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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花受紛-동아줄 2012. 4. 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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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 Pythagoras )의 생애

Πυθαγόρας, 기원전 6세기 중반 - 기원전 497년경

'달콤한 수학사' - 일출봉 출판사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60년에 출생하여480년에 사망했습니다. 사실 그의 출생과 죽음에 대한 년도는 정확하지 못합니다. 기록들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아무튼 피타고라스는 탈레스의 지도로 수학을 공부합니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중의 하나는 돈을 주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겁니다. 피타고라스가 교육을 받고 고향(시모스섬)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업적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배우려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피타고라스는 길가의 거지 아이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의 수학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결국 피타고라스의 돈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되자 학생이 자신이 돈을 낼 테니 계속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일화입니다. 피타고라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처음으로 증명해 내었다는 것과 '무리수'를 발견해 내었다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29년 학교를 설립합니다. 이 학교가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 학파들을 산출해 낸 곳이죠. 그런데 이 학파는 두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청강생'과 '수학자'인데 청강생은 말그대로 듣기만 하고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철학과 종교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어 '수학자'가 되면 천문학, 음악, 수학등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수학자(mathematician)'들에게 산술과 기하를 강조하여 'mathematician'이 수를 연구하는 학자, 즉 수학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수학자와는 다르게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수를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2는 여성, 3은 남성 5는 2+3이므로 결혼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에 각각의 의미를 정해 놓았으며 수를 이용한 점복술도 행해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수를 신비롭게 생각 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수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짝수와 홀수의 개념도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만들어 내었죠. 결국 이들의 연구가 정수론의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이렇게 수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확인 할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수로 모든 세상을 다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정수와 분수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의해서 무리수가 발견되었죠. 그들은 무리수가 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무리수는 분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절대 학파 외부로 알리지 말자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이를 발설하고 말죠. 결국 그 사실을 발설한 사람을 살해를 당합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서 말이죠. 하지만 결국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무리수를 자신의 연구분야로 받아 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황금분할'이라는 그 유명한 식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오각형에서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이 오각형은 한붓그리기로 가능한 별을 말합니다. 이외에도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음악과 천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의 길이가 정수배인 현들은 서로 조화로운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들의 길이의 비가 태양계를 구성하고 있는 천체들의 비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음악이 세상을 만든 이치를 밝혀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겠죠.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름으로 각종 연구들을 발표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실제로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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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 한권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아는 거라고는 피타고라스가 기원전 569년경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고 기원전 500년경 이탈이아 남단의 크로톤(지금의 크로토나)이라는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정도이다. 열여덟 살 때, 그는 올림픽 경기에 참가해서 권투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후 가까운 이오니아로 가서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문하생으로 몇 년간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시리아로 건너가 페니키아의 현인들 곁에 머물던 중 그들의 인도로 비블로스 비교에 입문하기도 했다. 그 다음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있던 카르멜 산으로 입산했다. 그곳에서 이집트로 건너가 20여년을 지냈다. 그는 오랫동안 나일 강 연안의 여러 신전을 다니며 이집트 제관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략한 거도 바로 그때였으며 그가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는 거기에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보낸 12년 동안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사들과 서기들로부터 방대한 지식을 전수받은 후 40년 전에 떠나왔던 사모스 섬으로 돌아갔다.지만 사모스는 당시 참주인 폴리크라테스가 통치하던 시기였고 피타고라스는 압제자들을 몹시도 싫어했다. 결국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해서 마그나그라이키아 연안국으로 갔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부의 시바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그리스에서 시바리스는 환락의 도시로 아주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크로톤이라는 인근도시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자신의 '학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학교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진리를 갈구하는 많은 젊은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약 150년에 걸쳐 그 명맥이 유지됐으며 정확히 218명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들 모두가 수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유명한 수학자들로는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 키레네의 테오도로스, 필로라오스, 타렌툼의 아르키다스, 그리고 히파소스 등이 있다. 그 당시 공개 석상에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던 여자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학생들을 '피타고라스 학도'라는 정식 학생과 청강생으로 나누었고, '그리스인 중 가장 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자'라는 존칭을 받은 피타고라스는 흰 가운에 별 모양의 5각형 무늬를 새긴 황금관을 쓰고 위풍당당하게 교단에 섰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로 씌어져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비법을 전수받은 정식 수학자들만을 위한 것, 이렇게 수준에 따라 두 가지로 만들어졌다. 또 지식의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달됐는데, 이러한 전달 방식에 따라 또다시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곧, 결과는 전달받되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증명은 전달받지 못하는 청강자와 결과와 증명을 모두 전달받을 수 있는 정식 수학자들이다. 피타고라스의 정식 학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 재산을 맡기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간소한 생활, 엄격한 교리, 극기, 절제, 순결, 순종의 미덕 증진을 목적으로 단체 행동을 하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 교단은 일대 세력을 갖게 되었고, 각 방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 동시에 질시의 표적이 되어, 드디어 정치적 반대파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당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부녀자들을 배에 태워 시실 방면으로 미리 피난시키고 피타고라스를 호위하면서 메소포타미아쪽으로 도망을 갔으나 추격은 점점 심해지고, 따르는 문하생도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 드디어 피타고라스는 체포되어 살해되고 말았다.그리스 7현 중의 한 사람인 그의 말로는 아르키메데스처럼 비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