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목록2♧/노인.치매.뇌

오복의하나

花受紛-동아줄 2010. 4. 12. 10:01

오복의하나가을이면 파랗던 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봄이 되면 얼었던 땅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여름날 소나기 한 줄기에 개울물은 우렁차게 소리 내며 흘러가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온갖 모양을 지어내며 어디론가 떠간다.

자연은 잠시도 멈춰있지 않고, 변화하며 생동하는 중에 탄생과 소멸을 반복해 나간다. 우주의 본태는 멈춤에 있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보거나 느낀 사물을 결코 똑같은 모습으로 두 번 다시 대할 수 없다.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자연의 한 모퉁이에 인간의 삶도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 삶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단연코 예외일 수 없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다.

태어난 생명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안고 산다. 태어났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느라고 바빠서 죽는 일은 잊고 산다. 도대체 삶 속에 마치 죽는 일은 없다는 듯이 산다. 사실 ‘어떻게 사는냐’가 중요한 것만큼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주위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으면서 우리는 죽음을 체득하며 산다. 죽는다는 일이 가까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새삼 느껴본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개념이 부정적이고 혐오적이며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지면서 우리들 삶 속에서 죽음이 잊혀지게 되었다. 잊혀진다고 해서 그 존재마저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날 불현듯 방문 앞에 죽음이 다가와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피할 수 없이 오고야 마는 일이라면 미리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를 쓴 능행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 삶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온 모습과 닮아 있다. 어떻게 죽느냐,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잘 먹고 잘 사는 법만 생각했지 잘 죽는 법은 모른 채 하고 산다.

죽는 것이 삶의 결론이고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면 결국 산다는 것은 잘 죽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죽는 일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삶의 분명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다.

능행 스님은 정토마을을 만들어 암으로 불치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호스피스 생활을 10년 이상 해온 분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달 혹은 두 달 정도 삶의 기간을 선고 받은 환자들이나 20년 혹은 30년 삶의 나날들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사실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평생을 돈이 다 인줄 알고 물불을 안 가리고 돈 버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두 세 달 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나 망막하고 절망스러울 것이다. 왜, 돈이면 다 된다던 세상에서 얼마든지 돈을 쓰겠다는 데도 죽어야 하느냐고 외치면서 몸부림을 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벼락은 남들한테만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뭐가 잘못되었다고 하필 내가 이제 좀 살만하니까 죽어야 하느냐고 절규한다. 돈은 쓰기 위해 있는 것인데 벌기만 하느라고 온갖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팽개치고 평생을 바친 다음 마지막 할 일이 죽는 일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여명을 두 달 남겨놓았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갑자기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더니 벼락이 떨어지데요. 내가 벼락을 맞을 줄이야. 내게 잘못이 있다면 정신없이 열심히 돈 번 것밖에 없는데.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만 했을 뿐인데... 글쎄 이제 와서는 돈을 쓸 데가 없네요. 돈만 많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런 개 같은 일이 다 있네요.”

인간답게 죽으려면 먼저 인간답게 살아야만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될 것이다.

예부터 오복 중에 하나로 고종명(考終命)이라는 것이 있다. 제 명대로 살고 집에서 자손들을 앞에 놓고 편안하게 할 말을 다하고 죽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들이 사는 일에만 비중을 두지 않고 마지막으로 잘 죽는 일이 오복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