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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강간’ 첫 유죄…“부부문제 치외법권 아니다”

花受紛-동아줄 2009. 10. 8. 22:32

‘부부강간’ 첫 유죄…“부부문제 치외법권 아니다”

부산지법, 아내 흉기로 협박해 강간한 남편 특수강간 적용해 징역형

 

신종철 기자  

아내를 흉기로 협박해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남편에게 법원이 처음으로 ‘부부강간죄’를 적용해 유죄를 인정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 대법원이 남편이 폭력을 행사해 강제로 처를 간음한 사건에서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이후 부부강간을 부정해 왔다.

또 2004년 서울중앙지법은 이혼위기에 있는 처를 성폭행한 남편에게 강제추행을 인정한 사례는 있었으나, 법률상 부부사이에 부부강간을 인정한 것은 이번 판결이 처음이다.

◆ 외국인 아내 강간 = 회사원 L(43)씨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2006년 8월 필리핀

국적의 A(25)씨와 혼인한 뒤 4개월 간 동거했다.

그런데 L씨가 생활비를 주지 않는데다가 술을 마시면 폭행 등 학대를 계속해 A씨는 더 견디지 못하고 가출한 후 김해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A씨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지난해 7월15일 다시 L씨에게 인계됐고, 그때부터 5일 정도는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하는 등 두 사람 사이에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7월21일부터 A씨가 생리가 시작되면서 성관계를 거부하자, L씨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고 가스총과 흉기를 A씨의 가슴

에 겨누고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며 강간했다.

이에 검사는 L씨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고,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는 16일 L씨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고국과 가족을 떠나 오로지 피고인만 믿고 온 타국에서 언어까지 통하지 않고, 친지도 없어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외로운 처지에 놓인 피해자를 처로 맞았으면 마땅히 사랑

과 정성으로 따뜻이 보살펴야 함에도 부양은커녕 갖은 고초를 겪게 함으로써 급기야 가출할 수밖에 없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국의 협력으로 가출했던 피해자를 다시 만났으면 위로와 휴식으로 정상적인 혼인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당한 욕구 충족만을 위해 처의 정당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무시하고 가스총과 과도로 위협하면서 유두를 자르겠다든가, 죽이겠다든가 하는 차마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다”고 질타했다.


재판부는 “이는 외국인인 처에게도 부끄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부끄럽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어 피고인의 죄질은 불량해 엄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다만 “피고인이 범행을 모두 시인하고 비록 뒤늦은 후회이긴 하나 다시 태어나면 ‘동물이 되겠다’는 등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는 점, 피해자 역시 가출했다가 돌아오고 피고인과 대화와 적절한 소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으로 보이는 점, 피해자가 고소를 취소하고 선처를 바라는 점 등을 참작해 형량을 정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 부부강간 판단 배경= 재판부는 “우리 형법상의 ‘부녀’에 ‘혼인 중의 부녀’가 제외된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어 현행 법률로 부부강간을 처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성적 성실을 의미하는 여성의 ‘정조’가 아니라 인격권에 해당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보는 이상 처 또한 같은 권리가 있다고 봐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부부사이에 발생하는 심각한 성적 폭력행위로 여성인 처의 자유로운 인격의 실현과 존엄성을 해하는 사태를 국가가 방치하는 것은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한 헌법 원리와 정의관념에 현저히 반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가정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부부사이의 성적 폭력을 법률로 규제하지 않으면 계속적, 반복적인 것이 되기 쉽고, 처의 지위가 힘이나 형편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우 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부부강간 인정의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됐다. 

한편, 미국

, 영국

, 프랑스, 독일 등은 부부강간을 처벌하고 있으며, 유엔인권위원회는 지난 1999년 우리나라가 아내 강간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 부부강간 부정 근거 = ▲부부는 민법상 동거의무를 가지며 동거의무에는 성생활을 함께 할 의무가 내포돼 있고 ▲부부강간에 형법이 개입하면 전통적인 부부간의 신뢰관계를 파괴해 부부간에 불화를 조장하고 화해를 방해할 수 있고 ▲부부강간죄 인정은 법률이 ‘혼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크며 ▲부부강간을 법정에서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부강간을 인정할 경우 파경을 맞은 부부사이에 감정적 보복, 재산분할과 같은 경제적 목적 등 여러 사유로 고소를 남발하는 등 부부강간이 오용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 문제는 구체적 사건이 법적인 분쟁으로 비화됐을 때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절차에서 그 시비를 가리면 족할 뿐이지, 이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폭력을 수단으로 한 부부강간을 부정하는 구실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부부문제는 치외법권? =최초의 부부강간 판결을 내리기까지 재판부도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재판부는 먼저 “부부강간에 국가가 개입해 혼인관계가 파탄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강간 자체로 혼인관계가 이미 파탄된 것이며, 국가는 사회의 구성단위인 가정을 이루는 부부사이에서 발생한 성적 폭력사태를 행복추구권 등 헌법원리와 정의의 관념에 입각해 사후수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은 처를 성적으로 함부로 대해도 된다든가 부부강간은 면책이라는 과거의 그릇된 생각은 만인의 권리의식이 보편화된 이 문명시대에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역사의 잔재”라며 “따라서 우리는 구시대의 관념을 의식 속에서 걷어낼 필요가 있고, 우리 사회 또한 이제는 부부사이의 성윤리에 관한 이 같은 새로운 관점을 능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