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스(Carl Friedrich Gauss,1777-1855) |
놀랄만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가우스는 18세기와19세기에 걸쳐 수학의 거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는 19세기의 가 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아르키메데스.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힌다. | |
가우스는 어렸을 때부터 보기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세살 때 아버지의 부기장부에 있는 계산착오를 지적했다고 한다. 가우스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0세 때, 선생님은 학생들을 조용히 하게 하려고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켰고 가우스는 거의 즉시 답을 제출하였다. 마침내 모든 학생이 답을 제출하였을 때 선생님은 가우스 혼자만이 아무런 계산도 없이 5050을 정확하게 답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가우스는 등차수열의 합1+2+3+… +98+99+100을 단지 100+1=101, 99+2=101, 98+3=101 등등 으로 계산하면 50개의 쌍이 나오므로 답은 50×101, 즉 5050이라고 암산하였던 것이다. 말년에 가우스 는 자기는 말보다 계산을 먼저 배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가우스는 19세의 나 이로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정 17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 로 일생을 수학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수학의 왕에게 |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
갈릴레오는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날에 피사에서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부모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앗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끌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 | |
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학과 수학에 관한 갈릴레오의 흥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학에서 기하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고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훌륭한 재능을 지난 과학과 수학분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
뉴턴 (I&sc Newton, 1642-1727) |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그래서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 |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eomerrie>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Clavis>,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월리스의 <무한의 수론, Arithmetica infinjtorm>을 읽었다. 이런 수학잭들을 읽고 난 후 수학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23세 때인 1665년 초에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알아냈고,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 )을 만들었다. 그해와 이듬해 동안 런던에 선(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서 울즈돕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미분학을 곡선의 임의의 점에서의 접선과 곡률반경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다양한 물리학 문제에 흥미를 갖고 광학에 관한 첫번째 실험을 하였으며 만유인력이 기본 원리를 공식화하였다. |
부울(George Boole)과 드 오르간(Augustus De Morgan) |
부울은 1815년 영국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찮은 소매 상인이었고, 따라서 부울은 단지 국민학교 교육만을 받았으나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다. 후에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저서를 통하여 형식 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47년에 부울은 <놀리와 수학적 해석,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드 모르간은 이것을 획기적인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 |
이 책에서 부울은 수학의 본질적인 특성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존재하며 수학은 (일부 사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는 것처럼) 단치 "측정과 수의 과학" 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그 기호에 대한 정확한 연산법칙에 따르는 기호와 내적인 무모순성만 요구하는 법칙으로 이루어진 연구라고 주장하였다. 2년 후 부울은 새로 설립된 아일랜드의 콕에 있는 퀸스 칼리지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54년 부울은 1847년의 초기 저술을 확장시키고 다듬어서 ,사고법칙에 대한 고찰,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Thought>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형식논리와 오늘날 부울 대수라 알려진 집합의 대수인 새로운 대수학을 확립하였다. 최근에 부울 대수는 전기 스위치 회로이론 등과 같은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 |
드 모르간은 1806년 마드라스에서 (한쪽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동인되 주식회사와 관련하고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수학 학위시험에서 4등으로 졸업한 후 1828년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후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개명된)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논문과 제자를 통하여 영국수학계에 큰 영항을 미쳤다.그는 철학과 수학사에 관한 책을 많이 탐독하고, 대수학의 기초, 미분학, 논리학,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매우 명쾌한 해설가였다. | |
그의 재치있고 재미있는 책 <역설 모음집, A Budger of Paradoxes>은 여전히 재미 있는 읽을거리이다. 그는 집합론에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히면서 집합의 대수에 관한 부울의 연구를 계승하였는데, 소위 드 모르간 법칙이 이것의 한 예이다. 부울처럼 드 모르간은 수학을 기초 연산의 집합에 종속되는 기호의 추상적 연그로서 간주하였다. 드 모르간은 학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거리낌없이 말하기 잘하는 명수였다. 그는 플루트를 멋지게 연주하고, 사람들과 항상 쾌활하게 교제하고, 대도시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퀴즈와 수수께끼를 매우 좋아하여 나이나 태어난 해를 묻는 질문에 "나는 년에 X살이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그는 1871년 런던에서 죽었다.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
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berm Leibniz)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보통교과서를 다 공부하여 수학, 신학, 철학, 법학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 characteristica generalis> 의 첫번째 착상을 벌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George Boole, 1815-1864)의 기호 논리로 | |
꽃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젊다고 하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법학박사학위를 거절당한 그는 뉴렘베르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그는 역사적 방법에 의한 법 교육에 관한 탁월한 글을 써서 마인츠 체후에게 헌납했다. 이 일로 해서 마인츠 제후는 그를 법령 재편찬위원회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사관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처음에는 마인츠 제후를 위해 1676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하노비에서 브룬스빅 공의 지위를 위해 봉사했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 head, 1861-1947)와 러셀(Be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1861년 영국의 램스게이트에서 태어나서 셰르본느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1885년부터 1911년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강의하였고, 그 후 런던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응용수학과 역학을 강의하였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 런던 대학교 과학기술대학의 수학교수를 지냈고,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어 1936년 정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는 1947년 매사추세트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죽었다. 가장 뛰어난 제자인 러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고찰하였으며, 두 사람이 함께 1910-1913년에 획기적인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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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집안의 자손인 러셀(Berrand A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1872년 웨일즈의 트렐렉 근교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라니티 칼리지에서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공모 장학금을 받은 그는 수학과 철학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화이트헤드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주로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수학, 논리, 철학, 사회학, 교육학에 관한 책을 40권 이상 저술하였다. | |
그는 실베스터, 드 모른간과 공동 수상한 영국학술원상 (1934), 메릿 훈장(1940), 노벨 문학상(1950)과 같은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거리낌없이 의견을 말하여 종종 논쟁에 휘말렸다. 제1 차 세계대전 중에 평화주의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징병제도를 반대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0년대 초에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이끌어 다시 잠깐 동안 투옥되었다. 뛰어난 지성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70년 98세의 고령에도 끝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 |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이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기원전 287년경 시칠리아 섬에 있던 옛 그리스 도시 시러큐스(Syracuse) 에서 천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가 시러큐스를 정복한 가원전 212년에 죽었다. 그는 평소에 시러큐스의 히에론(Hieron)왕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
또 그가 코논(Conon), 도시테우스(Dositheus),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등과 교분을 가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앞의 두 사람은 유클리드 후계자들이고 마지막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사서였는데,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연구결과가 이들과의 편지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마도 이집트에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 같다. 로마의 역사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에 관한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Marcellus)가 시러큐스를 공격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시러큐스의 방어를 위하여 고안한 여러 가지 훌흉한 장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저의 배가 도시 성곽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배에 무거운 돌을 떨어뜨릴 수 있는 투석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정거리를 조정할 수도 있고 이동 발사장치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적의 배를 물에서 끌어올리게 할 수 있는 기중기도 만들었으며 적의 배를 불태우기 위해 커다란 볼록렌즈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끌어올릴 수 있는 커다란 배를 그는 합성 도르래장치를 이용하여 혼자서 간단히 끌어올린 다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나에게 서 있을 자리를 다오. 그러면 지구를 움직여 보일 것이다.!" |
제논의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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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정 모두가 직면하는 약간의 논리적 문제점이 기원전 5세기경에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만든 네 개의 역설에 의하여 충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수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 역설을 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또는 많은 개수의 극소량들의 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든지 간에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역설의 본질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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