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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부모

花受紛-동아줄 2011. 5. 22. 12:43

"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부모
사람을 속박할 때 조작을 통해서 하는 경우가 있다. 조작으로 상대를 속박하는 사람은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의식적으로 자기긍정, 타인부정을 하는 사람이 상대를 속박할 때는 공치사를 하게 된다. 단, 이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는 반대의 자기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의식적으로 자기부정,타인긍정을 하는 사람이 상대를 속박할 때는 "너만 행복하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부모가 아이를 심리적으로 속박하여 자립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도 이 두가지 형태가 적용된다. 모두 상대를 죄의식으로 속박한다.

이제까지는 주로 공치사하고 생색내기 좋아하는 부모의 심리에 대해 설명했지만 , 지금부터는 '너만 행복하면 엄마는 그걸로 충분해'라는 식의 부모 의존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너만 행복하면 엄마는 그걸로 충분해" 이것은 애정의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의도적 사디즘이다. 이 말은 표면적인 의미는 둘째치고,  본질적으로는 '나를 행복하게 해줘'하며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는 이런 좋은 엄마를 두었으니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는 강제이기도 하다. 분명 상대한테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말들은 아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이가 감당하기엔 벅찬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살고 싶은 의욕이 꺾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주위 사람에게 적의를 갖게 된다. 이런 말을 하는 엄마 밑에서 정신적으로 힘들게 자랐기에 적의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엄마의 심리와 공치사하기 좋아하는 엄마의 심리는 연관되어 있다.  바로 '지배하려는 의도'와 '자기방어' 측면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양쪽 모두 지배하려는 숨은 의도를 통해 상대를 자신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 그리고 양쪽 모두 자신이 없다. 스스로 행복해질 힘이 없다.  유아기 때와 같은 의존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다. 정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결코 상대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는 말에 숨겨진 메시지는 '내 말대로 해라'이다.  "나는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모두가..."라고 말할 때는 어찌되든 상관없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가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라"라고 아이에게 말할 때 아이가 "그럼 공부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아버지가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라"라고 아이에게 말할 때 아버지는 아이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고 있다.

아이가 가출하고 싶게 만드는 말
물론 아이를 속박하는 말 "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아이가 집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말에는 행당되지 않는다.  집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말에는 , '우리는, 우리는...'이 있다.  아이는 이 말을 무의식적으로 싫어한다. '우리는'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 가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이라는 '거짓 연대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부모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로 아이를 속박하려 든다. 또 이런 부모는 스스로 가정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아이가 가정을 위해 일해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자신은 손을 놓는다. 아이를 속박함으로써 부모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뿐이다. 보통 아이는 '우리는'이 아니라 '너는'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이처럼 '우리는'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면 빨리 집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집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아이가 마음속 깊이 가족에게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아이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속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는 의식적으로는 부모에게 감사하고,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부모를 미워한다.  이 의시기과 무의식의 모순 속에서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게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전화 상담 코너를 하다보면 '집을 나가고 싶다'고 호소하는 사람을 많이 접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어쨌든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들어보면 상대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부모도 집을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집을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억누르고 있을 때 본인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무의식  속에 있는 '집을 떠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을 의식적으로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마지막에는 인정한다. 그리고 인정하는 순간,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과 마찬가지로 "너만 행복하면 엄마는 그걸로 충분해"라는 말도, 앞에서 말했듯이 아이를 속박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엄마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속박하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엄마는 강도높은 의존심의 소유자다. 이것도 무의식이다.  즉,  부모는 의식적으로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여 노력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즉 실제로는 아이를 속박하려는 것일 뿐이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인 베런 울프는 "사람은 상대의 무의식에 반응한다"는 명언을 한 바 있다.  아이는 엄마의 무의식에 반응한다. 따라서 "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해"라고 말하는 엄마는,  아이가 심리적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심리적으로는 어른이 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배'
자신의 내적 갈등을 남을 통해 해결하려는 사람,  그 중에 "너만 행복해진다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엄마,  이런 부류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의 것을 두 배로 착취하려 한다.  "너만 행복해진다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엄마는 아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편을 알콜 중독에 빠뜨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아내와 같은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알콜 중독이나 약물 의존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면, 남편이 약물 의존에 빠지게 된 원인으로 아내를 지목하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선 "아내의 남편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간섭'"이 약말 의존을 조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남편의 중독은 치유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거나 간섭하기 때문이 아니다. 남편의 의도를 조장한다기 보다는 아내의 의존성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호의적 지배가 남편을 약물 의존으로 내몰고 있다는 뜻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아내의 감춰진 사디즘이다. 아내는 '남편은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약물 의존이나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된 것을 마음속으로 달가워한다.  그것이 자신의 신경증적 자존심을 유지해 준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것을 에리히 프롬은 '호의적 지배' 또는 '호의적 사디즘'이라고 부른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호의적 지배 또한 사디즘의 표현이다. 호의적 사디스트는 자신의 소유물이 많아져서 보다 강력해지고 성공하기를 원하지만,  그가 전력을 다해 저지하려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의 소유물이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여 그의 소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에리히 프름은 자신의 저서에서 발자크의 소설 [환멸]에 대해 해설한 바 있다. 자살을 꾀한 저자에게 "당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승려가 된 죄수의 대사가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신록의 힘센 장사가 되어 그대의 화려한 성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에요. 나는 어떤 때라도 그대가 즐거우면 그글로 충분해요."  이것은 애정의 관계가 아니라 공생의 관계다.  '결합과 친근성'을 특징으로 '자유와 통합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프롬은 말한다. 서로가 자율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관계다. 호의적 사디스트는 언뜻 보면 매우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보인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호의적 사디스트의 특징은 미움과 유아성에 있다. 그리고 본인은 자신의 미움과 유아성을 깨닫지 못한다. 자기 안의 미움과 유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애정이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의 오류
위의 승려와 마찬가지로 엄마는 자식을 위해 청소, 세탁, 요리에 정성을 다한다고 말한다. 엄마는 이렇게 자신을 팔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린다. 엄마는 자신의 코트를 사지 않고 아이의 코트를 산다. 엄마는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주길 바란다. 그리고 말한다. "너만 행복하면 나는 그것으로 행복하다."고...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심리적으로 어른이 될 수 없는 피터팬 증후군에 걸린 사람을 보자. 그 엄마는 "너만 행복해진다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고독과 불행을 느낀다.  그리고 엄마가 자신을 거부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아이나 서로에 대한 불만을 억누르고 있다. 그래서 부모나 아이, 모두 불행하다. 

"너만 행복해 진다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는 말은 "내가 악역을 맡을 수는 없지" 또는 "엄마는 할 수 없으니까" 또는 "나는 바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공치사하기 좋아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신경증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카렌 호나이는 말한다.  요컨대 신경증적인 사람은 '나는 이것을 원한다'는 욕구가 없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는 욕구가 있으면 그 욕구를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적어도 "너만 행복해지만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식으 말로 상대방을 옭아매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면 되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라고 공치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원한다'는 욕구가 없으면 그 대신 상대에게 '이렇게 해주면 좋을 텐데'하고 바라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괴로워한다. 즉 카렌 호나이는 여기서 말하는 신경증적인 사람이란, 공치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네가 행복해진다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없다.  그들의 진심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경증적인 사람은 남의 눈길을 끌 만한 일이 있을 때만 에너지가 생긴다.  혹은 남이 자신의 신경증적 자존심을 위협할 때만 에너지가 생긴다. 그들은 공허함,  공포심,  불안감,  복수심 등 마이너스 감정에 의해서만 반응한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안에 확실성이 없다.

전력을 다해 일하는 사람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일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는 아니다.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  애정을 갈구 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지만 사랑받으려고 일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 실현을 위한 에너지는 아니다.  "너만 행복해지면 돼"라고 말하면서,  만일 자신이 불행해지면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라고 원망한다.  즉, 본질적으로 공치사하기 좋아하는 심리와 같다.  네가 소란 피워서 혼쭐 났다. 네가 게을러서 일을 망쳤다.  그리고 최후에는 "괜찮아. 엄마만 참으면 되지 뭐"한다.  "너만 행복해지면 돼"에서 "괜찮아, 엄마만 참으면 되지 뭐"까지.  이 모든 것이 이 엄마의 마음속에 자리한 공허함이나 불안, 공포, 의존성, 자기 무가치 의식 등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심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을 훌륭한 엄마라고 아이가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결국 불안과 공포의 합리화다. "너만 행복해지면 돼",  이런 말을 들은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비억제형 아이는 물건이라도 집어 던질지 모르지만 억제형 아이는 반론도 못한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주는 사랑,  아이가 원하는 사랑
"너만 행복해지면 돼"라는 말은 실은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말이다.  "너만 행복해지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말할 때,  이 엄마는 자신의 무의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무의식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내부의 충동을 만족시키면서 자신은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엄마는 손놓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다. 이것이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만일 엄마가 완벽하게 게으름뱅이라서 아이의 일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매일 밤 노래방이나 드나든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아이를 위하는 엄마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본인도 자신을 훌륭한 엄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의 노력을 바라보는 눈은 아이든 엄마든 주위 사람이든 일치하지만,  엄마의 태도에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너만 행복해지면 엄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노력은 하지만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려는 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이런 엄마는 아이가 심리적으로 좌절했을 때 무엇 때문에 아이가 좌절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렇게 아이를 위해서 애썼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노래방이나 드나들었다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좌절했을때 '아, 안 되겠다' 하고 솔직히 반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미용센터나 드나들었다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좌절했을 때 '아, 예뻐지는 데만 정신이 팔려 돈만 펑펑 써대고 내가 정말 무슨 짓을 한 거지?'하고 솔직하게 반성할 수 있다.

자신이 노력했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결국에는 아이를 비난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하는 원망이다. 아이가 원한 것은 아빠와 엄마의 관심이었다.  부모로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받는 것이었다.  엄마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학원비를 대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빠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가정을 경제적으로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부모의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아이는 부모에게 불만을 갖는다.  어느 쪽이든 아이는 부모에게 불만과 원망을 갖게 된다. 아이가 완전히 만족하는 부모란 실제로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트러블을 겪으면서 아이는 성장해간다.  부모와 자식 간의 트러블은 성장의 과정이다.  아이들은 대개 부모와 부딪치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 중에는 정신연령이 다섯 살밖에 안 되는 어른, 또는 피터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엄마는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보통 엄마보다 잔인하다.  이 엄마는 자신을 좋은 엄마라고 평가받고 시피어한다. 아이에게 자신을 팔아 아이를 나쁘게 만든다.  아이가 심리적으로 좌절하면 "왜 이렇게 됐니?" 하고 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고 나서 이 엄마는 "괴로워!"라고 말한다. 아이의 좌절이 엄마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더욱 추궁한다.  "제발 옛날의 너로 돌아가다오. 그러면 되는 거야.  엄마에게 좀더 상냥하게 대하면 안 되겠니?"하고 호소한다.  하지만 아이의 입자에서 그런 충고는 현실성이 없다.  아이에게 추궁하고 호소하는 엄마는 언제나 미사여구만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교활한 엄마는 대개 "그때 네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엄마가 해 주었을 텐데" 하는 식으로 말한다.  지금 현재의 일은 말하지 않는다.  늘 하지 못한 과거의 일만 들억인다. 그것은 아이를 이중 삼중으로 위협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을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트러블이 거듭되면 아이는 심리적으로 병이 들고 만다.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이면
멜랑콜리 친화형 성격을 가진 사람은 최선을 다해야만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  부모,  자식,  부부, 친구의 관계에서조차 그것은 인격적인 교제가 아니라 완수해야 하는 없무라고 후베르투스 텔렌바흐는 말한다. 그것은 성적 관계에서조차 상대에 대해 완수해야할 업무라고 해석된다.  멜랑콜리 친화형은 성행위에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상대의 인격을 긍정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텔렌바흐는 말한다.  어느 우울증 환자의 성행위에 대해 텔렌바흐는 [멜랑콜리]에서 이렇게 보았다. 성행위는 "그것을 통해 아내는 만족시켜야 하는 사람의 업무"이다. 자신이 성행위를 즐기고 있다면 성행위는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업무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상대를 기쁘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멜랑콜리 친화형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심리적으로 해방되지 않으면 성행위는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 

남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남에게 봉사할 수 있고 남을 기쁘게 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까지는 좋지만 멜랑콜리 친화형은 자신의 기쁨이란 것이 없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내용이 될 수없다."고 한다. 

아들을 미국으로 보낸 어느 여자 환자는 "내 생활에서 알맹이가 쏙 빠져 달아났어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자신이 공허하기 때문에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과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은 다르다.  자기 자신은 공허하기 때문에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공허해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고 할 때,  상대가 기뻐하지 않으면 불만을 품게 된다. 상대가 자신의 기분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내가 이만큼 해주었는데,  그 태도가 뭐야'하는 원망이 생긴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으면 흥미를 잃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 공허하기 때문에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언제나 불만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남을 원망한다.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면 그런 원망의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멜랑콜리 친화형의 대인관계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함으로써 실현된다고 하면 좋겠지만,  실은 자기 상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이면에는 매우 심각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기뻐해줘' '고마워해줘' '즐거워해줘' 등등 상대의 기분에 대한 여러가지 요구다.  멜랑콜리 친화형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며 봉사하며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상대를 속박하려고 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상대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이것을 텔렌바흐는 상대에 대한 자기 중심적 배려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는 의도는 맞지만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서적으로 미숙한 엄마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상대에 대한 자기중심적 배려라고 설명한다면 불만을 가질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자기중심적 배려는 상대의 친절한 말을 기대하면서 상대에게 보석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 물론 상대가 보석을 요구할 때도 있다. 가끔은 마음이 일치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가끔' 일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대에 대한 자기중심적 배려의 관점에서 본다면,  배려했다고 해서 반드시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자녀교육에 있어서 엄마의 노력이 반드시 효과를 본다고 단언할 수 없는 주된 이유다. 아무리 자녀교육에 애를 써도 자기중심적 배려에 주의하지 않으면 자녀교육은 실패한다. 자기 중심적 노력을 하는 부모는 자신이 아이를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뿐더러 인정하지도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언행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염려하는 심리적 융통성이 없다. 멜랑콜리 친화형은 상대의 입장을 통해 자신의 언행을 이해하려는 심리적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노력에 비해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텔렌바흐는, 이 '상대에 대한 자기중심적 배려'의 기저에는 본질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멜랑콜리 친화형이 남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된다. 혼자가 되는 두려움이란, 다름 아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말하기 전에 몇 번이고 생각해본다." 것도 마찬가지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 쓰지만,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더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것은 상대와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인관계에서 늘 긴장하는 이유는, 상대를 기쁘게 하는 일에 언제나 자신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쁘게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불안하기 때문에 긴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 불안과 긴장에 휩싸여 있는 것이 멜랑콜리 친화형의 대인관계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는 부모의 약점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는 심리의 약점은 상대의 기분을 늘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상대가 기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아이가 기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엄마는 아이와의 관계가 돈독하지 않다.  그래서 아이가 기뻐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불만을 갖는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끼는 엄마는 아이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아이가 기뻐하지 않아도 아이에게 불만을 갖지 않는다. 자신이 없는 부모는 아이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리고 불만이 생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과, 기뻐하는 얼굴을 봄으로써 자신이라는 존재를 느끼려는 것은 전혀 다른 심리다. 전자는 정서적으로 성숙한 엄마이고,  후자는 정서적으로 미숙한 엄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비즈니스맨을 예로 들면,  거래처 사람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헤어지면 그 일이 신경 쓰여 업무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어머니든 비즈니스맨이든 정서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상대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상대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다. 상대가 늘 기분 좋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상대에 대한 요구로 변화한다. '기분 좋게 있을 수 없어?' 하는 요구다. 이 요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 대해 이것저것 요구가 많으면 불쾌해진다.  하지만 자기 존재 인식을 이유로 상대를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상대의 불편한 기분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거기에 얽히기 때문에 더욱더 관계가 뒤틀린다. 결국 이런 사람은 '내가 이렇게까지 너를 생각해주는데....'하며 의기소침해한다. 또 이런 사람은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성가진 사람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이처럼 늘 남의 기분에 자신의 기분을 의존하는 방식이 '남을 위해 존재한다'는 멜랑콜리 친화형의 대인관계다. 남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좌우된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 언짢아 보이면 의기소침해진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언짢은 기분 때문에 상처받은 것과 같다. 어린아이는 늘 엄마가 기분 좋게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멜랑콜리 친화형의 대인관계는 '남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럴듯한 심리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또한 멜랑콜리 친화형은 남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전문용어로 '자기 동일성의 공급원으로서의 타인'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타인과 접할 때 쭈뼛 쭈뼛해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거부당하면 자신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엄마 좋지?"하고 묻는 엄마가 최하의 엄마라는 교육학자 닐의 말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아이는 엄마의 '자기 동일성의 공급원으로서의 아이'에 이지나지 않는다.  아이에게 "엄마 좋아"라는 말을 들어야 엄마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이에게 "엄마 좋아"라는 말을 듣지 못하면 엄마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진다. 이런식으로는 제대로 된 자녀교육을 할 수 없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선의의 강요
"모두 당신을 위해서인데...."  이처럼 "당신을 위해서"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교류분석 측면에서 보면 강한 자기긍정-타인부정의 자세를 보인다고 한다. "자신이 조언이나 원조를 해주면 상대는 고맙게 여기고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우쭐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자기보다 약한 입장에 선 사람에 대해서는 강한 자기긍정-타인부정의 자세를 취해 '당신을 위해서인데....'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부정-타인긍정의 자세로 비굴해진다.  따라서 아이에게 늘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부모는 사회에 나가면 양처럼 순해지는 경우가 많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주부는 "내가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저사람은 정말 못쓰겠어"하고 이웃집 여자를 흉보지만 권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약자가 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상대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착취한다.  착취란 그런 말로 자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욕을 먹는 당사자는 불쾌하다.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불쾌하지만 자기가 받은 친절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흉을 본 사람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상대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선의의 강요'를 하는 사람은 즐겁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만일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도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알았어, 알았어"라고 말하면서 일부러 하지 않는다.  원하지도 않은 일을 해놓고 "내가 얼마나 저 사람을 위해 희생했는데..."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사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놓고 상대에게 감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착취다.

영어 표현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이런 어머니가 아이에게서 착취하는 어머니다. 아이를 위해 이것 저것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이를 이용해 자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또는 "너한테 좋은 일이야"하고 애정어린 듯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의 갈등이 애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아이에게 불만을 갖는 부모의 공통점
최근 우리 사회도 고령화의 길에 접어들면서 노인문제가 급속히 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노년의 고독을 원망하는 노인들,  그런 노인들 중에는 '나는 남을 위해 전력을 다해 살아왔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내 뜻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년에 고독해도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기 뜻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냉랭해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남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냉대를 받으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혹은 나이 들어보니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깨닫는 사람은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온 것이 틀림없다.  '저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는데...'하며 성장한 아이의 태도를 한탄하는 엄마가 얼마나 많은가. 또는 퇴직한 후 '부하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나를 냉대하다니...'하며 옛 부하의 태도를 원망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도 자신의 세계가 있었다면 세상을 한탄하거나 남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고 해서 내가 나이 들었을 때 그들이 나를 돕는 것은 아니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면 사람에 대한 원망은 훨씬 줄어든다.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다른 사람의 세계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저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는데..'하고 아이의 태도를 한탄하는 엄마는 자신의 세계를 갖지 않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엄마 자신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세계를 갖지 않은 부모였기에 아이가 불효자로 자라는 경우도 있다. 또 자신의 세계를 갖고 살아가면 팀원을 구성하는 부하의 수준도 달랐을 것이고, 또 부하 스스로도 상사에게 맞추기 위해 바뀌었을 것이다.

멜랑콜리 친화형은 늘 "가족만을 위해서 산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 말 자체는 매우 훌륭하다. 그 중에는 '나에게는 이런 훌륭한 부모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부모를 둔 사람은 행복하기보다 오히려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멜랑콜리 친화형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의존심이 매우 강하다.  무엇보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분을 '방치'해둘 수가 없다. 언제나 부모가 좋아하는 웃는 얼굴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부모는 가족이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가족의 즐거운 기분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의 좋은 분위기가 그 사람에게 자기동일성을 가져다준다.  그러면 부모는 자기동일성을 추구하기 위해 가족에게 더욱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된다.  언제나 가족이 즐겁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가족 중 누군가 불쾌해 있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부모는 더욱 심한 불쾌감에 빠진다. 남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타인의 기분에 매우 민감하다. 그 정도로 자기동일성을 타인을 통해 찾는다. 자신이 노력하여 뭔가를 달성해도 자신을 느낄 수가 없다.  자신을 대하는 상대의 태도를 통해서만 자신을 느끼고 불안해한다. 상대가 자기 생각되로 되지 않으면 멜랑콜리 친화형 인간처럼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상대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진정으로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리 남을 배려해도 결국 자기중심적 배려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듯이 결국은 타인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를 기쁘게 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으려는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교육할 수 없다.  아이를 기쁘게 하지 못하면 뭐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고 만다. 그것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도 해댱된다.  남을 기쁘게 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리더십이 없다. 리더십은 때로 상대에게 고통을 요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

공치사하기 좋아하는 사람과 "너만 행복하면"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행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편안함이 없다. 그들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그런 엄마는 자기 마음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 따위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아이에게 죄의식을 주어 움직이게 한다
아이의 의욕을 꺾는 말,  아이에게 충격을 주는 말,  아이가 언젠가는 부모에게 불신을 갖게 하는 말,  그런 말들이 있다.  교류분석 이론에서 보면 '부모가 아이에게 보내는 파괴적 메시지'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아이를 일정한 심리적 입장에 서게 함과 동시에 인생에 있어서 완수해야 할 역할을 결정하게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엄마는 "너 때문에 몹시 괴롭다!"고 하고 말한다. 이 말에 아이는 "엄마, 잘못했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는 "공부할 테니 용서해주세요"라고 덧붙인다. 더 질 나쁜 엄마는 "엄마 괴롭히니까 재밌니?"라며 아이를 책망한다.  "엄마를 일부러 힘들게 하는 거니?"라는 말까지 하면 이것은 정말 더없는 괴롭힘이다. 더 심한 엄마도 있다. 최악의 경우 "엄마는 네가 두려워"라고 말하는 엄마다.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이 정도 되면 '부모가 아이에게 보내는 파괴적 메시지'라는 단순한 정의를 넘어서 그것은 분명 '괴롭힘'이다.

이런 아이는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집에서 괴롭힘 당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렸기에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항의하지 못한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싸우지 못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가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점점 생기를 잃고 무표정한 얼굴의 아이로 자라기 쉽다.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대는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가 많다.  이런 아이는 엄마를 비난하고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낫다.

교류분석에서는 만성적으로 정형화된 불쾌 감정을 '라켓'이라고 한다. 이 라켓은 주로 남을 조작하기 위해 이용된다. 이것을 이용해 키운 아이는 노이로제에 걸리게 된다. 예를 들면, 남자를 조종하는 여자의 눈물이 있다. 여자가 상대방 앞에서 훌쩍훌쩍 울 때는 인정받고 싶을 때일 것이다. 정말 슬프면 큰소리로 울면 된다.  찔끔찔끔 울면서 연인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다.  언제나 남자를 조종하기 위해 눈물을 이용할 때 그것은 라켓이다.  하지만 언젠가 남자는 그 여자를 떠난다.  연애뿐만 아니라 사람은 종종 마이너스 감정을 이용해 상대를 움직이려고 한다. 이것은 체벌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마이너스 효과를 나타낸다.  라켓은 상대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매우 슬픈 모습을 보이면 상대는 뭔가 자신이 나쁜 짓을 한 듯한 기분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라켓을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부모가 한숨을 쉰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태도에 자신감을 잃는다.  부모는 실제로 아이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이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협박이 된다. '네가 저지른 일은 매우 심각해'하고 상대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라켓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남을 속여 조종하기 때문에 가장 교활한 조작방법이다. '이것밖에 못하니?'하는 슬픈 얼굴을 한다. 슬픈 얼굴 뒤에 감춰진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만큼밖에 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죄의식을 안겨주는 것이다. 슬픔을 파는 사람은 남을 착취하는 사람이다. "엄마를 부끄럽게 만들래?"하고 말하는 엄마는 대개 아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아이한테 미움받지 않으면서 교묘히 아이를 조종하고 있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점점 욕망이 사라진다. 성장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알지 못한다.

라켓에 의해 키워진 사람은 촉각을 전부 잃어버린 곤충에 비유할 수 있다. 교류분석에서는 타인의 행동을 바꿀 목적으로 라켓을 이용하는 것을 '강요'라 한다. 조종하는 사람은 파멸하지 않지만 조종당하는 사람은 파멸한다. "공부해!"라고 말하면 아이가 화가 나서 반항할 수 있다. 하지만 라켓은 이런 분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분노하는 순간에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상대의 자책, 죄의식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권총으로만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이 라켓은 아이를 서서히 죽인다. 일반적인 살인보다 더 잔인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가 자살하면 엄마는 "착한 애였는데 사회가 이 아이를..."하고 말한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아이는 모두 '착한 아이'다. 그러나 부모의 라켓 기술에 걸려 비참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부모의 비참함을 호소하여 조종한다

아이를 싫어하는 엄마는 자신의 비참함을 과시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화 상담을 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 아이를 싫어하는 엄마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가족을 사랑하는 시늉'을 한다.  그런 엄마는 언제나 자신의 비참함을 호소한다.  "저는 몸이 약합니다. 게다가 친척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어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죠. 더구나 주위 사람들은 제게 냉정하게 대합니다."하고 장황하게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대개 이런 부모는 노력하지 않는 부모다. 말로 사람을 속이는 부모다.

꼭 부모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비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많다. "회사가 도산해서 전부..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처럼 괴로운 인생이 또 있을까요?" 또는 "저는 나이가 많아 구조조정으로 해고되고 일가족이 거리로 나앉게 생겨서..."로 시작하여 "암에 걸려 숨쉬기도 힘들고..."  "나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게 좋았을 텐데"  "아... 고달픈 인생이에요. 이제 내일 죽어도 여한은 없어요." 등등.. 이런 식으로 늘 비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들을 '좋아하는' 척한다. 자신에게조차 진실한 감정을 숨기고 있다. 

공장 경영자인 아버지가 가족에게 "경영자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기 때문에 다들 그런 소리 하는 거야"하며 늘 자신의 고달픔을 호소한다. 그런 아버지는 사실 가족을 싫어한다. 하지만 가족이 싫다고 의식하는 것이 두렵다. "너희가 싫어"라고 말하는 것이 두렵다. 그런 아버지는 내가 싫어하는 가족에게조차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가족을 좋아하는 시늉을 한다.  그 모순된 행동을 자신의 비참함을 호소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비참함을 호소하다 보면 "너희를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은근히 미워하는 마음이 해소된다. 이런 부모들은 사실 '나는 가족이 싫다'  '나는 아이가 싫다' 고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미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비참함을 과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하려 든다. 그리고 자신의 미움의 감정을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다.  하지만 이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미움을 인식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가족이나 본인이나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자신감을 주는 말 상처를 주는 말] P.10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