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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흉내나 낼라고 병신춤 췄겄어?” 공옥진님[김인정님글]

花受紛-동아줄 2010. 1. 13. 14:26




김인정
김인정님은 소설가로, 방송작가로 다양한 매체에서 글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광주MBC <오정해가 만난 사람>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흉내나 낼라고 병신춤 췄겄어?”
공옥진

영광군 영광읍에 가서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공옥진씨 집’에 가자면 된다. 동리 이름을 따로 댈 필요도 없이.
그렇게 택시에서 내려서 찾아간 집이 비어 있으면 인근의 밭을 뒤져봐야 한다. 수확이 끝난 빈 고구마밭에 수건을 쓰고 둘러앉은 할머니들 가운데 유독 호미를 흔들어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이 공옥진이다. 다가가 노래가락을 들어보면 육자배기도 나오고, 진도아리랑도 나온다.

“고구마밭에 앉아서 소리를 해도 어쩔 때는 박수소리가 ‘우’하고 들리지. 박수소리 들으면 또 신명이 나고. 아니 글구, 땅을 깊숙허니 파 보믄 이러고 오진 놈들이 들었는디, 내가 방구석에 들어앉었으믄 이 오진 놈들 다 썩힐 것 아닌가? 캐서 동네 노인들 쪄주면 좋지 않어?” 황토밭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수건을 풀어 몸에 들러붙은 흙을 툭툭 털어 내며 그가 중얼거렸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 지났다. 옥진이가 또 하루 넘겼다!” 
 
여자 춤의 개념을 바꿔버린 혁명가 
여자 춤꾼이라면 으레 고운 옷에 사뿐사뿐 날아갈 듯 곱상한 춤을 떠올리게 되지만 공옥진의 춤은 달랐다.
사지를 뒤트는 곱사춤, 눈 먼 심봉사가 절룩거리다 거꾸러지는 춤, 남자들도 엄두를 못낼 독특하고 과감한 춤사위…. 대체 어떻게 이런 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우리 아버지가 공대일 명창인데 징용에 끌려 가셨어. 소리 해서 가솔들 거두셨는데. 하도 가난하니 나를 몸종으로 판 거야. 천원을 받구서. 그래도 하필 춤꾼한테 팔렸어. 걸레질 해놓고는 혼자 춤을 춰 보곤 했는데, 하루는 최승희씨가 오더니 묻더라고. 그렇게 춤을 추고 싶냐고.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한번씩 동작을 잡아주더라고.”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고 자란 소녀에게 최승희의 춤은 또 다른 세계였다. 무용실 걸레질을 하고 나면 혼자 최승희의 춤을 춰보곤 했다. 어느 날부턴가 최승희가 동작을 바로 잡아주기 시작했다.
“병신춤도 내가 괜히 흉내 낼라고 췄것어? 내 남동생이 벙어리였어. 조카가 곱추였지. 남동생이 무등극장에서 기도를 봤는데, 깡패들이 공짜영화를 보자고 밀어닥치는데 그걸 막다가 몽둥이에 맞아죽었어. 남은 조카가 하필이면 곱추라. 부모도 없는 조카가 내 가슴에 못으로 박혔어.”
아픈 이들의 속내를 위로해 주기 위해 소리를 하고 춤을 췄다. 속 모르는 이들은 장애인들을 비하하는 춤이라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공옥진에게 춤이나 소리는 그냥 배운 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었다.

“자기 설움도 없으면서 선생 하란 대로 따라 하는 소리나 춤이 예술일 거야? 아니야. 예술은 자기 속으로 울음 삼키는 한이 있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외로움이 있어야지. 목청 좋다고 소리하고 예술하는 거 아니야. 배워서 할 양이면 누가 못해?”

 

 

평생의 연인 국민가수 남인수와 만나다
열 입곱 살이 되던 해엔 군산명창대회에 나가 1등상을 받았다.
“명창대회가 있던 그날 군산극장에 공연을 온 팀이 있었어. 남인수, 황해, 고복수씨. 공연팀들이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오늘 군산에서 탄생한 처녀명창을 보자는 말이 나왔던 모양이라. 그래서 느닷없이 그 자리에 불려가게 되았제. 처음 그분을 봤는데 참말로 미남자였어.”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고나니 하얀 중절모를 쓴 신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미성가수 남인수였다. <눈물의 해협> <산유화> <추억의 소야곡> <감격시대> 등으로 남인수가 누리던 인기는 지금의 오빠부대 그 이상이었다. 거듭된 앙코르 요청으로 사회자가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공연장 앞에는 남인수를 모셔가기 위한 인력거꾼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소리꾼들보다 가수 인기가 좋아지던 시절이었지. 나는 첫눈에 그분이 좋았고, 그분 역시도 내가 맘에 남았던 모양이라. 뒤풀이 자리가 끝나고 따로 나를 불러내시더라고. 둘만의 시간을 막 가지려는데, 헐레벌떡 쫓아온 사람이 있었어. 그때 나를 따라다니던 경찰이었지. 집안도 좋고, 돈도 많고. 우리 아버지는 나를 그리 여울 생각이셨지만 나는 별 맘이 없었어. 그래도 쫓아와서 눈에 불을 켜고는 내 약혼자와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남인수씨와는 그렇게 이별을 하고 말았지.”
전후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해 주던 미성가수와 처녀 소리꾼의 만남은 그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관객하고 울고 웃고 하나 되는 순간이 있어”
공옥진은 얼마 후 아버지 바람대로 경찰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첫딸을 낳자마자 남편은 바로 옆집에 살던 공옥진의 친구와 살림을 차려 버렸다.
“둘도 없이 친한 친구도 잃고, 남편도 잃었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영 안 돌아왔어. 경찰한테 여우면 풍파없이 살 줄 알았던 아버지가 발등을 찧으셨지.”
차라리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공옥진은 머리를 깎고 구례 천은사로 입산을 한다. 하지만 한발 걸을 때마다 딸의 얼굴이 밟혀서 3년을 못 채우고 산을 내려와서 다시 무대에 선다. 임방울의 협률사와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보다 못하단 소리를 듣고 싶었겠어? 복수심도 있었고. 또 목청이 좋았어. 대본도 밤을 새워서라도 외워서 함께 연습을 할 때는 나 혼자만 손에 대본 없이 연습을 했으니깐.”
소리도 좋았지만 춤을 배웠으니 발림이 남달랐고, 속으로부터 솟구치는 감정 또한 남달랐다. <심청전> <흑진주> <장화홍련전> 등 각종 창극에서 연달아 주연을 맡았다.
“무대에서 관객하고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어! 울고 웃고, 그래도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면 허전한 게 있었지. 그러던 어느날 부산공연에 갔는데, 남희집인가 하는 단골여관에 갔다가 그분을 다시 만난 거야.”

공연을 마치고 숙소를 나가려던 남인수씨는 짐을 들고 들어온 공옥진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 날로부터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사랑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다.
“자주는 못 만났지. 워낙 바쁜 양반이라. <이별의 부산정거장>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이런 노래들이 히트를 하니까 공연이 많았어. 참 노래를 잘 하셨지.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곤 했어.”
62년 남인수씨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몰래한 사랑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 했다.

 

세계무대를 휩쓸고 다시 옥당골 촌부로
지방무대에서 주가를 올리던 공옥진은 77년, 당시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서울의 예술소극장 ‘공간사랑’에 초청을 받는다.
승무의 이매방, 사물놀이 김덕수와 판토마임의 유진규 등이 데뷔했던 ‘공간사랑’. 공옥진은 병신춤에 이어서 춤과 소리, 연극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1인 창무극 <심청전>을 선보인다.

“어찌나 사람들이 몰려들던지…. 이 촌것을 보시겄다고. 난 서러운 세월도 살았지만 사랑도 원없이 받았어요. 정말 이 옥진이 춤과 소리를 아끼는 분들이 많았었지.”
그렇게 많은 무대에 섰지만 재산을 모으진 못했다. 돈이란 쓰면 다시 들어온다고 믿었기에 조금만 큰돈이 생기면 기부를 했다. 어쩐 일인지 아직까지 문화재 지정도 받지 못했다. 1인창무극이란 장르가 없으니 소리로 완창을 해라는 요구를 하는가 하면, 가당찮게 돈 요구를 하기도 했다.

“흰 적삼 입고 무대에 서다가 죽었으면 싶지. 사람들 박수 소리 받으면서. 문화재 못하면 어때요? 난 사람 못 끄는 공연은 안해 봤으니까. 관객들하고 그냥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공연을 했지. 평생. 그러니 이 복없는 촌것이 예술을 했기에 다행이지. 소리하고 춤  췄으면 사람들이 이 촌부를 뭐 그리 좋아해 줬을라고….”
공연사진을 바라보는 일흔 셋 선생의 주름진 눈시울에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돌아서 나오다가 덩그런 마당을 돌아보자니 겨울 바람이 유독 차가운 듯 싶다. 

기사출력  2005-02-25 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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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정원기의 국악 아카데미
글쓴이 : 세요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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