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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suicide, 自殺]

花受紛-동아줄 2012. 3. 19. 21:36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1. 

자살에 대한 글은 항상 조심스럽다.
이는 타인을 대하듯 객관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스스로 죽을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수세기 동안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일신교를 기초로 삼는 서양에서는 자살은 죄악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열녀나 열부의 죽음이나 어떤 이념을 위한 자결은 위인으로 숭상되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 가입 국가 중 자살율 1위라고 한다.
현대 사회의 자살이 더욱 문제화되는 것은, 타인이나 공공의 이익, 어떤 확고한 목표를 위해서(물론 이런 사유로 죽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가 아닌 삶의 의미를 찾지 못 하고 어려운 길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살은 절대 안 돼' 라는 경직된 모습으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살로서 쉽게 해결할 수 있어' 라는 안이한 태도 역시 굉장히 문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살이란 삶에서 어떤 의미(가치)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박탈하는 가장 부조리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2.

토머스 조이너의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 Myths of Suicide>는 
'자살이란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하는 일'이라고 전제하고 접근하는 책이다.  

일단 서문에서 언급한 '누가 자살을 원하는가'를 먼저 보자. (토머스 조이너의 국내 미출간된 전작 '사람들은 왜 자살하는가' 에서 다룬 부분이기 때문에, 서문에서만 간단히 다룬 듯 하다.) 

두 가지 심리 상태가 동시에, 그리고 오랜 기간 지속될 때 죽음에 대한 욕망이 자라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마음과 자신이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다는 마음이다. 이 두가지 심리 상태를 '짐이 된다는 의식'과 '소속감 부재'라고 부르겠다. 짐이 된다는 의식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가족과 친구, 크게는 사회에 짐이 된다는 사고 방식이다.  - 12p 


결국 수많은 이유(종교적 이유의 자살 폭탄 테러범, 나의 삶을 통제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남겨진 사람에게 이익을 남겨주겠다, 누군가에게 복수하겠어, 사랑을 잃어버린 나에게 삶의 이유가 없다 등등)를 댄다 하더라도,  

자신이 누군가의 삶이나 사회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느끼거나,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이 있다면 살아가려는 의지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이다.  

3. 

그런데 이 책은 나를 굉장히 당혹스럽게 한다.
일단 자살에 대한 25개의 오해와 편견을 단락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 각 단락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많지만, 소소한 나뭇잎에 가려서 숲이 보이지 않아 결국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취지가 무엇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통해서 자살 심리나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자살 시도자 판별, 자살 예방 방법을 알기 원한다면, 책을 잘못 선택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물론 책의 부분부분은 자살 예방에 목적을 두고 있는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통합되는 모습이 매우 부족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당혹스러운 부분은
외국인 저자인 책 치고 한국에 대한 인용이 이렇게 많은 책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즐거운 부분도 아니고, 하필이면 자살 이야기에. '정다빈' 씨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 하며, 매우 불편한 맘으로 책을 읽어 나간다. 우리나라는 자살 강국이 맞나보다. ㅠ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일단 
다음 인용구는 진저리나게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어른들이 '죽을 용기로 살아봐' 라고 하시는 말씀은 농담이 아니다. 그만큼 죽기는 쉽지 않다, 평생동안 폭력과 인연이 없었던 사람은 특히.  

"손목을 긋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시적이지도 않고, 쉽지도 않더군요. 피가 응고되어 멈춰버리기 때문에 고작 이런 상처로는 죽지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 날 저녁 내내 다시 응고되어 막히는 이 못된 혈관을 다시 째느라 씨름하면서 보냈습니다. 나도 고집스레 달라붙어 한 시간도 넘게 내 팔을 마구 베어댔죠. 나는 죽기 위해서 내 몸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운 끝에 결국 기절하고 말았어요.  - 32p" 


아아, 다시 읽어도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예전 우울증이 극심했을 때, 나 역시 죽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고려 사항이 많더라. 일단 가족들이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고려하게 되어서 어느 장소에서 저지를까부터, 늦게 발견되려면 어느 시간대에, 가능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고통이 덜한 방법이 무엇이지 까지. 누가 타이레놀을 다량 복용하면 간이 손상되어 죽는다던데 구체적으로 알아보니 거의 2-3일간 복통으로 미친다고 하고, 투신은 발견할 사람에게 너무 미안하다. 독약은 구할 방법이 거의 없고, 손목 긋기는 성공하기가 더욱 희박하다고 한다는 등등등.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끔찍하시리라.) 

에이, 죽을 때가 안 되었으니 그런 잡다한 걱정을 하는거야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 언급된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정신 병리적 이상(우울증, 조울증, 정신분열, 경계선 성격장애..)이 있지만, 일단 죽음을 결심하고 나면 그 부분에만 집중하여 상당히 이성적으로 명료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감하고 폭력에 단련된 사람이 주로 자살에 성공하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포기할 준비가 완전히 다 되어 있었습니다. 자살할 동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완전히 끝장을 내지 못했다고 할까요... 자살하고 싶었냐고요? 그랬습니다. 자살을 기도했냐고요? 정말 자살 근처까지 갔었죠.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딱 한가지는, 내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할만큼 강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  - 34p, 매릴린 맨슨 인터뷰

  
5. 

삶에 대해 자포자기하여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상태이다. 

사람이 너무도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게 되면 '인지 해체'라 불리는 무감각한 상태로 회피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인지 해체 상태에서는 집중력의 범위가 좁아지고 지각 능력이 낮아지면서, 구체적인 감각이나 움직임만을 지각할 수 있게 되며, 바로 코 앞에 닥친 바로 여기에서의 목표와 임무 밖에 지각할 수 없게 된다. 추상적인 사고나 앞을 내다보는 사고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며, 그 결과 자제력 상실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 80p  


인지 제한의 다른 예는 유서에서도 나타난다. 

자살을 준비하는데 드는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노력 때문에 주의력이 고갈되어, 자살하려는 사람은 유서를 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거나, 혹은 유서를 남긴다 해도 먼 미래의 감정적인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 열쇠나 청구서 같은, 상대적으로 낮은 사고 수준에서 비롯되는 하찮은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당신에게 5,000달러를 남겨둘게. 당신에게 그만큼 빚을 졌다고 생각해. 계약서와 목록은 책상에 두었어."
"문을 열기 전에 경찰에 먼저 전화해. 총으로 자살했어."
"경찰관께. 주머니에 차 열쇠가 있습니다. 차를 집에 갖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딸아이가 출퇴근할 때 차가 필요합니다."
"내 저축을 모두 인출해서 청구서를 처리해 주세요."  - 200p

 
6.

왜 자살을 할까 하고 궁금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집착도 우울증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마음의 감기'라 불리는 우울증에 걸리면,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사고가 맴을 돈다. 즉, 미래-자신-세상이 모두 불투명하고 가망성 없이 보이기만 한다. 자살에 대한 집착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갈등한다. 자신을 늪에서 끌어올려줄 수 있는 희망을 갈구한다. 그래서 종이 양면의 차이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포기하기도 하게 된다. 이 말은 자칫하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충동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날 분기점이 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그는 살고 싶어할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서. 누군가가 희망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그는 살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죽음을 보는 관점에 있어 일종의 분기점을 넘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에게 죽음이 일종의 평안을 가져다주리라 생각한다.  - 146p 

삶과 죽음의 싸움이 자살의 순간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긍정하는 순간을 누리고서 다음 순간 죽어버리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 위험이 높은 사람에게도 삶을 향한 마음과 죽음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뿐이다. - 114p

   
7. 

추가적으로,
이 책에 나와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자살 위험자의 가족과 친구에게 주는 지침'
자살 예방 및 상담 책자를 통해 인용하려 한다. 


1)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가벼이 넘기지 마라.
2) 침착함을 유지하되 적극적으로 대처 하라.
3)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라. 건강이나 안전에 위험이 생길 수 있으므로 위기 상황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라. 필요하면 119를 불러라
4) 그 사람의 담당 의사나 치료자, 구급팀, 또는 다른 전문가에게 연락하여 우려되는 바를 얘기하라. 그가 자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5)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눈을 맞춰라.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손을 잡는 등 몸으로 이야기하라.
6)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라. 그 사람이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라. 가능하다면 그가 어떤 자살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판단하라.
7) 그 사람의 감정을 인정하라.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판단하지 마라. 하지만 그가 자신의 생동에 대한 책임감의 끈을 놓게 해서는 안 된다.
8) 강조하라. 순간의 문제를 모면하기 위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해결책이 바로 자살임을 강조하라. 희망을 불어넣어라. 도움의 손길이 존재하며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점을 상기시켜라.
9) 비밀로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마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담당의에게 알리는게 좋을 수 있다. 그의 목숨을 위협에 빠뜨릴 수 있는 약속은 하지 마라.
10) 믿을 만한 전문가의 손에 맡겨질 때까지는 가능한 한 혼자 있게 하지 마라. 

 
8. 

어제 뉴스에서 한강 다리에 <생명의 전화>를 설치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의하면, 다리까지 온 사람은 이미 죽음에 대한 결심이 확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화를 걸 가능성이 적다고 한다. 그보다는 미관을 포기하더라도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 없도록 칸막이를 설치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란다. 코 앞에 생각하지 못한 죽음의 장애물이 있다면, 자살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자살 강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만큼
우리도 좀 더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각도에서 자살 예방법이 연구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고,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순간적인 탐닉에 열광하며 긴 시간의 노력을 회피하는 풍조를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대중 매체의 각종 경연 프로그램(연예인 만들기 프로젝트)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에 미쳐서 원석으로 숨은 다이아몬드는 언제 다듬을 것인지.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지금처럼 사람을 하나의 대상화시켜서 유행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점점 소속감과 연대감, 자신의 가치에 대한 존중감은 줄어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노약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정작 내가 노약자가 되었을 때 누군가의 짐으로 전락하는 현실은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이나 여성의 자살 성공율보다
중년 남성이나 노인의 자살 성공율이 훨씬 높다는 것은 사회의 또다른 슬픈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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