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필,선♧/哲學.心理學

싯달타

花受紛-동아줄 2008. 11. 25. 21:09

4. 부처님의 깨달음



1) 연기 - 불교의 세계관

싯달타 수행자가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이 우주는 연기(緣起)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연기란 모든 존재는 원인과 연(緣)이 동시에 맺어져서 생겨난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원인과 조연의 동시적인 화합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중아함경》,《잡아함경》335

이 경문(經文)을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꽃이 있기 때문에 열매가 있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꽃이 있기 때문에 열매가 있다고 할 때, 꽃이 먼저 있고 그 결과로서 열매가 생기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하지 연기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연기법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꽃잎이 있으므로 동시에 꽃술이 있고, 꽃잎이 없으면 동시에 꽃술도 없다는 이치를 말합니다. 즉, "이것"은 "저것"을 의지해서 있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을 의지해 존재한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동시성(同時性)과 상의성(相依性)이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므로 의지하는 시간이 서로 같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실랑이 있기 때문에 신부가 있다라고 할 때, 실랑이 있는 결과로 신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부와 실랑은 서로 동시에 의지해서 생겼고, 동시에 있는 것이고, 이 찰나에 신부가 아니면 동시에 신랑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리고 신부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신부가 인(因)이 되고 신랑이 연(緣)이 되며, 신랑을 주체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신랑이 인(因)이 되고 신부가 연(緣)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이라고 할 때 복수 적인 의미도 많습니다. 쌀과 물과 불이 연이 되어 밥을 지을 때, 쌀을 주체로 보는 사람에게는 쌀이 인(因)이 되고 물과 불이 연(緣)이 됩니다.

그러나 설사 쌀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고 불이 없어도 밥을 지을 수 없으므로 세 가지가 동시에 연을 맺어야 밥을 지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이 때, 쌀과 물과 불이 연하여 무엇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뜻으로 인간의 오장육부 하나 하나가 모두 동시에 건강할 때 건강한 사람이 되지만 이중 하나라도 병이 들면 병든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라도 죽는 찰나 다른 오장육부도 동시에 죽거나 변질된다는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緣起)의 연(緣)은 인연(因緣)이 되는 요소(要素)들의 동시성(同時性)과 상의성(相依性)을 의미하고 기(起)는 이로 말미암아 어떠한 존재가 일어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전체(全體)를 구성하는 한 성분(成分)의 변화는 동시에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고, 전체의 변화는 동시에 각 구성(構成) 성분(成分)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이치가 연기법입니다. 한 몸의 기관을 구성원(構成員)으로 볼 때는 몸이 전체가 되고 오장육부 각 기관이 성분(成分)이 되며, 한 단체의 회원을 구성원으로 볼 때는 단체가 전체가 되며, 각 회원이 성분이 되며, 국가를 전체로 볼 때는 각 행정단위 혹은 사회단위가 성분이 되며, 세계를 전체로 볼 때는 각 국가가 성분이 되며, 태양계를 전체로 볼 때는 태양계의 각 별이 성분이 되며, 전체를 은하계로 볼 때는 대자연(大自然), 다천체(多天體), 다천계(多天界)가 성분(成分)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성분(成分)의 궁극적인 최하 단위 체는 유정(有情)을 가진 생명체(生命體)인 중생(衆生)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와 세계의 생성(生成) 전개(展開) 소멸(消滅)은 중생의 생활 활동의 생성 전개 소멸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생명(多生命)인 유정(有情 sattva)의 업(業karma)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이 자연계가 성립 발전 유지(維持) 소멸되어 간다고 관찰하는 것이 우주생성(宇宙生成)과 세계변천(世界變遷)에 대한 불교의 우주관이며 인생관이며 생명관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부처님께서는 한마디로 연기 혹은 연기법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유하여 예를 들면 우리 몸을 전체로 볼 때 한 방울의 피는 몸의 성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한방울의 피와 이 몸은 비록 모양과 색은 다르지만 동시적이고 상의성을 가진 연기법에 의하여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방울의 피를 분석하면 피를 뽑은 그 때의 몸 전체의 컨디션(condition)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일체의 행위 - 울고 웃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선악행위(善惡行爲) - 가 합하고 흩어지는 우주 변화를 창출하는 힘(energy)이 됩니다. 이 힘에는 개체적(個體的)인 인력(引力)과 전체적(全體的)인 인력(引力)이 있어 끝임 없이 연기법 작용의 힘(energy)으로 작용하여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다는 원리(原理)를 도출(導出)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모든 중생의 인력(引力)의 입장에서 볼 때 생명관(生命觀)이 되는 것이며, 이 원리에 미치는 인간 역활과 인간에게 미치는 무상의 원리 입장에서 볼 때 참다운 인생관(人生觀)을 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연기법(緣起法)에 준한 인생관(人生觀)이 되는 것입니다.
한의사(漢醫師)가 맥박하나를 짚어보고 환자의 건강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것도 연기법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일신(唯一神) 종교에서 주장하는 창조주도 연기법칙에 의하면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존적(獨存的)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상의성(相依性)을 초월하는 독존적(獨存的)인 유일신(唯一神)이 이 우주상에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연기법은 진리가 될 수 없으며, 반대로 유일신(唯一神)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상의성(相依性)의 존재라면 유일신(唯一神)이나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가 이미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창조주를 믿는 유일신 종교와 연기법을 믿는 불교와는 절충이 불가능한 교리(敎理)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주 생성 전개 소멸의 원리인 연기법을 부처님께서는 본인이 창조한 원리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된 인간성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시든 나오시지 안았든 상관없이 연기법은 진리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타마 싯달타는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중아함(中阿含)』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만일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法)을 보면 연기(緣起)를 본다"라고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붓다 자신이 비구들에게 "(너희들이)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바르게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이해하는 것이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참된 나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연기법을 증득하는 것이 "나"를 본다는 것은 참된 나(眞我)를 보는 것으로,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기독교의 유신론(唯神論),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유물론(唯物論), 자이나교의 운명결정론에 비교되는 불교의 핵심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2) 사법인(四法印) - 존재의 실상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접적 가르침인 아함경의 근본교설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핵심 교법을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한다. 사법인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존재인 법(法 dharma)이 가지고 있는 4가지 존재의 속성을 간파(看破)한 내용으로 첫째는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이고, 둘째는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이며, 셋째는 일체개고인(一切皆苦因)이며, 넷째는 열반적정인(涅般寂靜印)입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앞에서 일체제법이 연기하므로 고정된 것이 없고 고정된 것이 없으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도출(導出)된다고 하였습니다. 일체 존재는 12처(處) 사대(四大) 오온(五蘊)으로 구성되며, 인연 화합하면 반드시 시간이 흐르고 반드시 공간이 형성되기 마련이며, 인연 화합된 존재가 없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고 또한 공간도 없는 무한대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상(無常)이란 일체존재의 변화(變化) 가운데에서 존재의 상태를 직관(直觀)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현상계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자 직시(直視)이며, 모든 자연(自然)에 대한 위대한 통찰(洞察)입니다. 그러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잘못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모든 현상이 좋은 곳에서 나쁜 곳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무상(無常)이라고 오해(誤解)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죽었을 때 무상(無常)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이 무상은 변화하는 세상을 지칭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비관적 절망적 의미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외국인들이나 타종교인들은 불교를 염세적(pessimistic)인 종교로까지 오해하고 있음은 위험한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상(無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좋은 방향에서 나쁜 방향으로, 나쁜 방향에서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變化)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불만족한 현상을 오히려 벗어날 수가 있는 큰 깨우침이며, 수행, 정진하거나 열심히 노력하면 그 보람도 있다는 깨우침이 됩니다. 이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광명이 있고 희망과 기대를 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상은 인생관의 실제적(實際的)인 진리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무상(無常)은 물질적 육체적인 존재의 외형(外形)적인 무상(無常) 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사상과 같은 비물질인 존재의 내면적(內面的)인 무상(無常)이 찰나적, 초분시(秒分時)적, 일월(日月), 년(年)으로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모든 물질의 절대적 정지(靜止) 상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도 물질적 요소로서의 원소(元素)와 원자(原子)로 이루어져 있어 원자는 핵이 있고 양자와 전자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본다면 일체존재는 육안으로는 절대정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입니다.

소우주(小宇宙)로서의 원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우주로서의 천체(天體)도 끊임없이 운동 중에 있습니다. 이것 또한 무상의 근본입니다.
지구는 스스로 자전(自轉)하면서 또한 태양 주위를 공전(公轉)하고 있습니다. 또 태양계 전체가 다시 운행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위치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질도 실은 거듭거듭 변화하여 운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신도 물질도 모든 일체 현상을 불교에서 파악한 제법은 무상(無常)하게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세상 모든 것의 영원한 진리임이 밝혀지는 첫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불교적 의미

무상(無常)의 인식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①무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친한 친구나 재산, 지위, 명예도 언제 어느 때 소실(消失)될 수도 있으므로 인생은 불안하고 괴로운(苦) 것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현실고(現實苦)의 원인을 알기 위하여 진리탐구의 열정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오온(五蘊)이 연기(緣起)하므로써 이루어진 나 자신이 무상(無常)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연기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치(對治)를 위한 발심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②무상(無常)은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참다운 인식에서 총상(總相)을 내가 주재(主宰)한다는 아집(我執)이나, 내 것이라는 탐애(貪愛)의 마음을 여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가치관(價値觀)이 허무하고 허망하였음을 인식하고 가치관의 일대전환을 통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진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진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③인생이 연기하므로 무상함을 관찰함에 의해서 사회와 인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게 되고 그에 의하여 정진하고 노력하는 결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생명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므로 오늘의 일은 오늘에 마치고 크게 미루지 않아야겠다고 각오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는 실로 신속하므로 현재는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중요한 시간으로 충실한 생활을 필요로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이 찰나의 쌓임이요 우리들의 삶은 현재 이 찰나의 삶 이외에 인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看破)하고 깨우치는 것이 무상(無常)의 교훈입니다.

부처님 최후의 유계(遺誡)에 "모든 행(行)은 실로 무상(無常)하다. 너희들은 방일(放逸)하지 말고 목적의 완수에 노력하라"라고 제자들에게 설한 것은 이 무상의 세계에 대한 간파(看破)이며, 시시 각각의 현실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 가르침입니다.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이 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은 이 세상 그 어떠한 종교, 철학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부처님의 독특한 진리의 파악입니다. 이 뜻은 '모든 것은 나(我)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 뜻에 신앙의 실천적인 면과 이론적인 면이 있습니다.

가) 무아(無我)의 이론적(理論的)인 면(面)
무아사상(無我思想)의 이론적인 면이란 일체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므로 고정성(固定性)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정성(固定性)이 없는 것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합니다. 자성(自性 svabhava)이란 자신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獨立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성(自性)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시근본불교가 고정 독존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치 않는 것은 불교의 기본적 이론이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 및 우주관의 가치가 무자성(無自性)의 원리에 의하고 있습니다.

무자성(無自性)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중아함(中阿含)』30,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우리들의 몸이 실법(實法), 실아(實我)라고 하는 그러한 본체적 존재가 없으므로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무아(無我)의 존재인 것은 우리들의 몸이 마치 재목, 진흙, 물, 풀 등에 의해서 공간을 메우고 집이라고 하는 가명(假名)이 생기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몸도 근골, 피부, 혈육 따위에 의해 공간을 메우고 신체라고 하는 가명(假名)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금강비구니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재목이 모여서 수레가 되는 것처럼, 여러 온(蘊)이 인연화합해서 유정 중생이라는 가명(假名)이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수레가 갖가지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가화합(假和合)의 존재이기에 수레라고 하는 실체가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신체도 오온(五蘊)의 가화합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거기에는 하등 '나'라고 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아(無我)의 해석은 원시근본 불교사상이고 대승(大乘)적 견지에서는 공(空 sunya) 혹은 공성(空性 sunyata)으로 무아사상(無我思想)을 설합니다.사람은 숙세에서부터 무명으로 인하여 지은 업(業)으로 말미암아 자성(自性)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이 자성(自性)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있고 고정된 것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만(我慢)과 아집(我執)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만(我慢)과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여의기 위하여는 무자성(無自性)을 얻어야 하고 무자성(無自性)을 얻기 위하여는 아집과 법집을 공(空)하여야 합니다.

나) 오온(五蘊)의 무아(無我)
원시 근본불교에서 오온(五蘊)이란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온(蘊 skhandha)이란 모인 것이라는 의미이고 오온(五蘊)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5가지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물질인 색(色)은 몸을, 비물질인 정신적 요소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을 의미하므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몸과 마음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질인 색(色)의 요소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요소이므로 모든 존재는 물질적 정신적 8대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이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연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온(五蘊)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만이 아닌 그것들이 존재하는 환경으로서 전체인 법(法 dharma)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계와 정신계의 일체를 의미하게 됩니다.
오온의 의미 중 어떠한 것들도 공(空)할 수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온설은 무아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됩니다.

오온(五蘊)에 대한 사견(邪見)

①색(色)은 "나(我)"다라고 하여 色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나라고 간주(看做)하는 것이다. 물질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유물론(唯物論)이다.

②색(色)이 "나"이어서 그 "나"가 수상행식을 "나(我)"의 소유(所有)가 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물질이 정신을 자기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유물론(唯物論)이다.

③수상행식이 "나"이어서 "나" 속에 색(色)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유심론(唯心論)이다.

④수상행식이 "나"이어서 그 "나"가 색 가운데 있고 신체 중에 두루해 있어 신체를 수상행식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유심론(唯心論)이다.

그러나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공사상(空思想)은 어디에도 "나(我)"를 발견할 수 없고, "나의 소유(所有)"도 있을 수 없으며, '오온(五蘊)'가운데 "나"가 있지 않으며, "나" 속에 오온도 있지 않음을 밝힌다.
즉, 유물론(唯物論)도 유심론(唯心論)도 불교에 의하여 부정(否定)된다.
오온(五蘊)의 구성요소에 내가 없고, 오온을 모두 합한 곳에도 내가 없습니다. 나는 찰나생(刹那生)이므로 나라고 할만한 내가 없습니다.

다) 무아상경(無我相經)
오온(五蘊)이 무아(無我)임을 밝히는 경전에 무아상경(無我相經)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인 다섯 비구에게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청정법안(淸淨法眼)을 얻도록 가르치고 곧 이어서 오온의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설명하였습니다.
다섯 비구제자는 이 설법을 듣고 그대로 오온(五蘊)의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좌선에 의해 관찰하고 사유함에 따라 불교 최고의 깨달음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관찰하여 이론이 아닌 체험적으로 이를 체득하고 완성된 인간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제 현존하는 부파불교 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무아상경(無我相經)』에 보이는 무아설(無我說)을 소개하겠습니다.

"나(我)"라고 하는 것을 브라만(brahman)교의 최고신으로서의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과 같이 일체의 생멸변화를 시킬 수 있는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나"로 보는 "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야 "나"라고 할 수 있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경(經)에서는 만일 색(色)이 "나"라면 이 색은 병들지 않는다. 또 색에 대해서 "나의 색은 이렇게 있어라"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病)도 들고, 생사윤회의 괴로움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색(色)은 "나(我)"가 아니요, "무아(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즉, 색아(色我)는 부자유(不自由), 부자재(不自在)라고 하는 이유로 오온(五蘊)이 무아(無我)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의 의미

개인의 생활과 사회와 인생 모두는 고정성(固定性)이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연기(緣起)하는 것입니다.
역경에 빠지거나 심적인 충격을 받으면 자포자기 하기도 하고 비관하기도 하여, 이미 자신의 상황이 절대적으로 고치기 어렵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역경이나 불운도 고정된 것은 아니고 얼마든지 가변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입니다. 금강경에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불교의 중심사상으로서의 연기사상(緣起思想)은 이 무아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무아사상의 이론적인 완성이며 인도불교이외의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의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은 무아의 실천무아행(實踐無我行)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근거입니다.

이론적(理論的) 무아(無我)는 개아(個我)의 자성(自性)을 부정하므로서 아집(我執)을 떨쳐버리기 위해 설해지며, 실천적(實踐的) 무아는 팔정도(八正道) 등 수행을 실천함으로서 개아(個我)의 자성(自性)이 없음을 체험하고 아집(我執)을 떨쳐버림으로서 실천무아행(實踐無我行)을 이루는 것이고, 불타의 위신력과 절대적 타력(他力)이라고 하는 것도 무아(無我)를 성취코저 함에 있는 것이며, 염불(念佛)이나 창제(唱題)의 실천도 구경에는 무아행(無我行)의 체험을 이루게 하여 무자성(無自性)과 연기법을 증득하게 함에 있습니다.

내 몸의 오온은 내 몸 밖의 오온과 연기하고 있으므로 무아(無我)의 성취는 곧 우주 섭리(攝理)와 개합(開合)하는 것이고 상응(相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예술, 운동 등 모든 인간의 삶의 각 분야에서 극치를 이룰 수 있는 이치인 것입니다.

(3)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을 세상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은 고(苦)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락(苦樂)의 상태로 말미암아 행 불행(幸不幸)을 각자 느낍니다. 느낌이라고 하는 감정(感情)에 따라 느끼는 방향이 주관적(主觀的)일 때가 많기 때문에 연기법(緣起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는 개고(皆苦)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게 된다." 여기서 고(苦)란 범어의 두카(duhka)로서 원래 불안(不安)을 의미합니다.

객관적인 고(苦)

①고고(苦苦):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며, 병고(病苦), 배고픔, 질병, 상처 등입니다.

②괴고(壞苦): 파괴나 멸망 등에 의해 느껴지는 정신적 고뇌(苦惱)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이제까지의 재산, 지위, 명예 등의 재난(災難),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등으로 실망(失望), 절망(絶望), 낙담 등입니다. 갈애(渴愛)의 욕구불만에서 오는 고뇌입니다.

③행고(行苦): '함께 짓는 것'에서 오는 고(苦)라는 의미입니다. 즉, 현상세계는 일체가 고(苦)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연기(緣起)하는 것은 일체가 고(苦)라는 말입니다. 고고(苦苦)와 괴고(壞苦)는 현상적으로 볼 때 직접적인 고(苦)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만 행고(行苦)의 원인은 직접적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간접적인 것입니다. 천재지변(天災地變), 주가(株價)의 폭락, 폭정(暴政), 전쟁(戰爭) 등이 연기함으로 인하여 입는 고통입니다.

현상세계는 여러 가지 조건과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고, 어떠한 현상계도 원인과 조건 없이 단독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원인과 조건의 변화로 인(因)하여 그 결과 번영의 길로 가기도 하고 쇠퇴의 길로 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의적(自意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상계에 의하여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손상과 손실이 있을 때에는 고(苦)가 느껴지지만 반대면 쾌락(快樂)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이 연기법을 깨닫지 못하고 업보(業報)에 지배받는 한 쾌락은 일시적이고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은 노병사(老病死)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의 세계에 들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범부에게는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되는 것입니다.

(4) 열반적정인(涅般寂靜印)
열반적정인(涅般寂靜印)은 연기(緣起)를 깨달아 무아사상(無我思想)의 이론적, 실천적 완성과 성취의 의미를 가집니다.
열반(涅槃)이란, 범어(梵語)로 니르바나(nirvana)로서 '불을 끄다'라고 하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따라서, 열반이란 다른 뜻이 아니라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등의 삼독심(三毒心)의 번뇌의 불을 불어 끈 상태를 의미합니다.

외도(外道)의 열반설에는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 등의 여러 가지 선정(禪定)상태를 열반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관(五官)의 욕락에 빠진 세속적인 쾌락을 열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정신을 과거업(過去業)의 덩어리인 육체의 속박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구하고자 단식을 하고 고행을 심화시켜 육체를 멸하는 죽음을 선택하여 사후에야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는 이교도(異敎徒)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수행하시던 시절에 두 선인(仙人)이 부처님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수승한 무색계정(無色界定)이 열반의 경지라고 가르치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열반이 아니라고 하시고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홀로 6년 고행(苦行)을 하였으나 고행이 열반을 성취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하시고 고행(苦行)을 중단하시고 부처님께서 선택하신 수행법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행(苦行)과 욕락(欲樂)의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수행으로 세계와 인생의 진리인 연기법을 깨닫고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님 스스로 본인이 살아 있는 현세(現世)에 열반을 체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행법을 부처님 제자들에게 가르쳐 수많은 제자들이 그들의 현세(現世)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게 하셨습니다. 올바른 열반은 바른 세계관과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에 의해 수행자가 살아 수행하는 동안에 얻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완전한 인격자가 되어 자유무애한 능력으로 자기의 주위, 세상 전체를 불안과 고뇌가 없는 평등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이상의 국토인 불국정토(佛國淨土)를 건설하고자 정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열반경지는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돌려 적멸위락(寂滅爲樂)을 성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함으로써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불교의 현상론과 불교의 현실론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불교의 본체론과 불교의 이상론으로 일련의 발전 과정을 불자(佛子)의 자율적인 의사로서 거치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자비희사적(慈悲喜捨的) 중생구제의 중대한 원칙이자 구도가 됩니다. 또 이것은 인간 존재가 존재에 대한 해명을 통해 그 존재들의 실상을 파악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규명하고 그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3) 해탈(解脫)의 대자유(大自由)

해탈사상은 인도의 모든 종교, 철학이 추구해왔던 것인데, 불교에서는 특히 이 해탈의 개념과 정의를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마하리 숫타 mahali sutta』에서는 부처님은 심해탈(心解脫 ceto- vimutti)과 혜해탈(慧解脫 pranna-vimutti)이 갖추어진 상태가 열반이며 이에 이르는 방법이 팔정도에 있다고 했습니다.
심해탈(心解脫)은 『테빗자 숫타 tevijjasutta』, 『디가니카야 dighanikaya』XIII에 의하면 심해탈로 이르는 범처(梵處 brahmanavihra)로서 알려진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戒)와 정(定)을 설하고, 오장(五障 five hindrance 탐진치 의심 나태)의 멸(滅)을 포함하여, 그 이후에 얻어지는 즐거움을 설하였습니다. 이는 번뇌를 없애고 생기는 최상의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으로 충만한 비구는 세상의 한 시방(十方)을 자비심으로 가득 채우며, 계속하여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모든 시방으로 나아간다.

계속하여 붓다는 비구들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대비(大悲 karun)와 다른 사람의 행복(幸福)을 위한 연민(喜 mudit), 그리고 베품(捨 upekkh)으로 채우는가를 설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심해탈(心解脫)에서 대비심(大悲心)을 얻고 혜해탈(慧解脫)에서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위한 방편지혜(方便智慧)를 증득하여 실천할 것을 설하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심해탈(心解脫)이 없는 혜해탈(慧解脫)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팔정도(八正道)의 혜(慧)를 살펴보면, 혜(慧)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를 나타내고, 계(戒)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을 나타내고 정(定)은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또는 정신집중(三昧 samadhi)으로 구성됩니다.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rajna)의 삼학(三學)이라는 붓다 최고의 구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나쁜 행동을 금하고(諸惡莫作), 모든 선을 취하여(衆善奉行)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自淨其意)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관(觀=慧)에 있어서, 심지어 주부들까지도 기술적이고 능률적이고 정력적인 태도로 그리고 탐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임무를 열심히 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콜리야 사람인 브약카팟자(vyagghapajja)와의 대화에서 붓다는 유념의 네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농사일, 장사, 목축, 궁술가, 공무원, 기술자 등등 어떠한 활동에 관계없이 생계를 유지한다. 어떠한 기술을 갖고 있는지 관계없이 그는 자신의 일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능숙하고 정력적이며 수완 있고 탐구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것을 得度의 근원이라 한다.

혜(慧)를 관(觀)하는 불자(佛子)는 어떠한 업(業)에 종사하던 능숙하고 정력적이고 수완 있고 탐구적인 마음을 가져서 자신의 일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탐구(探究)의 정신이 신통(神通 iddhi)에 이르는 네 가지의 방법중 하나입니다.

부처님이 열거하신 세 가지 신통력은 신비스런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예언 desan), 누진통(漏盡通, 가르침, anus ni)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는 나를 괴롭혔고 당황케 했고 구역질나게 했다."라는 말까지 하시며 비구들이 잘못된 신통력의 사용을 경계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선정(禪定 samadhi)을 위한 네 가지 긴요한 조건으로
①노력하고자 하는 충동,
②노력할 수 있는 힘,
③절차에 대한 의식, 그리고
④그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통력(神通力)에 이른자는 존재의 고(苦 duhka)의 원인을 멸(滅)에 이르는 옳은 길에 다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탐구하는 마음의 중요성이 있게 되며, 평범한 일상생활로부터 이를 배양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자 비구여!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히 해 두고자 한다. '이미 조건화 되어버린 것들은 언젠가는 멸하는 것들이니 유념(維念)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라.'" 이것이 여래(如來)부처님의 마지막 말이다.

모든 존재(存在)는 무상(無常)이니 정진(精進)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현세에서 존재자 자기 자신이 지계(持戒)를 하고 진리를 능숙하고 정력적으로 탐구하는 마음으로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이루어 불교 이상세계(理想世界)를 실현시키는 최대의 목표가 불교의 존재에 대한 현실적인 고찰입니다.

'♧전공,필,선♧ > 哲學.心理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질적으로 지혜란 무엇이며  (0) 2008.11.25
싯달타  (0) 2008.11.25
사랑에 담긴 20가지 병  (0) 2008.11.07
가족의 촌수 계산법  (0) 2008.11.07
love을 위한 사랑에 메세지 13가지  (0) 2008.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