그는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소용없어. 엄마가 죽는 게 어디 있어!" 얼마나 부조리한 말인가.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논리로 따지면 기막히게 옳은 말이다. 무의식의 논리는 의식의 논리와 다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적이다.

무의식 속에서 중요한 것은 받은 고통뿐이다. 가해자의 의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로 살인자가 휘두르는 칼과 자신을 구하려는 의도로 의사가 휘두르는 칼에 똑같이 반응하는 육체가 행위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은 고통을 주는 가해자의 바람이나 의도는 안중에 없다. 받은 고통만 중요하다. 초자아가 판별하고 의도를 인정함으로써 무고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금기를 내리는 때는 이미 사단이 난 뒤다.

무고한 사람을 미워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피해자(비록 죄책감을 부인하더라도)에게 화를 내는 것이 비록 옳지는 않지만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런 모순을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경험을 통해 보면 이러한 작업은(오랜 노력을 거쳐) 끔찍한 고통을 준 무고한 가해자를 원망하는 피해자의 죄책감을 없애준다. 피해자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가해자에게 느껴서는 안 될 공격 충동을 느낀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용서는 그런 감정이 정상이며 가해자에게 가끔 거부감이 들어도 그에 대한 애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 뒤에야 가능하다.

나는 지금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적대감과 무고한 사람에게 느끼는 부당한 거부감이 정당할 수 있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이게 만든 임상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해자의 책임 정도에 따라 사례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보았다. 첫 번째 유형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똑바로 인지하는 것은 물론 즐기기까지 하는 가학적 가해자고,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이 주는 고통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의식적 가해자다. 세 번째 유형은 고통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피해자가 느끼는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무고한 가해자다. 이때 피해자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심각한 잘못이나 배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사랑의 대상인 가해자(혹은 시스템)를 비난하지 못한다.

-[증오의 기술] p.11~22
WHO:열등감을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는것 같네요 제 생각에는 열등감이란 감정도 자신을 변화시킬수 있는 하나의 의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을 개선하고 더 낫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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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하는 쪽도 칭찬받는 쪽도 문제는 있습니다. 칭찬하면 말을 잘 듣는다는 생각으로 그저 아이를 잘 다루기 위해서만 칭찬하는 부모는 자녀 교육에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그렇다면 칭찬받는 아이에게는 문제가 없을까요?  집안일을 도우면 칭찬받는다,  동생을 돌보면 칭찬받는다,  마당 청소를 하면 칭찬받는다,  심부름을 다녀오면 칭찬받는다 등등 부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했을 때만 칭찬받는다면 막상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할 때 아이는 자기가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경우에만 칭찬받는다면 반대로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은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함으로써 부모에게 인정받고 귀여움을 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이런 경향은 커져 가기만 합니다.  상대방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단지 함께 있는 것으로도 서로에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안정된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겠지요?  이런 사람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미안한 기분을 갖고 생활하게 됩니다.

우선 자신이 어렸을 때, 어떠한 상황에서 칭찬을 받았는지 또 어떻게 칭찬받았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칭찬의 방식이 자신의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렸을 때 내가 무엇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무엇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럼으로써 내가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과 칭찬받는 것은 별개라는 점입니다. 칭찬받으면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사랑받은 적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고 인정받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은  마음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자기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은 상대방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게끔 습관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명성을 뒤쫒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명성을 얻음으로써 마음속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또한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은 필사적으로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공허감을 외면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와인버그의 책 [자기 창조의 원칙]에는 넬리라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넬리는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남동생이 태어나자 부모님의 관심은 남동생에게로 옮겨 갔습니다. 그녀는 성질을 부리거나 일부러 병에 걸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온갖 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버지의 애정어린 관심은 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심부름을 잘하는 착한 아이>가 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심부름하면 칭찬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점차 그녀는 순종적인 심부름꾼,  가정부 혹은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서만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에 성장한 그녀는 집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자를 만나 호감을 갖게 되면 항상 그를 위해 해줄 일을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요리,  방, 청소,  리포트 타이핑,  셔츠 단추 달기 등등..
그녀가 이토록 봉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존재의 고마움이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첫 번째 성경험 역시 기쁨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와인버그는 그녀의 인생에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는 공포와 절망으로 뒤섞인 감정에 휩싸인다는 점이었습니다.  남자와 결혼을 고려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면 그녀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하녀 혹은 매춘부를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그녀와 관계를 가진 남자들은 모두 같은 유형의 남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사람을 이용하는 못된 유형의 남자들 이었습니다.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처음부터 그런 유형의 남자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남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와인버그는 그녀의 행동을 <노예적>이라고 표현합니다.  호니는 여기에 <학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어 <abuse>는 악용하다,  남용하다,  혹사하다,  학대하다,  약점을 이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여성을 욕보인다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넬리 같은  사람은 진심으로 타인과 따뜻한 심적 교류를 하길 희망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이용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자신이 원하는 따뜻한 심적 교류를 할 수 없습니다.   그후 넬리는 아버지가 임종하는 순간조차 남동생에게만 주의를 기울이는 바람에 절망에 빠집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 채워지지 않았던 욕구 때문에 미래의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을 넬리 말고도 많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행동을 할 경우에만 사랑받는다면 아이는 부모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는 이때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성공했을 때에만, 부모 마음에 드는 말을 했을 때에만 사랑받기 때문에 언제 부모가 실망할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아이는 주위의 기대에 민감해지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점차 잊어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신뢰감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본성을 무시하고 타인의 마음에만 들려 하면 아무래도 스스로를 경멸하게 되고,  상처받기 쉬운 경향으로 바뀔 뿐 아니라 여러가지 병적인 심리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소위 <착한 아이>는 항상 칭찬 받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멸시하면 할수록 칭찬을 갈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자주 부모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부모의 인정을 받아 내려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착한 아이>는 모두 똑같습니다.  착한 아이는 언제나 부모에게 칭찬받지 않으면 자신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격려 속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감을 배운다] p.127~139

---------------------자신과 삶을 부정하는 가면---------------------------
무기력에빠지기 전에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마음속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좋은 사람이라고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에게 처벌을 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처벌을 내리는 사람이다.  처벌을 통해 당신은 '공포'라는 것을 배웠다.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그 후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조작하며 살아왔다.

지배적이며 소유욕이 강한 부모는 아이에게 그처럼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몸과 마음 모두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아이에게 그 같은 처벌을 내린다.

아집 센 부모의 마음에 드는 착한 아이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는 그런 아이가 되려 한다.  아집 센 부모는 늘 아이에게 실망을 느끼고 언짢아한다.  그런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아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실망하는 모습에.  그날 밤 이불 속에서 이 세상에 나처럼 나쁜 아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집 센 부모를 긍정하고 자연스런 자신을 부인한다. 그때 아이는 부모를 향한 분노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리고 부모 앞에서 '훌륭한 아이' '훌륭한 사람' 을 연기하며 살아왔다.  정작 거부해야 하는 것은 부모의 지배적 태도였는데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면 된다. 자신이 훌륭한 인간이라는 자기상에 매달리는 이유는 지금껏 자연스런 감정으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그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기상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소중한 자신의 이미지를 버리는 일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소중히 여겼던 자신의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소중히 생각했다'고 하면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실은 '매달렸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게 자신의 이미지에 매달려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미지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  물론 불안이 뒤따른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매달려 있을 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약하디 약한 자신'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모습이야말로 소중한 자신의 모습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약하디 약한 나' '결단력 없는 나' '미덥지 못한 나' '무력한 나'라는 또 다른 감정을 동반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버려야만 한다.

물론 훌륭하고 좋은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매달려 있는 이미지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훌륭한 자신'이라는 이미지를 버린다고 바람직하지 못한 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한 나,  결단력 있는 나, 믿음직스런 나, 사랑할 줄 아는 나, 행동력 있는 나,  도전하는 나,  자신감 넘치는 내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믿지 않기에 훌륭한 자신을 연기해서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매달리는 이미지는 바꿔 말해 영합하려는 행위일 뿐이다.  훌륭하지 못한 자신을 끝까지 훌륭하다고 주장하면. 이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훌륭한 자신'이라는 이미지로 약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리기 힘든 것이다.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p.187-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