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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연속성인 'I am(나는 나다)'

花受紛-동아줄 2011. 5. 22. 10:39

존재의 연속성인 'I am(나는 나다)'



한 참을 가야하는 긴 터널 같은 길에 내가 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최대한 낮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하지만 힘들게도 하나의 창문을 겨우 빠져나가면 또 하나의 창문이 있다. 주어진 숙제를 풀어야 하는 것 처럼 창문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너무나 어렵게 느껴진다. 가까스로 통과할 때마다 막막하고, 공포스럽고, 내몸이 구겨지고 짓눌려지는 압박감에 괴롭지만 매번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간다.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은 내 자신이 기특하다.

비온은 심한 고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헐벗은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살아가는 순간 순간의 믿음이 늘 위기에 처하는 사람이랄까. 고통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정상이라는 느낌'은 삶을 시작하는 유아의 '나는 나다' 라는 감정에서 기인한다. 엄마가 정서를 담아 몸으로 안아 줄 때 몸과 정신이 하나로 응집된다. 여기에서 존재, 삶, 몸, 자신에 대한 느낌이 시작된다.  '살아 있다'는 원초적 정상성의 감각은 부모로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 경험에 기인한다. 출생 이전에 자궁이 수행하는 지지와 아이를 안아주는 부모의 정서적 수용 사이에 연결이 존재하는데 정서 요소와 신체 요소는 상호 묶여있다. 그로인해 아이가 엄마의 정서 지원을 만나지 못하면 생의 시작 순간부터의 좌절로 인해 신체 이상이 발생한다. '나는 ~이다'의 존재감은 아이에게 최대한 적응해주는 신뢰로운 안아주기 사랑으로 성취된다. 엄마는 아이를 고유한 특성을 가진 온전한 인간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신체의 기형만큼 치명적인 것은 엄마의 불안과 냉담, 격노, 우울로 의해 안아주기 환경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의 살아있는 느낌이 마비되는 심리적 기형이다.


'엘렌의 가족이야기'라는 TV다큐드라마는 눈이 보이지 않는 니콜스 부부가 한국에서 버림받고 버려진 시각장애 아이 4명을 입양해서 키우는 이야기이다. 부부의 사랑으로 두 아이는 여러 번의 수술로 시력을 어느정도 회복해서 살고 있다.

 

또한 장녀인 엘렌은 비장애인과 결혼해서 부모에게 받은 헌신적인 사랑만큼 튼튼하고 예쁜 아기를 낳아 기르며 엄마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공무원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당당한 성실함은 신체장애가 결코 '삶의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렸을 때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지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사람으로 사는게 고통스럽고 많은 에너지를 소모당한다. 다행이도 엘렌에게 삶은 무서워서 회피해야하는 그 무엇이 아닌 듯 하다. 

 

막내인 새라는 중증장애인으로 20대의 처녀이지만 정신연령은 유아이다.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고 주말에 부모와 함께 지내는데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때론 과격해서 자해 방지 차원에서 헬멧을 쓰기도한다.  새라를 믿고 일관성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사랑해주는 니콜스 부부의 단단한 인격의 힘에 한바탕 감동의 눈물이 쏟아졌다. 어느 장면인가.. 아버지의 몸에 자신을 기대며 쉬는 신뢰감있는 모습에 그 아이의 '살아 있는 기쁨'이 진하게 느껴졌다. 새라는 행복한 아이구나..!

니콜스 부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지 못해 자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자기애적 부모가 아니다. 자기의 결핍을 메워줄 대상으로 아이들을 볼모로 잡아두지 않고, 간섭해서 통제하거나 지배하지도 않고, 아이들을 자기가 있어야 하는 공간으로 사회로 떠내 보낸다.


니콜스 부부는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아무도 없는 상태의 고립이 아닌 관계속에서 있으면서 눈치보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 내면에 좋은 대상들이 풍부하게 있다면 감사의 능력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내면에 좋은대상이 많다는 것은 좋은 환경에 대한 경험과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큰 것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6명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부딪치면서 어떻게 살아갈까? 끔찍할까? 얼마나 불편할까? 어떤 많은 것들이 포기될까? 라는 의심과 달리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실수와 충돌 속에서도 질서있게 살아간다. 일상으로 일어나는 좌절에 화를 내지 않고 살아가는 니콜스 부부의 온화한 인격적인 태도에 그 힘에 또 감탄을 했다. 그 아버지의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치유받는 느낌이다.


니콜스 부부는 아이들이 한국말로 '아빠, 엄마'라고 부를 때 기쁜 자부심으로 빛난다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이들 부부에겐 당연하고 평범한 일일 뿐이다. 일흔의 나이로 막내 새라의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25년이나 했기 때문에 하나도 어렵지 않고 불편하지않다고 말하는 그의 넉넉한 마음이 참 좋았다.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니콜스 부부는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잘 사랑하겠다고 한다. "사랑은 어떤 결과물을 바라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것이다.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아기의 기형을 '고쳐야 한다, 없어야 한다'고 느끼는 엄마와, 아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엄마가 있다. 기형적인 아이는 삶으로 나가기 전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 경험 이후에야 왜곡없이 타인들에 비해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인식을 발달시킨다.  살아있다는 느낌, 자신의 신체가 정상적이라는 느낌이 있어야 자신의 특정한 장애를 위해 자발적인 치료작업을 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부모에게 받은 흔들림 없는 지원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볼수 있는 모든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힘이 된다. 여기서 성공하는 아이는 사실 태어나는 그 날 부터 수용된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엄마도 행복하다.  아이의 살아 있음이 부모로부터 긍정되었기에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긍정은 사랑만이 아닌 존중이다. 니콜스 부부처럼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인 도움을 구한다.

 
따스한 감정은 인격의 타고난 잠재력이다. 이는 유아기의 좋은 양육에 의존되어 있다. 니콜스 부부가 아이를 다루는 방식과 감정의 접촉은 고도의 인격적인 특별한 사랑의 형태이다. 부모와 자녀 모두가 서로를 위한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는 그 감동이 따스함으로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알수가 있다.

 

 



꿈 사례의 주인공 보라씨는 2년 전 상담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살아 숨 쉬고 싶고, 살아내고 싶다"고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따스하고 평온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보라씨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난관과 위기를 경험했다. 수많은 버림받는 공포와 죽을 만큼 무서운 우울에 직면해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난관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단단한 살아있음에 상담자로서 경외심이 일어난다. 삶은 그녀에게 좋은 양분을 공급하기는 커녕 항상 짓누르고 있다. 그녀가 기능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던 억압은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 자신을 압도하며 밀려드는 파괴적인 힘과 싸워야만 했던 그녀는 그걸 이겨냈을까? 그녀는 끊임없이 이겨가고 있다. 존재의 연속성이 느껴지자 보라씨의 많은 관계에 위태로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지금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 공격적이지도 불건전하지도 않고 착취적이지도 몰이해적이지 않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대부분 서로 도와줄 수 있고 함께 즐겁게 보낸다. 가끔 자신을 무시하고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는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예전만큼은 끔찍하지 않다. 예전에는 늘 감정적으로 충분이 지원받지 못하고 나쁜 것을 공급받는 다는 느낌이 내면에 가득했다. 이제는 관계에서 서로를 좋아하고 존중하면서 파괴적일 수 있는 갈등을 잘 조절하는 법을 익혀나가는 것 같다.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자발적인 감각자기에 대한 정상성 감정의 토대가 되고 외부기준에 따른 정상성에 대한 이미지와 경계를 만들어준다. 이것이 실패되면, 외부의 기준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감정에만 몰두해 살거나, 외부 기준에만 집착해서 내적인 흐름이나 감정없이 살아간다.  보라씨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에 솔직해 질 수 있고 감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표현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주장을 하고 나서 공격하는 만큼 보복당할 것 같고 버림받을 것 같은 박해불안에 시달린다. 나 아닌 것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은 타인과 너무 밀착되거나 너무 떨어진 관계를 하지 않고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격적인 느낌은 감정과 신체뿐만 아니라 의식에서도 일어난다. 의식도 감정만큼이나 적대적이고 두려운 장소일 수 있다. 외상이 너무 크면 의식을 포함해서 그 어떤 것도 비인격화 되는 실패를 경험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지나치게 배타적일 때 자신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자기 상처와 접촉이 안된다. 심리적 손상으로,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내면의 증오로 삶이 고갈된다. 타인에 대한 증오의 고통은 항상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자신에 대해 느끼는 대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원하는 대로 사랑과 수용을 받는 느낌은 존재 연속성과 정상성에 대한 기본 경험을 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비정상성으로 고통받는 개인은 과도하게 이상화된 정상성 기준으로 타인과 자신을 평가절하한다. 꿈 꿔왔던 백일몽이나 사람에 대한 원시적 이상화가 깨지는 실망스러운 순간에 정상으로 믿었던 멋진 자신과 대상이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고통스러워진다. 거기에는 어떤 좋음도 없다.  삶은 소화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살만한 것이 못된다. 삶은 거절당하고 혐오된다. 존재의 연속성인 정상이라는 느낌을 너무 초기에 광범위하게 손상당하면 육체, 정서, 심리, 정치, 영적 차원 어디에서도 문제가 된다. 악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늘 제대로 된 것이나 좋은 것보다는 나쁘고 잘못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싫어하는 사람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한다. 그럴 때 우리는 숨을 쉴 수가 없고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출처 :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