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 1872~1970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더 인물이다. 철학, 수학, 과학, 역사, 교육,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에서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한 그의 탁월함은 자신의 지능을 최대한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그는 하루에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음)과 기억력이 밑받침 되었지만 그의 활동력의 원천은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이었다.
그의 사상은 분리된 두 개의 주제를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절대 확실한 지식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자는 그의 스승이며 협력자였던 화이트 헤드와의 공저 『수학원리』로 결실을 맺어 현대의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현실 사회에 대한 진솔한 관심과 스스로가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적 기질이라고 불렀던 그의 성향은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평화주의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핵 무장반대자로서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되었다.
철학자로서 그의 성과는 특히 이론철학에서 현저한데 G.E. 무어, L. 비트겐슈타인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철학적 경력은 길고 다양했을 뿐 아니라 그 입장도 다양한 변천을 보인다. 기호논리학적 접근으로 철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영향은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저서로는 『철학에 있어서의 과학적 방법』 『자유와 조직』 『권위와 개인』 『외계의 지식』 『수리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물질의 분석』 『의미와 진실의 탐구』 『서양 철학사』 등 다수가 있으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서문
이 책에서 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철학의 문제들만을 다루었다. 오직 부정적일 뿐인 비판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서는 형이상학보다는 인식론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철학자들에 의해 많이 논의된 문제들은 다루더라도 아주 간략하게 다루었다.
G.E. 무어와 J.M. 케인즈의 간행되지 않은 저술로부터 나는 귀중한 도움을 받았다. 무어에게서는 물질적 대상과 감각소여의 관계에 대해서, 케인즈에게서는 개연성과 귀납법에 대해서, 또한 나는 길버트 머레이 교수의 비판과 시사로부터 매우 유익한 도움을 받았다.
1912년
버트란드
1. 현상과 실재
이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지식이 이 세상에 있는가? 이 물음은 얼핏 보기에는 어렵지 않은 듯하지만 사실은 모든 물음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물음의 하나이다. 이 물음에 직접적이고 확신 있는 대답을 하려고 하다가 마주치는 여러 가지 장애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제대로 철학 연구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은 이러한 궁극적인 물음에 대답하려고 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또는 과학에서조차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부주의하게 독단적으로 대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물음을 어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조사하고 우리들의 일상 관념에 잠재하는 온갖 애매성이나 혼란을 자각한 다음에 비판적으로 대답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면 명백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정말로 믿어도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잘 생각한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확실성(確實性)의 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지식은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 경험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진술(陳述)은 대체로 잘못된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모양을 가진 책상을 마주하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책상 위에는 글씨를 썼거나 인쇄한 몇 장의 종이가 놓여 있다. 머리를 돌리면 나는 창밖으로 건물과 구름과 해를 볼 수 있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약 9천 3백만 마일 쯤 떨어져 있고 지구보다도 몇 배 큰 열구(熱球)이며 지구의 자전(自轉)에 따라 매일 아침 떠오르고 이것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어떤 정상적인 다른 사람이 내 방에 들어온다면 그는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은 의자와 책상과 책과 종이를 볼 것이며 또한 내가 보고 있는 이 책상은 내 팔로 저항을 느끼고 있는 책상과 같은 책상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면, 거의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자명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형식으로 말했다고 확신하기 전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논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난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책상에만 주의를 국한하기로 하자. 이 책상은 눈으로 보기에는 장방형이고 갈색이며 광택이 있고 만져 보면 평평하고 차갑고 딱딱하다.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이 책상을 보고 만져 보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기술(記述)에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난점도 제기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려고 하면 곧 문제가 생긴다. 나는 이 책상이 어느 부분이나 「정말로」 똑같은 색깔이라고 믿지만 빛을 반사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더 밝게 보이고 또한 어떤 부분은 반사광(反射光) 때문에 희게 보인다. 내가 움직이면 빛을 반사하는 부분이 달라질 것이고, 따라서 책상 위의 색깔의 외견상의 분포도 변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몇 사람이 동시에 이 책상을 보더라도 그중 단 두 사람도 정확하게 같은 색깔의 분포를 보지 못한다. 두 사람이 정확하게 같은 시점(視點)에서 책상을 볼 수는 없고 시점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빛이 반사하는 방식도 어느 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대체로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지만 화가에게는 이러한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화가는 어떤 사물이 상식적으로 「정말로」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에서 벗어나 사물을 나타나는 그대로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철학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를 일으키는 구분의 하나에 부딪친다 - 곧 「현상(現象)」과 「실재(實在)」, 다시 말하면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구분이다. 화가는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려고 하고 실제적인 사람이나 철학자는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려는 철학자의 소망은 실제적인 사람의 소망보다 강렬하고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많다.
책상으로 되돌아가자. 지금까지 살펴 온 것으로 보아 분명하거니와, 현저하게 책상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는 색은 없으며 또한 책상의 어느 특정 부분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는 색깔도 없다 - 시점이 달라지면 색깔도 달라지며 이 여러 가지 색깔 중에서 어느 색깔이 다른 색깔보다도 더 책상의 진짜 색깔이라고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일정한 시점에서 보더라도 인공 광선(人工光線) 밑에서 보거나 색맹이나 파란 안경을 쓴 사람이 보는 경우에는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편 어둠 속에서는 책상의 촉감이나 소리는 변하지 않아도 색깔은 전혀 없다. 이러한 색깔은 책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책상과 보는 사람과 책상에 빛이 비치는 방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그 책상의 색깔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정상적인 관찰자가 보통의 광선 밑에서 일상적인 시점으로부터 보게 될 색깔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조건 밑에서 나타나는 다른 색깔도 진짜 색깔이라고 생각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편견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책상 자체가 특정한 색깔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책상의 나뭇결도 마찬가지다. 육안으로는 나뭇결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매끄럽고 평평하다. 만일 현미경으로 본다면 우리는 울퉁불퉁한 모양과 언덕과 골짜기 그리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이 「진짜」 책상인가? 우리는 현미경을 본 것이 진짜에 더 가깝다고 말하기 쉽지만 그것도 더욱 강렬한 현미경을 사용하면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육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면 왜 현미경으로 본 것은 믿어야 하는가? 따라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감관(感官)에 대한 신뢰는 다시금 무너진다.
책상의 <모양>이라고 해서 형편이 더 낫지는 않다. 우리들은 모두 사물의 「실재(實在)의」 모양에 대해 판단하는 습관을 갖고 있으며, 게다가 아무런 반성 없이 판단하므로 정말로 실재의 모양을 보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누구나 알게 되는 일이지만 샅은 사물이라도 시점이 달라짐에 따라 그 모양도 다르게 보인다. 이 책상은 「사실상」은 구형(矩形)이라 하더라도 거의 모든 시점에서 마치 두 개의 예각(銳角)과 두 개의 둔각(鈍角)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대변(對邊)은 평행이더라도 관찰자에게는 멀리 있는, 한 점에서 마주치는 것처럼 보인다. 대변이 같은 길이이더라도 가까이 있는 변이 더 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든 일은 책상을 보면서 보통은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외견상의 모양으로부터 「실재의」 모양을 구성하는 것을 배웠고 우리가 실제적이 사람으로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실재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실재의」 모양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추리(推理)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방 안을 돌아다님에 따라 끊임없이 모양이 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감각은 책상 그 자체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책상의 현상에 대한 진리만을 제시하는 것 같다.
촉각(觸覺)을 고려할 때도 동일한 난점이 제기된다. 분명히 책상은 언제나 딱딱하다는 감각을 주고 우리는 책상이 압력에 저항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감각은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책상을 누르는가에 달려 있고 또한 신체의 어떤 부분으로 누르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압력이 다르고 신체의 부분이 다르면 달라지는 감각은 책상의 특정한 성질을 <직접>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며, 기껏해야 아마도 모든 감각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실제로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어떤 성질의 <기호(記號)>일 것이다. 책상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재하는 책상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가 시각이나 촉각이나 청각에 의해 직접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재하는 책상은,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인식되는 것으로부터 추리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매우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곧 (1)도대체 실재하는 책상은 있는가? (2)만일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대상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고려하려면 그 의미가 분명하고 명료한 몇 개의 단순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감관에 있어서 직접 알려지는 것, 예컨대 색깔, 소리, 냄새, 딱딱함, 울퉁불퉁함 등을 「감각소여(感覺所與, sense-data)」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것을 직접 지각(知覺)하는 경험을 「감각(感覺, sensation)」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색깔을 볼 때마다 그 색깔<의> 감각을 갖게 되지만 색깔 자체는 감각소여이고 감각은 아니다. 색깔은 그것에 <대해>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것이고 지각 자체는 감각이다. 우리가 책상에 대해 뭔가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책상과 관련되는 감각소여 - 갈색, 장방형, 평평함 등 - 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책상이 감각소여라고 하거나 또는 감각소여가 직접적으로 책상의 성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감각소여와,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실재하는 책상과의 관계가 문제로 대두된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실재하는 책상을 「물질적 대상(物質的對象, physical object)」이라고 부르자. 따라서 우리는 감각소여와 물질적 대상의 관계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물질적 대상을 아울러서 「물질(物質, matter)」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앞에 나온 두 문제를 다음가 같이 고쳐서 말할 수 있다. (1)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2)만일 존재한다면 그 본성(本性)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감각의 직접적 대상이 우리들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이유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자는 버클리(Berkeley, 1685~1753) 주교(主敎)였다. 그의 저서 《회의론자와 무신론자에 반대하여 하일라스와 필로노우스 사이에 교환된 세 가지 대화》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정신과 그 관념(觀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일라스는 지금까지 물질의 존재를 믿어 왔으나 필로노우스의 적수는 아니었다. 필로노우스는 무자비하게 하일라스를 모순과 역설로 몰고 가서 마침내 하일라스로 하여금 물질을 부정하는 것이 거의 상식에 속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사용된 논의는 여러 가지 가치를 갖는다. 곧 어떤 것은 중요하고 건전하며 어떤 것은 혼란하거나 억지 이론이다. 그러나 물질의 존재는 불합리를 범하지 않고 부정될 수 있으며, 우리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감각의 직접적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 것은 버클리의 공적이다.
물질이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때 여기에는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포함되며 이 두 문제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물질」이라는 말로 「정신」과 대립되는 어떤 것, 공간을 차지하고 어떠한 종류의 사고도 의식도 전혀 갖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버클리도 주로 이러한 의미에서 물질을 부정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보통 책상이 존재한다는 기호로 생각되는 감각소여가 사실은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의 존재의 기호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어떤 것은 비정신적인 것, 곧 정신이나 정신에 의해 받아들여진 관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우리가 방 밖으로 나가거나 눈을 감아도 계속 존재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책상이 보인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그것을 보지 않을 때에도 존속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 어떤 것이 본성상(本性上)으로 우리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이 <우리들이> 보는 것으로부터 독립해 있어야 한다하더라도 전적으로 우리들이 본다는 것으로부터 독립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실재하는」 책상을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요구되는 항구성(恒久性)과 우리들로부터의 독립성을 가지며, 이러한 관념은 매개 없이 직접 지각될 수는 없지만 추리될 수만은 있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불가지적(不可知的)인 것은 아니다 - 물질은 그렇지 않지만.
버클리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도 책상의 존재는 우리들이 본다는 데 의존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정신이 본다(또는 감각에 감지된다)는 데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 물론 어떤 정신은 반드시 신의 정신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우주의 공동 정신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들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정신 및 그 사고와 감정 이외에는 실재하는 것 - 또는 어쨌든 실재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것 - 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지탱해 주는 논의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사고하는 사람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다. 그러므로 정신 속에 있는 관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고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관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논의는 내 의견으로는 잘못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를 펴는 사람들이 이렇게 간단하고 조잡하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논법은, 타당하든 그렇지 않든 여러 가지 형태로 아주 광범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아주 많은 철학자들, 아마도 대다수의 철학자들이 정신과 그 관념을 제외하고는 실재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철학자들을 「관념론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물질을 설명할 때 버클리처럼 물질은 사실은 관념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처럼 물질로 보이는 것은 사실은 다소간에 미발달 상태의 정신의 집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자들은 정신에 대립되는 물질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을 인정한다.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 곧 (1)실재하는 책상은 있는가, (2)만일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대상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버클리도 라이프니츠도 실재하는 책상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버클리는 그것을 신(神)의 정신 속에 있는 어떤 관념이라고 말하고 라이프니츠는 영혼의 집단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두 철학자는 우리들의 첫 번째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며 다만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만 보통 사람의 견해와 다르다. 사실상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실재하는 책상이 있다는 데 동의하는 것 같다. 그들은 거의 모두 다음과 같은 점에 동의한다. 곧 아무리 우리들의 감각소여 - 색깔, 모양, 평평함 등 - 가 우리들에게 의존한다하더라도 이러한 감각소여가 생긴다는 것은 우리들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 곧 아마도 우리들의 감각소여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우리들이 실재하는 책상과 적절한 관계에 있으면 언제나 이러한 감각소여를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의 기호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일치하는 이 점 - 그 본성이야 어떻든 실재하는 책상이 있다는 견해 - 은 분명히 참으로 중요하며, 따라서 실재하는 책상의 본성에 대한 다음 문제로 옮겨가기 전에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고찰해 보는 것은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장(章)은 실재하는 책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는 것이 좋으리라. 감관(感官)에 의해 알려진다고 생각되는 보통의 대상을 본다면 감관이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것은 우리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들과 대상의 관계에 의존하는 어떤 감각소여에 대한 진리뿐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은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이 현상을 우리는 배후에 있는 어떤 실재의 기호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재가 현상으로 나타나있는 것과 같지 않다면 우리는 실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수단을 갖고 있는가? 만일 갖고 있다면 실재가 어떠한가를 찾아내는 수단을 갖고 있는가?
이 물음은 갈피를 잡기 어려우며 또한 아무리 기묘한 가설이라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들의 사고의 대상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친숙했던 책상이 놀라운 가능성으로 가득 찬 문제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책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책상이 보이는 바와는 다르다는 것뿐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온당한 결론을 넘어서면 우리는 무엇이든 추측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라이프니츠는 책상이 영혼의 집합체라고 말하고 버클리는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라고 말하고 냉정한, 그러면서도 그만큼 놀라운 과학은 격렬한 운동을 하는 하전체(荷電體)의 방대한 집적(集積)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놀라운 가능성들 속에는 어쩌면 책상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어 있다. 철학에는 우리가 바라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답>할 힘은 없다하더라도, 적어도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증진시키고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도 그 표피(表皮) 밑에는 기이함과 불가사의가 가로놓여 있음을 보여 주는 문제를 「물을」 수 있는 힘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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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장애를 자각한 끝에 비판적으로 대답하려는 시도다. 지식은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지만, 직접적 경험에서의 인식은 잘못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책상을 살펴보면, 책상에서 얻는 시각적 경험은 명료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경우에 따라 책상은 다르게 보인다. 현상과 실재가 다를 수 있으며, 화가가 현상을 놓치지 않듯이 철학자는 실재를 철저하게 탐구한다. 시각적 경험 뿐 아니라 모양, 촉각, 소리 등을 통한 경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실재하는 책상과 우리가 얻는 경험한 것은 같지 않으며, 간접적으로 인식된다.
이제 철학자는 실재하는 책상의 존재 여부와, 만일 존재한다면 실재하는 책상은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용어를 통일하자면, 감관에 있어서 직접 알려지는 것을 감각소여라고 부르고, 감각소여를 직접 지각하는 경험을 감각이라고 부르자. 우리가 책상을 볼 때 색깔의 감각을 갖지만 색깔 자체는 감각소여이며, 실재하는 책상과 우리의 경험의 관계는 곧 감각소여와 감각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있다. 실재하는 것을 물질이라고 바꿔 부르면, 앞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물질은 존재하는가? 존재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감관에 있어서 직접 알려지는 것 : 감각소여
직접 감각소여를 지각하는 경험 : 감각
(만일 존재한다면) 실재하는 것 : 물질
개개의 물질 : 물질적 대상
버클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물질은 존재하지 않고 세계는 정신과 그 관념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버클리는 물질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고, 우리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감각의 직접적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훌륭하게 주장했다. 버클리는 물질 역시 정신이나 정신에 의해 받아들여진 관념이라고 여긴다. 이후 철학자들은 물질의 존재는 비단 인간이 아닌 다른 정신일지라도 어떤 정신이 본다는 데 그 존재가 의존한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은 정신 및 사고와 감정 이외에는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관념론자라고 부른다. 관념론자들은 두 질문, 즉 실재하는 물질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첫째로 있다고 답하고 둘째로 물질은 곧 관념이라고 답한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감각소여를 갖지만, 이것은 실재하는 물질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의 기호라고 주장한다.
실재하는 물질이 무엇이냐는 논쟁에 앞서 실재하는 물질이 있다는 견해에는 많은 철학자가 동의하며, 이 점이 중요하므로 다음 장은 실재하는 물질이 있다고 여기는 이유를 다룬다. 그 전에 확실히 해둘 것은, 감각소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실재하는 물질 자체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들과 대상의 관계에 의존하는 어떤 감각소여에 대한 사실, 즉 현상일 뿐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실재의 존재 여부와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는 수단을 알 수 없다.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은 문제에 답할 힘은 없더라도 문제를 물을 수 있는 힘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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