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아함의 가르침과 반야 법화 화엄 정토 경전에서 설해지는 가르침으로
구성되는 불교를 근본불교로 통칭하면서, 그 전체의 흐름과 사상을 구체적인
경전 자료와 함께 제공하면서 근본불교의 가르침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 특히 제1편과 제2편의 주된 입장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 세계 진리 수행이라는 주제에 입각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신앙과 윤리적인 생활에 관련한 붓다의 가르침까지 살피는
것이 이 책의 제3편과 제4편이다.
제1편 불교의 특징
제1장 불교의 특징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과 그 해답을 신앙하는 방법에 있어 몇 가지 특징적인 점을 지닌다. 첫째, 이성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둘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본질로 하고, 셋째, 인간 중심의 종교라는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불교는 이성적 종교로서, 논리적 특징, 비판적 특징, 과학적 특징을 갖는다.
깨달음을 본질로 한다는 면에서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성불의 종교, 자력의 종교라는 특징을 들 수 있다. 인간 중심의 종교라는 점에서는, 신이 없는 종교, 인본주의 종교라는 특징을 들 수 있다.
제2장 붓다의 모습
붓다의 덕성과 정체를 잘 나타내는 표현으로 여래 십호와 십팔불공법을 들 수 있다. 여래 십호는 고타마 붓다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표현이다. 곧 붓다는 "그렇게 온[여래], 동등한[응공],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정변지], 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명행족], 잘 간[선서], 세간을 아는[세간해], 더 이상 없는[무상사], 사람을 길들이는[조어장부],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천인사], 깨달은 어른[불세존]"이라고 대, 소승의 경론 어디에서건 설해지고 있다.
십팔불공법은, 붓다는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확신과 세 가지 마음 자세와
하나의 커다란 슬픔으로 구성된 열여덟 가지 법을 갖추신 분"을 말한다.
먼저 붓다의 열 가지 힘[십력]이란 :
첫째,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판별하는 지력
둘째, 선하고 악한 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력
셋째, 네 가지 선정과, 여덟 가지 해탈과, 세 가지 삼매와, 여덟 가지 등지 등을 여실히 아는 지력
넷째, 중생이 지닌 진리에 대한 인지 능력의 높고 낮고 열등하고 우수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력
다섯째,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과 경향을 여실히 아는 지력
여섯째, 중생세계의 성질과 종류를 여실히 아는 지력
일곱째,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도과에 나아가는지를 여실히 아는 지력
여덟째, 무시의 전생을 여실히 아는 지력
아홉째, 중생의 내생을 여실히 아는 지력
열째, 모든 번뇌가 다하는 것을 여실히 아는 지력 등이다.
네 가지 확신[사무소외]이란 :
첫째, 모든 것을 아는 자로서의 확신
둘째,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
셋째, 수행에 장애되는 길마저 설할 수 있다는 자신
넷째,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설할 수 있다는 자신 등이다.
세 가지 마음 자세[삼염주]란 :
첫째, 중생이 붓다를 신봉하여도 기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둘째, 중생이 붓다를 불신하여도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셋째, 중생이 붓다를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기쁜 마음 또는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등이다.
끝으로 크나큰 슬픔[대비]를 붓다는 지니고 있다.
경전에는 "두 가지 붓다가 있다. 하나는 여래 응공 정등각자이고, 다른 하나는 벽지불이다." 라고 설해져 있다. '프라티예카 붓다(pratyeka buddha)'의 소리 옮김인 이 '벽지불'은 연각 또는 독각이라고 번역되었던 것인데, 벽지불은 '벽지보리[하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 분이라고 경전에 설해져 있다. 이는 깨달음에 삼먁삼보리(최상의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보다 하위의 깨달음이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열반을 증득한 것은 벽지보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열반은 궁극적 경지가 아니라, 반야바라밀다, 구경열반 등으로 표현되는 세계가 또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것은 '그러한 것[여]'의 세계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최상의 깨달음이므로 최상의 깨달음의 대상은 최종적인 '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붓다란 연기의 세계에서 수행을 통하여 실상을 깨닫되 열반의 경지를 먼저 깨닫고[벽지불] 이어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를 경유해 '그러한 것의 경지를 깨달은 자[무상정등각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불교경전의 세계
붓다의 교설과 그의 후계자들의 저술을 총칭하여 불교경전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는 불교경전중에서 현대어 번역을 제외하고 비교적
체계가 갖추어진 것은 팔리어(Pali) 경전, 범어(Sanskrit) 경전, 서장어(Tibet)
경전, 한역 경전 등이다.
팔리어 경전은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등 남방불교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불교경전이다. 팔리어경전은 6차에 걸친 편찬회의[결집]를 거쳐 이루어졌다.
범어 경전은 거의 대승경전이고 초기불교 경전은 극히 희소하다.
서장어 경전은 범어 경전의 투사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7세기 전반에
손첸 감포라는 왕이 인도의 불교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16인을 인도에 파견하여
인도어문을 배운 후 귀국시켜 인도어문을 모방하여 티벳 문자와 티벳 문법을
제정하여 불교경전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한역 경전은 그 양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참으로 불교경전 사상 위대한 업적이다. 유명한 역경가로는 구마라집,
현장 등의 뛰어난 천재들이 있다.
제2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가르침
제1장 초기경전 교설의 점진성
초기불교의 자료로는 팔리어로 된 율장 및 경장과 한문으로 번역된 아함경이
주로 쓰이는데, 이 자료들의 가르침은 '점교성'이라는 두드러진 특성이 있다.
붓다는 이렇게 설했다. "비구들이여 단번에 완성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나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에 의해 완성된 지식은 획득되는 것이다."
완성된 지식의 성격이 이미 한 가지 방법 또는 실천 또는 학습의 연장선상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교교육은 점진적으로 베풀어져야 하고 아울러 법문에
입각해서 제공되어야 한다.
교설의 점교성은, 종교사상[해], 종교실천[행], 종교체험[증]의 여러 면에서 나타
나고 있다.
불교교육을 통해 우리는 완성된 지식도 얻으려 한다. 그 지식의 성격이 점진적으로
꿰뚫어지고 획득되는 것이니 그것은 초기불교의 종교체험의 경지가 점점 깊어져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체험에 이르게 하는 종교실천의 가르침도 점진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그 실천에 대한 이론적 근거인 종교사상도 점진적인
순서를 지키며 제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으로 붓다에게 교육받는 불제자들은 점진적으로 전개되는 종교사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전개되는 실천방법을 철저히 따르다 보면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종교체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제2장 초기불교의 교리체계
1. 기본입장
붓다는 당시의 사회변동에 따라서 일어난 사상계의 혼란상을 보시고, 삼종외도설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주의 궁극적 실체에 대해 , 첫� 존우화작설(모든 것은 유일신인
존우의 뜻에 의해 창조된다는 설), 둘� 숙작인설(모든 것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설),
셋째 무인무연설(모든 것은 특별한 원인이 없이 물질적 요소들의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는 설) 등의 소위 3종외도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붓다는 인간의 죄의 문제와 자유의지 문제를 가지고 이들 3종외도설을 비판한다.
이 세 가지 견해는 비록 우주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죄악과 자유
의지라는 중요한 현상에는 결코 적용할 수 없으므로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아함 등에서 설해지는 궁극적 근원에 대한 붓다의 해답은 결코 직설적으로 언표되는
일이 없다. "그런 문제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직접적인 답을 회피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를 물리치고 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대부분 종료된다.
일찌기 구도의 길을 거니실 � 붓다가 한결같이 취한 태도는 합리적 사유였다. 붓다는 바로
눈앞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괸찰에 의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기초적인 가설부터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을 보다 넓은 범위의 세계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면밀하게 계속 새로운 모습
으로 심화시켜 나간다. 그런 뒤 마침내 우주의 근원을 꿰뚫은 진리에까지 도달케 하셨다.
이것이 방편시설이라고 불리는 불교의 교설방법이다. 바로 이렇게 방편시설된 문제들이 모여
바로 중층적이고 체계적인 아함 등의 교리조직을 이루는 것이다.
2. 현실과 의지
일반적으로 종교는 훌륭한 생활철학을 많이 제시하는데 그것은 종교의 실천적 교설을 말한다.
실천적 교설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론이 있어야 한다.
불교는 업설이란 실천원리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교설로 열두 포섭처에 관한 교설[십이처설]
을 제시한다. 열두 포섭처는 각각 여섯 개의 인식 주관[6근]과 인식 대상[6경]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인식'되는 세계만을 현실적 존재로 삼겠다는 뜻이며 아울러 현실세계는 인식하는 인간[6근]과
인식되는 대상[6경]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인식 주관을 의지[manas]라고 부르고
인식 대상을 법[dharma]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업설의 가장 기본적 술어인 업(karma)이란 명사는 의지적 '작용'에서 온 말이며, 업의 대응어인
보(vipaka)는 필연적 '반응'을 지칭한 말이다. 열두 포섭처를 이루는 여섯 감관과 여섯 대상 사이
에는 작용, 반응의 필연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작용, 반응의 필연성은 업, 보의 인과성으로 달리
생각할 수 있다.그리하여 마침내 업인과보라는 기본적 법칙이 도출되는 것이다.
붓다는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을 �는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도 있고 내세에
받을 수도 있다."고 설하셨다. 여기서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이 정립된다. 업인과보의 법칙성 및
삼세윤회의 교설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통하여 세워진 것이다.
3. 존재의 참모습
인간의 여러 의문 중에서 죽음은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느껴지는 문제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혼불멸론(몸은 죽어도 마음은
불멸에 의해 사후 존재가 지속된다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단멸론(마음은 몸이
죽고나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초기불교의 교설 중 죽음에 관한 것으로 업인과보설의 삼세윤회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
초기불교는 사후존재를 일단 긍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죽음에 대한 기본입장이
단멸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함 등은 삼법인을 누누이 설함으로써 영혼불멸론
적인 입장이 아님도 강조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과 함꼐 물질의 고찰도 결코 등한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음과
물질을 따로따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음과 물질을 동시에
고찰한다. 정신과 물질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열두 포섭처[십이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열두 포섭처는 형태적 변화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언젠가는 보인다. 초기불교에서는 '다르게 아는 것'을 식별[식]이라고 부른다.
식별은 그 뜻이 보다 포괄적이지만 핵심적인 뜻은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어떤 결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의존해야 된다는 뜻으로
"여섯 감관과 여섯 대상을 연하여 여섯 식별이 생한다"고 종합적으로 설한다. 여기서
'연한다'라는 술어가 바로 '의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다른 차원의 두 세계를 오르내리며 의존관계를 맺고 있는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을 열여덟 계층의 교설[십팔계설]로 설명한다. 여기서 계층[계, dhatu]은
층, 요소 등을 뜻하는 술어이다. 이 열여덟 계층은 땅, 불, 물, 바람, 공간, 식별의 계층으로 구성된
여섯 계층으로 파악된다. 결국 열여덟 계층과 여섯 계층을 설하면서 초기불교는 마음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에 대해 하나의 귀결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나, 현재 철저히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러한 존재관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한 번 살핌으로써, 우리는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보다 타당하고 진리다운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4. 괴로움과 극복
초기불교는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여섯 계층의 교설[6계설]로 설명한다.
6계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상, 하로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지,
수, 화, 풍으로 대표되는 기본존재들이 무수히 있다. 기본존재들은 두 공간의
상, 하에 하나씩 배열되는 중층구조를 이룬다. 중층구조를 이루는 존재들은
자유로이 상, 하의 위치를 바꾸면서 오르내린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본래
모습은 현실에서 보는 존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름을 우리는 직감한다.
즉,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실은 두 개의 공간도 없을 뿐더러 존재들도 단지
주어진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덩어리의 단일구조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개체 형성에 무엇보다 근원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집착된 물질적
'형체'와 그를 지속하기 위해 연이어 발생한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다섯 근간의 교설[5온설]은 이러한 내면적 소식을
전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여섯 계층의 교설[6계설]과 다섯 근간의 교설[5온설]을 통하여
인간존재 성립에 대해 간단한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인간존재란 상, 하, 좌, 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잇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루는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결합[행, samskara]'
작용이다. 그런데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결합력은 견딜 수 잇는 데까지
버티다 끝내 한계에 이르러 붕괴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 죽음의 구조이다.
또 흩어진 기본존재들은 다시 여섯 계층[6계]의 모습을 띠게 되고, 여섯 계층의 한
'형체' 위에는 아집이 더해진다. 아울러 형체를 지속시키려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의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들이 근간적인 부분이 되어 횡적인 결합이 진행되고 마침내
또 하나의 인간개체가 형성된다. 이것은 또 언젠가는 붕괴되고 만다. 이러한 돌고 도는
과정을 생사윤회라고 한다.
이러한 괴로움을 극복하려면 다섯 가지 근간을 '멸함'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의 길[도, marga]이 필요하다. 곧, 팔정도이다. 팔정도란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한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직업,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기억, 바른 삼매 등이다.
초기 불교는 이렇게 여섯 계층의 교설[6계설]과 다섯 근간의 교설[5온설]이라는
이론[해]을 바탕으로 한 뒤, 네 가지 성스러운 사실[4성제]과 여덟 가지 바른 길[8정도]의
교설 및 사문4과(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라는 실천원리[행]를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완벽한
교리조직을 이룬다.
5. 완성의 세계
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은 매우 중요하다. 깨달음은 불교의 목적이며 본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겠다. 붓다의 �달음의 내용은 바로 12연기이다.
12연기는 매우 깊은 뜻이 있어서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
12연기는 세 부분으로 나눠서 이해해 볼 만하다. 곧, '명'이라는 연기의 성립근거와
'열두 지분'의 내용 및 순서, 그리고 연기라는 발생법이 그것이다.
명이란 술어는 'vidya'라는 범어를 중국에서 번역한 역어이다. 'vidya'는
'실제로 존재한다', '밝히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vid'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실재함',
'밝힘' 등의 의미를 가진다. 결국 명은 '실재하는 세계', '밝혀지는 세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생멸의 변화가 있는 무상한 현실세계에 반하여 '실재하는 세계, 밝혀지는 세계'를
내세움을 볼 때, 밝힘[명]이란 생, 멸이 사라진 상주의 세계임을 짚을 수 있다.
초기불교에 설해진 모든 수행은 바로 이 밝힘의 세계에 들기 위한 것이다. 밝힘을
체득할 � 그것을 비로소 해탈이라고 부르며 열반의 경지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연기의 12지분은 밝힘[명]이 없는 자는 반드시 죽음의 괴로움을 당하게
됨을 구체적이고도 정연하게 보여준다. 12지분의 첫째는 무명이다. 밝힘이 없는 자를
일컫고 있음은 자명하다. 이렇게 밝힘[명]이 없는 자에게 '밝힘이 아닌 것[무명]'을
연하여 '결합[행]'이 있게 되고 이어 '식별[식]' '이름과 색[명색]' '여섯 포섭처[6처]'
'부딪침[촉]' '느낌[수]' '갈애[애]' '취함[취]' '됨[유]' '생함[생]'이 있게 된다.
그리고 생함을 연하여 '죽음[사]'이 있게 되는 것으로 12지분은 배열된다.
12지분에는 다섯 근간[5온]의 지분들과, 열두 포섭처[12처] 및 생, 사 등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12지분의 순서는 아함 등에서 한 번도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
그것은 지분의 전후관계가 매우 엄격한 필연성 속에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연기(pratitya-samutpada)라는 말은 각 지분 사이를 맺어주는 발생법을 핵심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연기의 어원적 해석은 '연하여(pratiya) 함께(sam) 올라간다(utpada)'이다.
그래서 '밝힘 아닌 것'을 연하여 '결합'이 있게 된다고 할 때, 그때의 상황은 '밝힘 아닌 것'을
연하여 '결합'이 있게 되고 이어 '결합'은 '밝힘 아닌 것'과 함께 '결합'의 세계로 올라가는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12연기는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건 아니하건 관계없이 법계에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붓다는 단지 그것을 깨달아 중생에게 법을 연설해 줄 뿐이라고 설해진다.
이는 12연기가 지닌 보편타당성을 나타내며 12연기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내용이 됨을
말하고 있다.
초기불교에 시설되어 있는 숱한 교리들은 12연기에 의해 종합,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12연기에 의해 초기불교의 전 교리체계가 완성되면서 연기설은 바라문교의 전변설과
사문들의 적취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던 붓다 당시의 사상계에서 불교의 대표적인 철학적
입장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12연기를 통해 '공'과 '중도'의 핵심적인 뜻을 엿보게 된다. 공과 중은 반야, 법화로
뻗어가는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에 속한다. 이런 개념들이 바로 12연기설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두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은 자가 �달으려는 자를 �닫게 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달음의 진실한 내용이
12연기이다. 아함 등의 모든 교리들이 종합, 완성되는 구경이 12연기이다. <반야경>의 세계,
<법화경>의 세계로 불교는 새로운 꽃을 피워간다. 이러한 세계의 튼튼한 지반도 역시 12연기이다.
불교의 본질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단번에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1) 열두 포섭처의 교설 2) 업설 3) 여섯 식별의 교설 4) 열여덟
계층의 교설 5) 여섯 계층의 교설 6) 다섯 근간의 교설 7) 네 가지 성스런 사실의 교설을 차례로
경유함으로써 비로소 8) 12연기의 �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초기불교에 대한 전체적이고도 균형잡힌 안목은 결코 이 8 가지 교설들을 벗어나지 않은 곳에
있음을 새겨두기 바란다.
제3장 반야부, 법화부 경전의 사상
1. 반야부 경전
초기 대승불교의 경전들 중에서도 초기에 성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야부 경전에는
한결같이 열반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이처럼 한결같이 열반이 더 이상 절대시되지
못하며 오히려 부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초기불교에서 설해진 열반을 현실의
생사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생사와 열반은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A, B 두 법이 이렇게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두 법에는 독자적
인 존재성, 즉 자성(savbhava)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상대방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존재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이
모두 자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므로 참존재일 수 없는데 그 중의 열반을 독자적 존재성
을 지닌 것으로 절대시한다면, 이것을 과연 여실한 견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경지인 열반을 더 이상 절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생사와 평등한
것으로 보는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 열반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반야로부터 반야부 경전의
사상은 출발한다.
반야는 'pra(진행적으로, 능동적으로, 머묾이 없이)'라는 접두사와 'jna(알다)'라는 어근
으로 구성된 말이다. 따라서 반야는 '어떤 앎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진행적으로 알아 나가
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말의 핵심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
곧 '어떤 법 A는 어떤 법 B와 1) 연생관계를 맺으므로 2) 자성이 공하다고 아는 것'이
반야이다. 여기서 열반을 A로 두고 생사를 B로 두면서 반야는 출발하거니와, '열반은 생
사와 1) 연생관계를 맺으므로 2) 자성이 공하다고 아는 것'이 반야인 것이다.
이러한 반야가 있고 나면 더 이상 열반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열반에 머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반을 벗어나기 위한 실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열반을 벗
어남이란 새로운 경지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한 단계 진전한 열반'이라고 부를 만
하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수는 없다. 한 단계 더 진전해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 이후의 과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곧 "망념의 부정이 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분별망념이다. 다시 망념의 부
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리고 무한한 자기부정적 실
천이 계속된다."
이처럼 1)반야 -->실천-->얻음--> 2)반야-->실천-->얻음--> 3)반야-->실천-->얻음
-->무한대로 전개되니 이것은 대승적 해(반야)-->행(실천)-->증(얻음)이 무한히 전개됨
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부정이 반야에 의해 계속되면 그 끝은 어디일까. 무한부정이라는 말은 그야
말로 결코 긍정할 것이 없다는 표현인데 놀랍게도 반야부 경전들은 한결같이 반야(prajna)
에 의해 피안(para-m)으로 가는[i] 것[ta]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내놓고 있다. 이것은 무
한 부정의 진행에 어떤 목표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피안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최후의 접미사 'ta'는 그곳에 궁극적으로 안착함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바라밀다는 어떤 경지인가. 반야바라밀다를 설명하는 진술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18공으로 규정하는 것이 주목된다. 곧 "반야바라밀다는 열여덟
가지 공성이나니라."라는 진술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공성의 원어는 �야탸(sunyata)
인데 이는 '비었다(sunya)'라는 형용사와는 달리 무언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에 반야바라밀다와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인 표현을 찾는다면 구경열반이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최종적으로 구경의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다. 반야부 경전이 시종일관 열반 등을
부정하면서 반야에 의한 공관을 실행해 온 것에 비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야부 경전의 사상이란 반야공관에 의한 무한부정의 과정과 결국 반야바
라밀다, 공성, 구경열반이라고 표현되는 어떤 결과를 성취하는 것으로 볼 만하다.
2. 법화부 경전의 사상
법화부 경전에서는, 반야부 경전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다가 궁극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선 법화부 경전에서는 보살의 체계를 부정하는 표현을 만나게 되니 보살도 알 수 없는
경지가 있다고 여러 차례 주장한다. 오직 붓다(=여래)만이 알고 본다고 함으로써 아직
붓다가 아닌 보살들은 모른다라고 주장한다.
"붓다는 방편의 힘으로 삼승의 가르침을 보인 것이다."
"붓다는 다만 하나의 불승만을 위하여 중생들에게 말하는 것이지 다른 이승이나 삼승은
없나니라."
"일승뿐이니 이승이나 삼승은 언제 어느 세간에도 없다. (그것은 방편이니) 방편은 제외한다."
여기서 삼승이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다. 따라서 보살승도 방편에 의해 설해진 것이라고
해야 한다. 보살승도 무언가 끝난 것이 아니라 가설된 것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가설된 것이
보살승이라면 보살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라는 것도 가설된 것에 불과하다고 해야 한다.
보살승을 방편으로 규정하는 법화의 참뜻은 무엇일까? 보살승도 무언가를 궁극적 목표로 보고
수행하여 마침내 그 무언가에 도달한 뒤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보게
한다. 보살승의 목표는 반야바라밀다에 두는 것이 가장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법화부에서 긍정하는 보살의 단계가 새로이 있음을 우리는 암시받는다. 결국 법화부에서는
방편으로 제외되는 보살승이 있고 그러면서도 긍정되는 보살이 있거니와 그 구별은, 제외되는
보살승은 반야바라밀다를 목표로 수행하고 그것에 도달하는, 반야부 교의에 입각한 보살승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긍정되는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서 성불을 향하여 새로이 나아가는
보살이라고 규정하면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법화부의 사상은 피안에서 차안으로 되돌아 오기 위한 방법론 및 그 과정과 차안으로 되돌아 왔을
때의 최종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만하다. 붓다는 보살들로 하여금 피안에서
차안으로 되돌아 오게 한다. 이미 붓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여래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그 개념은 보살의 반야바라밀다와 방향상의 좋은 대조를 보인다. 반야바라밀다가 '건너편으로 간 것'이어서 방향상 멀어져 가는 것이라면, 여래는 분명 온다고 함으로써 차안으로 회향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안으로 되돌아 오게 한 뒤 궁극적으로 자신과 같은 붓다를 이루도록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붓다가 세간에 출현하는 유일한 이유는 중생에게도 불지지견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붓다가 베푸는 첫째 방법은 수기로 보인다.
이러한 수기를 받은 자는 반드시 붓다를 이룰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또한 반드시 붓다를 이루고 말겠다는 발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깨닫게 한 뒤에 붓다는 보살들로 하여금 '붓다가 알고 본 것의 도로 건너게 하려 한다.' 이것은 붓다의 삶의 방식에 입각해 살게 하려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붓다의 삶의 방식이란 다른 존재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함께 받게 하고, 함께 보여주고, 건너게 하고, 깨닫게 하는 그 방식이다. 따라서 붓다의 교화를 받아 깨달음을 얻은 그도 끝없이 다른 존재들을 교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붓다처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법화에서는 모든 존재들을 모든 측면에서 '그러하다(tatha)'라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표현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정체 내지 자성의 다섯 가지 측면도 다른 자료에서는(구마라집 역 법화경 제2 방편품) 상, 성, 체, 력, 작, 인, 연, 과, 보, 본말구경의 열 가지 측면으로 확대되어 있듯이, 붓다의 입장에서 존재란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가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부 경전에서는 반야부의 반야바라밀다를 궁극적인 경지로 안주하는 것을 파기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피안으로부터 차안을 향하여 오는 과정을 새로이 설하고 그 결과로 모든 존재의 '그러한 정체 내지 자성'을 알고 보는 무상정등각을 성취하여 붓다를 이루게 하는 것이 <법화경>의 사상임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화엄부, 정토부 경전의 사상
1. 화엄부 십지경에서의 재건
초기불교 경전과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지양의 교의가 화엄부의 <십지경>에서는
재건되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 재건이란 뜻은 다시금 긍정되어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재건이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어떤 방법을 새로이 동원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한 재건의 현실적 장치를 <십지경>은 십지 중 제1지에서 '원'으로
시설하고 있다.
환희지(제1지)에 머물고 발하는 십대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 서원의 구성은 오직
붓다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10 가지이다. 즉, 1)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2) 일체
불법을 수지하기 3) 부처님의 상수 제자 되기 4) 교화가 중생의 마음을 증장시킬 것
5)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기 6) 일체세계를 받들어 섬길 것 7) 일체 국토가 청정하기
8) 일체 보살들과 늘 함께하기 9) 작은 수행이라도 큰 이익 있기 10) 무상정등각을
성취하고 성불하기 등을 서원하는 것이다. 이상의 서원이 확립될 때 비로소 첫걸음을
옮기는 자가 능히 궁극의 목표인 붓다를 성취하게 되며 이러한 서원 외에 성불이라는
목표의 부담감을 이겨낼 방도는 없다고 파악한 것이다.
<십지경>에서의 재건 과정을 살펴보자.
<십지경>의 제2지에서는 십선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 주장된다. 이 십선도는 사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모두에서 널리 선양되는 교설이다.
제3지는 3법인적인 관찰에서 시작한다. 이어서 색계4선과 4무색정과 4무량심과
5신통이 닦아야 할 수행법으로 제시된다.
제4지에는 37조도법이 구체적인 수행의 내용으로 제시된다. 37조도법은 이른 바
4념처, 4정근, 4신족, 5근, 5력, 7각지, 8정도로 구성된 대표적인 초기불교의 수행법이다.
제5지는 4제에 대한 관찰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4제설이 본격적으로 설해지는 것도 또한
초기경전이다.
제6지는 12연기에 대한 관찰로 가득 차 있다. 12연기의 각 지분을 무려 10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으니 오히려 초기경전의 12연기설보다 더 자세한 면도 있다.
제7지는 10바라밀다를 수행하는 지위이다. 반야부 경전에서의 주된 수행이 6바라밀다를
중심으로 하는 것과 일치한다. 나아가 제7지의 명칭이 '원행'인 것도 주의를 끈다.
'멀리 나아간다'는 표현은 반야부 경전들이 늘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끝없이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제8지는 무생법인을 얻으면서 출발하는 경지이다. 무생법인의 '인(ksanti)'은 아직 완성된 삶,
예를 들면 불지지견은 아니지만 어떤 차원에서의 궁극적인 앎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술어로
생각된다.
제9지는 4무애지의 지혜를 일으키는 것으로 특징이 규정된다.
마지막으로 제10지의 내용은 집-->화-->지-->미세지-->밀-->섭-->입지-->해탈이라는
술어들로 표현되는 구조와 전개를 가지고 진행된다. 각 술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집 : '함께 올라 옴 '
2) 화 : '변화함'
3) 지 : '위에 섬'
4) 미세지 : 차안과 피안이 가치론적으로 통합됨을 확인하는 지
5) 밀 : '숨은 것'
6) 섭 : '흘러 들어 감'
7) 입지 : '-에 들어가는 지'
8) 해탈 : '벗어나려 함'
이러한 논술이 건전하다면 십지 중 제9지와 제10지는 분명 법화부 경전의 교의를 재건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게 된다.
결국 화엄부의 <십지경>은 제1지에 십대원을 세우게 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이상을 전제한 다음,
제2지에서 제6지까지는 초기경전의 사상을 배열하고, 제7지와 제8지는 반야부 경전의 사상을
배열하였으며, 끝으로 제9지와 제10지에는 법화부 경전에 입각한 보살도를 배열시킴으로써
한 줄기 붓다되는 길, 곧 일불승을 재건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2. 정토부 경전
1) 타력의 의미와 어버이로서의 아미타불
지금까지의 초기불교(아함), 반야, 법화, 화엄부 등의 가르침은 자각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정토부 경전에 오게 되면 누군가의 각타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유신론적 종교와
같은 타자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중요한 방법이 된다. 재가자이든 출가자이든 진정
속시원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자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것이 진솔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인간은 나약하다. 인간의 유한성은 분명 인간의 한 본질이다. 그 유한성이란 죽음
으로 대표된다. 즉 인간은 죽음을 전제로 한 존재로서, 또는 죄업에 대한 과보적 존재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고독 속에서 눈물지으며 처량한
모습으로 방황할 뿐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거짓된 확신에 들떠 있는 것보다 나은,
진실된 우리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죄업과 인간의 유한 허무성에 압도되어 망연자실하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분이 있다. 그분은 어버이와 같은 분이다. 깨달음에의 길을 아예 시도조차 못하는 나약한
우리에게 그분은 따사로운 손길을 베푸신다.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걸어 나아갈 용기와 힘을
획득할 때까지 보살펴 주신다. 이것이 곧 타력의 근본되는 의미이다. 그런 뒤 스스로 걸어가게
놓아주신다. 다시 자력의 길이 전개되는 것이다.
누가 여기서 자력의 길만을 주장하겠는가. 따사로운 어버이의 보살핌을 어찌 잊겠는가.
그 보살핌의 배경에 깔리지 않는 한 어찌 깨달음이 있겠는가. 타력과 자력이 조화될 때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이 구현될 것이다.
2) 고타마 붓다와 아미타불
붓다의 입장에서 불교를 말해 보자. 붓다는 중생을 깨닫게 하여 자신과 같은 붓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 그런데 붓다가 중생을 가르치는 데(깨닫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이 자연히 예상된다.
하나는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생을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이다.
이 중에서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신 대표적인 붓다가 고타마 붓다이다. 그리고
그 붓다의 중생교화를 궁극적으로 밝힌 경전이 <법화경>이다. 그리고 <법화경>은 아함, 반야,
법화로 연결되는 연장선상에 있다. 실제 교화에 임해서 우선 고타마 붓다는 수기라는 장치를
통하여 현실의 오탁 악세 속에서 붓다의 상속을 계속되게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중생을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신 대표적인 붓다로서 아미타 붓다를
만나지 않을 수 없으니 바로 그 붓다의 교화를 밝힌 경전이 정토부 경전이다. 그런데 붓다가 중생을
불러들이는 세계는 오탁악세가 아닌 정토이다. 그리고 붓다가 중생을 불러들여야 하므로 중생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되고, 중생의 관심을 끌 만한 모습이어야 하므로 무량한 광명으로
스스로[불신]의 장엄을 보이고 일곱 보배로 극락장엄을 보인다.
그리고 정토로 불러들인 중생을 제도하려면 정토에서의 수명을 무량하게 가져야 한다.
그래야 중생들과의 만남을 성취할 충분한 기회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량수 붓다는
스스로가 반열반하더라도 관세음과 대세지 보살로 하여금 차례로 붓다의 지위를 잇게 함으로써
정토에서의 붓다의 상속이 영원히 계속되게 한다.
정토의 존재에게는 그곳에 왕생한 이상 특별한 자극이 필요 없다. 또한 실제 정토에서의 교화도
'지악, 행선-->여러 붓다의 경전의 도-->여섯 바라밀다-->일불승설'로 붓다를 이루게 하므로
아함-->반야-->법화(화업 십지)의 전개를 그대로 보인다. 아울러 눈을 점진적으로 뒤바뀌게 한다.
'육안 청정-->천안 통달-->혜안(여러 도를 구경함)-->법안(진실을 보아 피안에 이르름)-->
불안(법성을 깨달음)으로의 전개가 <무량수경>에 뚜렷이 명시되어 있거니와 이 또한
아함-->반야-->법화(화업 십지)의 전개를 그대로 보여 준다.
사실 오안설은 불교의 깨달음의 과정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가르침이다.
불교 수행을 통해 인간은 깨달음의 능력을 무한히 증대시키게 되는데 그 능력은 무지의 어둠을
깨뜨리고 진리에 대한 밝은 자각으로 깨어나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불교 수행은 횡적으로는
수용하고[신] 이해하고[해] 실천하고[행] 증득한다는 과정을 경유한다. 그리고 종적으로는
범부의 눈[육안], 하늘의 눈[천안], 지혜의 눈[혜안], 진리의 눈[법안], 붓다의 눈[불안]이라는
다섯 차원의 인식 단계를 경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토부 경전에서 선양되는 오안설은 바로 아함, 반야, 법화, 화엄의 교설을 전제로 정토부 경전이
설해짐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중생의 입장에서 불교를 말해 보자. 중생은 근본적으로 붓다를 만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붓다에게는 두 가지 교화 방법이 있으므로 붓다에게 의지하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붓다가 찾아온 경우는 고타마 붓다를 만나서 뵈었기에 그분의 실재(했음)를 믿는 것은 쉽다[이신]. 그렇지만 현실은 오탁악세이므로 깨달음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어렵고 깨닫기는 더 어렵다[난행]. 그리하여 행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아함, 반야, 법화의 과정을 거쳐 붓다를 이루겠다고 강한 원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붓다를 이루어 자신도 중생 속에 뛰어 들어 끝없는 교화 행적을 펼쳐야 한다.
다음은 붓다를 찾아가야 할 경우인데 아미타 붓다는 죽은 뒤에 가서 뵙는 대상이므로 지금으로서는
본 적이 없어 그분의 실재를 쉽게 믿을 수는 결코 없다[난신]. 그러나 가기만 하면 오탁이 사라진 정토이므로 깨닫는 노력도 용이하고 깨달음을 이루기도 쉽다[이행]. 그리하여 믿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극락에 왕생하여 붓다를 이룰 수 있도록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존재성 및 염불왕생의 진실성을 강하게 신앙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함에서 화엄까지의 흐름과 정토부의 사상은 종이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그러면서도
아함에서 법화(화엄 십지)까지의 전개가 앞면에 해당함을 말할 수 있다.
3) 정토신앙의 근거와 왕생의 방법
아함 내지 십지의 흐름에도 신앙이란 중요한 요소이고 정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정토에서의 그것은 다소 특징적인 것이 있다. 곧 정토신앙에서의 신앙의 대상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존재성 그리고 염불왕생의 진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야바라밀다를 수지하는 것보다 <무량수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 더 어렵다."
"붓다의 지혜에 대한 의혹이 있어서는 아니 되니 붓다의 지혜를 믿어야 극락을 믿게 된다."
라는 절대적 신앙과 관련된 표현을 만나게 되며, "극락은 불불상념이요 유불독명료의 세계"
임이 <무량수경>의 벽두에서부터 선언되고 있다. 정토신앙의 완벽한 성취는 붓다의
깨달음에서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낮은 근기의 우리로서는 정토에 대한 것을 믿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그럴 � 우선 인과의 법칙을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르마아카라[법장] 비구의
48 대원과 그것의 완벽한 실천이 원인이 되어 극락과 아미타불이라는 결과가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단언해야 한다. 즉 인과의 법칙에 입각하는 한, 전생을 믿는다면 극락과 아미타 붓다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의 법칙을 음미해야 한다. 죽음이 있으면 불사가 있고, 차안이 있다면 피안이 있고,
중생이 있으면 붓다가 있고, 오탁악세가 있으면 불국토가 있으니, 극고의 지옥이 있으면 극락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계합의 법칙을 살펴야 한다. 불교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법칙은 모든 것은 유사한
법끼리 무리지어 화합한다는 것이다. 곧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의 정토에 가서 태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끼리 모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토부 경전에 의하면 극락에 왕생하기 위한 요건은 다음의 7 가지이다 :
1) 다섯 가지 악을 짓지 않아야 한다.
2) 어렵지만 선을 지어야 한다.
3)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4) 극락정토를 지극하게 믿어야 한다.
5) 그 믿음에 기쁨을 느껴야 한다.
6) 정토에 나기를 원해야 한다.
7) 아미타 붓다를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4) 인과법에 의한 극락의 실재성
우리가 정토부 경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극락정토와 아미타 붓다의 실재성 및 염불왕생의
진실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이 경전이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인과법에서, 원인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모두 그 결과를 우리 눈앞의 현실에서 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역으로 결과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모두 그 원인을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 불교에서는 <아함경>에서부터 과보에 대한 원인 및 원인에 대한 과보가 발견되지
않을 � 그 원인은 '전생'에서, 그 결과는 '내생'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의 전생을 인정하고
나면 그것은 자연히 무한한 무시의 전생을 상정하게 되고, 역시 한번의 내생을 인정하고 나면 그것은
자연히 무한한 내생을 상정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몇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먼저 그렇게 윤회하는 유정의 수가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유정의 마음가짐과 업과 모습도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뛰어난 유정을 생각해 보면, 다르마아카라[법장]와 같은
인물을 떠 올릴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과 성불뿐만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전 중생의 성불과
불국토 건설을 추구하려 했던 인물로 묘사된다.
따라서 극락정토와 아미타 붓다의 실재성 및 염불왕생의 진실성을 믿는 것은 여전히 인과법에 입각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 필자는 세 가지 요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 정토부 경전이 다른 경전들과 동떨어진 경전이 아니라 초기불교 및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늘 아함, 반야, 법화의 가르침을 불교의 뼈대에 비유하고
화엄의 십지를 그 살에 해당한다고 보며 <정토경>은 그 살에 옷을 입힌 것에 해당항다고 보았다.
둘째, 극락정토와 아미타 붓다를 유심적 존재로 보기보다는 실재하는 것으로 신앙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정토부 경전이야말로 만인의 불교경전임을 말하고 싶다. 누구나 아미타 붓다의 염불을 10념만 해도 극락왕생하여 수행성불할 수 있다는 정토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를 만인의 소망으로 세워놓는 가르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극락에 왕생하기만 하면 전문적인 수행과 그를 통한 깨달음은 보장되고 깨달음을 통해 누구나 행복해 지는 것이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불자든 불자가 아니든 정토부 경전이야말로 만인의 경전이 될 수 있음을 볼 �, 우리는 붓다의 부촉을 받들어 이 경전을 널리 선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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