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의 역사적 유래
Ⅰ. 서론
1. 탈이란 무엇인가...
우리말에 '탈나다'라는 말이 있다. 배가 아플때도 '배탈' 이 났다 하고 다친곳이 덧나도 '탈났다'고 한다. 즉 탈이란 '뭔가 거림칙한' 일상 상에 있어서의 변고를 뜻한다. 보통 탈놀이가 끝나게 되면 어느 고장에서나 불에 태워 없애는 것이 놀이의 마무리인 양 꼭 지켜왔다. 탈에는 갖가지 액살이 잘 붙는 것이니 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 오랜 속신으로 여겨 왔다. 이처럼 탈은 전국 어디에서나 만들어지고 놀이화되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제 얼굴이 아닌 것 또 다른 모습의 얼굴인 탈을 쓰게 되었을까?
첫번째 가정을 보면, 원시 공동체 사회의 제천의식에서 보면 인간은 탈을 씀으로써 비로소 신이 된다고 믿었다. 어찌보면 이것은 질병이나 재양같은 갑작스런 자연 재해를 신의 모습을 빌어 해결해 보려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때 탈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상징적 매개물로서 "신앙적 기능"을 지닌다.
또다른 의견은 짐승을 잡기위한 위장용이나, 전쟁을 할때 탈이 긴요한 구실을 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수렵을 위한 탈, '생산적 기능'으로서의 기원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라 지증왕 13년에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나무사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방면의 전문가들은 탈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제사에 모셔졌던 신앙성을띤 탈로는 신성탈, 벽사탈이 있고 토템숭배에서 나타나는 토템탈 , 또 비가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기우탈등 도 있다. 이외에도 수렵탈, 전쟁탈 등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것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후 오락성을 띠면서 생겨난 예능탈로는 크게 춤탈 과 연극탈로 분류한다. 이처럼 다양한 탈들이 우리나라의 지방마다 고루 전승되어 지금도 풍부한 '탈유산'을 지니게 되었다.
2. 우리의 탈 역사
우리나라의 탈은 인류사와 큰 연관을 맺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추측되는 인물상이나 동물상등을 통하여 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가족, 씨족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신의 형태로 빚어진 조형물들에서 연관성을 추측해 보는 것이다.
가장오래된 탈은 6세기경 신라 시대의 '목심칠면'으로 1946년 경주에서 출토되었는데, 나무에 칠을 하고 눈은 황금으로 점을 박았으며 방상씨와 같은 귀면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 탈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이 된다. 이제 고구려, 신라, 백제의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의 탈을 짚어보자.
1) 고구려
고구려 악은 당시 중국을 풍미한 서역악, 곧 악기 뿐만아니라 탈춤까지 고루 수용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 '가' '무' 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2) 백제
고구려, 시라와는 다르게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교류함으로써 빠른 시기에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 또한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기악이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신라
한가위 때 팔관회에서 연희되던 신라악들은 다분히 중국의 '산악백희'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추측 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크게 검무, 무애무, 처용무, 오기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검무와 처용무를 중심으로 신라악을 설명하기로 하자!
가.검무
검무의 유래는 신라의 황창이란 7세의 소년이 검무를 빙자하여 백제 왕을 죽이고 목숨을 잃었으므로 신라인들이 이르 가상히 여겨 이 놀이를 시작하였다. 이 춤은 단순한 모의무(模擬舞)이나 검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탈을쓰고 연희하는 연극성이 짙은 탈놀이 였다.
나.처용무
신라 헌강왕때 처용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이 춤은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토착 신앙과도 관련이 있다. 즉 처용은 본디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헌강왕을 따라 경주로 와서 벼슬도 하고 아내도 얻었는데 아내가 외간 남자(나쁜 귀신)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구짖기는 커녕 '처용가'를 불러 뉘우쳐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만들어 대문 위에 걸어 놓음으로써 나쁜 귀신을 쫓았다 한다. '처용탈'은 신앙적 상징물로 떠 받들어지면서 굿에서 탈춤놀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4) 고려
가. 나희
음력 섣덜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구나의식에 불과했던 굿이었나, 나중에 창우 또는 광대 심지어는 무격들의 놀이로까지 확대되었다.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벽사의 굿으로 발달되 이 놀이는 국가에서 관장하였으며, 이대에는 '오방귀무'와 같은 제사춤을 비롯하여 곡예, 탈놀이 ,답교 처용무, 백수무등을 펼쳤다.
3. 탈의 분류
탈은 흔히 '신앙탈'과 '예능탈'로 나누는것이 일반적이다. 먼저 '신앙탈'이란 그 탈에 제사를 지내거나 어떤 소망을 기원하기도 하고 지킴이로써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예능탈'은 주로 춤추고 굿하고 놀이할때 얼굴에 쓰는 것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이처럼 두 분류로 나누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 두가지 기능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탈의 특성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탈은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으로부터 '북청사자놀을' 그리고 해서지방의'봉산탈춤'과'강령탈춤','은율탈춤'이 있고, 중부지방의 산대놀이 로서는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그리고 요즘에 나오는'퇴계원 산대놀이'가 있다. 경상북도의 '하회 별신굿', 경상남도에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 '진주오광대', 부산지방의 '수영,동래야유' 이 밖에도 강릉의 '관노놀음'를 비롯해서 남사당패의 '덧뵈기'등의 줄잡아 3백여 종의 탈 유산이 오늘에 전해진다. 이러한 탈 유산 가운데 '하회별신굿'의 탈 아홉점과 병산의 두점이 지난 1964년 국보(제 121호)로 지정 되었다. 하회탈은 턱을 따로 떼어 끈으로 연결함으로써 재담을 하면 얼굴 전체가 표정을 갖게 하는 탁월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방상씨'탈은 악귀를 쫓는 탈을 뜻한다. 이것은 장례 행렬의 맨 앞을 이끌면서 잡귀, 잡신들을 쫓는 역할을 한 조선시대 유일한 유물이다. 궁그런 눈이 넷, 입은 볼위까지 찢어졌고 이마와 양 볼에는 주름살이 져 있어 귀면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 전체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무섭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이 많은 탈의 종류중 지면 관계상 농촌탈춤의 전형인 하회 별신굿과 도시 탈춤에서는 북부탈춤으로 '봉산탈춤', 중부탈춤으로 '송파산대놀이'를, 남부탈춤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지방을 야유(野遊)라 하였고 서쪽지방을 오광대놀이(음)라 하였는데, 야유에서는 수영야유를, 오광대놀음에선는 '고성오광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본론
1. 하회 별신굿
1) 역사적 유래
현존하는 각 지방의 부락제의 명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를 둘로 크게 나누면, 남성 중심으로 행해지는 유교풍의 동제와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참가하며 무당이 주제하는 도당굿일 것이다. 그러나, 유교식 동제보다 더 원초적인 것으로는 축문도 없이 제주가 조용히 정성을 들인다는 산제가 있다. 이와 같은 산제와 당굿과 동제가 우리나라 부락제의 기본 유형으로 생각되나, 그중에서 현재까지 서낭제탈을 전하는 것으로는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의 동제와 그 별신굿 탈놀이를 들 수 있다.
하회동의 서낭신은 문진생 서낭님이며, 이곳 서낭제의 평상제는 보통 동제라고 부르나 3년, 5년 혹은 10년에 한번씩 지내는 별신제 또는 도신제라고 하는 임시특별제가 있다. 별신굿은 특별신사의 준말이라는 설이 있으나, 경상도와 강원도 해안지방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기능으로 보아 부락제로서 서낭신에 대한 대제와 시장이 서는 것과 결부된, 경재적 오락적 동기에서 거행되는 임시대제의 둘로 나눌 수 있다.
2) 특 징
하회동의 낙동강 상류에서 강이 S자형으로 굽이도는 강기슭에 자리잡은 풍산유씨의 동족부락으로 조선조 선조 때의 명신 유성룡의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에 전하는 향언으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반에" 라는 말이 있어 대체로 고려 중엽까지는 허씨, 그 후에 안씨가 들어왔고, 나중에 유씨는 조선조 초기부터 집단적으로 정주한 것 같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라는 전설을 하회탈이 고려 중엽의 것이라는 하나의 방증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10년에 한 번씩 또는 신탁에 따라 임시로도 거행되는 하회별신굿은 그 준비를 12월 말부터 시작한 산주는 먼저 부정 없는 목수를 골라 뗏재에서 서낭대와 성줏대를 마련한다.
정월 초이튿날 아침에 산주와 무녀와 광대들이 서낭당에 모여 제수를 차려 놓고 약 10미터 길이의 서낭대와 약 8미터 길이의 성줏대를 세우고 강신을 빈다. 서낭대에는 5색포를 늘이고 그 꼭대기에 당방울을 달았다. 신이 내려 신령이 울리면 강신한 서낭대와 성줏대를 받들고 주악하면서 상당에서 하당과 삼신당을 다녀서 옛 동사 앞 놀이마당에 이르러 서낭대를 세워 놓고 별신굿 탈놀이을 시작하였다.
3) 놀이의 순서
제 1 : 주지놀음
주지는 사자를 말하며, 붉은 보자기로 온 몸을 가리고 주지 머리를 손에든 광대 두 사람에 의해 음악에 맞춰 끌려다니며 춤을 춘다.
제 2 : 삼석놀음
무녀과 주연하는 삼석놀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제 3 : 파계승놀이
각시가 나와 춤을 추고 있으면 중이 등장하여 함께 어울리게 되나, 양반의 하인 초랭이가 등장하자 각시를 업고 중이 도망친다. 이어 양반과 선비, 선비의 하인 이매가 등장하여 달아나는 중과 각시를 바라보고, 양반과 선비는 세상을 개탄하고, 하인들은 껴안고 웃으며 좋아한다.
제 4 : 양반, 선비놀이
부네가 등장하여 춤을 추며 유혹하면 양반과 선비 사이에 사랑 의 삼각관계가 벌어진다. 부네를 사이에 두고 양반과 선비 사이에 사랑의 삼각관계가 벌어진다. 부네를 사이에 두고 양반과 선비는 서로의 지체 높음과 학식의 많음을 자랑한다. 그리고, 둘은 부네와 흥겹게 춤을 추다가 서로 부네를 독점하려고 애쓴다. 이때 백정이 도끼와 쇠불알을 들고 와서 양기를 돕는데 좋다고 하니, 양반과 선비는 서로 사겠다며 쇠불 알을 잡아당긴다. 백정은 불알이 터진다고 야단이고 할미가 등장하여 싸움을 말린다. 이 과장은 양반계급을 풍자한 것으로 다른 탈춤에서처럼 가장 중심이 되는 마당으로 보인다.
제 5 : 살림살이 과장
서민생활의 고달픔을 보여 주고 있다.
제 6 : 살생과장
백정이 나와 소를 잡고 껍질을 벗기는 시늉을 한 뒤 염통과 불알 등을 관중에게 사라고 한다. 백정탈을 전에는 희광이라고 불렀으며, 소를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형하는 시늉을 하고 우뢰가 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표정을 하였다고 한다.
제 7 : 환자놀이
관리인이 나와 마을사람들에게 곡식을 받아가면서 중간착취하는 횡포를 풍자하고 있다.
제 8 : 총각과 각시의 혼례 과장
이 때 혼례식용 자리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바치려고 한다.
제 9 : 신방 과장
총각이 잠는 뒤 각시가 궤를 열면 간부인 중이 나와 총각을 살해한다.
하회탈과 허도령 강신: 고려 중엽 하회마을에 허도령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허도령은 꿈에 마을의 수호신으로부터 가면제작의 계시를 받고 이튿날 부터 목욕제계하고 집안에 외인의출입을 막는 금색을 치고 전심전력 으로 가면 제작에 몰두했다. 그때 허도령을 몹시도 사모하던 처녀가 있어서 오랫동안 허도령을 볼 수가 없어 허도령이 무엇을 하는지 그 모 습이나 보고자 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고 말았다. 금단의 계율을 어긴 것이다. 입신지경이던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만들던 이매탈의 턱을 완성 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도 이매탈은 턱이 없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마을에서는 허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황당 부근 에 도령단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도령단 마저 흔적이 없다.
2. 봉산탈춤
1) 역사적 유래
봉산탈춤은 해서 일대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이다. 이 해서탈춤은 분포를 보면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 지대인 안악, 재령, 신천, 장연, 송화, 은율 등지의 탈춤과, 동남쪽 평야 지대인 기린, 신원, 서흥, 평산, 신막 등지의 탈춤과, 해안 지대로는 해주, 강령, 옹진, 송림, 추화, 금삼, 연백 등지의 탈춤으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며,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탈군들을 초빙하여 1년에 한 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황해도 전지역에서 놀던 탈춤으로, 그중에서 특히 봉산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분포로 보아 해서탈춤은 거의 20세기 초의 일이며, 특히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된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 말이래의 일이고,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특히 고려 이래의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단오는 중부이북 지방에서 남부 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명절로서 성대히 지냈는데, 시계적으로 이때가 모내기 직전의 망중한의 시기이며, 단오의 명절놀이로서 봉산, 기린, 서흥, 황주, 강령 등지에서 탈춤을 추어 온 것은 벽사와 기년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재로서 그 민속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종교의례적 행사에서 점차 오락 위주의 민중의 탈춤으로 발전되어 간 것 같다.
2) 특 징
황해도 탈춤을 그 탈, 의상, 춤, 대사 등의 유형으로 보아 기린, 서흥, 봉산, 황주, 재령, 신천 및 안악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형과 옹진, 강령 및 해주으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해주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봉산탈춤의 연출 형식도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여 피리, 젓대, 북, 장구, 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 타령, 굿거리곡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이에 몸직과 동작과 재담과 노래가 따르는 탈춤으로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그 구성을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춤은 중부 지방에 남아 오는 장삼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해주탈춤형의 장삼춤에 비하여 활발하며, 장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깨끼춤이 기본이 된다. 목중춤은 오광대의 말뚝이춤과 마찬가지로 도무로서 모닥불 위를 뛰어넘으며 장기를 자랑했으며, 대륙에서 전래한 건무의 영향을 상정케 한다. 춤사위의 분석은 양주별산대춤처럼 자세하지는 못하나 팔목중의 외사위, 곱사위, 양사위, 만사위, 취발이의 깨끼춤, 말뚝이의 두어춤, 미얄의 궁둥이춤과 까치걸음, 팔목중의 뭇동춤 등의 사위 명칭이 있으며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봉산탈춤의 길놀이는 악공의 주악에 따라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소무, 양반, 영감, 상좌, 노장 그리고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이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한다. 일주하는 도중에 광장에 이르면 행렬자는 모두 어울려서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지정된 놀이터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을 시작한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하여 이를 넓히는 일도 한다. 근래에는 길놀이가 없고, 대신 나무판에 광고문을 적어 사방에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3) 놀이의 순서
1과장 사상좌과장 탈춤의 시작을 알리는 과장으로 사상좌가 사방신에게 인사를 함으로 해거 시작한다 여기서 상좌는 어린 여중이므로, 등장시 업혀 나오는 것이 특색이 있다. 네 상좌의 통일된 동작과 느린 동작이 특색이 있으며 이춤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2과장 8목중과장 파계한 8명의 목중이 차례로 나와 자신의 대사를 읖조리고 춤을 춘다. 각각으 대사앞에 불림을 부르는데 이의 종류로는 "낙양동천 이화정" "흑운이만천 천불견" "월락오제 상만춘 등등이 있으며 여덟번째 목중까지 나와 춤을 추면 나머지 일곱명의 목중이 나와 다 같이 합동무를 추는데 이춤이 힘이 있고 상당히 멋들어 진다.
3과장 사당과장 출연진이 모두나와 사당주위에서 진을 짜면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주제는 사당과 거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가날픈 서도민요로 떨리는 음이 특색이 있다. "어라디어 어허야 요오호 내로구나 녹양에 피는 꽃은 북한산 쑥들어로 간다" 로 시작하는 노래이다.
4과장 노장, 취발이 과장 생불이라는 노장이 어느날 어린 무당(소무)에게 반하여 타계를 한다. 여러 노력 끝에 소무의 마음을 얻은 노장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순진한 신장수 의 신값을 떼 먹는다. 그러던중 취발이가 나와 소무를 보고 소무를 찾지하려고 하다가 노장과 싸움을 하고 이겨서 소무를 차지한다.
5과장 사자과장 신성시 되었던 사자와 마부가 나온다. 사람두명이 한조로 이루어진 사자춤은 참 볼만한데 비해 그렇게 생동감있게 표현하려고 사자탈을 쓰고 고생하는 춤군을 생각하면 조금은 안쓰럽다.
6과장 양반과장 양반 3형제와 말뚝이가 등장한다. 헌데 이 양반이 똑똑하지 못한데 그것은 탈에서도 나타난다. 첫째와 둘째는 언청이고 막내는 입이 삐뚤어 쪘는데 지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이 들고 큰 소리만치는데 그러한 양반을 말뚝이가 익살맞게 골려먹는다.
7과장 미얄과장 미얄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난리통에 서로 해어진 사람들이다. 극이 시작하면 미얄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각각 나와 상대방을 찾다가 만나 서로 회포를 풀다가 할아버지에게 여자가 있는 것을 알고 미얄할머니가 그 돌머리집이라는 여자와 싸우다가 할아버지에게 맞아 그만 죽고 만다. 나중에 할머니의 원혼을 달래려고 무당이 나와 한껏 춤을 추고나면 남강노인이 나와 전체 탈춤판을 정리한다. 처첩 갈등이 잘 나타나 있으면 미얄의 대사가 일품이다.
3. 송파산대놀이
1) 역사적 유래
송파진은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와 함께 5강의 하나였고, 조선조 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향시 열 다섯 중의 하나였던 송파장이 서던 곳으로, 을축년 대홍수때까지도 270호의 객주가 있어 성업을 이루던 장터였다. 구송파라고 하는 것은 송파진으로서 강언덕에 있었는데, 주로 연초 가공업자와 신탄상이 많아 담배와 신탄을 서울에 공급하였고, 우시장이 성하였으며, 마행상인들의 상업 근거지로서 경기 일대에서는 부촌이었으므로 송파산대놀이가 유지될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현지 연희자들에 의하면, 약 200년전부터 송파산대놀이는 창설되었으나 쇠진되었던 것을 1900년 초부터 다시 송파거주 허윤씨가 구파발 본산대의 연희자 윤희중씨를 초청하여 부흥시켰다고 한다. 그 후 연중 행사로 정월 대보름과 단오와 추석에 명절놀이로 놀았는데, 단오에는 일주일씩 계속되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1924년에는 큰 규모의 산대놀이 모임을 송파에서 개최하였는데, 이때에 구파발, 애오개, 퇴계원, 의정부, 타락한 8명의 중이 등장하여 재담을 하고 춤을 추다
2) 특 징
송파산대놀이도 양주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반주음악에 맞춰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따르는 탈놀음의 일종이며 산대도감 계통극의 중부형의 한 분파이다. 송파산대놀이는 놀이 내용의 플롯이나 과장과 춤, 가면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여 다 같이 애오개, 구파발 등지의 본산대의 분파임을 말해 주나, 몇 개의 탈과 배역이 송파산대놀이에서는 고형을 지니고 있어 특징적이다. 즉,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이미 탈락한 초라니, 당녀, 핸산어멈, 신할멈, 무당 탈 등을 따로 갖고 있고, 놀이 과장에서도 이들이 맡는 역이 따로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3) 놀이의 순서
1. 길놀이
탈놀이를 하게 되면 놀이꾼들이 풍장을 치면서 장터를 중심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이것을 길굿, 또는 거리굿이라 한다. 놀이패들이 늘어서는 순서는 맨 앞에 기가 있다. 그리고 풍장을 치는 잽이들이 따르는 뒤로 탈꾼들이 이어진다. 맨 앞의 기는, 옛날에는 '산대도감' 이라고 쓴 붉은 기와 작은 노랑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용두기와 작은 영기 두 개를 든다. 기에는 '송파산대놀이' 또는 '송파산대놀이 기'라 쓰기도 한다. 다음을 따르는 잽이들은 쌍호적이라 하여, 호적 한 쌍이 앞 선다. 징잽이.장고.재금(바라)등이 길군악을 치며 따른다. 그 뒤로 의상을 갖춘 탈꾼들이 춤을 추면서 이어진다. 탈꾼들은 대개 첫째 상좌부터 놀이에 나오는 순서대로 열지어 간다. 뒤로는 노장이 양소매를 어깨에 끼고 걸으며, 왜장녀가 뒤뚱 거리며 그 뒤를 따른다. 가끔 행렬에서 뛰어나온 원숭이가 우스개 짓을 하고, 신장수가 채찍을 들고 이리 저리 좇기도 한다. 놀이꾼들은 저마다 등장 인물의 성격대로 갖가지 춤을 춘다. 그런데 왜장녀는 허리통을 드러낸 채 엉덩이 춤을 추어 마을 사람들을 웃긴다. 동구밖 널찍한 마당에 이르러 잽이들이 타령을 치면, 탈꾼들이 마당에 어우러져 한 바탕 익살스러운 춤판을 벌인다. 그 무렵이면 마을에서 술동이를 내놓는다. 얼마쯤 논 다음에 다시 길군악을 치며, 줄을 지어 마을을 한 바퀴 돈 뒤에야 놀이판으로 들어가 개복청에서 탈놀음 준비를 한다. 길놀이는 산대놀이의 돌돌이(예고편)와 같은 것으로 마을 터를 울리는 것이나, 탈놀음이 벌어지는 것을 동네에 알려 구경꾼을 모으는 구실도 한다.
2. 고사
산대놀이를 벌이기 전 놀이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젯상이 차려지면 탈을 늘어 놓는다. 그러고 나서야 탈꾼들이 열지어 서서 고사를 지낸다. 젯상 앞에 탈을 늘어 놓되, 첫째 상좌.둘째 상좌 탈은 맨 위에, 연잎. 눈끔적이 탈은 양반탈이라 하여 다음줄에 놓는다. 샌님.신할애비탈을 노인탈이라 하여 셋째줄에, 기타의 탈은 그밑에 늘어 놓는다. 여자탈은 맨 끝줄 차지가 된다. 상에는 쇠머리(또는 돼지 머리)며 3색 과일과 시루떡.조라술(제단 옆에 묻어두었던 술)등으로 걸판지게 차려졌으나, 을축년 대 홀수 후에는 약식으로 간단해졌다. 탈꾼 대표가 나와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린 다음에 축문을 낭독 한다. 산대놀이 대표 xxx.... 하고 난 다음에는 소지를 올리면서 저승에 간 놀이꾼들의 명복을 빈다. 그러고 나서 음복한 후,젯상의 먹거리를 구경꾼들에게 나누어 준다.
첫째 마당 : 첫째. 둘째 상좌
한삼이 달린 흰 장삼 차림인 첫째 상좌가 붉은 띠를 두르고 붉은 고깔을 쓰고 나와서 놀이 마당 한 가운데에서 두 손을 모으고 선다. 마당이 조용해지면.. 염불장단에 맞춰 사방에다 절을 하고 나서, 느린타령 장단 으로 팔뚝잽이, 반화장, 곱사위, 활개펴기, 여닫이 순으로 춤을 춘다. 이어 자진 타령으로 화장무, 자진화장, 여닫이, 곱사위, 건드렁(만취상태), 멍석말이 등 순으로 춤사위를 섭렵한 다음 한쪽으로 가서 앉는다. 그러면 둘째 상좌가 흰 장삼에 남색 띠를 두르고, 같은 색 고깔을 쓰고 반대 편에서 나와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령장단으로 건드렁,여닫이로 춤을 추고서 자진 화장무로 첫 상좌 쪽으로 가서 어른다. 그때서야 첫 상좌가 뛰어나가 건드렁으로 마주 춤을 춘다. 화장무,자진화장,곱사위로 춤을 추면서 거울보기로 맴돈 다음, 마주 보며 깨끼춤을 추다가 첫째 상좌는 물러간다.
둘째 마당 : 옴중.먹중
진회색 삼베 장삼 차림인 옴중이 시루 밑 벙거지를 쓴 채 재금을 들고 나와 선다. 둘째 상좌의 자진 타령 춤이 끝난 무렵이면 재금을 쟁쟁치면서 중앙으로 나선다. 그러면 둘째 상좌는 놀라서 춤을 멈추고 뒤에 가서 앉는다. 옴중이 불림 (자신을 남, 즉 구경꾼에게 알림)을 하고, 바라춤을 시작하면, 둘째 상좌가 뛰어나가 재금을 낚아 챈다. 부아가 난 옴중은 재담을 한 후,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상좌에게 다가가 함께 춤을 추다가 상좌를 쫓아내 버린다. 옴중 혼자서 불림을 하고 춤사위로 전진 후퇴 하였다가, 건드렁. 용트림으로 춤을 춘다. 이어 타령으로 활개 펴기. 건드렁. 화장무를 추자, 먹중이 반 장삼을 입고 나오서 처음은 옴중과 재담을 하다가 온갖 말로 그를 헐뜯으면서, 또는 함께 재담을 하며 다투더니만 타령장단 춤을 추며 나간다.
셋째 마당 : 연닢.눈끔적이
흰 장삼에 청동 대를 두른 연잎의 차림새는 청동 한삼이 덧 대어졌다. 흰 고깔을 쓴 채 청동 머리띠를 두른 눈끔적이는 정자관을 썼으며, 둘 모두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굿거리 장단 춤을 추면서 놀이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이편에 서서 계속 춤을 추면, 8먹중 가운데 세 명이 누른. 붉은. 푸른 색으로 저마다 반 장삼을 입고 저편에서 들어와 춤을 춘다. 그러다가 연잎과 눈끔적이를 보고, 서로 무엇인가 보자면서 재담을 하고나서 한 사람씩 타령 장단 춤을 추며 다가갔다가는 놀라 되돌아 온다. 나중에는 서로 알아보고 짝지어 타령 장단에 깨끼춤. 건드렁. 멍석말이로 춤사위를 날리며 나간다.
넷째 마당 : 애사당의 북놀이
먹중 둘이 한 사람은 북을 들고, 다른 먹중은 북채로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한 바퀴 돈다. 그러고 나서 채를 든 먹중이 북을 치려하면, 북을 든 먹중이 이리 저리 피하며 여러가지 재담을 하고나서 타령 장단으로 춤추기 시작 한다. 그때서야 흰 저고리에 추록 치마를 입은 왜장녀가 큰 머리를 하고 허리를 드러네 놓은 채 엉덩이 춤을 추며 나타나면, 먹중이 북을 쳐보라고 북채를 건네 준다. 하지만 고개를 젓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돈을 달라고 한다. 먹중은 허리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주며 북채를 내민다. 그때서야 왜장녀는 이를 받아 가지고 나갔다가 애사당을 데리고 들어 온다. 애사당은 노랑 저고리, 다홍 치마에 쾌자를 걸치고 붉은 띠를 둘렀다. 큰 머리를 틀어 올렸으며 흰 고깔 쓴 차림으로 들어온다. 이를 본 왜장녀가 애사당에게 북채를 건네 주며 북을 치게 한다. 채를 받아든 애사당이, 먹중이 든 북을 둥둥 치다가 먹중의 이마를 때린다. 화가 난 먹중이 그것을 낚아채어 북채 두 개로 자진모리 장단을 치면, 먹중과 애사당, 그리고 왜장녀가 함께 어울려 춤추다 나간다.
다섯째 마당 : 팔먹중의 곤장놀이
먹중 여덟이 색색으로 반 장삼을 입고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나온다. 맨 앞에 나오는 먹중은 곤장을 들고, 뒷걸음으로 등장.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난 이들이 재담을 하면서 나무아미타불에 맞춰 타령 장단으로 춤을 춘다. 춤추고 나서야 곤장 든 먹중이 다른 먹중들을 한 명씩 때려서 내쫓는다.
여섯째 마당 : 신주부의 침놀이 팔먹중의 하나가 갑자기 쓰러지자 먹중들이 신주부를 불러와 완쾌시키는 장면으로, 팔먹 갑은 직접 치료도 해보고 손수 의원까지 불러와 완쾌시키는, 민중의 지도자이다. 팔먹중 하나가 쓰러지자, 먹중들이 '신맥이 뚝 끊어졌다.'며 신풀이로 백구타령을 부르느데, 이에 대해서 양주 별산대에서는 신명을 풀이 못해 마음의 병이 난 것을 신명을 통해 고치려하는 것이 그 의도이다.
여섯째 마당 : 신주부의 침놀이
굿거리 장단에 춤을 추며 들어온 8먹중들이 마당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계속 춤사위를 벌인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마당 가운 데에 쓰러져 엎디어 버린다. 이를 본 8먹중들 이 체했다면서 여러가지 재담 중에 신맥이 막혔다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백구 타령으 로 풀어보자면서 백구 타령을 한다. 그래도 낫지 않는다면서 침쟁이 신주부를 불러 온 다. 신주부는 흰 두루마기에 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 재담을 하면서 황침을 놓는다. 그러면 쓰러져 있던 먹중이 놀라 일어 난다. 먹중들은 그때서야 타령 장단 춤을 추며 나간다.
일곱째 마당 : 노장
굿거리 장단에 춤사위를 날리며 다시 줄지어 들어온 8먹중들이 타령 장단 춤을 추면- 노장이 검은 장삼에 송낙을 쓰고, 염주를 두른 채 붉은 가사에 부채와 6환장을 든 차 림으로 한쪽 편 구경꾼 옆에서 등장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선다. 그러자 8먹중들이 노래를 그치고, 노장의 검은 얼굴을 살핀다면서 먹중 하나가 타령 장단 춤사위로 노장 앞으로 다가간다. 코 앞에 다가설 때에야 노장에 부채로 먹중 얼 굴을 때린다. 얻어 맞고 돌아온 먹중이 노장 스님이라고 말 한다. 우르르 몰려간 8먹중은 노장을 모셔 온다면서, 그의 6환장을 한 손으로 움켜 잡고 굿 거리 장단 춤을 추며 이쪽으로 온다. 그런데 노장은 오지 않고, 6환장만 들려 온다. 8 먹중은 다시 나아가 6환장을 노장에게 잡게하여 모시고서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추며 마당 한 중앙으로 나간다. 마당 가운데에 웅크려 앉은 노장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8먹중이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먹중 하나가 죽장을 가져다 노장 앞에 놓는다. 먹중들은 노장을 생선이라면서 토막내어 먹자고 재담을 한다. 그때 먹중 하나가 다가 가서 팔을 들어 노장을 친다. 노장은 움칠하고... 먹중들은 타령 장단으로 화장무와 여닫이며 건드렁으로 춤을 추며 나간다. 먹중들이 퇴장하고 나면, 소무 두 명이 노란 저고리 다홍 치마 차림에 남색 쾌자를 걸친 밑으로 붉은 띠 두르고, 큰 머리 틀어 올 려 꽃을 꽂은 채 나와서 마당 양 옆으로 갈라서서 염불장단으로 자라춤을 춘다. 노장은 웅크린 채 고개만 들어 부채 너머로 소무를 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하고 춤을 추다가, 6환장을 짚고 좌우 소무를 살피더니,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려다가 다시 웅크 려 앉는 것을 반복하는 춤사위를 날린다. 급기야 일어선 노장이 부채를 펴고 팔을 들어 양쪽 소무를 부채 밑으로 번갈아 살핀다. 살피고 나서 여러가지 몸짓과 활개짓으로 화장무. 활개 펴기. 거드름 춤을 차례로 추며 오른 쪽 소무에게 다가가면, 소무는 싫 다고 몸을 뒤로 돌려 춤을 춘다. 노장은 다시 좌측 소무 쪽으로 춤추며 다가서자, 왼편 소무 역시 몸을 돌려 버린다. 노장은 염주를 벗어 소무 목에 걸어 주고, 우측 소무 쪽으로 춤추며 다가가면서도 연신 왼편 소무 쪽을 돌아 본다. 때를 같이하여 좌측 소 무는 염주를 벗어 땅에 팽개 친다. 다가간 노장이 염주를 주어 냄새를 맡다가 화가 났 는지 땅에 팽개 친다. 장삼도 벗어 던지고서 앞으로 나가 쪼그려 않아 양치질과 세수 하는 시늉을 한다. 소매자락으로 얼굴을 닦고서 품 속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 다듬는 시늉을 하고나서야 뒤돌아 보면, 장삼 팽개쳐진 곳으로 다가간 소무들이 염주를 주어 들고서 오라고 손 짓한다. 노장은 주저 앉아 투전을 꺼내 표를 떼는 시늉을 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돌 아온다. 그러면 소무는 손 사래로 오라고 부르고, 노장이 다가가면 장삼을 입혀 준다. 장삼을 입은 노장은 소무를 양 겨드랑이에 끼고, 염주를 함께 목에 걸고, 마당을 한 바퀴돌아 저편에 가서 앉는다. 붉은 옷차림의 원숭이는 그때서야 신장수 등짐에서 내 려와 고개를 파묻고 땅에 엎드린다. 그러면 신장수는 신을 사라고 외치고, 노장은 오 라고 손짓 한다. 신의 칫수를 물어 본 신장수는 신발 주는 시늉을 하고, 원숭이에게 값을 받아 오라고 한다. 하지만 원숭이는 소무와 놀아나다가 그냥 돌아 온다. 화가 난 신장수는 채찍으로 원숭이를 쫓으며 함께 퇴장 한다.
여덟째 마당 : 신장수
검정 깃이 달린 누른 반 장삼을 입은 신장수가 붉은 띠를 두르고 꽃달린 패랭이를 썼 다. 등에 원숭이를 업은 채찍을 든 신장수는 채찍을 든 채 굿거리 장단에 맞춰 천천히 마당을 돌고난 다음 노장이 않아 있는 반대 쪽에다 원숭이를 내려 놓는다.
아홉째 마당 : 취발이
푸른 장삼 차림인 취발이가 겨드랑이에 한삼을 끼고 녹색 고깔을 썼다. 손에 녹음으라 하여, 나뭇가지로 얼굴을 가리고서 비틀 거리며 들어와 재담을 한 다음, 타령 장단에 맞춰 여당이. 자진 화장으로 춤을 춘다. 그러다 노장 있는 곳을 보고서는 타령 장단 으로 춤사위를 바꿔 다가가면 노장이 부채로 취발이를 친다. 재담을 하고 난 취발이가 타령 장단에 따라 녹음으로 노장을 치면, 노장이 물러나 소무의 가랭이 밑에 숨는다. 취발이가 노장을 쫓으면, 노장은 소무 한 사람을 업고 나간다. 취발이는 남아 있는 소무를 보고, 같이 놀자고 하는데.....소무는 한사코 싫다 한다. 타령 장단 춤으로 소무를 놀리다가 상주풀이를 부른 다음, 다시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나서 상투 트는 재담을 한다. 이때 소무는 진통이 나서 배를 문지르며 신음을 하는데.... 이를 본 취발이가 해산 어멈을 부른다. 해산 어멈은 왜장녀 차림으로 짚뭉치를 머리에 이 었다. 그리고 엉덩이 춤을 추며 나와서 소무에게 다가가, 동자 인형을 소무 치마 속에 서 꺼내 들면 취발이가 받아 든다. 짚뭉치를 챙겨든 해산어멈이 소무를 데리고 나간다. 동자 인형을 앞에 놓은 취발이가 천자 풀이. 언문 뒤풀이로 글을 가르친다. 밥벌이 (장타령)를 가르치다 말고, 동자를 들고서 소무를 부른다. 소무가 마오자, 동자를 소 무에게 주는데... 소무는 동자를 땅에 내동댕이 친다. 취발이는 소무를 꾸짓고,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동자를 안고 나간다.
열번째 마당
검정 저고리에 패랭이를 쓴 말뚝이가 채찍을 들고 굿거리 장단에 맞춘 뒷걸음으로 나 온다. 뒤로는 도포를 입은 샌님이 정자관 차림으로 따르고, 두루마기를 걸친 서방님은 갓을 썼으며, 옥색 두루마기에 쾌자를 걸친 도련님이 복건을 쓰고 나온다. 마당을 한 바퀴 돈 샌님. 서방님. 도련님 등이 저편 가로 가서 나란히 서면, 마당 중앙으로 나온 말뚝이는 춤을 춘다. 샌님이 말뚝이를 불러 사처를 정하라고 한다. 그 말에 말뚝이는 툴툴거리다가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의막 사령인 쇠뚝이를 부른다. 쇠뚝이는 노란 반 장삼 차림으로 나와서 말뚝이와 재담하고 상전을 흉본 다음, 사처를 정 할 것을 부탁한다. 말뚝이는 상전에게 돼지 우리를 사처로 정했다면서, 채찍으로 돼지 몰 듯 상전을 몰아 부치며 타령 장단 춤을 추면서 퇴장한다.
열한번째 마당 : 샌님. 미얄할미.포도부장
도포 차람에 정자관을 쓴 샌님이 소무의 어깨를 안고, 굿거리 장단 춤을 추며 나와서 마당을 한 바퀴 돈다. 그러고 나면 포도부장이 흰 두루마가에 갓을 쓰고 나와 저쪽 편 으로 가서 선다. 그때서야 미얄 할미가 흰 치마. 저고리에 지팡이를 짚고, 보퉁이와 부채를 들고 나온다. 이를 본 샌님이 소무를 뒤에 숨긴다. 샌님과 미얄할미는 서로 찾아 다녔노라면서 재담을 한다. 샌님이 소무를 소개하자, 미얄 할미는 욕을 하며 달 려들어 소무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미얄 할미가 나둥그라진다. 샌님을 말리고-- 미얄 할미는 욕을 하며 굿거리 장단에 맞춰 나가 버린다. 샌님과 소무가 어울려 춤을 추는데.... 포도부장이 다가가서 넘겨 보다가 따라서 춤사위를 날리더니만, 소무의 양 손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춘다. 샘이 난 샌님이 포도부장을 쫓아 버린다. 샌님은 소무를 달래고, 다시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 포도부장이 다가와서 소무의 양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샌님을 가로 막고 돈다. 급기야 샌님이 포기하자, 포도부장과 소무가 함께 춤을 추면서 퇴장 한다.
열두번째 마당 : 신할애비.신할미
흰 두루마기 차림인 신할애비가 허리에 보따리를 맸으며 부채를 들었다. 지팡이를 짚 고 굿거리 장단에 맞춰 어정거리고 들어와서는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저쪽으로 가서 춤 을 추면, 흰 치마. 저고리에 지팡이를 짚은 신할미가 부채를 들고 나온다. 어정거리며 뒷걸음으로 들어온 신할애비 뒤로 가서 실수인 척 엉덩이를 부딪친다. 그리고 서로 돌아 본다. 신할애비는 신할미를 보고,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이 싫다면서 죽으라고 타박 한다. 그러면 실할미는 서럽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다가 넘어져 죽는다. 신할미의 죽음을 확인한 신할애비는 아들 도끼를 부른다. 도끼는 반 장삼을 입고 나 타나, 신할미의 죽음을 확인하고 병신짓을 하면서 저쪽으로 가서 누이를 부른다. 흰 치마. 저고리 차림으로 나타난 누이는 도끼와 재담을 하고, 신할미 쪽으로 가서 우는 시늉을 한다. 동네 사람들이 나타나 신할미를 운력해 나가자, 상복으로 갈아 입은 도 끼와 누이는 마당 가운데에 차려놓은 젯상 앞에 선다. 이어 노랑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쾌자를 걸친 무당이 빗갓 차림으로 부채와 방울을 들고 나와서 노랫가락을 부른 다. 그리고 공수 (죽은 사람 뜻이라고 전하는 무당의 말)를 주면서 당악장단에 맞춰 춤을 춘 다음, 창부타령을 부르고 나서 또 다시 당악장단에 따라 춤을 추면.... 모든 놀이꾼들이 마당으로 나와서 한 바탕 춤사위를 벌이고 나간다.
4. 동래야유
1) 들놀음이란?
1967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동래야류는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옛놀이터를 근거로 전승되고 있는 탈놀음의 일종이다. 동래야류는 오광대와 마찬가지로 해서(海西)의 탈춤, 중부지역의 산대놀이와 함께 한국 가면극의 3개 주류에 드는 가면극 의 영남형으로 보고 있다. 동래야류는 동래 들놀음으로 불리어진다. 산놀음을 산유(山遊), 냇가놀음을 천변유(川邊遊)로 부르듯 야류는 들놀음을 한자 로 표기한 것이다. 정월 대보름 저녁 온 동네가 들썩거릴 정도로 마을 사람 모두가 구경꾼이요 연희자(演戱者)로 참여하는 대동놀음으로 놀 아졌던 동래야류는 지신밟기로 시작된 탈놀음에 앞선 길놀이가 상당히 규모가 컸었으나, 이제는 길놀이는 거의 없어져 가 고 4개의 과장만이 하나의 공연으로서 전승되어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동래민속예술보존회가 80년대에 들어와 길놀이의 지신밟기를 재현하여 부산의 지방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어 동래야류의 앞놀이 복원에 힘쓰는 중이다.
연희시기는 앞서 말한대로 정월 대보름이었으며 준비과정은 야류 탈놀음 계원들이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동네 각 집을 돌며 "지신밝기"를 하여 비용을 마련한다. 음력 정월보름날 동부, 서부간의 줄다리기가 끝난 이튿날 밤에 동래 중앙통 광장 패문리에 무대를 가설하여 놓고 놀았다. 무대는 목재를 사용해 관중보다 약간 높게 만들고 관중은 삼면에서 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악사석은 무대를 향하여 왼쪽에 있다. 이 놀음은 밤에 연희되므로 연희 때는 무대 좌우 적당한 곳에 불을 밝히고 놀음판을 좀더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제등을 공중에 달았다.
2) 탈의 종류
사용되는 등장인물의 탈은 원양반, 차양반, 셋째양반, 넷째양반, 종가집도령, 말뚝이, 문둥이, 할미, 제대각시 등이고 탈의 재료는 셋째양반처럼 털가죽으로 만든 것도 있으나 대개는 바가지로 만든다. 가면 좌우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굵은 노끈을 꿰어서 붙잡아 매게 되어 있다. 원양반(元兩班), 차양반(次兩班), 모양반(毛兩班), 넷째 양반, 종가 도련님의 가면은 가면의 하반부인 입술 밑, 턱은 좌우에 노끈으로 연결시켜 재담을 할 때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어 훨씬 재미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놀이가 끝난 뒤에는 탈을 마을의 동사(洞舍)나 공청에 보관하였는데, 탈에 악귀가 붙는다하여 집에 보관하기를 꺼리는 까 닭이다.
3) 놀음의 순서
놀음의 내용은 앞 뒤 둘로 구분되는데, 앞은 길놀음과 군무 및 잡희로 이루어지고 뒤는 탈놀음이다. 들놀음을 하는 날 해 가 지면 먼저 길놀이를 한다. 그리하여 놀음판에 도착하면 길놀이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춘 뒤 탈놀음이 시작된다.
탈놀음은 총 4과장으로 이루어 지는데, 첫째 과장은 문둥이가 나와 미쳐 날뛰다가 뒹굴면서 춤을 춘다. 이것은 문둥이의 원한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영남의 들놀음이나 오광대에만 보이는 문둥이탈은 이 지역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등장인물이 다. 특히 고성오광대나 통영오광대에서는 문둥이탈이 하나씩인데, 동래야류에서는 문둥이탈이 2개 쌍으로 등장한다.
제2과장에 나오는 문둥이춤은 비중도 크고 표현도 다채롭다. 문둥이탈은 호제(瓠製) 흰 면에 붉고 푸르죽죽한 널따란 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눈썹은 없고 눈, 코도 뭉그러졌으며 입은 비뚤어졌다는 것이 65년 최상수 조사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자료 <동래야류가면극>에 나오는 보고이다. 요즘은 살색 면에 흰 반점이 찍힌 가명을 쓰고 있다.
평복에 중대님으로 차린 두 사람의 문둥이탈은 조막손에 소고와 북채를 들고 등장해서 북을 치며 춤을 추기도 하고, 여기 저기 긁적거리는 등 문둥이의 생활상을 표시한 갖가지 동작을 한다.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나 하급 관속들 중에 가무에 소양이 있는 사람들이 놀아온 이 놀음의 연희자들은 모두 남자였으나 이제는 전수생 중에 여자도 상당수가 있어 문둥이 탈춤은 여자들이 전수 받아 추고 있다.
동래야류에 나오는 양반탈들은 둘째 과장에서 하인 말뚝이가 불평불만을 폭로하면서 양반을 모욕하는가 하면 곁말로 조롱 하며, 샌님의 대부인과 사통했다고 하며 양반 체면을 손상시키고, 셋째 과장에서는 영노라는 괴물에게 더욱 신랄하게 모욕을 당한다.
"쉬, 엿다. 이 제에미를 붙고 금각대명을 우둥우둥갈 이 양반들아, 오늘 날이 따따무리하니 온갖 짐생 다 모았다. 손 골목에 돼지새끼 모은 듯, 옹달샘에 실뱀이 모은 듯, 논두렁 밑에 돌나무생이 모은 듯, 삼도 네거리 히뜩새 모은 듯, 떨어 진 중의 가랑이 신 대가리 나온 듯, 모도모도 모아 가주고 말뚝인지 개뚝인지 부르는 소리가 귀에 쟁쟁"
말뚝이 입에서는 온갖 잡소리로 양반에게 욕을 보이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양반들은 있는 지혜 다 짜내어도 말뚝이 둘러 대는 소리에는 꼼짝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욕을 보다보다 말뚝이 아들 신세까지 됐던 양반들, 영노과장에 이르 면 아예 양반을 벗어 버린다. 영노가 "양반 아흔 아홉 잡아묵고 네 하나 잡아 묵으면 등천(登天)한다."고 소리치자, 비비양반 얼른 "나는 양반 아니다." 고 꽁무니를 뺀다.
"그러면 뭐꼬?" 라는 영노의 질문에 "내가 똥이다."라고 궁상을 떤다.
영노 : 똥은 더 잘 묵는다.
양반 : 내가 개다.
- 중 략 -
양반 : 내가 구리(구렁이)다.
영노 : 구리도 잘 묵는다.
이렇게 되면 양반 체면에 별별 잡스러운 짐승 노릇까지, 그것도 자청해서 하는 꼴이 된다.
넷째 과장인 할미영감과장에서는 영감과 할미탈 제대각시가 등장하고 의원, 무당, 봉사, 상여꾼까지 등장하게 되는데, 영감 이 첩을 얻자 본처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본처와 첩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영감은 화병으로 죽고 만다.
5. 고성오광대
1) 오광대에 대하여
연출 형태는 여타와 비슷하지만 음악은 꽹과리를 주로하고 장고와 북을 곁들인다. 오광대놀이에 공통되는 요소로서 영노(백성의 힘과 열망을 실체화시킨 가상의 힘과 열망을 실체화시킨 가상의 동물) 혹은 비비과장이 들어 있으며, 가산과 진주의 오광대놀이에는 판열음을 하는 오방신장무라는 춤이 전해진다. (중요 무형문화재 7호)경남 고성에서 19세기 말 성립되어 전승되어 온 탈놀이로서 주로 정월 대보름에 놀았다. 들놀이라고도 부르는 '야유(野遊)'와 함께 초계 밤마리를 기원으로 두며 이것이 서쪽으로 전승된 것이 오광대놀이이다. 오광대놀이에는 공통적으로 5방위를 상징하는 다섯 광대가 나와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을 빌어 준다. 고성 오광대는 오광대 중 비교적 고형(古形)으로 수영야류와는 달리 신앙적 의의는 없고 다만 오락 위주의 장터놀이로 이루어졌다. 1970년 중요 무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2) 놀이의 순서
제 1과장 문둥 광대과장
영남 지방에만 있는 이 춤은 이 지역에 문둥이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춤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문둥병이 걸려 부자유스런 춤을 추다가 점점 춤이 자유스러워지면서 내면적인 환희와 해방을 이루는 소고춤을 추게된다. 즉 정상인으로서 춤을 추면서 퇴장하는 문둥이의 모습은 사람취급조차 못받고 살던 그에게는 신체적 구속을 벗어난, 인간으로의 해방을 나타낸다.
제 2과장 오광대 과장
원양반, 청제, 흑제, 홍백, 적제, 백제, 도령 등이 말뚝이의 비판과 조롱을 받으며 멸시를 당한다.
제 3과장 영노과장
양반과장 끝날 무렵에 이 세상의 무엇이든 다잡아먹는 괴물 영노가 등장한다. 그리고 양반은 비비양반이 등장한다. 비비란 갖은 횡포로 평민들을 괴롭히는 양반을 위협 조롱하면서 양반 등살에 쌓였던 평민들의 울분을 풀어준다.영노가 입에 대풀잎을 물고 비비 소리를 내기에 비비라 한다. 비비양반은 비비에게 여러 꾀를 내며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한껏 조롱 당하다가 끝내는 비비와 춤을 추며 퇴장한다.
제 4과장 승무과장
노장이 나와 2명의 소무를 희롱하며 대무를 춘다. 이는 승려의 타락상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중북부지방의 탈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진 주제이다. 대사는 없으며 춤으로서 여자를 꼬셔내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제 5과장 제밀주 과장 본처인 할미가 영감의 첩인 제밀주가 낳은 아이를 두고 다투면 영감이 제밀주 편을 들면서 뜯어 말린다. 도중에 아이가 떨어져 죽게되고 영감은 할미를 때려 죽인다. 상두꾼을 불러 출상하게 된다.
5. 그밖의 탈놀이들...
1)남사당 덧뵈기 (중요 무형문화재 3호)남사당 덧뵈기는 남사당놀이의 한 부분이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남자들로만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했는데,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둑각시 놀음) 등 여섯가지 종류의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전승의 탈놀이에 비하여 의식이나 행사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노는 지역사람들의 흥취에 부합하였고, 춤보다는 놀이꾼의 재담과 연기에 더 큰 비중을 둔 풍자극이다.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의 네 마당으로 이루어진다. 남사당 덧뵈기는 떠돌이패의 놀이라는 점에서 농촌 두레패 탈놀이의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넘어 도시적, 세속적 생활공간 속에 열린 축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2) 강릉관노놀음
강릉관노놀음은 강릉단오제에 행해지던 놀이였다. 이곳 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 시작되어 5월 1일부터 본제를 시작하였는데 관노놀음은 본제부터 단오 날까지 서낭당 앞뜰에서 놀았다. 대사는 없었다고 한다. 구한말까지 행해지다 전승이 끊겼다. 모두 4과장으로 이루어지며 양반의 오해로 죽은 소매각시를 용서하는 대목에서 끝을 맺는다. 놀이가 끝나면 동민이 함께 장내에 들어와 군무를 추었다. 모두 4과장으로 이루어지며 양반의 오해로 죽은 소매각시를 용서하는 대목에서 끝을 맺는다. 놀이가 끝나면 동민이 함께 장내에 들어와 군무를 추었다.
Ⅲ. 결론
1. 그 밖의 또 다른 문제
초기에는 모든 지역에서 탈춤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이후 농촌 탈춤에서 도시 탈춤으로 전이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중세 후기에 들어서며 실학 사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이 형성되고 계급질서가 천천히 붕괴되어 간다. 상업자본의 형성의 결과 전문 예인집단이 생겨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고 도시에 시장이 형성되며 시장에서 상인들에 의해 초청되어 탈춤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농촌탈춤이 도시 탈춤으로 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앞 서두에서 밝힌바와 같이 탈춤을 크게 '북부탈춤', '중부탈춤', '남부탈춤'으로 나누어 볼 때 북부탈춤의 전승지역이 봉산, 해주, 강령, 은율, 황해, 안악, 재령, 신주, 장안, 송화, 기린, 신안, 서흥, 신막, 평산, 송림, 추화, 금산, 연백 등이 있는데 그 지역들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대동강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부 탈춤은 서울 녹번동, 아현동, 노량진, 퇴계원, 사직골, 송파, 경기도 양주구읍 등이 한강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고, 남부탈춤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부의 수영, 동래구읍, 부신진등에 야류(들놀음)이, 서쪽에 충무, 고성, 사천, 진주, 마산, 산청, 김해 가락, 창원 진동, 거제 등지가 강을 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승되는 과정에서 왜 호남지방도 강을 끼고 있고 도시가 형성되었지만 호남지방은 탈춤이 계승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농촌탈춤에서 도시탈춤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탈춤이 볼거리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예인집단을 고용해서 탈춤을 공연하였는데 소비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 사람들이 모이게되고 그래서 물건을 파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은 곡창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주로 사기보다는 팔기위한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굳이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 호남지방은 광활한 농토를 소유하고 또한 들판에서의 노동이 힘들었다. 그래서 들노래가 발전하였고 또한 판소리의 형태가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판소리는 시나위권 중심의 호남지방에서, 탈춤은 강을 낀 산악지역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와 탈춤의 분포는 상보적(相補的)분포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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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탈이란 무엇인가...
우리말에 '탈나다'라는 말이 있다. 배가 아플때도 '배탈' 이 났다 하고 다친곳이 덧나도 '탈났다'고 한다. 즉 탈이란 '뭔가 거림칙한' 일상 상에 있어서의 변고를 뜻한다. 보통 탈놀이가 끝나게 되면 어느 고장에서나 불에 태워 없애는 것이 놀이의 마무리인 양 꼭 지켜왔다. 탈에는 갖가지 액살이 잘 붙는 것이니 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 오랜 속신으로 여겨 왔다. 이처럼 탈은 전국 어디에서나 만들어지고 놀이화되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제 얼굴이 아닌 것 또 다른 모습의 얼굴인 탈을 쓰게 되었을까?
첫번째 가정을 보면, 원시 공동체 사회의 제천의식에서 보면 인간은 탈을 씀으로써 비로소 신이 된다고 믿었다. 어찌보면 이것은 질병이나 재양같은 갑작스런 자연 재해를 신의 모습을 빌어 해결해 보려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때 탈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상징적 매개물로서 "신앙적 기능"을 지닌다.
또다른 의견은 짐승을 잡기위한 위장용이나, 전쟁을 할때 탈이 긴요한 구실을 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수렵을 위한 탈, '생산적 기능'으로서의 기원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라 지증왕 13년에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나무사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방면의 전문가들은 탈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제사에 모셔졌던 신앙성을띤 탈로는 신성탈, 벽사탈이 있고 토템숭배에서 나타나는 토템탈 , 또 비가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기우탈등 도 있다. 이외에도 수렵탈, 전쟁탈 등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것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후 오락성을 띠면서 생겨난 예능탈로는 크게 춤탈 과 연극탈로 분류한다. 이처럼 다양한 탈들이 우리나라의 지방마다 고루 전승되어 지금도 풍부한 '탈유산'을 지니게 되었다.
2. 우리의 탈 역사
우리나라의 탈은 인류사와 큰 연관을 맺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추측되는 인물상이나 동물상등을 통하여 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가족, 씨족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신의 형태로 빚어진 조형물들에서 연관성을 추측해 보는 것이다.
가장오래된 탈은 6세기경 신라 시대의 '목심칠면'으로 1946년 경주에서 출토되었는데, 나무에 칠을 하고 눈은 황금으로 점을 박았으며 방상씨와 같은 귀면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 탈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이 된다. 이제 고구려, 신라, 백제의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의 탈을 짚어보자.
1) 고구려
고구려 악은 당시 중국을 풍미한 서역악, 곧 악기 뿐만아니라 탈춤까지 고루 수용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 '가' '무' 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2) 백제
고구려, 시라와는 다르게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교류함으로써 빠른 시기에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 또한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기악이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신라
한가위 때 팔관회에서 연희되던 신라악들은 다분히 중국의 '산악백희'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추측 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크게 검무, 무애무, 처용무, 오기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검무와 처용무를 중심으로 신라악을 설명하기로 하자!
가.검무
검무의 유래는 신라의 황창이란 7세의 소년이 검무를 빙자하여 백제 왕을 죽이고 목숨을 잃었으므로 신라인들이 이르 가상히 여겨 이 놀이를 시작하였다. 이 춤은 단순한 모의무(模擬舞)이나 검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탈을쓰고 연희하는 연극성이 짙은 탈놀이 였다.
나.처용무
신라 헌강왕때 처용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이 춤은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토착 신앙과도 관련이 있다. 즉 처용은 본디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헌강왕을 따라 경주로 와서 벼슬도 하고 아내도 얻었는데 아내가 외간 남자(나쁜 귀신)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구짖기는 커녕 '처용가'를 불러 뉘우쳐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만들어 대문 위에 걸어 놓음으로써 나쁜 귀신을 쫓았다 한다. '처용탈'은 신앙적 상징물로 떠 받들어지면서 굿에서 탈춤놀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4) 고려
가. 나희
음력 섣덜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구나의식에 불과했던 굿이었나, 나중에 창우 또는 광대 심지어는 무격들의 놀이로까지 확대되었다.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벽사의 굿으로 발달되 이 놀이는 국가에서 관장하였으며, 이대에는 '오방귀무'와 같은 제사춤을 비롯하여 곡예, 탈놀이 ,답교 처용무, 백수무등을 펼쳤다.
3. 탈의 분류
탈은 흔히 '신앙탈'과 '예능탈'로 나누는것이 일반적이다. 먼저 '신앙탈'이란 그 탈에 제사를 지내거나 어떤 소망을 기원하기도 하고 지킴이로써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예능탈'은 주로 춤추고 굿하고 놀이할때 얼굴에 쓰는 것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이처럼 두 분류로 나누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 두가지 기능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탈의 특성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탈은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으로부터 '북청사자놀을' 그리고 해서지방의'봉산탈춤'과'강령탈춤','은율탈춤'이 있고, 중부지방의 산대놀이 로서는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그리고 요즘에 나오는'퇴계원 산대놀이'가 있다. 경상북도의 '하회 별신굿', 경상남도에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 '진주오광대', 부산지방의 '수영,동래야유' 이 밖에도 강릉의 '관노놀음'를 비롯해서 남사당패의 '덧뵈기'등의 줄잡아 3백여 종의 탈 유산이 오늘에 전해진다. 이러한 탈 유산 가운데 '하회별신굿'의 탈 아홉점과 병산의 두점이 지난 1964년 국보(제 121호)로 지정 되었다. 하회탈은 턱을 따로 떼어 끈으로 연결함으로써 재담을 하면 얼굴 전체가 표정을 갖게 하는 탁월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방상씨'탈은 악귀를 쫓는 탈을 뜻한다. 이것은 장례 행렬의 맨 앞을 이끌면서 잡귀, 잡신들을 쫓는 역할을 한 조선시대 유일한 유물이다. 궁그런 눈이 넷, 입은 볼위까지 찢어졌고 이마와 양 볼에는 주름살이 져 있어 귀면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 전체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무섭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이 많은 탈의 종류중 지면 관계상 농촌탈춤의 전형인 하회 별신굿과 도시 탈춤에서는 북부탈춤으로 '봉산탈춤', 중부탈춤으로 '송파산대놀이'를, 남부탈춤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지방을 야유(野遊)라 하였고 서쪽지방을 오광대놀이(음)라 하였는데, 야유에서는 수영야유를, 오광대놀음에선는 '고성오광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본론
1. 하회 별신굿
1) 역사적 유래
현존하는 각 지방의 부락제의 명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를 둘로 크게 나누면, 남성 중심으로 행해지는 유교풍의 동제와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참가하며 무당이 주제하는 도당굿일 것이다. 그러나, 유교식 동제보다 더 원초적인 것으로는 축문도 없이 제주가 조용히 정성을 들인다는 산제가 있다. 이와 같은 산제와 당굿과 동제가 우리나라 부락제의 기본 유형으로 생각되나, 그중에서 현재까지 서낭제탈을 전하는 것으로는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의 동제와 그 별신굿 탈놀이를 들 수 있다.
하회동의 서낭신은 문진생 서낭님이며, 이곳 서낭제의 평상제는 보통 동제라고 부르나 3년, 5년 혹은 10년에 한번씩 지내는 별신제 또는 도신제라고 하는 임시특별제가 있다. 별신굿은 특별신사의 준말이라는 설이 있으나, 경상도와 강원도 해안지방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기능으로 보아 부락제로서 서낭신에 대한 대제와 시장이 서는 것과 결부된, 경재적 오락적 동기에서 거행되는 임시대제의 둘로 나눌 수 있다.
2) 특 징
하회동의 낙동강 상류에서 강이 S자형으로 굽이도는 강기슭에 자리잡은 풍산유씨의 동족부락으로 조선조 선조 때의 명신 유성룡의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에 전하는 향언으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반에" 라는 말이 있어 대체로 고려 중엽까지는 허씨, 그 후에 안씨가 들어왔고, 나중에 유씨는 조선조 초기부터 집단적으로 정주한 것 같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라는 전설을 하회탈이 고려 중엽의 것이라는 하나의 방증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10년에 한 번씩 또는 신탁에 따라 임시로도 거행되는 하회별신굿은 그 준비를 12월 말부터 시작한 산주는 먼저 부정 없는 목수를 골라 뗏재에서 서낭대와 성줏대를 마련한다.
정월 초이튿날 아침에 산주와 무녀와 광대들이 서낭당에 모여 제수를 차려 놓고 약 10미터 길이의 서낭대와 약 8미터 길이의 성줏대를 세우고 강신을 빈다. 서낭대에는 5색포를 늘이고 그 꼭대기에 당방울을 달았다. 신이 내려 신령이 울리면 강신한 서낭대와 성줏대를 받들고 주악하면서 상당에서 하당과 삼신당을 다녀서 옛 동사 앞 놀이마당에 이르러 서낭대를 세워 놓고 별신굿 탈놀이을 시작하였다.
3) 놀이의 순서
제 1 : 주지놀음
주지는 사자를 말하며, 붉은 보자기로 온 몸을 가리고 주지 머리를 손에든 광대 두 사람에 의해 음악에 맞춰 끌려다니며 춤을 춘다.
제 2 : 삼석놀음
무녀과 주연하는 삼석놀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제 3 : 파계승놀이
각시가 나와 춤을 추고 있으면 중이 등장하여 함께 어울리게 되나, 양반의 하인 초랭이가 등장하자 각시를 업고 중이 도망친다. 이어 양반과 선비, 선비의 하인 이매가 등장하여 달아나는 중과 각시를 바라보고, 양반과 선비는 세상을 개탄하고, 하인들은 껴안고 웃으며 좋아한다.
제 4 : 양반, 선비놀이
부네가 등장하여 춤을 추며 유혹하면 양반과 선비 사이에 사랑 의 삼각관계가 벌어진다. 부네를 사이에 두고 양반과 선비 사이에 사랑의 삼각관계가 벌어진다. 부네를 사이에 두고 양반과 선비는 서로의 지체 높음과 학식의 많음을 자랑한다. 그리고, 둘은 부네와 흥겹게 춤을 추다가 서로 부네를 독점하려고 애쓴다. 이때 백정이 도끼와 쇠불알을 들고 와서 양기를 돕는데 좋다고 하니, 양반과 선비는 서로 사겠다며 쇠불 알을 잡아당긴다. 백정은 불알이 터진다고 야단이고 할미가 등장하여 싸움을 말린다. 이 과장은 양반계급을 풍자한 것으로 다른 탈춤에서처럼 가장 중심이 되는 마당으로 보인다.
제 5 : 살림살이 과장
서민생활의 고달픔을 보여 주고 있다.
제 6 : 살생과장
백정이 나와 소를 잡고 껍질을 벗기는 시늉을 한 뒤 염통과 불알 등을 관중에게 사라고 한다. 백정탈을 전에는 희광이라고 불렀으며, 소를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형하는 시늉을 하고 우뢰가 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표정을 하였다고 한다.
제 7 : 환자놀이
관리인이 나와 마을사람들에게 곡식을 받아가면서 중간착취하는 횡포를 풍자하고 있다.
제 8 : 총각과 각시의 혼례 과장
이 때 혼례식용 자리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바치려고 한다.
제 9 : 신방 과장
총각이 잠는 뒤 각시가 궤를 열면 간부인 중이 나와 총각을 살해한다.
하회탈과 허도령 강신: 고려 중엽 하회마을에 허도령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허도령은 꿈에 마을의 수호신으로부터 가면제작의 계시를 받고 이튿날 부터 목욕제계하고 집안에 외인의출입을 막는 금색을 치고 전심전력 으로 가면 제작에 몰두했다. 그때 허도령을 몹시도 사모하던 처녀가 있어서 오랫동안 허도령을 볼 수가 없어 허도령이 무엇을 하는지 그 모 습이나 보고자 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고 말았다. 금단의 계율을 어긴 것이다. 입신지경이던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만들던 이매탈의 턱을 완성 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도 이매탈은 턱이 없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마을에서는 허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황당 부근 에 도령단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도령단 마저 흔적이 없다.
2. 봉산탈춤
1) 역사적 유래
봉산탈춤은 해서 일대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이다. 이 해서탈춤은 분포를 보면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 지대인 안악, 재령, 신천, 장연, 송화, 은율 등지의 탈춤과, 동남쪽 평야 지대인 기린, 신원, 서흥, 평산, 신막 등지의 탈춤과, 해안 지대로는 해주, 강령, 옹진, 송림, 추화, 금삼, 연백 등지의 탈춤으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며,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탈군들을 초빙하여 1년에 한 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황해도 전지역에서 놀던 탈춤으로, 그중에서 특히 봉산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분포로 보아 해서탈춤은 거의 20세기 초의 일이며, 특히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된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 말이래의 일이고,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특히 고려 이래의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단오는 중부이북 지방에서 남부 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명절로서 성대히 지냈는데, 시계적으로 이때가 모내기 직전의 망중한의 시기이며, 단오의 명절놀이로서 봉산, 기린, 서흥, 황주, 강령 등지에서 탈춤을 추어 온 것은 벽사와 기년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재로서 그 민속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종교의례적 행사에서 점차 오락 위주의 민중의 탈춤으로 발전되어 간 것 같다.
2) 특 징
황해도 탈춤을 그 탈, 의상, 춤, 대사 등의 유형으로 보아 기린, 서흥, 봉산, 황주, 재령, 신천 및 안악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형과 옹진, 강령 및 해주으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해주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봉산탈춤의 연출 형식도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여 피리, 젓대, 북, 장구, 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 타령, 굿거리곡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이에 몸직과 동작과 재담과 노래가 따르는 탈춤으로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그 구성을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춤은 중부 지방에 남아 오는 장삼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해주탈춤형의 장삼춤에 비하여 활발하며, 장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깨끼춤이 기본이 된다. 목중춤은 오광대의 말뚝이춤과 마찬가지로 도무로서 모닥불 위를 뛰어넘으며 장기를 자랑했으며, 대륙에서 전래한 건무의 영향을 상정케 한다. 춤사위의 분석은 양주별산대춤처럼 자세하지는 못하나 팔목중의 외사위, 곱사위, 양사위, 만사위, 취발이의 깨끼춤, 말뚝이의 두어춤, 미얄의 궁둥이춤과 까치걸음, 팔목중의 뭇동춤 등의 사위 명칭이 있으며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봉산탈춤의 길놀이는 악공의 주악에 따라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소무, 양반, 영감, 상좌, 노장 그리고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이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한다. 일주하는 도중에 광장에 이르면 행렬자는 모두 어울려서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지정된 놀이터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을 시작한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하여 이를 넓히는 일도 한다. 근래에는 길놀이가 없고, 대신 나무판에 광고문을 적어 사방에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3) 놀이의 순서
1과장 사상좌과장 탈춤의 시작을 알리는 과장으로 사상좌가 사방신에게 인사를 함으로 해거 시작한다 여기서 상좌는 어린 여중이므로, 등장시 업혀 나오는 것이 특색이 있다. 네 상좌의 통일된 동작과 느린 동작이 특색이 있으며 이춤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2과장 8목중과장 파계한 8명의 목중이 차례로 나와 자신의 대사를 읖조리고 춤을 춘다. 각각으 대사앞에 불림을 부르는데 이의 종류로는 "낙양동천 이화정" "흑운이만천 천불견" "월락오제 상만춘 등등이 있으며 여덟번째 목중까지 나와 춤을 추면 나머지 일곱명의 목중이 나와 다 같이 합동무를 추는데 이춤이 힘이 있고 상당히 멋들어 진다.
3과장 사당과장 출연진이 모두나와 사당주위에서 진을 짜면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주제는 사당과 거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가날픈 서도민요로 떨리는 음이 특색이 있다. "어라디어 어허야 요오호 내로구나 녹양에 피는 꽃은 북한산 쑥들어로 간다" 로 시작하는 노래이다.
4과장 노장, 취발이 과장 생불이라는 노장이 어느날 어린 무당(소무)에게 반하여 타계를 한다. 여러 노력 끝에 소무의 마음을 얻은 노장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순진한 신장수 의 신값을 떼 먹는다. 그러던중 취발이가 나와 소무를 보고 소무를 찾지하려고 하다가 노장과 싸움을 하고 이겨서 소무를 차지한다.
5과장 사자과장 신성시 되었던 사자와 마부가 나온다. 사람두명이 한조로 이루어진 사자춤은 참 볼만한데 비해 그렇게 생동감있게 표현하려고 사자탈을 쓰고 고생하는 춤군을 생각하면 조금은 안쓰럽다.
6과장 양반과장 양반 3형제와 말뚝이가 등장한다. 헌데 이 양반이 똑똑하지 못한데 그것은 탈에서도 나타난다. 첫째와 둘째는 언청이고 막내는 입이 삐뚤어 쪘는데 지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이 들고 큰 소리만치는데 그러한 양반을 말뚝이가 익살맞게 골려먹는다.
7과장 미얄과장 미얄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난리통에 서로 해어진 사람들이다. 극이 시작하면 미얄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각각 나와 상대방을 찾다가 만나 서로 회포를 풀다가 할아버지에게 여자가 있는 것을 알고 미얄할머니가 그 돌머리집이라는 여자와 싸우다가 할아버지에게 맞아 그만 죽고 만다. 나중에 할머니의 원혼을 달래려고 무당이 나와 한껏 춤을 추고나면 남강노인이 나와 전체 탈춤판을 정리한다. 처첩 갈등이 잘 나타나 있으면 미얄의 대사가 일품이다.
3. 송파산대놀이
1) 역사적 유래
송파진은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와 함께 5강의 하나였고, 조선조 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향시 열 다섯 중의 하나였던 송파장이 서던 곳으로, 을축년 대홍수때까지도 270호의 객주가 있어 성업을 이루던 장터였다. 구송파라고 하는 것은 송파진으로서 강언덕에 있었는데, 주로 연초 가공업자와 신탄상이 많아 담배와 신탄을 서울에 공급하였고, 우시장이 성하였으며, 마행상인들의 상업 근거지로서 경기 일대에서는 부촌이었으므로 송파산대놀이가 유지될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현지 연희자들에 의하면, 약 200년전부터 송파산대놀이는 창설되었으나 쇠진되었던 것을 1900년 초부터 다시 송파거주 허윤씨가 구파발 본산대의 연희자 윤희중씨를 초청하여 부흥시켰다고 한다. 그 후 연중 행사로 정월 대보름과 단오와 추석에 명절놀이로 놀았는데, 단오에는 일주일씩 계속되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1924년에는 큰 규모의 산대놀이 모임을 송파에서 개최하였는데, 이때에 구파발, 애오개, 퇴계원, 의정부, 타락한 8명의 중이 등장하여 재담을 하고 춤을 추다
2) 특 징
송파산대놀이도 양주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반주음악에 맞춰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따르는 탈놀음의 일종이며 산대도감 계통극의 중부형의 한 분파이다. 송파산대놀이는 놀이 내용의 플롯이나 과장과 춤, 가면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여 다 같이 애오개, 구파발 등지의 본산대의 분파임을 말해 주나, 몇 개의 탈과 배역이 송파산대놀이에서는 고형을 지니고 있어 특징적이다. 즉,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이미 탈락한 초라니, 당녀, 핸산어멈, 신할멈, 무당 탈 등을 따로 갖고 있고, 놀이 과장에서도 이들이 맡는 역이 따로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3) 놀이의 순서
1. 길놀이
탈놀이를 하게 되면 놀이꾼들이 풍장을 치면서 장터를 중심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이것을 길굿, 또는 거리굿이라 한다. 놀이패들이 늘어서는 순서는 맨 앞에 기가 있다. 그리고 풍장을 치는 잽이들이 따르는 뒤로 탈꾼들이 이어진다. 맨 앞의 기는, 옛날에는 '산대도감' 이라고 쓴 붉은 기와 작은 노랑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용두기와 작은 영기 두 개를 든다. 기에는 '송파산대놀이' 또는 '송파산대놀이 기'라 쓰기도 한다. 다음을 따르는 잽이들은 쌍호적이라 하여, 호적 한 쌍이 앞 선다. 징잽이.장고.재금(바라)등이 길군악을 치며 따른다. 그 뒤로 의상을 갖춘 탈꾼들이 춤을 추면서 이어진다. 탈꾼들은 대개 첫째 상좌부터 놀이에 나오는 순서대로 열지어 간다. 뒤로는 노장이 양소매를 어깨에 끼고 걸으며, 왜장녀가 뒤뚱 거리며 그 뒤를 따른다. 가끔 행렬에서 뛰어나온 원숭이가 우스개 짓을 하고, 신장수가 채찍을 들고 이리 저리 좇기도 한다. 놀이꾼들은 저마다 등장 인물의 성격대로 갖가지 춤을 춘다. 그런데 왜장녀는 허리통을 드러낸 채 엉덩이 춤을 추어 마을 사람들을 웃긴다. 동구밖 널찍한 마당에 이르러 잽이들이 타령을 치면, 탈꾼들이 마당에 어우러져 한 바탕 익살스러운 춤판을 벌인다. 그 무렵이면 마을에서 술동이를 내놓는다. 얼마쯤 논 다음에 다시 길군악을 치며, 줄을 지어 마을을 한 바퀴 돈 뒤에야 놀이판으로 들어가 개복청에서 탈놀음 준비를 한다. 길놀이는 산대놀이의 돌돌이(예고편)와 같은 것으로 마을 터를 울리는 것이나, 탈놀음이 벌어지는 것을 동네에 알려 구경꾼을 모으는 구실도 한다.
2. 고사
산대놀이를 벌이기 전 놀이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젯상이 차려지면 탈을 늘어 놓는다. 그러고 나서야 탈꾼들이 열지어 서서 고사를 지낸다. 젯상 앞에 탈을 늘어 놓되, 첫째 상좌.둘째 상좌 탈은 맨 위에, 연잎. 눈끔적이 탈은 양반탈이라 하여 다음줄에 놓는다. 샌님.신할애비탈을 노인탈이라 하여 셋째줄에, 기타의 탈은 그밑에 늘어 놓는다. 여자탈은 맨 끝줄 차지가 된다. 상에는 쇠머리(또는 돼지 머리)며 3색 과일과 시루떡.조라술(제단 옆에 묻어두었던 술)등으로 걸판지게 차려졌으나, 을축년 대 홀수 후에는 약식으로 간단해졌다. 탈꾼 대표가 나와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린 다음에 축문을 낭독 한다. 산대놀이 대표 xxx.... 하고 난 다음에는 소지를 올리면서 저승에 간 놀이꾼들의 명복을 빈다. 그러고 나서 음복한 후,젯상의 먹거리를 구경꾼들에게 나누어 준다.
첫째 마당 : 첫째. 둘째 상좌
한삼이 달린 흰 장삼 차림인 첫째 상좌가 붉은 띠를 두르고 붉은 고깔을 쓰고 나와서 놀이 마당 한 가운데에서 두 손을 모으고 선다. 마당이 조용해지면.. 염불장단에 맞춰 사방에다 절을 하고 나서, 느린타령 장단 으로 팔뚝잽이, 반화장, 곱사위, 활개펴기, 여닫이 순으로 춤을 춘다. 이어 자진 타령으로 화장무, 자진화장, 여닫이, 곱사위, 건드렁(만취상태), 멍석말이 등 순으로 춤사위를 섭렵한 다음 한쪽으로 가서 앉는다. 그러면 둘째 상좌가 흰 장삼에 남색 띠를 두르고, 같은 색 고깔을 쓰고 반대 편에서 나와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령장단으로 건드렁,여닫이로 춤을 추고서 자진 화장무로 첫 상좌 쪽으로 가서 어른다. 그때서야 첫 상좌가 뛰어나가 건드렁으로 마주 춤을 춘다. 화장무,자진화장,곱사위로 춤을 추면서 거울보기로 맴돈 다음, 마주 보며 깨끼춤을 추다가 첫째 상좌는 물러간다.
둘째 마당 : 옴중.먹중
진회색 삼베 장삼 차림인 옴중이 시루 밑 벙거지를 쓴 채 재금을 들고 나와 선다. 둘째 상좌의 자진 타령 춤이 끝난 무렵이면 재금을 쟁쟁치면서 중앙으로 나선다. 그러면 둘째 상좌는 놀라서 춤을 멈추고 뒤에 가서 앉는다. 옴중이 불림 (자신을 남, 즉 구경꾼에게 알림)을 하고, 바라춤을 시작하면, 둘째 상좌가 뛰어나가 재금을 낚아 챈다. 부아가 난 옴중은 재담을 한 후,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상좌에게 다가가 함께 춤을 추다가 상좌를 쫓아내 버린다. 옴중 혼자서 불림을 하고 춤사위로 전진 후퇴 하였다가, 건드렁. 용트림으로 춤을 춘다. 이어 타령으로 활개 펴기. 건드렁. 화장무를 추자, 먹중이 반 장삼을 입고 나오서 처음은 옴중과 재담을 하다가 온갖 말로 그를 헐뜯으면서, 또는 함께 재담을 하며 다투더니만 타령장단 춤을 추며 나간다.
셋째 마당 : 연닢.눈끔적이
흰 장삼에 청동 대를 두른 연잎의 차림새는 청동 한삼이 덧 대어졌다. 흰 고깔을 쓴 채 청동 머리띠를 두른 눈끔적이는 정자관을 썼으며, 둘 모두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굿거리 장단 춤을 추면서 놀이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이편에 서서 계속 춤을 추면, 8먹중 가운데 세 명이 누른. 붉은. 푸른 색으로 저마다 반 장삼을 입고 저편에서 들어와 춤을 춘다. 그러다가 연잎과 눈끔적이를 보고, 서로 무엇인가 보자면서 재담을 하고나서 한 사람씩 타령 장단 춤을 추며 다가갔다가는 놀라 되돌아 온다. 나중에는 서로 알아보고 짝지어 타령 장단에 깨끼춤. 건드렁. 멍석말이로 춤사위를 날리며 나간다.
넷째 마당 : 애사당의 북놀이
먹중 둘이 한 사람은 북을 들고, 다른 먹중은 북채로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한 바퀴 돈다. 그러고 나서 채를 든 먹중이 북을 치려하면, 북을 든 먹중이 이리 저리 피하며 여러가지 재담을 하고나서 타령 장단으로 춤추기 시작 한다. 그때서야 흰 저고리에 추록 치마를 입은 왜장녀가 큰 머리를 하고 허리를 드러네 놓은 채 엉덩이 춤을 추며 나타나면, 먹중이 북을 쳐보라고 북채를 건네 준다. 하지만 고개를 젓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돈을 달라고 한다. 먹중은 허리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주며 북채를 내민다. 그때서야 왜장녀는 이를 받아 가지고 나갔다가 애사당을 데리고 들어 온다. 애사당은 노랑 저고리, 다홍 치마에 쾌자를 걸치고 붉은 띠를 둘렀다. 큰 머리를 틀어 올렸으며 흰 고깔 쓴 차림으로 들어온다. 이를 본 왜장녀가 애사당에게 북채를 건네 주며 북을 치게 한다. 채를 받아든 애사당이, 먹중이 든 북을 둥둥 치다가 먹중의 이마를 때린다. 화가 난 먹중이 그것을 낚아채어 북채 두 개로 자진모리 장단을 치면, 먹중과 애사당, 그리고 왜장녀가 함께 어울려 춤추다 나간다.
다섯째 마당 : 팔먹중의 곤장놀이
먹중 여덟이 색색으로 반 장삼을 입고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나온다. 맨 앞에 나오는 먹중은 곤장을 들고, 뒷걸음으로 등장.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난 이들이 재담을 하면서 나무아미타불에 맞춰 타령 장단으로 춤을 춘다. 춤추고 나서야 곤장 든 먹중이 다른 먹중들을 한 명씩 때려서 내쫓는다.
여섯째 마당 : 신주부의 침놀이 팔먹중의 하나가 갑자기 쓰러지자 먹중들이 신주부를 불러와 완쾌시키는 장면으로, 팔먹 갑은 직접 치료도 해보고 손수 의원까지 불러와 완쾌시키는, 민중의 지도자이다. 팔먹중 하나가 쓰러지자, 먹중들이 '신맥이 뚝 끊어졌다.'며 신풀이로 백구타령을 부르느데, 이에 대해서 양주 별산대에서는 신명을 풀이 못해 마음의 병이 난 것을 신명을 통해 고치려하는 것이 그 의도이다.
여섯째 마당 : 신주부의 침놀이
굿거리 장단에 춤을 추며 들어온 8먹중들이 마당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계속 춤사위를 벌인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마당 가운 데에 쓰러져 엎디어 버린다. 이를 본 8먹중들 이 체했다면서 여러가지 재담 중에 신맥이 막혔다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백구 타령으 로 풀어보자면서 백구 타령을 한다. 그래도 낫지 않는다면서 침쟁이 신주부를 불러 온 다. 신주부는 흰 두루마기에 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 재담을 하면서 황침을 놓는다. 그러면 쓰러져 있던 먹중이 놀라 일어 난다. 먹중들은 그때서야 타령 장단 춤을 추며 나간다.
일곱째 마당 : 노장
굿거리 장단에 춤사위를 날리며 다시 줄지어 들어온 8먹중들이 타령 장단 춤을 추면- 노장이 검은 장삼에 송낙을 쓰고, 염주를 두른 채 붉은 가사에 부채와 6환장을 든 차 림으로 한쪽 편 구경꾼 옆에서 등장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선다. 그러자 8먹중들이 노래를 그치고, 노장의 검은 얼굴을 살핀다면서 먹중 하나가 타령 장단 춤사위로 노장 앞으로 다가간다. 코 앞에 다가설 때에야 노장에 부채로 먹중 얼 굴을 때린다. 얻어 맞고 돌아온 먹중이 노장 스님이라고 말 한다. 우르르 몰려간 8먹중은 노장을 모셔 온다면서, 그의 6환장을 한 손으로 움켜 잡고 굿 거리 장단 춤을 추며 이쪽으로 온다. 그런데 노장은 오지 않고, 6환장만 들려 온다. 8 먹중은 다시 나아가 6환장을 노장에게 잡게하여 모시고서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추며 마당 한 중앙으로 나간다. 마당 가운데에 웅크려 앉은 노장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8먹중이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먹중 하나가 죽장을 가져다 노장 앞에 놓는다. 먹중들은 노장을 생선이라면서 토막내어 먹자고 재담을 한다. 그때 먹중 하나가 다가 가서 팔을 들어 노장을 친다. 노장은 움칠하고... 먹중들은 타령 장단으로 화장무와 여닫이며 건드렁으로 춤을 추며 나간다. 먹중들이 퇴장하고 나면, 소무 두 명이 노란 저고리 다홍 치마 차림에 남색 쾌자를 걸친 밑으로 붉은 띠 두르고, 큰 머리 틀어 올 려 꽃을 꽂은 채 나와서 마당 양 옆으로 갈라서서 염불장단으로 자라춤을 춘다. 노장은 웅크린 채 고개만 들어 부채 너머로 소무를 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하고 춤을 추다가, 6환장을 짚고 좌우 소무를 살피더니,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려다가 다시 웅크 려 앉는 것을 반복하는 춤사위를 날린다. 급기야 일어선 노장이 부채를 펴고 팔을 들어 양쪽 소무를 부채 밑으로 번갈아 살핀다. 살피고 나서 여러가지 몸짓과 활개짓으로 화장무. 활개 펴기. 거드름 춤을 차례로 추며 오른 쪽 소무에게 다가가면, 소무는 싫 다고 몸을 뒤로 돌려 춤을 춘다. 노장은 다시 좌측 소무 쪽으로 춤추며 다가서자, 왼편 소무 역시 몸을 돌려 버린다. 노장은 염주를 벗어 소무 목에 걸어 주고, 우측 소무 쪽으로 춤추며 다가가면서도 연신 왼편 소무 쪽을 돌아 본다. 때를 같이하여 좌측 소 무는 염주를 벗어 땅에 팽개 친다. 다가간 노장이 염주를 주어 냄새를 맡다가 화가 났 는지 땅에 팽개 친다. 장삼도 벗어 던지고서 앞으로 나가 쪼그려 않아 양치질과 세수 하는 시늉을 한다. 소매자락으로 얼굴을 닦고서 품 속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 다듬는 시늉을 하고나서야 뒤돌아 보면, 장삼 팽개쳐진 곳으로 다가간 소무들이 염주를 주어 들고서 오라고 손 짓한다. 노장은 주저 앉아 투전을 꺼내 표를 떼는 시늉을 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돌 아온다. 그러면 소무는 손 사래로 오라고 부르고, 노장이 다가가면 장삼을 입혀 준다. 장삼을 입은 노장은 소무를 양 겨드랑이에 끼고, 염주를 함께 목에 걸고, 마당을 한 바퀴돌아 저편에 가서 앉는다. 붉은 옷차림의 원숭이는 그때서야 신장수 등짐에서 내 려와 고개를 파묻고 땅에 엎드린다. 그러면 신장수는 신을 사라고 외치고, 노장은 오 라고 손짓 한다. 신의 칫수를 물어 본 신장수는 신발 주는 시늉을 하고, 원숭이에게 값을 받아 오라고 한다. 하지만 원숭이는 소무와 놀아나다가 그냥 돌아 온다. 화가 난 신장수는 채찍으로 원숭이를 쫓으며 함께 퇴장 한다.
여덟째 마당 : 신장수
검정 깃이 달린 누른 반 장삼을 입은 신장수가 붉은 띠를 두르고 꽃달린 패랭이를 썼 다. 등에 원숭이를 업은 채찍을 든 신장수는 채찍을 든 채 굿거리 장단에 맞춰 천천히 마당을 돌고난 다음 노장이 않아 있는 반대 쪽에다 원숭이를 내려 놓는다.
아홉째 마당 : 취발이
푸른 장삼 차림인 취발이가 겨드랑이에 한삼을 끼고 녹색 고깔을 썼다. 손에 녹음으라 하여, 나뭇가지로 얼굴을 가리고서 비틀 거리며 들어와 재담을 한 다음, 타령 장단에 맞춰 여당이. 자진 화장으로 춤을 춘다. 그러다 노장 있는 곳을 보고서는 타령 장단 으로 춤사위를 바꿔 다가가면 노장이 부채로 취발이를 친다. 재담을 하고 난 취발이가 타령 장단에 따라 녹음으로 노장을 치면, 노장이 물러나 소무의 가랭이 밑에 숨는다. 취발이가 노장을 쫓으면, 노장은 소무 한 사람을 업고 나간다. 취발이는 남아 있는 소무를 보고, 같이 놀자고 하는데.....소무는 한사코 싫다 한다. 타령 장단 춤으로 소무를 놀리다가 상주풀이를 부른 다음, 다시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나서 상투 트는 재담을 한다. 이때 소무는 진통이 나서 배를 문지르며 신음을 하는데.... 이를 본 취발이가 해산 어멈을 부른다. 해산 어멈은 왜장녀 차림으로 짚뭉치를 머리에 이 었다. 그리고 엉덩이 춤을 추며 나와서 소무에게 다가가, 동자 인형을 소무 치마 속에 서 꺼내 들면 취발이가 받아 든다. 짚뭉치를 챙겨든 해산어멈이 소무를 데리고 나간다. 동자 인형을 앞에 놓은 취발이가 천자 풀이. 언문 뒤풀이로 글을 가르친다. 밥벌이 (장타령)를 가르치다 말고, 동자를 들고서 소무를 부른다. 소무가 마오자, 동자를 소 무에게 주는데... 소무는 동자를 땅에 내동댕이 친다. 취발이는 소무를 꾸짓고,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동자를 안고 나간다.
열번째 마당
검정 저고리에 패랭이를 쓴 말뚝이가 채찍을 들고 굿거리 장단에 맞춘 뒷걸음으로 나 온다. 뒤로는 도포를 입은 샌님이 정자관 차림으로 따르고, 두루마기를 걸친 서방님은 갓을 썼으며, 옥색 두루마기에 쾌자를 걸친 도련님이 복건을 쓰고 나온다. 마당을 한 바퀴 돈 샌님. 서방님. 도련님 등이 저편 가로 가서 나란히 서면, 마당 중앙으로 나온 말뚝이는 춤을 춘다. 샌님이 말뚝이를 불러 사처를 정하라고 한다. 그 말에 말뚝이는 툴툴거리다가 타령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의막 사령인 쇠뚝이를 부른다. 쇠뚝이는 노란 반 장삼 차림으로 나와서 말뚝이와 재담하고 상전을 흉본 다음, 사처를 정 할 것을 부탁한다. 말뚝이는 상전에게 돼지 우리를 사처로 정했다면서, 채찍으로 돼지 몰 듯 상전을 몰아 부치며 타령 장단 춤을 추면서 퇴장한다.
열한번째 마당 : 샌님. 미얄할미.포도부장
도포 차람에 정자관을 쓴 샌님이 소무의 어깨를 안고, 굿거리 장단 춤을 추며 나와서 마당을 한 바퀴 돈다. 그러고 나면 포도부장이 흰 두루마가에 갓을 쓰고 나와 저쪽 편 으로 가서 선다. 그때서야 미얄 할미가 흰 치마. 저고리에 지팡이를 짚고, 보퉁이와 부채를 들고 나온다. 이를 본 샌님이 소무를 뒤에 숨긴다. 샌님과 미얄할미는 서로 찾아 다녔노라면서 재담을 한다. 샌님이 소무를 소개하자, 미얄 할미는 욕을 하며 달 려들어 소무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미얄 할미가 나둥그라진다. 샌님을 말리고-- 미얄 할미는 욕을 하며 굿거리 장단에 맞춰 나가 버린다. 샌님과 소무가 어울려 춤을 추는데.... 포도부장이 다가가서 넘겨 보다가 따라서 춤사위를 날리더니만, 소무의 양 손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춘다. 샘이 난 샌님이 포도부장을 쫓아 버린다. 샌님은 소무를 달래고, 다시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 포도부장이 다가와서 소무의 양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샌님을 가로 막고 돈다. 급기야 샌님이 포기하자, 포도부장과 소무가 함께 춤을 추면서 퇴장 한다.
열두번째 마당 : 신할애비.신할미
흰 두루마기 차림인 신할애비가 허리에 보따리를 맸으며 부채를 들었다. 지팡이를 짚 고 굿거리 장단에 맞춰 어정거리고 들어와서는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저쪽으로 가서 춤 을 추면, 흰 치마. 저고리에 지팡이를 짚은 신할미가 부채를 들고 나온다. 어정거리며 뒷걸음으로 들어온 신할애비 뒤로 가서 실수인 척 엉덩이를 부딪친다. 그리고 서로 돌아 본다. 신할애비는 신할미를 보고,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이 싫다면서 죽으라고 타박 한다. 그러면 실할미는 서럽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다가 넘어져 죽는다. 신할미의 죽음을 확인한 신할애비는 아들 도끼를 부른다. 도끼는 반 장삼을 입고 나 타나, 신할미의 죽음을 확인하고 병신짓을 하면서 저쪽으로 가서 누이를 부른다. 흰 치마. 저고리 차림으로 나타난 누이는 도끼와 재담을 하고, 신할미 쪽으로 가서 우는 시늉을 한다. 동네 사람들이 나타나 신할미를 운력해 나가자, 상복으로 갈아 입은 도 끼와 누이는 마당 가운데에 차려놓은 젯상 앞에 선다. 이어 노랑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쾌자를 걸친 무당이 빗갓 차림으로 부채와 방울을 들고 나와서 노랫가락을 부른 다. 그리고 공수 (죽은 사람 뜻이라고 전하는 무당의 말)를 주면서 당악장단에 맞춰 춤을 춘 다음, 창부타령을 부르고 나서 또 다시 당악장단에 따라 춤을 추면.... 모든 놀이꾼들이 마당으로 나와서 한 바탕 춤사위를 벌이고 나간다.
4. 동래야유
1) 들놀음이란?
1967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동래야류는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옛놀이터를 근거로 전승되고 있는 탈놀음의 일종이다. 동래야류는 오광대와 마찬가지로 해서(海西)의 탈춤, 중부지역의 산대놀이와 함께 한국 가면극의 3개 주류에 드는 가면극 의 영남형으로 보고 있다. 동래야류는 동래 들놀음으로 불리어진다. 산놀음을 산유(山遊), 냇가놀음을 천변유(川邊遊)로 부르듯 야류는 들놀음을 한자 로 표기한 것이다. 정월 대보름 저녁 온 동네가 들썩거릴 정도로 마을 사람 모두가 구경꾼이요 연희자(演戱者)로 참여하는 대동놀음으로 놀 아졌던 동래야류는 지신밟기로 시작된 탈놀음에 앞선 길놀이가 상당히 규모가 컸었으나, 이제는 길놀이는 거의 없어져 가 고 4개의 과장만이 하나의 공연으로서 전승되어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동래민속예술보존회가 80년대에 들어와 길놀이의 지신밟기를 재현하여 부산의 지방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어 동래야류의 앞놀이 복원에 힘쓰는 중이다.
연희시기는 앞서 말한대로 정월 대보름이었으며 준비과정은 야류 탈놀음 계원들이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동네 각 집을 돌며 "지신밝기"를 하여 비용을 마련한다. 음력 정월보름날 동부, 서부간의 줄다리기가 끝난 이튿날 밤에 동래 중앙통 광장 패문리에 무대를 가설하여 놓고 놀았다. 무대는 목재를 사용해 관중보다 약간 높게 만들고 관중은 삼면에서 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악사석은 무대를 향하여 왼쪽에 있다. 이 놀음은 밤에 연희되므로 연희 때는 무대 좌우 적당한 곳에 불을 밝히고 놀음판을 좀더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제등을 공중에 달았다.
2) 탈의 종류
사용되는 등장인물의 탈은 원양반, 차양반, 셋째양반, 넷째양반, 종가집도령, 말뚝이, 문둥이, 할미, 제대각시 등이고 탈의 재료는 셋째양반처럼 털가죽으로 만든 것도 있으나 대개는 바가지로 만든다. 가면 좌우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굵은 노끈을 꿰어서 붙잡아 매게 되어 있다. 원양반(元兩班), 차양반(次兩班), 모양반(毛兩班), 넷째 양반, 종가 도련님의 가면은 가면의 하반부인 입술 밑, 턱은 좌우에 노끈으로 연결시켜 재담을 할 때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어 훨씬 재미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놀이가 끝난 뒤에는 탈을 마을의 동사(洞舍)나 공청에 보관하였는데, 탈에 악귀가 붙는다하여 집에 보관하기를 꺼리는 까 닭이다.
3) 놀음의 순서
놀음의 내용은 앞 뒤 둘로 구분되는데, 앞은 길놀음과 군무 및 잡희로 이루어지고 뒤는 탈놀음이다. 들놀음을 하는 날 해 가 지면 먼저 길놀이를 한다. 그리하여 놀음판에 도착하면 길놀이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춘 뒤 탈놀음이 시작된다.
탈놀음은 총 4과장으로 이루어 지는데, 첫째 과장은 문둥이가 나와 미쳐 날뛰다가 뒹굴면서 춤을 춘다. 이것은 문둥이의 원한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영남의 들놀음이나 오광대에만 보이는 문둥이탈은 이 지역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등장인물이 다. 특히 고성오광대나 통영오광대에서는 문둥이탈이 하나씩인데, 동래야류에서는 문둥이탈이 2개 쌍으로 등장한다.
제2과장에 나오는 문둥이춤은 비중도 크고 표현도 다채롭다. 문둥이탈은 호제(瓠製) 흰 면에 붉고 푸르죽죽한 널따란 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눈썹은 없고 눈, 코도 뭉그러졌으며 입은 비뚤어졌다는 것이 65년 최상수 조사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자료 <동래야류가면극>에 나오는 보고이다. 요즘은 살색 면에 흰 반점이 찍힌 가명을 쓰고 있다.
평복에 중대님으로 차린 두 사람의 문둥이탈은 조막손에 소고와 북채를 들고 등장해서 북을 치며 춤을 추기도 하고, 여기 저기 긁적거리는 등 문둥이의 생활상을 표시한 갖가지 동작을 한다.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나 하급 관속들 중에 가무에 소양이 있는 사람들이 놀아온 이 놀음의 연희자들은 모두 남자였으나 이제는 전수생 중에 여자도 상당수가 있어 문둥이 탈춤은 여자들이 전수 받아 추고 있다.
동래야류에 나오는 양반탈들은 둘째 과장에서 하인 말뚝이가 불평불만을 폭로하면서 양반을 모욕하는가 하면 곁말로 조롱 하며, 샌님의 대부인과 사통했다고 하며 양반 체면을 손상시키고, 셋째 과장에서는 영노라는 괴물에게 더욱 신랄하게 모욕을 당한다.
"쉬, 엿다. 이 제에미를 붙고 금각대명을 우둥우둥갈 이 양반들아, 오늘 날이 따따무리하니 온갖 짐생 다 모았다. 손 골목에 돼지새끼 모은 듯, 옹달샘에 실뱀이 모은 듯, 논두렁 밑에 돌나무생이 모은 듯, 삼도 네거리 히뜩새 모은 듯, 떨어 진 중의 가랑이 신 대가리 나온 듯, 모도모도 모아 가주고 말뚝인지 개뚝인지 부르는 소리가 귀에 쟁쟁"
말뚝이 입에서는 온갖 잡소리로 양반에게 욕을 보이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양반들은 있는 지혜 다 짜내어도 말뚝이 둘러 대는 소리에는 꼼짝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욕을 보다보다 말뚝이 아들 신세까지 됐던 양반들, 영노과장에 이르 면 아예 양반을 벗어 버린다. 영노가 "양반 아흔 아홉 잡아묵고 네 하나 잡아 묵으면 등천(登天)한다."고 소리치자, 비비양반 얼른 "나는 양반 아니다." 고 꽁무니를 뺀다.
"그러면 뭐꼬?" 라는 영노의 질문에 "내가 똥이다."라고 궁상을 떤다.
영노 : 똥은 더 잘 묵는다.
양반 : 내가 개다.
- 중 략 -
양반 : 내가 구리(구렁이)다.
영노 : 구리도 잘 묵는다.
이렇게 되면 양반 체면에 별별 잡스러운 짐승 노릇까지, 그것도 자청해서 하는 꼴이 된다.
넷째 과장인 할미영감과장에서는 영감과 할미탈 제대각시가 등장하고 의원, 무당, 봉사, 상여꾼까지 등장하게 되는데, 영감 이 첩을 얻자 본처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본처와 첩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영감은 화병으로 죽고 만다.
5. 고성오광대
1) 오광대에 대하여
연출 형태는 여타와 비슷하지만 음악은 꽹과리를 주로하고 장고와 북을 곁들인다. 오광대놀이에 공통되는 요소로서 영노(백성의 힘과 열망을 실체화시킨 가상의 힘과 열망을 실체화시킨 가상의 동물) 혹은 비비과장이 들어 있으며, 가산과 진주의 오광대놀이에는 판열음을 하는 오방신장무라는 춤이 전해진다. (중요 무형문화재 7호)경남 고성에서 19세기 말 성립되어 전승되어 온 탈놀이로서 주로 정월 대보름에 놀았다. 들놀이라고도 부르는 '야유(野遊)'와 함께 초계 밤마리를 기원으로 두며 이것이 서쪽으로 전승된 것이 오광대놀이이다. 오광대놀이에는 공통적으로 5방위를 상징하는 다섯 광대가 나와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을 빌어 준다. 고성 오광대는 오광대 중 비교적 고형(古形)으로 수영야류와는 달리 신앙적 의의는 없고 다만 오락 위주의 장터놀이로 이루어졌다. 1970년 중요 무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2) 놀이의 순서
제 1과장 문둥 광대과장
영남 지방에만 있는 이 춤은 이 지역에 문둥이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춤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문둥병이 걸려 부자유스런 춤을 추다가 점점 춤이 자유스러워지면서 내면적인 환희와 해방을 이루는 소고춤을 추게된다. 즉 정상인으로서 춤을 추면서 퇴장하는 문둥이의 모습은 사람취급조차 못받고 살던 그에게는 신체적 구속을 벗어난, 인간으로의 해방을 나타낸다.
제 2과장 오광대 과장
원양반, 청제, 흑제, 홍백, 적제, 백제, 도령 등이 말뚝이의 비판과 조롱을 받으며 멸시를 당한다.
제 3과장 영노과장
양반과장 끝날 무렵에 이 세상의 무엇이든 다잡아먹는 괴물 영노가 등장한다. 그리고 양반은 비비양반이 등장한다. 비비란 갖은 횡포로 평민들을 괴롭히는 양반을 위협 조롱하면서 양반 등살에 쌓였던 평민들의 울분을 풀어준다.영노가 입에 대풀잎을 물고 비비 소리를 내기에 비비라 한다. 비비양반은 비비에게 여러 꾀를 내며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한껏 조롱 당하다가 끝내는 비비와 춤을 추며 퇴장한다.
제 4과장 승무과장
노장이 나와 2명의 소무를 희롱하며 대무를 춘다. 이는 승려의 타락상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중북부지방의 탈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진 주제이다. 대사는 없으며 춤으로서 여자를 꼬셔내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제 5과장 제밀주 과장 본처인 할미가 영감의 첩인 제밀주가 낳은 아이를 두고 다투면 영감이 제밀주 편을 들면서 뜯어 말린다. 도중에 아이가 떨어져 죽게되고 영감은 할미를 때려 죽인다. 상두꾼을 불러 출상하게 된다.
5. 그밖의 탈놀이들...
1)남사당 덧뵈기 (중요 무형문화재 3호)남사당 덧뵈기는 남사당놀이의 한 부분이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남자들로만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했는데,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둑각시 놀음) 등 여섯가지 종류의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전승의 탈놀이에 비하여 의식이나 행사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노는 지역사람들의 흥취에 부합하였고, 춤보다는 놀이꾼의 재담과 연기에 더 큰 비중을 둔 풍자극이다.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의 네 마당으로 이루어진다. 남사당 덧뵈기는 떠돌이패의 놀이라는 점에서 농촌 두레패 탈놀이의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넘어 도시적, 세속적 생활공간 속에 열린 축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2) 강릉관노놀음
강릉관노놀음은 강릉단오제에 행해지던 놀이였다. 이곳 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 시작되어 5월 1일부터 본제를 시작하였는데 관노놀음은 본제부터 단오 날까지 서낭당 앞뜰에서 놀았다. 대사는 없었다고 한다. 구한말까지 행해지다 전승이 끊겼다. 모두 4과장으로 이루어지며 양반의 오해로 죽은 소매각시를 용서하는 대목에서 끝을 맺는다. 놀이가 끝나면 동민이 함께 장내에 들어와 군무를 추었다. 모두 4과장으로 이루어지며 양반의 오해로 죽은 소매각시를 용서하는 대목에서 끝을 맺는다. 놀이가 끝나면 동민이 함께 장내에 들어와 군무를 추었다.
Ⅲ. 결론
1. 그 밖의 또 다른 문제
초기에는 모든 지역에서 탈춤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이후 농촌 탈춤에서 도시 탈춤으로 전이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중세 후기에 들어서며 실학 사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이 형성되고 계급질서가 천천히 붕괴되어 간다. 상업자본의 형성의 결과 전문 예인집단이 생겨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고 도시에 시장이 형성되며 시장에서 상인들에 의해 초청되어 탈춤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농촌탈춤이 도시 탈춤으로 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앞 서두에서 밝힌바와 같이 탈춤을 크게 '북부탈춤', '중부탈춤', '남부탈춤'으로 나누어 볼 때 북부탈춤의 전승지역이 봉산, 해주, 강령, 은율, 황해, 안악, 재령, 신주, 장안, 송화, 기린, 신안, 서흥, 신막, 평산, 송림, 추화, 금산, 연백 등이 있는데 그 지역들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대동강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부 탈춤은 서울 녹번동, 아현동, 노량진, 퇴계원, 사직골, 송파, 경기도 양주구읍 등이 한강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고, 남부탈춤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부의 수영, 동래구읍, 부신진등에 야류(들놀음)이, 서쪽에 충무, 고성, 사천, 진주, 마산, 산청, 김해 가락, 창원 진동, 거제 등지가 강을 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승되는 과정에서 왜 호남지방도 강을 끼고 있고 도시가 형성되었지만 호남지방은 탈춤이 계승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농촌탈춤에서 도시탈춤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탈춤이 볼거리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예인집단을 고용해서 탈춤을 공연하였는데 소비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 사람들이 모이게되고 그래서 물건을 파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은 곡창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주로 사기보다는 팔기위한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굳이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 호남지방은 광활한 농토를 소유하고 또한 들판에서의 노동이 힘들었다. 그래서 들노래가 발전하였고 또한 판소리의 형태가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판소리는 시나위권 중심의 호남지방에서, 탈춤은 강을 낀 산악지역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와 탈춤의 분포는 상보적(相補的)분포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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