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필,선♧/大學院curriculum

여러 수학자들에 대해서

花受紛-동아줄 2009. 12. 8. 08:25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1777-1855)

놀랄만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가우스는 18세기와19세기에 걸쳐 수학의 거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는 19세기의 가 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아르키메데스.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힌다.
가우스는 1777년 독일의 브룬스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집세고 교육적 식견이 없는 육체 노동자였다. 어머니는 비록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그가 공부하는데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평생 동안 자식의 업적을 자부심으로 간직하며 살았다.

가우스는 어렸을 때부터 보기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세살 때 아버지의 부기장부에 있는 계산착오를 지적했다고 한다. 가우스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0세 때, 선생님은 학생들을 조용히 하게 하려고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켰고 가우스는 거의 즉시 답을 제출하였다. 마침내 모든 학생이 답을 제출하였을 때 선생님은 가우스 혼자만이 아무런 계산도 없이 5050을 정확하게 답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가우스는 등차수열의 합1+2+3+… +98+99+100을 단지 100+1=101, 99+2=101, 98+3=101 등등 으로 계산하면 50개의 쌍이 나오므로 답은 50×101, 즉 5050이라고 암산하였던 것이다. 말년에 가우스 는 자기는 말보다 계산을 먼저 배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가우스는 19세의 나 이로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정 17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 로 일생을 수학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우스의 가장 위대한 단행본은 현대 정수론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책인 <수론 연구, Disquisitiones arirhmeticae>이다.
가우스는 천문학, 측지학, 전기학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1801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당시 막 발견된 케레스(Ceres)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하였다. 807년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와 천문대장이 되었다.1821년 하노버의 삼각측량을 하였고, 자오선을 측정 하고, 회광기(또는 일조계)를 발명하였다. 1831년 전기학과 자기학의 기초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동료 베버(Wilhelm Weber, 1804-1891)와 공동연구를 시작하여 1833년에는 전자석식 전신기를 고안하였다.
가우스는 1812년에 초기하급수에 관한 논문에서 최초로 급수의 수렴성을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곡면론에 관한 가우스의 걸작<일반 곡면론, Disquistiones generales circa superficies curvas>은 1827년에 발간되었고, 이로 인해 공간에서의 곡면에 관한 기하학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유명한 얘기는 가우스가 한 말이다. 가우스는 흔히 다음과 같이 회자된다. "그는 너무 큰 거인이어서 우주를 한눈에 들여다 보았다."과학적 저술에 있어서 가우스는 완전주의자였다.대성당도 건축장의 마지막 조각이 치워질 때까지는 대성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분석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면서 논문을 완전하게 하고, 간결하게 하며, 다듬고, 설득력 있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가우스는 1855년 2월 23일 괴팅겐 천문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후 하노버의 왕은 가우스에 경의를 표하는 기념 메달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 70mm 메달은 오래지 않아(1877년) 하노버의 유명한 조각가이며 메달 제작자인 브레머(Friedrich Brehmer)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하노버의 왕 조지 5세가

수학의 왕에게

이후부터 가우스는 '수학의 왕'으로 일컬어진다.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갈릴레오는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날에 피사에서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부모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앗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끌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학과 수학에 관한 갈릴레오의 흥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학에서 기하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고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훌륭한 재능을 지난 과학과 수학분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25세 때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낙하 물체의 공개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얘기에 의하면 학생, 교수,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하나가 다른 것의 열 배 무게인 두 금속 물체를 떨어뜨렸다. 그 두 금속 물체는 실제로 같은 순간에 땅에 떨어졌는데 이 사실은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마침내 그 유명한 식 s=gt²/2 에 따라서 물체의 낙하거리는 낙하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얻어냈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된 갈릴레오의 실험도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의 믿음을 깨지는 못했다. 대학의 권위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갈릴레오의 무엄한 오만에 충격을 받아서 그 곳에서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1591년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그는 파두아(Padua) 대학의 교수로 채용되었는데, 그 곳은 과학적 연구에 보다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거의 18년 동안 갈릴레오는 실험과 강의를 계속했고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09년경 정탐 안경의 발명 소식이 갈릴레오에게 전해지자 그는 곧 리퍼쉐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우수한 정탐 안경을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연구를 거듭하여 지난번 것보다 더욱 강력한 네 개의 ('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tele와 '보다'를 뜻하는 skopos로 부터 telescope라 명명된) 망원경을 더 만들었다.
그는 목성의 네 개의 빛나는 위성을 발견하였고, 큰 물체 둘레를 작은 물체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뚜렷하게 확증시켜 주는 관찰을 하였다. 갈릴레오는 또 그의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산, 금성의 위상, 토성의 고리 등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발견은 태양은 완벽하며 지구와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던 많은 성직자의 편협한 반대를 한 번 더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한 성직자는 심지어 갈릴레오를 목성의 네 개의 위성을 망원경 안으로 끌어들인 점을 들어 고소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책을 출간한 다음 해인 1633년에 종교 재판소에 소환되었는데, 거기에서 이 늙고 병든 사람은 고문의 위협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책은 200년 동안이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양심을 위증함으로써 늙은 학자의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해한 과학적 연구는 계속하도록 허용되었으나 그는 실망하였고 종교 재판소의 감시 아래 실제 죄수인 채로 1642년 1월에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실험과 이론의 조화로서의 과학의 현대정신은 갈릴레오의 은혜를 입은 바 크다. 그는 자유낙하 물체의 역학을 세웠고, 후에 뉴턴이 그의 과학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역학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그는 진공 상태 안에서 투사된 물체의 경로가 쌍곡선 형태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고, 운동량을 포함하는 법칙들을 추측하였다. 그는 최초의 현대식 망원경과 한때 매우 유행했던 부채꼴 모양의 컴퍼스를 발명하였다. 19세기 칸토어(Cantor)의 집합론의 근본적인 관점이며 현대 해석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무한집합들 사이의 상등 개념을 이미 그가 깨닫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갈릴레오의 명제들이 역사적으로 커다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갈릴레오는 그와 동시대인인 유명한 케플러를 질투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케플러가 1619년경 행성 운동의 세 가지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갈릴레오에 의하여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생애 내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따라서 그는 과학자로서 관찰과 추론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견해가 자신이 독실한 신자라고 여기는 교회의 성경에 위배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알고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과학과 성경 사이의 관계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때때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엽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의 창조론과 조화시키기는 어려웠다.


뉴턴 (I&sc Newton, 1642-1727)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그래서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eomerrie>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Clavis>,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월리스의 <무한의 수론, Arithmetica infinjtorm>을 읽었다.  이런 수학잭들을 읽고 난 후 수학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23세 때인 1665년 초에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알아냈고,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 )을 만들었다.  그해와 이듬해 동안 런던에 선(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서 울즈돕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미분학을 곡선의 임의의 점에서의 접선과 곡률반경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다양한 물리학 문제에 흥미를 갖고 광학에 관한 첫번째 실험을 하였으며 만유인력이 기본 원리를 공식화하였다.
 뉴턴은 166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2년 동안 광학 연구에 매달렸다. 1669년 배로가 뉴턴을 위하여 루카스 교수직을 사임함으로써 18년간의 대학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논쟁을 싫어하여 그의 발견들은 발견한 후 오랫동안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발표를 미루는 습관 때문에 나중에 미적분학의 발견의 전후에 괸련하여 라이프 니츠와 점잖치 못한 논쟁을 겪게 된다. 이 논쟁 때문에 뉴턴을 지도자로 지지하는 영국 수학자들은 대륙과의 수학 교류를 단절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졌다.
 1673년 부터 1683년까지의 뉴턴의 대학 강의는 대수학과 방정식론에 전념된 것이었다. 그가 달의 운동에 대한 연구와 관련하여 지구의 반지름의 새로운 측정법을 사용함으로써 만유인력 법칙을 증명한 때가 바로 이 시기인 1679년이다. 그는 또한 태양과 행성을 무거운 질점( ) 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만유인력 법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과 양립함을 확증하였다. 1703년 영국 학술원장에 피선되어 매년 재선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고 1705년에는 나이트 직위를 받았다. 그는 1727년 84세의 나이에 만성적이고 고통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뉴턴의 가장 위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이 <프린키피아>인데, 거기에는 완전한 역학계와 천체 운동현상의 완전한 수학적인 공식화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과학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책임이 분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유율법에 의하여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리들은 군데군데 약간의 단순한 극한 개념을 써서 순전히 고전적인 그리스 기하학을 이용하여 중명되었다는 점이다. 상대성 이론이 발견되기전까지 모든 물리학과 천문학은 뉴턴이 이 책에서 만든 좌표계의 가정 위에 세워졌다.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난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중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하였는데 그는 곡선족의 직교궤도를 구하여 풀었다.
 뉴턴은 숙련된 실험가이자 뛰어난 분석자였다. 수학자로서 그는 거의 전 분야에서 이제까지 배출된 학자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수학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아마 어느 누구도 결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태초부터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의 위대성에 관한 많은 증명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라그랑주는 "뉴턴은 최상의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단지 한 번만 우주의 체계를 세울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찬사에 비하여 자기 업적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나는 진리의 거대한 바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체 내 앞에 놓여 있는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선배들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하였다.
 뉴턴은 가끔 하루에 18 내지 19시간을 집필하였고, 놀랄 만한 집중력을 가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넋이 빠지는 것을 입증하는, 꾸며낸 듯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뉴턴이 몇몇 친구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할 때,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방에서 나갔다가 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자기가 왜 나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중백의를 걸쳐 입고 교회당으로 가벼렸다.
 또 한 일화로, 뉴턴의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닭요리로 저녁을 먹기로 그를 방문하였다.  뉴턴은 외출중이었으나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이 뚜껑 덮힌 접시에 차려져 있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약속시간을 너무 지체하였고 스턱켈리 박사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 닭요리를 먹고 나서 뼈를 뚜껑 덮힌 접시에 담아 놓았다. 뉴턴이 나중에 와서 친구와 인사하고 식탁에 앉아서 뚜껑을 열었으나 뼈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다 먹었다는 것을 잊었군,"이라고 말했다.
 또 한 일화로, 어느날 뉴턴이 그란담으로부터 말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을 때 마을 건너편에 있는 스피틀리게이트 언덕을 오르려고 말에서 내렸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말이 미끄러 떨어졌는데도 빈 고삐만이 손에 끌려 가고 있는 것을 뉴턴을 몰랐다. 언덕꼭대기에 올라서 다시 말 안장 위로 뛰어 오르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뉴턴은 그 사실을 알았다.


부울(George Boole)과 드 오르간(Augustus De Morgan)

  부울은 1815년 영국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찮은 소매 상인이었고, 따라서 부울은 단지 국민학교 교육만을 받았으나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다. 후에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저서를 통하여 형식 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47년에 부울은 <놀리와 수학적 해석,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드 모르간은 이것을 획기적인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이 책에서 부울은 수학의 본질적인 특성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존재하며 수학은 (일부 사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는 것처럼) 단치 "측정과 수의 과학" 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그 기호에 대한 정확한 연산법칙에 따르는 기호와 내적인 무모순성만 요구하는 법칙으로 이루어진 연구라고 주장하였다. 2년 후 부울은 새로 설립된 아일랜드의 콕에 있는 퀸스 칼리지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54년 부울은 1847년의 초기 저술을 확장시키고 다듬어서 ,사고법칙에 대한 고찰,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Thought>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형식논리와 오늘날 부울 대수라 알려진 집합의 대수인 새로운 대수학을 확립하였다. 최근에 부울 대수는 전기 스위치 회로이론 등과 같은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1859년에 부울은 <미분방정식론, Treatise on Differential Equations>, 1860년에는 <차분법론, the Calculus of finite differenes>을 발표하였다. 후자는 오늘날까지 그 분야에서의 표준 저서가 되고 있다. 부울은 1864년 콕에서 죽었다.

  드 모르간은 1806년 마드라스에서 (한쪽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동인되 주식회사와 관련하고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수학 학위시험에서 4등으로 졸업한 후 1828년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후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개명된)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논문과 제자를 통하여 영국수학계에 큰 영항을 미쳤다.그는 철학과 수학사에 관한 책을 많이 탐독하고, 대수학의 기초, 미분학, 논리학,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매우 명쾌한 해설가였다.
그의 재치있고 재미있는 책 <역설 모음집, A Budger of Paradoxes>은 여전히 재미 있는 읽을거리이다. 그는 집합론에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히면서 집합의 대수에 관한 부울의 연구를 계승하였는데, 소위 드 모르간 법칙이 이것의 한 예이다. 부울처럼 드 모르간은 수학을 기초 연산의 집합에 종속되는 기호의 추상적 연그로서 간주하였다. 드 모르간은 학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거리낌없이 말하기 잘하는 명수였다. 그는 플루트를 멋지게 연주하고, 사람들과 항상 쾌활하게 교제하고, 대도시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퀴즈와 수수께끼를 매우 좋아하여 나이나 태어난 해를 묻는 질문에 "나는 X2년에 X살이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그는 1871년 런던에서 죽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berm Leibniz)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보통교과서를 다 공부하여 수학, 신학, 철학, 법학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 characteristica generalis> 의 첫번째 착상을 벌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George Boole, 1815-1864)의 기호 논리로

꽃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젊다고 하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법학박사학위를 거절당한 그는 뉴렘베르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그는 역사적 방법에 의한 법 교육에 관한 탁월한 글을 써서 마인츠 체후에게 헌납했다. 이 일로 해서 마인츠 제후는 그를 법령 재편찬위원회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사관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처음에는 마인츠 제후를 위해 1676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하노비에서 브룬스빅 공의 지위를 위해 봉사했다.
   1672년 외교적 업무로 파리에 있을때 라이프니츠는 그 곳에 살고 있던 호이겐스를 만났는데, 이 젊은 외교관은 그 과학자를 설득하여 자기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임무를 띠고 런던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곳에서 올덴버그와 사귀었으며 영국학 술원에 계산기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브룬스빅 공의 사서라는 유리한 직책에 취임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이미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하고 이 주제에 관한 개념의 대부분을 개발하였으며, 미분법의 수많은 기본 공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7년간은 미적분의 발견에서 뉴턴과 독립적으로 했느냐에 관해 뉴턴 사이에서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논쟁으로 해서 한층 비참하게 되었다. 1714년 그의 군주는 최초로 영국의 게르만 왕이 되었으나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남겨저 무시되었다. 2년 후인 1716년에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단지 그의 충실한 시종만이 참석하였다고 전해진다.
   라이프니츠는 천부적으로 낙천주의자였다. 가기 생애 동안 대립하는 종파를 하나의 일반적인 교회로 재결함시키려는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진살술의 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에 의하여 전 중국을 기독교화하는 방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느꼈다. 신은 1로 무는 0으로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진법에서 모든수가 0과 1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은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것을 창조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매우 흡족한 라이프니츠는 그생각이(특히 과학을 좋아했던) 중국의 현 황제와 나아가 중국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중국 수학위원회 위원장인 예수회 수사 그리말디에게 그것을 알렸다. 라이프니츠의 종교적인 환상의 또 다른 예는 허수가 기독교 성경의 성령-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쯤이 양서류의 일종과 닮았다고 한말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이 재능에 대한 마지막 찬사로 라이프니치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연속과 이산이라는 수학적 사고의 넓고 대조적인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수학의 역사에서 사고의 이 두 가지 성질을 완전하게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 head, 1861-1947)와 러셀(Be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1861년 영국의 램스게이트에서 태어나서 셰르본느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1885년부터 1911년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강의하였고, 그 후 런던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응용수학과 역학을 강의하였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 런던 대학교 과학기술대학의 수학교수를 지냈고,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어 1936년 정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는 1947년 매사추세트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죽었다. 가장 뛰어난 제자인 러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고찰하였으며, 두 사람이 함께 1910-1913년에 획기적인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였다.

  귀족집안의 자손인 러셀(Berrand A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1872년 웨일즈의 트렐렉 근교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라니티 칼리지에서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화이트헤드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주로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수학, 논리, 철학, 사회학, 교육학에 관한 책을 40권 이상 저술하였다.

그는 실베스터, 드 모른간과 공동 수상한 영국학술원상 (1934), 메릿 훈장(1940), 노벨 문학상(1950)과 같은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거리낌없이 의견을 말하여 종종 논쟁에 휘말렸다. 제1 차 세계대전 중에 평화주의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징병제도를 반대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0년대 초에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이끌어 다시 잠깐 동안 투옥되었다. 뛰어난 지성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70년 98세의 고령에도 끝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이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기원전 287년경 시칠리아 섬에 있던 옛 그리스 도시 시러큐스(Syracuse) 에서 천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가 시러큐스를 정복한 가원전 212년에 죽었다. 그는 평소에 시러큐스의 히에론(Hieron)왕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코논(Conon), 도시테우스(Dositheus),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등과 교분을 가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앞의 두 사람은 유클리드 후계자들이고 마지막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사서였는데,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연구결과가 이들과의 편지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마도 이집트에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 같다.   로마의 역사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에 관한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Marcellus)가 시러큐스를 공격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시러큐스의 방어를 위하여 고안한 여러 가지 훌흉한 장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저의 배가 도시 성곽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배에 무거운 돌을 떨어뜨릴 수 있는 투석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정거리를 조정할 수도 있고 이동 발사장치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적의 배를 물에서 끌어올리게 할 수 있는 기중기도 만들었으며 적의 배를 불태우기 위해 커다란 볼록렌즈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끌어올릴 수 있는 커다란 배를 그는 합성 도르래장치를 이용하여 혼자서 간단히 끌어올린 다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나에게 서 있을 자리를 다오. 그러면 지구를 움직여 보일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너무 강력한 정신집중을 했기 때문에 한 문제에 몰두하면 주위에 대하여 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예로서 히에론 왕의 왕관과 수상쩍은 금세공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히에론 왕이 금세공인에게 명령해서 금으로 왕관을 만들게 했는데 금세공인이 왕관을 만들어 가져왔을 때 히에론 왕은 그가 다소의 금을 빼돌리고 그 대신 은을 사용하여 왕관을 만들지 않았을까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르키메데스와 이 문제를 상의하고 아르키메데스는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 어느 날 공중 목욕탕에서 정수역학의 제 1 법칙(부력에 관한 법칙)- 한 물체가 어떤 액체 속에 잠길 때 그것은 흘러나온 액체의 무게와 똑같은 힘으로 떠오른다- 을 생각해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신이 발가벗었다는 것도 잊은 채 "Eureka, eureka!(알아냈다, 알냈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달렸다고 한다. 그 즉시 그는 저울의 한 쪽 접시 위에서 왕관을 놓고 또 다른 접시 위에서 똑같은 무게의 금을 얹어놓은 다음 물 속으로 그것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왕관을 담은 접시가 위로 떠올랐고 그래서 왕관 속에 금보다 밀도가 작은 어떤 이물질이 들어있다는 것을 보였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을 연구할 때 대부분의 그림을 난로의 재나 목욕 후에 바르는 기름을 자기의 몸에 바른 후 그위에다가 그렸다고 한다. 그의 최후는 로마가 시러큐스를 약탈하고 있을 때 맞이 하게 된다. 그가 모래쟁반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몰두하고 있었을 때 한 로마병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아르키메데스가 병사에게 "나의 그림을 밟지마오!"라고 외쳤는데, 이에 격분한 병사가 이 위해한 노인을 창으로 찌르고 말았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병기 덕택으로 시려큐스는 거의 3 년간 로마의 공격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 넘친 시러큐스인들이 축제를 벌이느라 경계를 소홀히한 틈을 타 로마는 간신히 시러큐스의 방어벽을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비록 적이긴 했지만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힘겹게 시러큐스에게 입성한 후, 제일 먼저 이 훌륭한 수학자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었다. 그랬으므로 마르켈루스가 아라크메데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비통에 잠겼을까 하는 것은 상상이 간다. 그는 이 유명한 학자를 그 도시의 공동묘지에 깊은 영광과 존경을 바쳐서 매장했다. 아르키메데스는 평소에 자신이 발견한 한 위대한 기하학적 도형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를 가져서 자기가 죽으면 묘비 위에 직위기둥에 내접하는 구의 그림을 새겨달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마르켈루스는 그의 소원이 이루어 지도고 해 주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저작은 수학적 설명의 걸작품이며 놀라울 정도로 현대논문집의 논문들과 우수하다. 그것은 깔금한 표현, 우아한 끝맺음, 위대한 독창성, 계산기술과 논증의 엄격함 등을 보여주고 있다. 약 열 개의 논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논문이 쓰여ㅈㅆ지만 오늘날에는 분실되었다는 흔적이 있다. 이러한 저술 중 수학에서 가장 놀랄 만한 공헌은 아마도 적분법의 초기 개발일 것이다.


제논의 역설


  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이 매우 많은 개수의 쪼갤 수 없는 극소량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첫번째 가정은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것을 발견하는데 두 번째 가정을 이용할 때는 자칫 어떤 불합리성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 학교들이 위의 두 가정을 이용하는 것을 발달시켰다는 증거가 있다.

  두 가정 모두가 직면하는 약간의 논리적 문제점이 기원전 5세기경에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만든 네 개의 역설에 의하여 충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수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 역설을 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또는 많은 개수의 극소량들의 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간에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역설의 본질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분법(The Diconotomy):만일 직선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직선을 통과하려면 우선 중점을 지나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분점을 지나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팔분점을 지나야만 하는 등 무한히 많은 점을 지나야 한다. 따라서 운동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화살(The Arrow):만약 시간이 더 이상 쪼개질수 없는 아주 짧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 다면 움직이는 화살은 항상 정지해 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그 화살은 한 고정된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각 순간에서 이 명제가 참이므로 화살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 후 제논의 역설에 대한 많은 해설이 주어졌는데 그들 대부분의 각 양이 극히 작다 하더라도 양의 무한개의 합은 무한히 크고 (그림생략), 그 크기가 0인 양의 유한 또는 무한개의 합은 0이라는 (nx0=0, ∞x0=0) 통상적인 직관적 믿음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 역설을 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들의 영향으로 무한소가 그리스 논증기하학에서 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