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樂♪ 오락♧/글.詩.운세.꿈해몽

[스크랩] 불교의 4대 수행법 / 일타

花受紛-동아줄 2009. 1. 30. 01:32

불교의 4대 수행법 / 일타 큰스님(조계종 원로의원)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熏修)!

불법을 수행하여 해탈하는 길에 백천 가지 삼매 법문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큰 가닥으로 잡아 이야기하면 참선(參禪)·염불(念佛)·간경(看經)·주력(呪力)의 네 가지 수행으로 압축할 수 있다.

서울 장안에 들어가려고 하면 동대문·남대문·서대문·북대문 중 어느 문이든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계신 열반의 궁전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이 네 가지 수행법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부지런히 밀고 나아가면 마침내 불국(佛國)의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이들 네 가지 수행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격외향상(格外向上)의 참선문(參禪門)

4대문 가운데 남대문에 해당하는 참선문(參禪門)은 일반적으로 격외향상문(格外向上門)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수행이 한 계단 한 계단씩을 밟아 위로 올라가는 것임에 비해 참선을 하게 되면, 단번에 최상의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여 '격외의 향상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참선법은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을 잡는 방법'이다. 우리 자신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몸뚱이는 자동차 자체와 마찬가지요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은 것이다. 곧 운전수가 참된 '나'이지, 자동차와 같은 이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동차 생각해 보라. 공장에서 갓 나올 때는 윤이 나고 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고물이 되기 시작하고, 오래 사용하여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면 폐차를 해야 한다. 이 몸뚱이도 총각·처녀 시절에는 잘나고 예쁘다고 큰소리 치고 다니지만, 늙어지면 별수가 없다. 늙고 병들어 수명이 다하면 버려야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佛法)이란 무엇인가? 껍데기인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수인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불법이다. 곧 부처님께서 일평생 동안 설하신 것이 모두 이 마음자리를 찾게끔 이끄는 가르침이었다. 이에 비해 참선법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자리를 직접 찾아 나서는 수행법이다.

참선은 중국에서 확립된 부처님 설법 밖의 수행법으로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이라는 두 개의 큰 가닥이 있다. 묵조선은 묵묵히 자기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수행법이고, 간화선은 화두에 의지하여 닦는 선법으로 달리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간화선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화두선법이다.

그렇다면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화두의 '話'는 '말씀 화(話)'자로서 말이라는 뜻이고, '頭'는 '머리 두(頭)'자로 앞서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흔히 책의 머리말을 '서두(序頭)'라고 하듯이,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화두는 달리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공안의 '공 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案'은 곧 '방안'이다. 따라서 공안은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복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는 언어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계합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백만억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녹야원에서 시작하여 이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未회說一字]."
바로 평생을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 방편이요, 약방문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방문이 병을 고치는 약은 아니고, 불이라고 말하여도 입이 타는 것이 아니듯이…

아무리 약방문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약방문만으로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약방문을 보고 자기 병에 맞는 약을 지어먹을 때에만 병은 낫게 되는 것이다. 설혹 팔만대장경을 다 외웠다 할지라도 그것은 약방문을 외운 것일 뿐, 약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약방문을 모르더라도 약만 먹으면 병은 나을 수 있다. 그 약이 바로 언어 이전의 화두이며,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 수행법이 그 약을 먹는 일인 것이다. 이제 화두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가 동관원(東觀院)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수행승 문원(文遠)이 개를 안고 와서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無]."

이것이 화두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하셨다. 그렇다면 개에게는 틀림없이 불성이 있고, 불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단 한마디 '無'라는 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주선사가 엉뚱한 답을 주신 것은 아니다. 조주선사의 깨달은 경지에서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요, 언어 이전의 참된 답을 일러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조주선사께서 '無'라고 하신 까닭을 확실히 알면 그는 조주선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곧 조주선사와 하나가 되어 대오(大悟)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주선사께서 '無'라고 하신 까닭을 이해하고 못한다. 그러므로 화두법에 의지하여 가장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한다. 머리를 굴려서 얻는 해답으로는 안된다. 철두철미하게 의심하고, 의심의 삼매 속에 들어가 해답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無'라고 하였는가?"
"틀림없이 개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왜 조주선사는 '無'라고 하였는가?"
"왜 '無'라고 하였는가?"
"왜 '無'인가?"
"無?"
"?"
이와 같은 "?", 이와 같은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대의단(大疑端)을 갖는 것, 크나큰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그러나 화두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參究)하는 것!' 이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切)!' 이것이야말로 화두법문·참선법문의 가장 요긴한 방법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을 일으켜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흙이 크면 부처가 크고, 물이 높으면 배가 높이 뜬다."는 속담과 같이, 의심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큰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막상 화두를 잡고 있으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마치 놋젓가락을 가지고 계란을 잡으려고 할 때 요리조리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듯이,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만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해서는 물론 안된다. 오히려 화두가 잘되지 않으면 '송(誦)'이라도 해야 한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듯이 속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誦話頭)를 꾸준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염(念)'자의 염화두(念話頭)가 된다.

우리는 흔히 '염불을 한다'고 하면 목탁을 두드리며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구불(口佛)이지 염불(念佛)이 아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생각 염(念)'자 염불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송화두를 꾸준히 하다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목구멍 속에서 화두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고, 그것이 계속되면 마침내는 염화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송화두·염화두를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면서도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가 되는 것이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촉발(觸發)하면 홀연히 참의심[眞疑]이 발기(發起)되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에 들게 되는데 비로소 이를 참선화두(參禪話頭)라 하는 것이다. 참화두(參話頭)만 되면 깨침은 진정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참화두! 어떤 것이 진짜 참선인가?
화두가 또렷이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가 진짜 참선의 경지이다. 그와 같은 참화두의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하게 된다. 정녕, 참선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한 의심이다. 화두에는 좋은 화두, 나쁜 화두가 따로 없다. 초점은 의심이다. 간절히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잡는 것이 최상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할 때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삼매에 이르면 저절로 깨달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여기까지 읽은 불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참선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참선이야말로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참 생명, 참된 주인공을 찾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는 것이다. 하루에 30분씩이라도 꾸준히 참선을 하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밝아지게 되어, 집중력이 놓아지고 판단력이 빨라져서 생활 또한 보다 윤택하게 꾸려갈 수 있게 된다.
곧 참선할 때의 집중력이 생활에 그대로 응용되어 갖가지 좋은 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부디 능력껏 참선공부를 행하여 자기의 참 생명을 밝혀보기 바란다.

염불왕생문(念佛往生門)

두 번째의 염불왕생문은 염불을 하여 정토(淨土)에 왕생에 하는 수행방법으로, 서대문에 해당한다. 이 염불수행법이 크게 발달한 것은 중국 진나라 때부터이다. 혜원(慧遠, 334∼416)법사가 백련사(白蓮社)를 조직하여 염불수행을 적극 권유함으로써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예배하고 기도하는 수행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처님을 지극히 생각하고 염불하는 길도 있었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십육관경>에는 염불수행법이 생겨나게 된 까닭과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극락왕생 염불법이 자세히 설하여져 있다. 이는 염불수행법의 지침이 되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마음에 깊이 새겨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하기 바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80년 생애 끝 무렵이 가까웠을 때의 일이다. 마갈타국의 아자아타 태자는 데바닷타의 간교한 꼬임에 빠져 부왕인 빔비사아라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왕을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음식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빔비사아라 왕의 부인 바이데히이는 몸을 깨끗이 씻은 후 볶은 찹쌀가루를 벌꿀로 버무려서 몸에 바르고 감옥으로 들어가, 찹쌀가루를 먹임으로써 왕의 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아자아타는 분노하면서 어머니를 죽이려 하였으나, 중신들의 간곡한 만류로 궁에 감금하고 출입을 못하게 감시하였다. 바이데히이 부인은 분함과 억울함을 참으며, 슬픔과 탄식 속에서 부처님이 계신 깃자쿠우타산을 바라보며 부처님 뵈옵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빗방울 같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드리고 있을 때 부처님은 신통으로 부인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고, 부인은 부처님 앞에서 흐느껴 울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무슨 죄보로 이와 같은 불효 악자(惡子)를 낳게 되었나이까? 저는 이 천박하고 악독한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이 세상은 지옥·아귀·축생이 꽉 차있는 좋지 못한 세상입니다. 청컨대, 저에게 깨끗한 세계를 보여 주시옵소서."

이에 부처님은 백호(白毫) 광명을 뿜어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 정토(淨土)를 남김없이 보여주셨다. 그 하나하나의 세계는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부인은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가 가장 좋다고 하며,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시므로 아미타불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주야로 생각하며 세 가지 복업(福業)을 닦을 것을…….
그리고 그 세 가지 복업이
① 자비심을 깊이 가지고 10善을 지킬 것,
②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계행(戒行)을 지킬 것,
③ 인과(因果)의 이치를 믿고 경전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道 닦을 것을 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린 아미타불이 모습을 나타내어 기뻐하는 대중들에게 석가모니불의 말씀이 옳음을 증명해 보이셨고, 석가모니불께서는 극락왕생을 위해서 미타염불로 정진할 후인들을 생각하여 그 염불법을 조용히 일러주셨다.
"바이데히이여, 저 부처님을 주야로 생각하라.
저 부처님의 몸은 법계(法界)에 가득 차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도 들어가 계신다.
그러므로 저 부처님을 생각할 때의 그 마음은 진실로 원만한 상호(相好)를 갖춘 부처인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란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의 마음이 부처를 생각하면 그 마음 그대로가 부처가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들이 아미타불을 일심으로 지극히 생각하면 모든 공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끝없는 무명번뇌의 미혹에 들어가는 죄를 제하게 되리니, 생각하고 잊지 아니하는 이의 공덕은 말할 것 없다.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서 깨끗한 연꽃이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그 벗이 되고, 마침내는 극락정토에 가서 나게 되리라."

왕후 바이데히이는 풍족과 행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인과의 수레바퀴 속에서 피붙이의 손에 수모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어야 했고, 급기야는 이 세상의 추악한 존재 양상에까지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부처님의 자비 아래 선택한 정토가 극락이요, 아미타 염불법이다.

물론 염불을 한다고 하여 꼭 '아미타불'만을 염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허약한 이라면 약사여래를 외워도 좋고, 현세의 행복이 급하면 관세음보살을, 먼저 가신 분들을 천도하고 싶으면 지장보살을, 지혜를 이루고자 하면 비로자나불이나 문수보살을 염하여도 좋다.

실로 예로부터 전래되는 염불법은 수없이 많다. 입으로만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는가 하면, 고요히 앉아 부처님의 형상을 관념(觀念)하는 관상염불(觀相念佛)도 있고, 일체만유의 진실한 자성(自性)인 법신(法身)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도 있다. 그리고 좌선할 때처럼 고요히 앉아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정업염불(定業念佛)과 가나 있으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이 염불하는 산업염불(散業念佛)도 있으며, 더러운 세계를 싫어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며 염불하는 유상업염불(有相業念佛)이 있는가 하면, 비록 염불하여 정토를 구하나 자기 몸이 곧 정토라고 보는 무상업염불(無相業念佛)도 있다.

내가 불자들에게 많이 권하는 것은 한 숨에 108번 불보살의 명호를 외우는 염불법이다. 이 108염불법은 어떻게 하는가?
먼저 허리를 쭉 펴서 심호흡을 세 번 이상 하고 숨을 깊이 들이킨 다음, 꽉 찬 숨을 아껴서 한번의 숨을 다 내쉬는 동안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을 108번 부르는 것이다(이하 관세음보살로 통일함). 이때 108염주를 쥐고 있다가 한번 염불할 때마다 한 알씩 돌리면 된다.
왜 한 숨에 108번을 부르라는 것인가? 천천히 부르면 잡념이 많이 생기지만, 한 숨에 아주 빨리 108번을 부르면 집중이 잘 되고, 간절한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서 천천히 시작하여 서너 번 지나면 점점 빨리 불러, 마침내는 한번 한 번 부르는 '관세음보살' 소리가 앞 뒤 간격이 없을 만큼 빠르게 불러야 한다. '나'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지만, 옆에서 듣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빨리!

이렇게 빨리 부르면 능히 한 숨에 108번을 부를 수 있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30번, 40번밖에 부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능력껏 부르고 숨을 깊이 들이키면서 속으로 소원을 세 번씩 기원한다. 그리고 다시 앞의 요령대로 관세음보살을 108번 부르고 기원, 또 108번 부르고 기원……. 이와 같이 세 차례 또는 일곱 차례 반복하면 자기 암시가 되어 자신감도 생기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능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한 숨에 108번 이상을 염할 수 있게 되면, 그는 이미 염불로 인한 염력(念力)이 생긴 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염력이 생긴 자라면 참선수행을 하는 것도 좋고, 간경(看經) 수행 쪽으로 방향을 돌려봄도 바람직하다.

또한 사람들 중에는 중병에 걸렸다거나 갑자기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했다거나 뜻하지 않은 재앙을 처하게 되어 염불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매우 다급한 경우에 처한 분들의 기도는 결코 한가할 수가 없다. 애가 타고, 애간장이 녹아날 것 같은 이라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때는 입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염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려야 한다.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이 불보살님께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 능히 소원을 이룰 수 있다. 단, 아주 다급한 소원인 만큼 하루 일정 시간, 잠깐이 아니라 앉으나 서나 누우나 끊임없이 불보살을 챙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즘 불교계에 기도가 널리 행하여지고 있어 참으로 흐뭇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묘한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한다는 점이다. 처음 <천수경>을 외우고 그 다음 108배를 하고 또 <지장경>을 읽고 <금강경>을 읽고, 관세음보살 정근도 한참 동안하고 그것도 모자라 <팔양경>까지 읽고……. 물론 이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함께 하다보면 삼매를 이루기가 용이하지 않다.

오히려 더 간단히 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천수경>을 외우고 그 다음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 중 한 분을 택하여 그 분의 명호만 꾸준히 부르는 것이 좋다. 가거나 오거나 일을 하거나, 그 분의 명호가 저절로 속에서 흘러나오고 꿈에서도 염불이 되면 마음속의 소원은 꼭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다. 또 꼭 입을 소리내어 부르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은 불보살을 속으로 염하여도 좋고, 마음으로 그 모습을 그려도 무방하다. 그냥 간절히 생각하면 가피가 저절로 찾아들어 다급한 소원을 능히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의 경우에는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놓고 염불을 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백일을 하나의 기한으로 잡는 것이 좋고, 시간이 급하면 3일 또는 7일을 기한으로 잡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기한을 정하여 꾸준히 염불을 하다보면 그 날짜가 다 채워지기도 전에 가피를 입는 듯한 징조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여 회향일 전에 염불을 그만두지 말고 꾸준히 계속하여 날짜를 채우는 것이 좋다. 또한, 한번의 기한으로 원을 이루지 못하면 또 한 차례 기한을 정하여 염불하는 것이 좋다.

우리 불자들 중에는 염불기도를 하다가 쉽게 성취를 보지 못하면, "아미타불은 나에겐 인연이 없는가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면서 스스로를 흔드는 경우가 있다. 또 주위의 스님이나 신도가 "당신은 관세음보살보다 산신과 인연이 깊다."고 하면 그만 흔들려 "산왕대신"을 찾는 불자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흔들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것이 시련이요 염불을 방해하는 마장(魔障)이 될 수 있으므로, 더욱 지조있게 한 분의 불보살을 찾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기도성취가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므로, 더욱 마음을 모아 염불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생 염불을 다짐한 경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외증조할머니는 나이 일흔에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시작하여 여든 여덟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이 염불하였다. 살아 생전에도 가끔씩 신통력을 보였던 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이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한결같은 염불정신! 그 결과는 반드시 우리를 불국정토에 머물 수 있게 한다. 한결같이 염불정진하는 분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부디 부지런히 염불하여 염불삼매를 이루어 보라. 삼매에 젖어들면 능히 서대문을 통과하여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보배궁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니…….

의교관행(衣敎觀行)의 간경

불교의 4대 수행법, 곧 부처님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4대문 가운데 북대문에 해당하는 간경문(看經門)은 일반적으로 의교관행문(衣敎觀行門)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보고, 그 경전에 의거하여 관행(觀行)을 닦음으로써 해탈의 경지를 체득하는 수행법이다. 여기에서는 관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간경의 기본요령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금강경> <아미타경> <지장경> <천수경> <법화경> 등을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읽는 불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경전을 독송하는 불자들 중에는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음만 취하여 줄줄줄 읽어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렇게 할 때도 '독경(讀經)' 자체의 공덕이 없진 않겠지만, 뜻을 새기지 않고 한문의 음(音)만을 외우는 것은 혼백을 잃은 육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한문을 가르칠 때 "글은 글, 나는 나(書者書我者我)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글과 글을 읽는 '나'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럼 어떻게 경전을 읽어야 하는가?

첫째, 경전 속의 뜻을 새기며 읽어야 한다.
<초심>을 보면 "모름지기 글의 뜻을 관하며 읽어라(須誦門觀意)."는 말씀이 있다. '뜻을 관(觀)한다'고 할 때의 '觀'은 경전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외우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라는 것이다. 간경의 '간(看)' 또한 마찬가지이다. '看'은 곧 '觀'이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전의 내용이 '나'의 마음속에 또렷이 살아 있도록 보는 것, 경의 내용을 '나'의 것으로 만들면서 보는 것이 간경이다.

경전의 내용을 나의 것으로 만들며 읽는 것과 뜻을 모른 채 읽는 것과의 차이를 잘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영가천도를 위한 독경의 경우이다. 특히 요즈음은 승속을 막론하고 영가천도를 위해 어떠한 경을 49일 또는 백일 동안 읽어주는 독경이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그런데 독경을 할 때 그 경전의 뜻을 새기면서 읽지 않게 되면 그 경전의 내용은 영가에 전달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가는 소리를 듣지 않고 독경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수십 년 전 합천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해인사 강원의 학인(學人)들이 장경각 뒤쪽으로 잣을 따러 갔다. 그런데 그곳의 잣나무는 워낙 키가 커서, 이쪽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다른 나무로 올라가게 되면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잣을 따는 사람들 중에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냥 건너뛰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많은 학인들이 나무를 건너뛰며 잣을 땄는데, 한 학인이 자칫 실수하여 나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나무 밑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어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호흡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스스로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그 학인의 영혼은 잠깐 사이에 속가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속가의 집에 들어서자 식구들이 모두 머리가 아프다며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서있는데, 그 동네의 무당할머니가 바가지에 김치국밥을 풀어서 살살 다가오더니 머리에 확 덮어씌우고는 칼을 들이대며 소리를 첬다.
"네 이놈, 객귀(客鬼)야, 어서 나가거라."
그는 깜짝 놀라 뛰쳐나오며 중얼거렸다.
"에잇, 빌어먹을 집. 내 생전에 다시 찾아오나 봐라. 나도 참, 중이 된 몸으로 무엇하러 집에 왔나? 더군다나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집에."

그리고는 해인사로 돌아와 보니, 재(齋)가 있는지 독경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소리가 이상하여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들어보니,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은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하고 있고,
요령을 흔드는 스님은 '제경행상' 딸랑딸랑~, '제경해상' 딸랑딸랑~ 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독경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열반당(涅槃堂) 간병실로 가보니 자기와 꼭 닮은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는 누워있는 사람을 발로 툭 걷어찼고, 순간 그는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난 그는 자신을 위해 독경을 해주던 도반스님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들으니 너는 '은행나무 바리때'만 찾고, 너는 '제경행상'만 찾던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리냐?"

그러자 독경을 했던 두 도반스님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고백하였다.
"나는 전부터 은행나무로 만든 너의 바리때를 매우 갖고 싶었어. 너의 유품중에서 그것만은 꼭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하게 나던지...... 너를 위해 독경을 하면서도 '은행나무 바리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네. 정말 미안하네."
"나도 역시 그랬다네. 네가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제경행상(諸經行相)>이라는 책이 하도 탐이 나서......"

이 이야기는 독경을 할 때 마음을 모아 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경우, 영가가 어떻게 알아듣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이야기이다. 모름지기 독경을 할 때는 마음을 잘 모아서 해야한다. 그야말로 간경(看經)이 되어야 한다. 영가천도를 위한 독경이든 소원성취를 위한 독경이든, 경전을 읽을 때는 경전 속의 내용을 또렷이 새기며 읽어야 한다.
정녕 경전을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는 간경이 되어야 독경 그 자체가 기도가 되어, 영가를 천도할 수도 있고 소원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경전을 마음으로 보면 불경의 뜻, 곧 부처님의 말쑴과 '나'는 차츰 하나가 될 수 있고 마침내는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둘째, 경전을 읽다가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새겨두었다가 스님 등 선지식(善知識)들게 여쭈어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찾아간 선지식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요, 선지식이 올바로 풀이해주어도 스스로의 귀가 어두워 바로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한 경우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 뜻을 계속 밝히고자 노력해야 한다.

중국 당나라 때에 살았던 이발(李勃)은 책을 많이 읽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가 책을 만 권이나 읽었다고 하여, 그를 '이만권(李萬卷)'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이발은 <유마경>을 읽다가,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의 '수미산(須彌山)이 겨자 씨앗 속에 들어가고 사대해수(四大海水)가 하나의 털구멍 속에 들어간다'는 법문에 이르러 꽉 막혀버렸다. 이발은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여산의 업종사(業宗寺)에 있는 지상(智常)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다.
"유마경에 '수마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고 사대해수가 하나의 털구멍 속에 들어간다'는 법문이 있던데, 그렇게 큰산과 넓은 바다가 어떻게 겨자씨나 털구멍처럼 작은 것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지상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반문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를 '이만권'이라 한다지?"
"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제가 이제까지 본 책이 만 권 정도 된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책을 어떻게 그 작은 머리 속에 다 넣었는고?"
지상스님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발은 마음이 확트여 크게 깨달았다.

이 이야기 속의 '이만권'처럼, 경전을 읽다가 생겨나는 의문을 그냥 모른 체 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좋은 인연을 만날 때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적당한 이해, 적당한 해결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은 것이라도 철두철미하게 뚫고 들어가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무엇 하나든 정성을 다하여 나아갈 때 참된 결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간경을 할 때 대충대충 하지 말고, 난해한 구절이나 의문이 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나아가기를 당부 드린다.

셋째, 처음 경전을 공부할 때는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기보다는 하나의 경전을 택하여 확실히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도 삼아 독경을 하거나 경전을 공부하는 불자들중에는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천수경> <관음경> <지장경> 등 영험이 크다고 하는 경은 무엇이든 취하여 외우거나 공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한 가지 경전을 옳게 통달하면 나머지 경전들도 저절로 통달이 되는 것이므로, 간경하는 힘이 잘 모일 때까지는 하나의 경전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공부하는 것이 좋다.

중국 수나라 때의 승려인 혜공과 혜원은 사형 사제 사이로, 젊은 시절 '기필코 불도를 성취하겠다'는 서원을 함께 세웠다. 그리고 사제인 혜원스님은 장안으로 가서 여러 경전을 남김없이 독파하여 대강사가 되었고, 혜공스님은 강화로 가서 오로지 <관음경>만을 외우며 정진하였다.
두 스님은 헤어진 지 3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때 혜원스님은 여러 경전의 심오한 도리를 쉴사이 없이 계속하였으나, 사형인 혜공스님은 한마디의 응답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홀로 열변을 토하다가 멋쩍어진 혜원스님은 혜공스님께 물었다.
"사형께서는 도무지 말이 없으시니, 그 동안 어떤 공부를 하신 것입니까?"
"나는 원래 천성이 우둔하지 않은가? 그래서 관음경 한 권만을 일고 외웠을 뿐이라네."
"관음경이라면 세속의 불자들도 모두 외울 수 있는 경전이지 않습니까? 사형께서는 나와 더불어 도과(道果)를 성취하겠다는 서원을 세웠거늘, 30년이 지나도록 겨우 관음경 한 권만을 외웠단 말이오? 이것은 우둔한 것이 아니라 나태한 증거요. 서원을 저버린 사형과는 그만 인연을 끊겠소이다."
혜공스님은 흥분한 혜원스님에게 차분히 말하였다.
"관음경이 비록 적은 분량의 경전이지만 역시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더냐, 그 말씀을 믿어 받들면 무량한 복을 받을 것이요, 그 경전을 경솔히 생각하면 죄를 짓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 성만 내지 말고, 서로의 인연을 끊기 전에 내가 외우는 관음경을 한 차례만 들어주게."
"허허, 관음경은 내가 백 번도 더 가르친 것인데, 어찌 시끄럽게 들으라고 하시오?"
"불법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지, 사람이 불법을 키우는 것은 아니네. 다만 지성으로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그만이지, 왜 사람을 핑계하여 법까지 버리려 하는가?"
이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혜원스님은 마지못해 혜공스님의 <관음경> 독경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혜공스님이 경의 제목을 읽자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충만하였고, 본문을 읽어나가자 천사의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네 가지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상의 음악소리는 갈수록 미묘한 곡조로 바뀌었고 꽃비는 분분히 휘날리더니, 혜공스님이 관음경 외우기를 끝내자 꽃비도 음악소리도 일순간에 멎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기적에 깜작 놀란 혜원스님은 자신의 오만함을 깊이 뉘우치고, 혜공스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
"한낱 냄새나는 송장에 불과한 혜원이 감히 불법을 깊이 깨달았다며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부디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모든 경전을 두루 섭렵한 혜원스님과 <관음경> 하나만을 30년 동안 외운 혜공스님. 이 두분 스님 중 어느 스님의 도력이 더 높은 것일까? 모든 사람이 다 혜공스님을 택할 것이다. 간경수행을 하는 불자라면 마땅히 혜원이 아닌 혜공스님을 닮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많은 경전을 접하여야 많이 깨우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법의 세계는 그야말로 '일통일체통(一通一切通)'이다. 하나를 통달하면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게 된다. 한 경전을 요달하면 모든 경전의 뜻을 꿰뚫을 수가 있다. 오직 성패는 내가 그 경전과 하나가 되어 공부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가 되어 공부를 하다보면 차츰 삼매에 젖어들게 되고, 마침내는 혜공스님과 같은 신통묘용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간경공부를 하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만약 지금 특별히 공부하고 있는 경전이 없다면 양이 많은 경전보다 짤막하면서도 심오한 <반야심경>을 외우라고......
정녕 짧디짧은 <반야심경> 하나라도 분명히 공부하여, 그 경전의 뜻을 조금의 의문도 없이 해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를 지어가면, 무량한 공덕과 함께 참으로 깊은 경지를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반야심경> 이외의 다른 경전이나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경전, 곧 <반야심경> 등을 '나'의 중심으로 삼고 다른 불경이나 불교서적들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하면 결국은 모든 가르침이 <반야심경>의 공삼매(空三昧)를 채득하는 밑거름이 되어 흔들림 없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부디 우리 불자들이 이제까지 열거한 간경공부의 기본요령을 잘 터득하여 꼭 북대문을 통과하기 바란다.

진언총지의 주력문(呪力門)

두 4대문 가운데 동대문에 해당하는 주력문은 진언총지문(眞言總持門)이라고도 한다. 진언총지문의 '眞言'은 참된 말, 진리의 언어 등으로 풀이되고, '總持'는 범어 다라니를 의역(意譯)한 말로서, 모든 장애를 벗어나게 하고 한량없는 복덕과 공덕을 다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곧 진언과 다라니는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범어로 된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이러한 용어 풀이를 통하여 보면 '주력문 진언총지문'이 밀교(密敎) 계통의 수행제계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언총지의 주력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밀교(密敎)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밀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주력수행법을 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밀교는 부처님께서 깨우친 진리를 은밀하게 보여주는 대승 불교의 한 교파이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실천행보다 이론적이 탐구를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또 중생을 구제하는 승려보다는 학문을 익히며 대접받는 승려들이 많았던 시기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밀교는 바로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를 펼치려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발전되어왔던 반야공사상(般若空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계승 발전시킴과 동시에, 힌두교와 민간신앙을 폭넓게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의 근본경전으로는 <대일경(大日經)>과 <금장정경(金剛頂經)>이 있다. 이중 <대일경>은 밀교의 이론적 원리를 밝힌 경전이고, <금강정경>은 밀교수행법의 체계를 밝힌 경전이다. 나아가 이들 경전에서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의 근본 서원력에 의지하여, 대일여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나'의 근본자리를 찾는 태장계(胎藏界) 수행법과 대일여래와 같은 지성(智性)을 발현시키는 금강계(金剛界)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을 지닌 채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즉신성불을 이룰 수 있는가?
몸으로는 단정히 앉아 여러 가지 수인(手印)을 맺고,
입으로는 진언을 염송하고,
마음으로는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밀(身密)·구밀(口密)·의밀(意密)의 '삼밀가지(三密加持)' 수행법이라고 한다. 곧 '나'의 몸과 말과 뜻, 부처님의 몸과 뜻, 이 둘이 서로 은밀하게 감응하여 일치를 이루면 현생에서 능히 성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주제로 삼고 있는 '진언총지의 주력문'은 바로 이 삼밀가지 수행법을 뜻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주력문은 신·구·의 삼밀을, 모두 갖춘 수행법이 아니라, 진언이나 다라니만을 열심히 외우는 구밀(口密)의 수행에 한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입으로만 외우는 이 구밀수행법, 곧 주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진언(眞言, 呪)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힘(呪力)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어떠한 힘인가? 제불삼보감통력(諸佛三寶感通力)이다. 모든 부처님과 삼보의 감통력이다. 우리가 진언이나 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워나가면 제불 삼보와 그대로 감통하여 소원을 성취할 수도 있고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 말기, 고(高)씨 성을 가진 한 젊은이는 뜻하지 않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온몸이 곪아터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어져나가 양쪽 엄지손가락만이 남게 되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쫓겨나게 된 그 젊은이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한술 밥을 빌어먹으면서 모진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젊은이는 정자나무 밑에서 한 노스님을 만났고, 기도성취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병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 저에게 그 주문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스님은 자상하게 그 주문을 써주고, 직접 여러 차례 읽어주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 아리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 다나타
아바다 아바다 바리바제 인혜혜 다냐타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바라마수다 못다야 새바라야 살바돗타 오하야미 사바하

젊은이는 곧바로 동네 앞에 있는 개천가로 가서 잔돌 10만개를 모았고, 아침저녁 동네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관세음보살모다니>를 외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한번 외우고는 돌을 하나 치우고 또 한번 외우고는 돌을 하나 치우고… 이렇게 하다보니 돌 10만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젊은이는 그날 밤 감미로운 한 편의 꿈을 꾸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젊은이를 찾아와 두 팔로 안더니 개천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정성껏 온몸을 씻어주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끼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토록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문둥병이 깨끗이 치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젊은이는 출가하여 덕산(德山)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경주 석굴암에서 일평생을 기도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렇듯 진언이나 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면 누구나 삼보의 감통력을 입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주력수행을 하는 불자들에게 한 가지 더 주문하고 싶은 것은 입으로 진언을 외움과 동시에 앞에서 말한 삼밀가지 중 의밀(意密)을 함께 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의밀가지가 아주 특별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진언을 외우면서 그 진언의 제목에 해당하는 모습을 마음으로 떠올리는 관상법(觀想法)이다.

경전을 읽을 때 뜻을 새기듯이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울 때 그 장면을 관상하게 되면 주문의 힘을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다. 영가천도를 위한 관음시식(觀音施食) 중 4다라니를 외울 때를 예로 들어보자.
4다라니는 변식진언(變食眞言)·시감로수진언(施甘露水眞言)·일자수륜관진언 (一字水輪觀眞言)·유해진언(乳海眞言)의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진언들을 세 번 또는 일곱 번을 외운다.

먼저 변식진언을 외움에 있어
첫 번째는 밥 한 그릇이 일곱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관하고
두 번째는 일곱 그릇이 마흔아홉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관해야 하며
세 번째는 또 7배, 그렇게 일곱 번을 외우면 처음 차려놓은 공양물은 수십만배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영가들이 아주 만족스럽게 포식할 수가 있다.

감로수진언을 외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옛말에 '하늘 사람은 물을 유리궁전으로 보고 사람은 물로 본다. 고기는 물 속에 살면서도 물을 보지 못하고 귀신은 물을 불로 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귀신은 물을 불로 보기 때문에 감로수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로수진언을 외워주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실로 변식을 이루어내고 감로수를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주문의 힘과 관상력(觀想力) 삼보의 신력(神力)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4다라니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진언을 외울 때도 마음으로 관하여야 한다.
그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佛家에서는 진언이나 다라니의 뜻을 굳이 풀이하지 않고 있다. 풀이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진언 그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범음(梵音) 그대로 읽는 것이다. 그 대신 주어진 것이 관상법이다. 광명진언·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옴마니반메훔·대비주·능엄주 그 어떠한 주력을 행할지라도 꼭 관상하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나아가 천수경 등과 같이 경문과 주문이 함께 있는 경전을 외울 경우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울 때 관상을 하고 경구절을 외울 때는 뜻을 새기며 읽게 되면 그 효과는 가히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상의 사항을 부디 명심하여 진언총지의 주력문을 잘 통과하기 바란다.

지난달과 이번달 2회에 걸쳐 우리는 참선·염불·간경·주력이라는 불교의 4대 수행문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서남북으로 뚫려 있는 이 네 개의 큰문!
그 어느 문이든 통과만 하면 누구라도 부처님의 열반궁에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나'의 信心이요 '나'의 정성이다.
무엇이든 못 들어가리.
꾸준히 하다보면 문득 삼매(三昧)에 젖어들 날이 있고
그날이 오면 깨달음의 궁전 행복의 궁전 해탈의 궁전에 와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된다.

부디 그날이 올 때까지
물러섬 없이 잘 정진하시기를
두 손 모아 깊이 깊이 축원 드린다. ()

1998년 7월호 <법공양> 中에서

출처 : 얼추하르방 鏡潭 秘望錄
글쓴이 : 얼추하루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