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주(굿연구소 소장)
첫번째
굿의 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초기에 굿판에서 직면하는 당혹스런 상황 중의 하나는 굿쟁이들이 자신이 하는 굿, 자기 동네굿이 최고라는 의식이 확고하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으며 이를 찾아 온 손님이 인정하기를 바라는 강렬한 욕구와 직면할 경우였다. 짧은 안목에 구분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설사 별 볼일 없는 것이라는 판단(그 판단 기준이 문제였지만)이 선다 하더라도 이를 내 놓고 '뭐 시시하네요'라고 면전에서 핀잔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충 고개만 끄덕거리며 상황을 모면하기 일쑤였다.
또 한가지 신기했던 것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이웃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굿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경우다. 아주 다르거나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섬세한 부분에서 꼭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질굿의 가락수가 차이가 난다거나 가락 구성이 다르다거나… 바로 옆 동네인데도 왜 다를까? 왜 최고라는 의식을 갖게 됐을까? 너무 우물안 개구리식의 편협한 사고는 아닌가?
이런 의문은 굿을 많이 보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는데 결론은 이렇다. 최고라는 의식이 억지가 아님.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신명으로 나름대로의 맛과 멋과 매력을 갖고 있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최고임. 고로 굿의 양식은 전부 다를 수밖에 없음. 굿을 잘 살펴보면 그 사람들의, 그 마을의 풍광, 지세, 성격, 언어, 생산물 등과 아주 잘 어울려 독특한 매력과 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말(언어)만 하더라도 강원도는 강원도대로, 충청도는 충청도대로, 전라도는 전라도대로, 경상도는 경상도대로 그 말이 쓰이는 동네에서 그 사람들이 쓸 경우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야기하는 모습과 분위기가 쫀득쫀득 할 정도로 <참! 맛있다>라는 느낌이 강렬하였다('맛있다'라는 표현 이상으로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음). 뺄 것도 없고 더 보탤 것도 없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굿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교와 세련미가 있으면 풋풋한 맛과 진솔한 맛이 덜하고 투박한 맛이 있으면 화려한 맛이 떨어지나 감흥의 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니, 어느 한 잣대(그것도 보는 사람의 구미에 맞는)를 대어 우열을 가릴 성질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그것이 자신들의 생활공간에서 꼭 필요해서 하고 그것을 통해 꼭 필요한 부분을 해결하고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표현하고 만끽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면, 그 이상도 필요 없으며 그것으로 최고인 것이다. 그러니 옆 마을과 꼭 통일을 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같은 가락을 쳤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각기 개성과 미의식이 발현되어 나름대로의 양식을 구축해가며, 옆 마을과의 선의의 경쟁의식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데 기여할 테니 다를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 동네가 중심이고 우리가 최고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온 민족, 그 문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줏대 있는 민중, 개성 있는 문화(나는 <꼴림(멋대로)>의 문화라고 불러본다)라고 정리해도 좋으리라. 바로 이것이 수많은 내우외환을 겪는 질곡의 역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탱해준 힘의 원천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주 깊고 다양하고 진솔하면서도 힘이 있는 민중문화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두번째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개성있는 굿문화를 배양시켰던 토대는 이미 파괴되었으며, 줏대를 세우며 살기는 고사하고, 저들의 똥구멍 따라가기에 급급했음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자각과 의지는 피나는 노력과 희생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대학에서 노동현장에서 농성 현장에서 매스컴에서 공연장에서 심심찮게 풍물소리․탈춤소리․민요소리․단소소리… 등을 들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숨을 돌리고 돌아온 족적을 반추해 볼 땐 아쉬움이 남는다. 제대로 가고 있는가? 줏대를 회복하려는 방법과 푯대가 과연 우리 동네것(굿) 우리 민족것(굿)을 바탕으로 했는가? 그렇게 한다고 했지만 그 결과가 시큰둥한 것은 굿을 제대로 몰라서는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념의 많은 판들이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진솔하고 짚은(깊은) 맛을 느끼기가 힘들고 이를 느낄 감식력도 미약하다.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기예자랑이나 하는 판들만 난무하게 되니 진솔할 리 없고, 감각적인 테크닉만이 가치기준의 척도다. 그렇게 다양했던 유산들은 흔적을 찾기가 힘들고, 있는 것마저도 문화재지정 전국적인 지명도라는 무소불위의 잣대가 이들을 소외시켜 또 그렇게 쓰러져가게 만들고 있다. 맘껏 '꼴림'을 표현할 판은 만나보기 힘들고, 소위 예술가들의 폼자랑 구경이나 공연장에서 텔레비젼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문화인이다. 대중은 남이 골라준 입맛에 따라가기에 바쁘다. 굿의 주인(주체)은 마치 뛰어난 기량을 갖은 전문가들의 것인양 돼버렸다. 개성과 줏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꼭두각시와 앵무새들만이 판을 치고 또 양산되고 있다.
풍물소리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사물놀이가 굿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음), 또 그렇게 만들려는 의지가 꿈틀거리는 조짐. 시간이 좀 지나면 사물놀이, 필봉농악, 이리농악, 삼천포농악, 평택농악, 밀양백중놀이 등 몇몇 개의 양식만 남게 될 가능성. 그것마저도 종국에는 사물놀이화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자기동네(지역)굿을 찾아보기는커녕,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우습게 알고 사물놀이(특히) 필봉농악․이리농악을 배워다가 확산시키고 있는 한심스런 모습들. 또 이를 조장하는 대중의 감식력. 어느덧 기술자(소위 전문가로 자처하는 농악 사물놀이 기술자들)들만이 풍물굿의 주인인 것처럼 돼버린 풍토. 다 경계해야 할 현상들이다.
사물놀이는 하나의 새로운 현상(양식)이어야 한다. 그렇게 위치 지워져야 한다. 우리 동네굿은 이리 보고 또 저리 보아도 신통치 않다 하더라도, 이를 완전히 소화해 놓고 딴 것을 결합했을 때 천하의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온다고 해도 당당이 견줄 수 있는 배짱과 길이 열릴 것이다. 제아무리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할아버지께서 오신다 해도 꼭 한 수 가르쳐줄 밑천이 생길 것이다.
왜 사물놀이들이 째즈하고 만난다 그림하고 만난다 법석인지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동네 역사, 살아왔던 사람들의 기질, 특기 등, 살아온 방식, 난국에 대처해 나가는 모습과도 만나게 된다. 우리민족을 지켜온 힘과 그 방법론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사물놀이 이상(以上)가는 또 다른 현상(양식)들을 우리는 창조해야 한다. 결코 희망사항이 아니다. 이를 가능케 할 질 높고 다양한 유산을 우리는 물려받았다. 인식의 전환만 이뤄진다면, 다양한 굿 유산을 제대로만 소화해낼 수 있다면, 굿의 주체가 다시 생활인이 된다면…….
세번째
노동조합의 풍물꾼들, 아마추어 동호인들, 아직도 농사지으면서 때 되면 당산굿 치는 사람들, 아직도 고기 잡다가 때 되면 군고치는 동네사람들, 자기 동네굿을 이어보려고 애쓰는 젊은 기운들, 자기 동네 굿을 이어보려고 낮에 들일하고 저녁에는 마을회관에 나와 두들겨대는 아줌마 아저씨들, 사물놀이 배우다 자기 고향 굿으로 방향을 바꾸는 향우회사람들, 새롭게 굿을 배우는 주부들 학생들…. 아직은 그 힘과 몸짓이 미미하고 어설프지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중시해야 한다. 그 중요성과 가치를 알아야 한다. 이들이 굿의 진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굿들이 자기들의 생활공간에서 살아있는 문화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 기능해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힘을 서로 북돋아줘야 한다.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가락과 양식을 만드는 일을 굿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줏대와 개성을 회복해야 한다. 줏대와 개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현 단계 풍물굿 운동의 시급한 좌표가 되기에 충분하다.(영원한 숙제가 되겠지만)
먼저 전통적인 굿판의 명맥을 제대고 이어가고 있는 지역과 쟁이들을 찾아내어 전승력을 키워줘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굿을 제대로 전승하기 위하여, 멋들어진 문화와 역사를 우리가 창조하기 위해서는 꼭 지키고 갈무리해야 할 원천이요 생명수다. 이것은 확신이다. 아니 신앙이다. 나름대로 소화했다고, 졸업했다고, 아니면 일고의 가치가 없고 내 머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나 있다면 착각임을 단언할 수 있다. 파고 또 파도 나온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찾으면 해답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잔존물은 수천년 우리 조상(민중)의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결정체라는 것만 인식하고 넘어가자. 전국을 뒤져 보라. 자기동네를 다시 뒤져 보라. 비록 파편조각일망정 남아있을 것이다. 이를 잘 닦고 꿰맞추는 작업이 당분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길게 봐도 10년이 지나면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연행양식뿐만이 아니다. 토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마을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굿이 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을수록 굿의 본질에 가까이 가는 길일 것이다. 현시점에서는 지역풍물패나 지역문화단체와의 연계가 바람직할 것이다. 노조풍물패가 그 사업장에서 생산하는 생산물과 연관 있는 생산물(원료, 소비처)을 생산하는 지역과의 만남이 함께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향우회의 풍물패결성 운동과 자기 고향 당산굿 살리기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동호회모임과 농산물직거래사업과의 결합방식을 연구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둘째, 노조 풍물패 등 생산현장의 풍물굿 운동의 활성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 사업장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단순한 기량전달, 정치투쟁일변도, 선전선동 일변도의 연행방식에서 생활과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생산력 증대에 기여하는 굿으로서, 농산물직거래와 결합시키는 매개로서, 노조원들의 일상적인 문화생활을 풍성하게 해주는 굿으로서... 증대된 생산물에 대한 정당한 몫을 나누어 갖는 문제는 지금까지 싸워온 경험을 잘 살려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셋째, 자생적으로 결성되어 자기공간들을 확보해 가는 동호인차원의 풍물패들의 계속적인 확대, 그리고 나름대로 굿의 본질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취미차원, 기량습득 차원에 머무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도 중요한 기능과 역할이 있다. 그러나 자칫 개성과 줏대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뭔가 성취감을 더 느낄 수 있는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공간이 위치한 지역과의 다각적인 만남을 찾을 필요가 있다. 봉사차원의 활동, 전통 풍물굿의 토대와의 만남 등, 자신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만남들을 계속적으로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넷째, 풍물굿의 이론가들과 연구 성과물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나와 있는 것도 부분적이고 초보단계다. 방향을 잡아줄 풍물굿 미학의 정립과 생성원리(창작원리)를 하루바삐 찾아야 한다. 이를 찾아가는 방법은 철저히 굿의 관점에서 보려는 자세로,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연구하기를 권하고 싶다. 우리가 한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요 과제다. 그것을 바탕으로 남의 관점과의 비교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지 아닌지, 취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다시 만들어 가야 할 것인지. 지금까지 남의 잣대(미학, 철학, 이데올로기, 방법론)로만 굿을 보아왔다고 단언할 수 있지 않은가?
다섯째, 소위 전문가를 자처하는 농악기술자들, 사물놀이 기술자들. 정신이 죽은 테크닉,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기술자는 이용당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기량이 돈버는 상품 이상의 의미가 없을 때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할말이 없지만 예술가이고 싶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더더욱 시대와 역사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테크닉만 갖고서 천하 통일을 꿈꾼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혹 기량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이 순간부터 힘을 빼라. 앞에서 살펴본 방법들은 검증이 끝난 것들이 아니다. 실천하면서 찾아가야 할 수밖에 없다. 찾아가면서 다양한 방법들을 또 찾아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단지 시행착오를 최대 한 줄이는 우리의 노력과 인식의 전환이 더욱더 요구될 뿐이다.
굿은 살아 숨쉬는 토대였다. 두레․계․공동체에서의 굿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반면, 대학에서는 학과 단위까지 풍물패가 조직되고 노동조합이 결성된 단위사업장에서 풍물패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으며 동호인 모임의 자생적인 패거리가 서울시내만 수십을 헤아리며 시․군 단위에는 적어도 한 개 이상의 풍물패나 문화단체가 결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길거리에서 장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심심치 않게 보게 되었으니 풍물인구의 계속적인 확산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은 현실이다.
개성과 줏대를 가진 민중들이 전통적인 맥을 바탕으로 생산방식과 물적인 토대, 인적자원의 조건에 따라 자기 생활 공간 속에서 상황에 맞추어 굿, 메구, 두레굿, 풍장굿, 풍물, 군고, 금고, 걸궁, 걸립 등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이들이 주체가 되어 생활 그 자체로서 기능하고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던 굿을 지금에 와서는 농악, 사물놀이 혹은 풍물굿, 풍물놀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예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확산의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생활의 주체들이 풍물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서 전락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하고 이런 이름들을 붙여준 일부 집단이나 계층의 의도와 의식을 절대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하니 양적인 확산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의도와 의식이 어떤 형태로든 효과를 거두고 파급력을 획득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국면을 맞이한 것은 우리 민족이 역사의 단절을 겪고 공격적인 외래문화의 침투, 매판성을 띤 정치세력에 의한 탄압이 원인이라고 분석하는데 별반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의도와 의식이 역사의 단절과 파괴에 일조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이다. 특히 전혀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접하게 되는 일반 대중이 객체로서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선택하기 위해서는 각 용어가 갖고 있는 의도와 의식을 정확히 읽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네번째
농악(農樂)이라는 용어에는 민족의 정체성, 정통성을 보존하고 자기발현의 힘을 배양시키는 토대이며 이를 저해하는 요소에는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는 속성을 가진 굿을 하찮은 존재(농민)들의 기분풀이(樂) 정도로 어떻게든 폄하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이는 원초적인 생명력과 무서운 결집력, 폭발적인(신명이 바탕이 될 때) 파괴력을 갖는 굿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이의 대표적인 실례는 일제가 시장에 관한 법, 집회에 관한 법과 같은 법령까지 제정하여 당산굿을 금하는 등 굿을 통제했으며, 착취를 해갈 생산물획득의 경우(농사장려)에만 집회허가를 주기 때문에 농악이라는 명칭으로 주재소에 신청을 해야만 굿을 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마저도 일제말기에는 숟가락까지 훑어가는 놋쇠공출의 무서운 회오리에 쇠와 징도 운명을 같이했으니 농악이란 이름으로도 굿을 칠래야 칠 수 없는 상태까지 내몰린 것이다. 이 전통(?)은 그대로 해방 후 까지 연결되어 도시는 물론 농촌과 어촌에서까지, 행정계통뿐만 아니라 일반인까지도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어느덧 농악은 해방 후 민속학계의 학술용어로도 굳건히 국가나 관변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화행사(전국농악경연대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전주대사습 등)에는 농악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인 용어로서 그 위력을 발휘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민속예술이라는 관점, 굿의 정신과 기능을 제거하고 원형론에 입각한 양식만을 보존책으로 채택 한 문화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생산방식의 변화로 토대를 상실한 생활로서의 굿을 그 주체로부터 더욱 유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굿의 주체는 마치 뛰어난 기예를 갖는 농악전문가(기술자라고 보통 이야기하였음)들의 것처럼 인식을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기예자랑을 위한 공연형식의 연행방식과 기예를 겨루는 경연대회방식의 대회를 정착시켰다. 그 영향은 예술가 지향형 인간문화재 지향형의 농악전문가들을 양산하게 되고 농악을 상품화하게 되어 민속촌농악과 같은 형태를 잉태시키기도 한다.
해방 후 지금까지의 전통문화정책을 수립하는데 이론적인 토대와 방안을 제시했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정병호 교수는 1986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농악이라는 책 후기에 농악(農樂)의 속성과 자기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농악에 대한 연구는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비교적 진전이 되어있어서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농악은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춤, 연극, 놀이, 사설과 같은 예능적 요소에 대한 연구는 이번이 첫걸음인 셈이다. 또한 농악은 이러한 예술적 형식 못지 않게 그 본질과 기능을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 방향을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 큰 난점이었다.
굿에 대한 기존학계와 제도권의 연구는 농악(農樂)이라는 용어가 쳐놓은 그물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걸려들어 굿을 병신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으며, 일반인의 의식에 기형적인 모습으로 굿을 그려주었고 굿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관심과 시각을 봉쇄하거나 봉쇄당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나 정부조직에서는 농악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굿의 본질을 제대로 반영할 학술용어를 찾거나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표면적으로 거의 발견하기 힘들다. 사물놀이의 등장 이후 일반 대중의 뇌리에서는 농악이라는 용어가 거의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악이라는 용어가 갖는 의도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도 국가정책차원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사물놀이는 1978년에 사당패의 후예들인 30대 전문예인 4인이 단체를 결성하면서 민속학자의 자문을 받아 붙인 단체명이었으나 지금은 그들이 보여준 연행물의 성격과 내용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에게는 굿 = 사물놀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물놀이가 10여 년의 짧은 기간 내에 농악이라는 용어를 물리칠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 배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배경의 검토는 사물놀이의 공과를 판단하는데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양식면에서 보면 기예가 생존수단이었던 사당패의 높은 기예를 온전히 계승한 점, 굿의 본질이 살아 숨쉬는 난장판을 생활로서 직접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체험함으로서 수천년의 조선민족 심성에서 우러난(미의식이 농축되어 스며있는) 가락과 원초적인 생명력과 폭발적인 신명을 감각적으로 표출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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