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면서 가장 큰 오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있는것같다
라캉:한 인간이 진리를 향해 진보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을 넘어서야 한다
선과 악이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데서 기인한다. 이세상에 유일하게 혼자만 존재한다면 어찌 선악을 알겠는가.. 선과 악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어떤 정신적 외상은 반드시 미워하는 마음이 동해야 극복할 수 있다. 다만 '미움은 엄격히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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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적당한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 그러나 공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피해자의 제어 능력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과격해진다. 제어 능력이 압도당한 것이다. 제어의 실패는 엄청난 결과를 낳으며 특히 피해자가 어린아이일 때에는 더욱 심각해 진다. 어린 아이의 정신적 방어 체계는 점진적으로 발달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당한 심각한 외상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취약한 존재라고 하며 공격이 어떤 형태를 띠든 강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어머니의 개입(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온은 그것은 '꿈꿀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불렀다)이 아이의 나약함을 메워주고 파괴적인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갖는 능력이 부재할 때도 있다. 어머니의 애정이나 관심이 부족할 수도 있고 자녀가 겪는 외상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아예 무관심할 수도 있다. 또 어머니 본인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받은 정신적 상처는 희석되지 못해 지워지지 않고 계속 피해를 입는다.
주위에서 능력은 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누구는 능력이 없는 것 같은데도 좋은 자리에서 꿋꿋이 버티고, 누구는 사랑을 할 때마다 배신당하거나 버림받아서 번번이 실패를 맛본다. 또 누구는 의사들이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병이란 병은 다 앓고 사고란 사고는 다 당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어머니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야 했다.(때로는 부당하게)
성인의 실패(혹은 절반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어린아이(혹은 과거 어린아이 : 나이가 몇 살이건 간에 우리 안에 있는 상처입는 존재는 공격에 늘 무방비 상태인 어린아이다)에게 가해진 악의적 공격에서 비롯된 원인들을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른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부모를 탓하는 일은 없다. 아이는 자신이 완벽하지 못해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믿는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건 내가 나쁜 애(바보, 못생긴 애, 재미없는 애)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난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어"
다른 고등동물의 새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새끼도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의 말에 복종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종족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부모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새끼 영양이나 사자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아마 금세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부모가 항상 옳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이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죄의식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엄하게 벌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면 그 기원에는 위와 같은 논리가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벌해야 하는 당위성에 사로잡힌 피해자는 그런 제동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주로 다음과 같다. 피에르가 폴에게 상처를 입힌다. 폴은 피에르를 원망한다. 만약 피에르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폴은 가해자인 피에르를 미워하고 복수까지 할지 모른다.
문제는 아이(혹은 그 아이가 자란 어른)가 피해자일 때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이는 가해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혹은 부모의 대체물)는 사랑하는 존재이므로 부모는 원칙적으로 죄를 씻는다.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금기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미움은 쏟아부을 수 있는 또 다른 외부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사그라지지도 않는 적대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이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적대감은 강력하고 매몰차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그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딱 한 가지이다. 자기 자신이 유일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격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데 적대감은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으니 결국 독은 피해자에게 돌아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피해자는 진짜 죄인을 놔두고 스스로를 잔인하게 벌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다이아몬드를 깰 수 있는 건 다이아몬드밖에 없다. 이처럼 가장 격정적인 감정인 미움을 물리칠 수 있는 것도 미움밖엔 없다. 피해자는 자신을 좀먹는 스스로에 대한 미움(일반적으로 그 원인은 무의식적이다)을 가해자에게 되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짜 죄인이 미움을 받고 피해자는 자신에 대한 미움을 거둘 수 있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가해자를 '벌하자는 것'도 아니요 그에게 복수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효과도 없다.
가해자가 세상을 떠났든 아직 살아 있든 어린아이를 고문했던 과거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는 성장했고 가해자였던 사람은 더 이상 아이에게 아무 짓도 못한다. 아이에게는 더 이상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가해자는 과거로 사라진 존재다. 아직도 파괴적인 힘을 그대로 갖고 있는 가해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옛 피해자가 기억과 의식 그리고 무의식에 담고 있는 '그'이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바고 '그' 가해자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엄청난 힘을 갖는 망령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가족이 야기한 부당한 고통은 어쩔 수 없이 한을 남긴다. 그 한은 시간이흘러도 희석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되돌려 벗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떨까? 여기서 말하는 용서란 가해자에 대한 용서가 아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면서 죄의식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용서다.
타인의 비열한 행동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지만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때에만 효과가 있고 용서를 인정할 수 있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때까지 피해자가 가슴에 품고 살았던 회한과 죄의식을 가해자에게 지울 수 있다.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피해자는 내면에서 미움이 엄청난 파괴력을 갖게 되면 단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런 용서는 허상에 불과하다. 용서란 자아와 자아의 문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했던 기억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넣고는 진정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잊고 평화를 되찾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때부터 침묵하기 시작한 외상은 언젠가 가면을 쓰고 나타나 신경증이나 신체장애로 발현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큰 상처를 받았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원망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더 힘들다.
그보다 더 복잡한 상황을 대면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며 우리에게 주었던 고통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원망과 나아가 적대감을 느낄 때다. 우리가 사랑하는 무고한 사람에게 원망이라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초자아가 반응하여 강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어질고 애정이 넘치는 어머니(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영향은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도 '무의식적으로 전혀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다. 어머니가 죽고 싶었거나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아이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아이에게 준 고통은 엄청나다.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부모가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그에 대한 기억조차 견딜 수 없을 때(자신이 받는 사랑 때문에) 그 기억이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거부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힘을 갖도록 할 때가 있다. 이는 전쟁중 수용소로 끌려가 처첨한 경험을 한 유대인의 자녀에게서 나타난다. 수용소에서 겪은 일이 워낙 끔찍하다보니 자녀는 거기서 살아남은 부모를 애지중지하게 되고 끔찍이 아끼고 더 많은 애정 표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토록 많은 고통을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자녀는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적대감을 느끼기 시작하다가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스스로를 벌하기에 이른다.
막다른 상황에 놓였을 때 유일한 해결책은 금지된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무의식 속에서 강한 죄의식을 느껴(때로는 반쯤 의식하지만 인정하지 못한다)스스로를 처벌하게 된다.
이렇게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사랑을 주었을 사람이 고통을 준 경우다. 이때 가해자는 백퍼센트 책임이 있다.
두번째 유형은 가해자가 고의가 아니거나 무의식적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경우다. 예를 들면 딸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느라 청춘을 바친 뒤 병을 얻었을 때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절반쯤 책임이 있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조금 만 더 있었더라도 이기심을 억눌러 자식의 불행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 유형은 무고한 가해자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혹은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사망한 부모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과거에 극심한 고통을 겪어서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우는 부모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게 된다. 아이는 부모 탓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일찍 어른이 되게 만든 부모를 탓하게 되며 또 그런 부모를 탓하는 자신을 자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가해자의 책임이 아닌데도 그를 미워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친구는 40년 전에 입양되었는데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느꼈다. 그때는 전쟁중이었고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나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경찰 단속이 두려웠던 어머니가 그를 사회복지기관에 맡긴 것이 아니었겠냐고 말했다. 버린 것이 아니라 신변이 안전해지면 다시 찾아오려고, 결국 그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 아니었겠냐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많은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나는 내 생각을 설명하면서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그를 구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말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친구는 더 화를 냈다. 그의 역정은 뼈아픈 고통에서 우러나왔으리라. 그는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소용없어. 엄마가 죽는 게 어디 있어!" 얼마나 부조리한 말인가.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논리로 따지면 기막히게 옳은 말이다. 무의식의 논리는 의식의 논리와 다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적이다.
무의식 속에서 중요한 것은 받은 고통뿐이다. 가해자의 의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로 살인자가 휘두르는 칼과 자신을 구하려는 의도로 의사가 휘두르는 칼에 똑같이 반응하는 육체가 행위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은 고통을 주는 가해자의 바람이나 의도는 안중에 없다. 받은 고통만 중요하다. 초자아가 판별하고 의도를 인정함으로써 무고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금기를 내리는 때는 이미 사단이 난 뒤다.
무고한 사람을 미워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피해자(비록 죄책감을 부인하더라도)에게 화를 내는 것이 비록 옳지는 않지만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런 모순을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경험을 통해 보면 이러한 작업은(오랜 노력을 거쳐) 끔찍한 고통을 준 무고한 가해자를 원망하는 피해자의 죄책감을 없애준다. 피해자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가해자에게 느껴서는 안 될 공격 충동을 느낀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용서는 그런 감정이 정상이며 가해자에게 가끔 거부감이 들어도 그에 대한 애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 뒤에야 가능하다.
나는 지금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적대감과 무고한 사람에게 느끼는 부당한 거부감이 정당할 수 있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이게 만든 임상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해자의 책임 정도에 따라 사례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보았다. 첫 번째 유형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똑바로 인지하는 것은 물론 즐기기까지 하는 가학적 가해자고,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이 주는 고통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의식적 가해자다. 세 번째 유형은 고통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피해자가 느끼는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무고한 가해자다. 이때 피해자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심각한 잘못이나 배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사랑의 대상인 가해자(혹은 시스템)를 비난하지 못한다.
-[증오의 기술] p.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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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원칙 ∋ 현실원칙' 이 아닙니다. '쾌락원칙 → 현실원칙 → 행동'이고, 정말 기본적인 것입니다만, 욕구가 있다고 해서 전부 쾌락원칙의 범주로 넣지는 않습니다. 욕구가 일어나도 그것을 단념하면 그건 더이상 쾌락원칙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론 쾌락원칙은 제 5기에 관한 내용을 기술할 뿐이고 각기에선 발달적 특성이 있습니다. 간단한예를 들면 항문기에는 지배적특성이 짖게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이지요.프로이트의 현실원칙에 대한 내용도 찾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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