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보통명사가 된 사물놀이에 김덕수란 고유명사를 덧씌워 사물놀이를 국악의 한 장르로 뿌리내리게 한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꼭두쇠다.
그는 스스로를 "도깨비처럼 산다"고 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서양을 누비면서 장구를 치면 신명 지핀 소리가 나오고, 뜨거운 갈채가 쏟아진다.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네 가지 타악기가 내는 [원초적 소리]로 세계를 매료시킨 꼭두쇠답지 않게 담백하고 진솔하다.
다섯 살때 조치원 난장에서 남사당패 무동으로 처음 대중 앞에 섰던 일, 걸립을 할 장소를 찾지 못해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몇 십리 밤길을 걷던 일, 뜬쇠와 삐리들 틈바구니에 끼여 새우잠을 자던 시절들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니라 [예인의 긍지]로 털어놓는다.
그는 작고 당찬 체격에 인간적 붙임새도 뛰어나다. 기자와의 첫 만남이건만 오래된 사이처럼 스스럼이 없다. 찻집에서 만나 주점으로 자리를 옮길 만큼 인터뷰의 격식도 무시됐다. 소주잔도 찔끔찔끔 나누어 마시지 않고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단숨에 들이켠 뒤 잔을 건넨다.
사물놀이가 첫선을 보인 것은 78년 2월. 서울 원서동의 공간사랑에서 열린 제 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에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이광수 등 남사당패의 후예 4명이 [웃다리농악-경기 충청 가락]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으면서부터다.
그해 4월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 공연을 갖자 이들의 진지함과 예술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고 민속학자 심우성씨가 [사물놀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풍물가락의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기량을 갈고 닦았고, 사물놀이의 위력을 단숨에 국내외에 과시하기 시작했다.
음악평론가 김헌선씨(33)는 "사물놀이는 긴장.이완의 원리와 음.양 조화의 원리가 날줄과 씨줄로 교직되어 다양한 소리를 낸다"고 정의했다.
그에 의하면 북, 꽹과리, 장구, 징 등 사물은 우주의 질서를 구현하는 악기라는 것. 쨍쨍거리는 꽹과리는 천둥 번개와 비슷하고, 징의 지속적 울림은 바람과 유사하며, 잦게 몰아가는 장구의 가락은 비와 관련이 있고, 둥실대는 소리를 내는 북은 구름에 비유하고 있다.
결국 음양의 조화라고 하는 것도 이들 네 가지 소리가 단순하게 어울린다는 뜻이 아니라 강약의 조화가 가락을 밀고 당기면서 맺어줄 때 맺어준다는 조화를 의미한다. 가령 우도굿 가락에서 꽹과리 소리를 키우면 장구와 북이 소리를 줄이고 장구와 북이 소리를 키우면 꽹과리를 줄이는 강약의 조화를 드러낸다.
가장 한국적인 가락을 세계의 가락으로 승화시킨 김덕수는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사당패에서 벅구놀이로 유명한 김문학씨(78년 작고)로 덕수는 다섯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장구를 만지기 시작한 그는 웃다리 풍물의 기예자 양도일, 남용운, 송순갑씨로부터 장구와 쇠가락을 배웠고 남사당패의 기예인 상모돌리기, 버나(접시돌리기), 덜미(꼭두각시), 어름(줄타기) 등을 익혔다. 또 박헌봉, 성금연, 지갑성, 지영희, 김죽파, 박록주, 신쾌동, 한일섭 등 쟁쟁한 명인 명창들로부터 기악과 소리 등을 두루 익혔다.
오늘의 김덕수를 만든 큰 요인은 유랑 집단의 기예를 어려서부터 익혀온 몸에 밴 기량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초창기 멤버인 최종실, 이광수, 김용배 등이 유랑집단 후예들로 코흘리개 때부터 호흡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다.
김덕수의 장구 솜씨는 하늘이 낸 재인이란 칭송을 들을 만큼 붙임새를 구사하는 기교가 힘과 결합되어 섬세한 가락도 오차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느린 가락으로 칠 때는 긴 호흡으로 가락을 쥐고 흔들고 아무리 빠른 가락을 치더라도 분출하는 힘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변화시킨다. 그의 장기는 후두룩 가락과 풍류가락.
김덕수패중 쇠와 비나리의 1인자 이광수는 북만주 일대까지 누비던 전문연희패의 뜬쇠 이점식씨의 아들. 법고춤과 징소리의 대가 최종실의 부친은 12차 무형 문화재 지정당시 단장이었던 최재명씨. 김용배의 아버지는 김신이라는 예명을 가진 영화배우로 모두가 예인의 핏줄을 타고났다.
김용배는 83년 국립국악원 창단과 관련해 국악원으로 갔으나 자유분방한 천성을 추스르지 못하고 84년 의문 속에 자살했고 최종실은 서울예술단의 조감독으로 서울예술단 사물놀이를 이끌고 있으며 이광수는 민족음악원을 차리고 노름마치를 창단해 떠남으로써 강민석만이 그의 곁에 남아 있다.
국내 공연에서 "뒤집어지게 잘한다"는 찬사를 들었던 김덕수패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뉴욕의 센트럴파크, 현해탄의 선상, 뮌헨의 무기창고, 시부야 거리 어디에서고 판을 벌였다.
미국의 대아시아 문화창구인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어떤 단체든 한번만 초청한다는 원칙을 깨고 김덕수패만은 다섯 번 불러 들였다.
그 단체의 총감독인 비아터 고든은 "사물놀이는 하나의 사건이다. 음악의 심장은 리듬인데 그들은 메트로놈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리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출범 당시부터 타 장르와의 만남을 서슴지 않았다. 재즈, 콘체르토, 록, 팝오케스트라, 현대무용, 국악관현악 등과도 협연하여 [세계적남사당패]가 되었고 가는 곳마다 사물노리안(samulnorian: 사물놀이 공연에 열광하는 광적인 팬들)이라는 애호가 클럽을 형성해놓았다.
김덕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해외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무대는 82년 11월19일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협회] 대회(pasic-82)라고 한다. 세계 24개국에서 초청된 팀들의 공연을 보고난 타악인 협회 이사 모리스 렌지는 김덕수 사물놀이 패를 이렇게 평가했다.
"겨우 4명으로 구성된 사물놀이의 기막힌 연주를 들은 후 나는 새삼 한국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겠다고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내가 그 연주장에 들어섰을 때 무대 위에는 겨우 4개의 악기와 깃대 하나만이 서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고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모든 청중들이 그들의 소리에 함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물놀이가 폭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풍물굿의 가락을 연행 갈래의 틀과 흡사하게 다시 짰다는 것이고, [마당]이나 [판]으로나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공간을 실내 무대로 변화시킨 착상이며, 연주자들의 뛰어난 기량이 삼위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80년 발족한 [한국전통예술 연구보존회] 회장인 김덕수는 90년 신촌에 공연장겸 연습장인 [난장]을 개관했다.
그는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무덤도 없이 사라진 [남사당패 아저씨]들이 일러준 태극의 동선과 호흡의 원리를 [장구의 기본1]이란 제목으로 정리했고 [삼도 설장고] [삼도 농악] [비나리]등을 레퍼토리별로 묶어낼 계획이라고 한다. 또 짬나는 대로 필봉농악같은 소규모 마을농악의 고유가락도 사라지기 전에 채보하여 정리하겠다고 한다.
김덕수는 지난해 강민석과 함께 [사단법인 한울림 예술단]을 창단, 국내외 공연기획 등을 하고 있다.
영혼에서 분출하는 강렬한 비트처럼 15년의 관록과 명예에 자족하지 않는 그는 연주가 공연기획자에 이어 교육자로 발돋움하고 있다. 내년 봄 개장 목표로 뉴욕에 상설공연장을 마련하기 위해 몇 차례 현지에 다녀왔고 지난 9월 부여군 옥산면 홍연리에 [사물놀이 교육원]을 개원했다.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교육원은 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고도 부여읍에서 22㎞, 폐교된 홍연국민학교를 유상으로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개원에 앞서 지난 7월20일부터 전국체전 개폐회를 장식할 대전여상 사물놀이 고적대 1백여 명을 15일간 합숙교육시켰고 전국에서 찾아온 동호인 3백여 명을 대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여름학교를 열어 호응을 받았다.
김덕수씨는 "부여 교육원은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전통 민속예술분야까지 연수 범위를 확대해 세계적인 타악음악의 본거지로 성장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교육원에서 만난 임병고 교육원원장(56.부여문화원장)은 "당장 시급한 것이 기숙사 샤워장 등 부대시설 마련"이라고 하면서 "국악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당국의 지원이 아쉽다"고 덧붙인다.
국민일보 1994.10.29 09면
그는 스스로를 "도깨비처럼 산다"고 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서양을 누비면서 장구를 치면 신명 지핀 소리가 나오고, 뜨거운 갈채가 쏟아진다.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네 가지 타악기가 내는 [원초적 소리]로 세계를 매료시킨 꼭두쇠답지 않게 담백하고 진솔하다.
다섯 살때 조치원 난장에서 남사당패 무동으로 처음 대중 앞에 섰던 일, 걸립을 할 장소를 찾지 못해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몇 십리 밤길을 걷던 일, 뜬쇠와 삐리들 틈바구니에 끼여 새우잠을 자던 시절들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니라 [예인의 긍지]로 털어놓는다.
그는 작고 당찬 체격에 인간적 붙임새도 뛰어나다. 기자와의 첫 만남이건만 오래된 사이처럼 스스럼이 없다. 찻집에서 만나 주점으로 자리를 옮길 만큼 인터뷰의 격식도 무시됐다. 소주잔도 찔끔찔끔 나누어 마시지 않고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단숨에 들이켠 뒤 잔을 건넨다.
사물놀이가 첫선을 보인 것은 78년 2월. 서울 원서동의 공간사랑에서 열린 제 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에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이광수 등 남사당패의 후예 4명이 [웃다리농악-경기 충청 가락]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으면서부터다.
그해 4월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 공연을 갖자 이들의 진지함과 예술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고 민속학자 심우성씨가 [사물놀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풍물가락의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기량을 갈고 닦았고, 사물놀이의 위력을 단숨에 국내외에 과시하기 시작했다.
음악평론가 김헌선씨(33)는 "사물놀이는 긴장.이완의 원리와 음.양 조화의 원리가 날줄과 씨줄로 교직되어 다양한 소리를 낸다"고 정의했다.
그에 의하면 북, 꽹과리, 장구, 징 등 사물은 우주의 질서를 구현하는 악기라는 것. 쨍쨍거리는 꽹과리는 천둥 번개와 비슷하고, 징의 지속적 울림은 바람과 유사하며, 잦게 몰아가는 장구의 가락은 비와 관련이 있고, 둥실대는 소리를 내는 북은 구름에 비유하고 있다.
결국 음양의 조화라고 하는 것도 이들 네 가지 소리가 단순하게 어울린다는 뜻이 아니라 강약의 조화가 가락을 밀고 당기면서 맺어줄 때 맺어준다는 조화를 의미한다. 가령 우도굿 가락에서 꽹과리 소리를 키우면 장구와 북이 소리를 줄이고 장구와 북이 소리를 키우면 꽹과리를 줄이는 강약의 조화를 드러낸다.
가장 한국적인 가락을 세계의 가락으로 승화시킨 김덕수는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사당패에서 벅구놀이로 유명한 김문학씨(78년 작고)로 덕수는 다섯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장구를 만지기 시작한 그는 웃다리 풍물의 기예자 양도일, 남용운, 송순갑씨로부터 장구와 쇠가락을 배웠고 남사당패의 기예인 상모돌리기, 버나(접시돌리기), 덜미(꼭두각시), 어름(줄타기) 등을 익혔다. 또 박헌봉, 성금연, 지갑성, 지영희, 김죽파, 박록주, 신쾌동, 한일섭 등 쟁쟁한 명인 명창들로부터 기악과 소리 등을 두루 익혔다.
오늘의 김덕수를 만든 큰 요인은 유랑 집단의 기예를 어려서부터 익혀온 몸에 밴 기량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초창기 멤버인 최종실, 이광수, 김용배 등이 유랑집단 후예들로 코흘리개 때부터 호흡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다.
김덕수의 장구 솜씨는 하늘이 낸 재인이란 칭송을 들을 만큼 붙임새를 구사하는 기교가 힘과 결합되어 섬세한 가락도 오차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느린 가락으로 칠 때는 긴 호흡으로 가락을 쥐고 흔들고 아무리 빠른 가락을 치더라도 분출하는 힘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변화시킨다. 그의 장기는 후두룩 가락과 풍류가락.
김덕수패중 쇠와 비나리의 1인자 이광수는 북만주 일대까지 누비던 전문연희패의 뜬쇠 이점식씨의 아들. 법고춤과 징소리의 대가 최종실의 부친은 12차 무형 문화재 지정당시 단장이었던 최재명씨. 김용배의 아버지는 김신이라는 예명을 가진 영화배우로 모두가 예인의 핏줄을 타고났다.
김용배는 83년 국립국악원 창단과 관련해 국악원으로 갔으나 자유분방한 천성을 추스르지 못하고 84년 의문 속에 자살했고 최종실은 서울예술단의 조감독으로 서울예술단 사물놀이를 이끌고 있으며 이광수는 민족음악원을 차리고 노름마치를 창단해 떠남으로써 강민석만이 그의 곁에 남아 있다.
국내 공연에서 "뒤집어지게 잘한다"는 찬사를 들었던 김덕수패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뉴욕의 센트럴파크, 현해탄의 선상, 뮌헨의 무기창고, 시부야 거리 어디에서고 판을 벌였다.
미국의 대아시아 문화창구인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어떤 단체든 한번만 초청한다는 원칙을 깨고 김덕수패만은 다섯 번 불러 들였다.
그 단체의 총감독인 비아터 고든은 "사물놀이는 하나의 사건이다. 음악의 심장은 리듬인데 그들은 메트로놈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리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출범 당시부터 타 장르와의 만남을 서슴지 않았다. 재즈, 콘체르토, 록, 팝오케스트라, 현대무용, 국악관현악 등과도 협연하여 [세계적남사당패]가 되었고 가는 곳마다 사물노리안(samulnorian: 사물놀이 공연에 열광하는 광적인 팬들)이라는 애호가 클럽을 형성해놓았다.
김덕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해외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무대는 82년 11월19일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협회] 대회(pasic-82)라고 한다. 세계 24개국에서 초청된 팀들의 공연을 보고난 타악인 협회 이사 모리스 렌지는 김덕수 사물놀이 패를 이렇게 평가했다.
"겨우 4명으로 구성된 사물놀이의 기막힌 연주를 들은 후 나는 새삼 한국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겠다고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내가 그 연주장에 들어섰을 때 무대 위에는 겨우 4개의 악기와 깃대 하나만이 서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고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모든 청중들이 그들의 소리에 함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물놀이가 폭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풍물굿의 가락을 연행 갈래의 틀과 흡사하게 다시 짰다는 것이고, [마당]이나 [판]으로나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공간을 실내 무대로 변화시킨 착상이며, 연주자들의 뛰어난 기량이 삼위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80년 발족한 [한국전통예술 연구보존회] 회장인 김덕수는 90년 신촌에 공연장겸 연습장인 [난장]을 개관했다.
그는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무덤도 없이 사라진 [남사당패 아저씨]들이 일러준 태극의 동선과 호흡의 원리를 [장구의 기본1]이란 제목으로 정리했고 [삼도 설장고] [삼도 농악] [비나리]등을 레퍼토리별로 묶어낼 계획이라고 한다. 또 짬나는 대로 필봉농악같은 소규모 마을농악의 고유가락도 사라지기 전에 채보하여 정리하겠다고 한다.
김덕수는 지난해 강민석과 함께 [사단법인 한울림 예술단]을 창단, 국내외 공연기획 등을 하고 있다.
영혼에서 분출하는 강렬한 비트처럼 15년의 관록과 명예에 자족하지 않는 그는 연주가 공연기획자에 이어 교육자로 발돋움하고 있다. 내년 봄 개장 목표로 뉴욕에 상설공연장을 마련하기 위해 몇 차례 현지에 다녀왔고 지난 9월 부여군 옥산면 홍연리에 [사물놀이 교육원]을 개원했다.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교육원은 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고도 부여읍에서 22㎞, 폐교된 홍연국민학교를 유상으로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개원에 앞서 지난 7월20일부터 전국체전 개폐회를 장식할 대전여상 사물놀이 고적대 1백여 명을 15일간 합숙교육시켰고 전국에서 찾아온 동호인 3백여 명을 대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여름학교를 열어 호응을 받았다.
김덕수씨는 "부여 교육원은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전통 민속예술분야까지 연수 범위를 확대해 세계적인 타악음악의 본거지로 성장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교육원에서 만난 임병고 교육원원장(56.부여문화원장)은 "당장 시급한 것이 기숙사 샤워장 등 부대시설 마련"이라고 하면서 "국악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당국의 지원이 아쉽다"고 덧붙인다.
국민일보 1994.10.29 09면
출처 : 정원기의 국악 아카데미
글쓴이 : 사물노리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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