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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 치료의 이론적 배경

花受紛-동아줄 2009. 10. 5. 21:50

게슈탈트 치료는 독일출생 유대계 정신과 의사 프린츠 펄스(Fritz perls)에 의해

1940년대에 창시된 상담 및 심리치료의 한 접근 방법으로

전체로서의 유기체”를 다루며 “여기 그리고 지금”에

초점을 두는 실존적인 치료 방법이다.

특히, 경험의 즉각성, 비언어적 표현, 말 보다는 행동을 강조하며

내담자의경험에 대한 현재의 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게슈탈트란 개체에 의해 지각된 자신의 행동 동기를 뜻한다.

곧 개체가 자신의 유기체 욕구와  감정을 하나의 의미 있는 행동 동기로

조직화하여 지각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것,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 마시고 싶은 것,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것 등

크고 작은 모든 행동은 우리의 게슈탈트인 것이다.


게슈탈트 치료는 게슈탈트의 개념을 치료 영역까지 확장한 것으로

신체와 정신 환경을 상호 불가분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존재로 이해함으로써

재래 심리치료 기법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했다. 게슈탈트 치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파헤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현재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알아차림으로서 시야를 확장하여 새롭고

창의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 프릿츠 퍼얼스(fritz perls)는 누구인가?

 

펄스는 1893년 독일 베를린 중 ․

 하류층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나서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정신신경과 의사 쉴더(Paul Ferdinard Schilder ; 1886~1940)에게서 배우고

28세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25년부터 7년간 정신분석 수련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나중에 빌헬름 라이히와

카린 호나이에게 분석을 받으면서 다소 기분이 나아졌다고 술회했다.

그는 심리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빌헬름 분트의 실험심리학에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6년 푸랑크푸르트에서 당시 유명했던

신경정신의학자 쿠르트 골드슈타인을 만나서,

전체로서 통합된 유기체 이론을 접하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푸랑크푸르트와 비엔나, 베를린을 전전하며

페니켈, 도이취, 히트슈봔, 하펠 등으로부터 지도감독을 받았다.

1934년 그는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남아프리카로 갔는데 여기에서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정신분석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936년에 그는 마리엔바드에서 개최된 세계 정신분석학회에 참석하여

 ‘구강적 저항’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는데, 이때 그의 이론은 프로이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프로이드의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정신분석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골드슈타인의 유기체 이론과 스마트의 생태학 이론을 토대로 개체와 환경을

하나의 전체적인 통합체로 보는 새로운 시각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프로이드의 공격본능 이론을 비판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여

『자아, 배고픔, 공격』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의 저술과 더불어 그는 프로이드 학파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1946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다시 이 책을 발간하였는데, 아직

학계로부터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50년에는 ‘알아차림(awareness)'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는 한편, 처음으로 “게슈탈트 치료”라는 용어를 만들어

뉴욕 게슈탈트 치료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헤퍼린, 굳맨 등과 공저로 『게슈탈트 치료』라는 책을 펴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정신분석이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때를 맞추어 유럽으로부터 실존주의 정신의학 사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게슈탈트 치료도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존주의

정신의학은 지나치게 복잡한 개념과 언어적 사변 때문에 실망을 가져다준 반면에,

게슈탈트 치료는 많은 관심을 끌면서 소위 제3세력 운동이라고 불리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펄스가 1970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게슈탈트 치료는 구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치료법의 하나로 발전해 있었다(Perls,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