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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 옆, 그냥 자연스런 일상

花受紛-동아줄 2009. 12. 23. 22:06

죽음은 삶 옆, 그냥 자연스런 일상

 

화장터를 바라보는수도자들


[여성 수도자] 강가 강의 화장터 1

내세로 가는 길 닦는 수도자조차 눈물 훔치는데
불한당이자 폭력이었던 그것이 물처럼 바람처럼


 강가 강이 겉옷 같은 안개를 벗어버리자 가장 먼저 나체처럼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은 죽음이었다. 한 남자의 주검이 들것에 실려 강변인 가트의 계단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주검은 살아 있는 동안 겪었을 고난도, 누렸을 영화도 한낱 거짓인 양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었다.
 그 옆의 수많은 화장터에선 주검과 장작을 태우는 연기가 비행접시처럼 살아 남은 자의 머리 위를 배회했다. 빼빼 마른 개 한 마리가 화장터의 잿더미를 발로 뒤적이며 자기 몫으로 남겨진 죽은 자의 유물을 찾고 있었다. 개가 잿더미를 뒤적이자 재는 바람에 실려 영원한 귀의처인 강가 강에 자신을 던지고, 일부는 별똥별처럼 나룻배로 날아들어 순례단의 수도자들에게 귀의했다.

 수도자란 이승에서 내세로 가는 길을 닦는 이들이다. 만약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야 할 바다가 없다면 다리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종교가 있을까. 고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소년 시절 성 밖에 나갔다가 처음으로 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해 고뇌했다. 그것이 출가와 구도의 계기가 되었다. 또 예수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가 있었을까.
 죽음을 넘어선 그런 성인들에게 우리가 귀의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구원 받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일지 모른다.



 두려운 영혼들을 위로해야 할 수도자들도 눈앞에서 허망하게 육체가 해체되는 풍경에 까닭 모를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네 명의 장정이 주검을 실은 들것을 메고 오는 사이 유족은 무심하게 주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머리채 잡힌 채 적군들에게 끌려가는 딸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한 포로처럼, 산 자는 누구도 죽은 자를 대신해줄 수도, 가는 길을 막을 수도 없었다.
 화장터가 있는 가트와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물가에서 힌두교 수행자인 사두로 보이는 한 남자가 요가 자세로 앉아 강가 강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었다. 흰 머리는 강가 강에 닿을 듯 길었다. 얼굴은 맑았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강가 강의 물을 손 가득히 떠서는 길고 하얀 자신의 머리에 끼얹고 손을 모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 인상 뒤로 또 한 조각 주검을 태운 연기가 아직도 육체를 떠나지 못한 영혼의 방황을 보여주듯 날개짓하며 다가왔다.

얼마 전 죽은, 깃털처럼 가벼웠던 목사 친구가 환영처럼

갠지스강 화장터 전경


 그 연기에 닿아 글썽거리는 시선 너머로 얼마 전 죽은 친구가 환영처럼 서 있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막막한 지경을 경험하게 했던 친구 채희동이었다. 그는 충남 아산에 있는 작은교회의 목사였다. 신자가 스무 명이나 될까.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교회였다. 말이 목사지, 신자를 늘리거나 교회를 키우는 데는 전혀 능력이 없는 친구였다. 나에게 그는 목사가 아닌 친구 희동이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서울에 있을 때였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과 같은 도시에서 그는 결코 살아남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마 그가 고향인 아산으로 간 것도 그런 자신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목회에서도 그랬고 경제적으로도 무력한 존재였다. 자신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까봐, 세상을 살다 간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며 뭇 사람들이 발버둥칠 때 그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도 여유롭기만 했다.
 성직자임에도 ‘권위’와는 영 거리가 멀었던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면 시를 읊고 동네 아이들과 들판에서 공을 찼다. 그래서 그는 내 친구였다. 만나면 고담준론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조용히 걷거나 함께 나무를 바라보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이 좋았다.

 

꽃에덮인주검들


  그가 죽기 한두 달 전쯤이었을까. 나는 1년의 인도 순례를 끝나고 돌아온 뒤 맨 먼저 그를 찾았다. 우리는 그의 고향인 아산 송악에 있는 봉곡사의 아름다운 솔밭길을 거닐었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아들, 딸과 함께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바로 그 길과 절일 만큼 그는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해 마음을 열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 같은 게 원래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작고 깃털처럼 가벼웠기에 예배당처럼 편안하게 절에 앉아 놀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런 그가 죽었다고 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봉고차를 끌고 자기 마을 뚝방길 신호등에서 대기하던 중, 운전사가 졸며 고속으로 달려오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뻔한 유조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것이었다.
 희동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내 마음 속 첫 반응은 어리석게도 거부였다. 그것이 죽은 자를 위한 나의 예의이기나 한 것인 양 나는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가족들, 동료들의 잇따른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은 내게 늘 절망일 뿐이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죽음은 늘 내게 불한당일 뿐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도적이고, 살인자일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동의 한 마디 없이 앗아가는 단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몇 달 뒤 집에 큰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가 한밤중에 큰 화상을 입었을 때 마을 아주머니들이 “저 귀한 자식들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는구나”라고 웅성거리던 말이 귀에 들어선 순간 죽음은 더욱 깊은 고정관념으로 뇌리에 박혔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나의 동의 한 마디 없이 내게서 앗아갈 수 있는 폭력으로.
 죽은 자들은 죽었기에 말이 없었고, 내 주위에서 죽은 자 가운데 누구도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젖을 떼 듯 관계를 강압적으로 단절시켜버리는 죽음의 그 폭력성이 싫었다. 그런 내 생각과 달리, 죽은 자들은 저세상에서 죽음이 아닌 어떤 다른 삶을 누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죽음 이후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너무도 익숙한 고향을 떠나와야 했듯 그들도 고향을 떠나 또 다른 삶의 세계로 갔을지, 아니면 이 세상 여행을 끝내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언제나 명절날 온 고모가 떠나는 게 싫다며 다리 뻗고 울던 응석받이로 돌아가버리곤 했다.

배위에서꽃파는소녀

삶의 숱한 기억 새겨진 몸 남김없이 훌훌

 그렇게 절망스런 죽음들이, 여전히 일어나선 안 될 그 무엇인 양 거부되는 것들이 이렇게 자연스런 일상처럼 강가 강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주검을 멘 네 남자는 들것과 함께 주검을 강가 강에 풍덩 풍덩 두 번 빠뜨리며 이승에서 마지막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주검을 화장대에 뉘었다. 그 옆엔 삶의 숱한 기억이 새겨진 몸을 남김없이 태워버릴 장작이 놓여 있었다. (강가 강의 화장터-죽음에 대한 얘기가 다음 2,3회 이어집니다)

 

 

죽음도 삶도, 위 아래 없는 물처럼

 
 

강가(갠지스)강의 아이들과 함께 있는 조현 기자.


강가강의 화장터

주검 세례한 강물 머리 끼얹는 수행자 모습에 언뜻…
빛으로 ‘죽음을 산’ 친구여, 아름다운 여행하시라


** [강가강의 화장터①] 죽음은 삶 옆, 그냥 자연스런 일상 

 그 옆에서 사두(힌두교 수행자)는 주검을 세례한 물결의 파고가 그의 눈앞에서 퍼져 나가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두의 모습이 바로 인도의 사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시바 신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힌두 사원에서 시바는 남근인 링가로 표현되지만, 간혹 시바를 그린 그림이나 상들도 있었다. 단숨에 뭔가를 파괴할 듯한 건장한 몸임에도 희로애락을 초월한 표정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는 영락없는 시바 신이었다.

지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강, 천국으로 가는 강물 세례


 인도인들은 강가 강이 원래 천상에서 흐르는 풍요의 강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지상에 큰 가뭄이 들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선인이 강가 강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를 소원하며 고행을 거듭한 결과, 드디어 강가 강을 이 지상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 엄청난 물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이 땅의 모든 것이 다 쓸려내려가 파괴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를 염려한 ‘파괴의 신’ 시바가 그의 머리로 강물을 받아 그 물줄기들을 조각 내 땅으로 내려 보낸다고 한다.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파괴란 변화의 모습이다. 변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생겨났다 유지되고, 파괴되고 다시 생겨나는 변화는 만물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괴의 신 시바는 인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변화무쌍한 신이다.
 시바의 머리칼을 타고 내려오는 이 물을 인도인들은 왜 가장 성스럽게 여기며, 그 강물의 세례를 받으면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일까. 나는 알 수 없는 세계를 떠도는 유랑별처럼 인도를 떠돌 때 온갖 오물로 덮인 시궁창 같은 바라나시의 강가 강만이 아니라 수많은 강가 강을 보았다.

강가 강의 화장터


변화에 익숙하지 못해 생소한 것은 거부하는 나를 보며

 강가 강은 광활한 인도의 대지를 적신다. 요가 학교가 있는 비하르 주 뭉게르에선 바다처럼 광대한 강가 강을 보았고, 요가의 땅 리시케시에선 맑디맑은 시내 같은 강가 강을 보았다. 또 더 높은 히말라야의 고산에선 계곡 같은 강가 강을 보았다. 그리고 구름과 비, 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뭇 동물들…….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그들이 바로 강가 강으로, 시바 신으로 현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론 히말라야에서, 바라나시에서, 또는 비로, 나무로, 인간으로 몸을 드러내는 시바 신은 육신을 무너뜨린 그 자리에 어떤 생명을 피워냈을까. 변화에 익숙하지 못해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처럼 생소한 것에 대해선 먼저 거부 반응을 보이는 나를 보며 그 사두는 다시 강가 강의 물을 한 손 가득히 떠 자신의 머리에 부었다. 그 자연스런 변화와 다름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스러워지고, 천국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어디엔가 매여 있고 집착이 강하면 결코 물처럼 흐를 수도, 그 흐름을 통해 정화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기라도 하듯이. 보라, 그대가 물이 된다면 윗물과 아랫물은 결국 같은 물일 뿐, 죽음도 아니요, 삶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가버렸냐는 ‘산 자의 푸념’, 이젠 그만…

 그 순간 희동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한밤중 아산에 도착해 영안실에 갔을 때 희동의 아내가 다가왔다. 나는 다만 그의 아내를 안아주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바로 직전에 어떤 분이 영안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분에게 희동의 영혼이 임해, 그분의 입을 통해 희동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하고 떠나와 너무너무 좋은 곳에 왔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더라고 했다. 그 뒤 희동은 많은 친구들의 꿈속에도 빛에 싸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 환희의 삶을 보여주듯이.
 

 나도 그의 죽음에 대한 절망과 탄식을 끝내고 이제는 그를 ‘환송’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가버렸냐는 ‘산 자의 푸념’은 이제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를 내기보다는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그대가 있어 행복했노라고, 세상살이에 무능해 보이는 바보스런 이들이 더욱 더 아름다운 세상 여행을 했다는 것을 더욱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삶의 승리일지 모른다는 안도감을 주어 고맙다고, 아름다운 여행을 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 강가강은 히말라야부터 인도의 대륙으로 장대하게 뻗어있습니다. 히말라야에서부터 대륙까지 여러 곳에서 만날 때마다 찍어두었던 강가강의 사진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명상해보지요.
 배경음악은

 

 

 

[여성수도자] 죽음은 살아 남은 이들의 최고 스승

 

한겨레| 2008-02-26 
 
 
 


 

[여성 수도자] 강가강 ③
수녀님, 스님, 교무님도 죽음과 더불어 새로운 삶
죽은 친구는 아름다운 환송으로 산 내게 환희 선물

 
 희동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또 한명의 친구를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 한 골목에서 살던 동갑내기 영철이었다. 우리 집 사랑채에서, 그리고 그의 집 작은방에서 우리들은 한 이불 속에서 고구마와 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책을 보고, 킥킥대며 장난을 치곤 했다. 서로 결혼하고 다른 직장에 가서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 십수년을 함께 보낸 친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저 가슴 밑바닥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어느날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 영철이가 암이라고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일산에 입원해 있던 그에게 달려가 보았더니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요양을 하도록 신신 당부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몇달이 지난 뒤 한 친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영철이가 곧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럴리가”라는 의혹은 병원에 가서 대꼬챙이처럼 말라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어처구니 없는 비탄으로 바뀌었다. 영철이는 내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직장에 나간 모양이었다. 조금 나아졌다 싶으니 처와 두아들을 부양해야지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보처럼.





원망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가슴에 못 박는 얘기만  

 두번째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더욱 말라 있었다. 그의 아내를 밖으로 불러내 물었더니 “살 희망이 없다”고 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영철이는 그런 상황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영철이가 모든 사람을 원망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계속 가슴에 못을 박는 얘기만을 내뱉는다고 했다.

 그의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침대에 누운 영철이 옆에 걸터앉아 마주했다. 그의 옆엔 성경책이 놓여있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자 그는 “아내가 다니니 그냥 다닐 뿐이고, 모든 게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네 상태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도 알아.”
 그가 말했다. 가족들은 그가 모르는 줄 알지만 자신도 자기가 채 한 달도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고 했다.

 설마 했던 것이 정말 현실이냐는 듯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한가닥 믿음을 달라며 쳐다보는 그를 향해 나는 다시 비수를 꺼냈다.

 “그래, 너 얼마 못 살아!”
 푹 꺼진 눈이 그 말을 들으며 찰나간에 한 자는 더욱 꺼져버린 그를 향해 물었다.

 “며칠 뒤 네 숨이 끊어진 순간 너는 어떨 것 같으냐?”
 그는 더욱 퀭한 눈을 아래로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빛에 싸여 미소짓던 그의 아름다운 환송으로 나조차 환회로와졌다 

 “영철아. 너는 죽지 않아!”
 나는 마치 그의 생사여탈권을 쥔 신이라도 된 양 그에게 단언하고 있었다. 마치 죽어서 저승에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말은 확신에 넘치고 있었다. 그 확신 외에 그 순간 내 친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네 숨은 끊어지겠지. 그 순간 설사 나와 네 아내는 너를 보지 못해도, 너는 보고 있을거야. 숨이 붙어 있을 때보다 더욱 더 생생히 보고 있을거야. 우리를. 그것이 잠시 죽었다가 깨어난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이고, 모든 종교의 간증이야. 숨이 끊어질 뿐 네 영혼은 결코 죽지 않아.”

 영철이는 익사 직전 지푸라기를 잡은 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네가 숨이 붙어 있는 순간 지금과 같은 지옥의 마음상태를 마지막까지 가지고 가면, 숨이 끊어진 이후에도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네가 지금 마음이 편해진다면 숨이 끊어진 이후에도 천국이 기다리고 있겠지. 천국과 지옥은 지금 네가 선택하는거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친 김에 하던 말을 계속했다.
 “숨이 끊어진 순간에도 성성히 깨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너는 그 때서야 남은 가족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하고 떠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거야. 그렇게 가고 싶어?”

 영철이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작별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토록 빼빼말라가며 외롭게 홀로 죽음을 맞이하며 서럽고 무서웠던 모든 악몽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영철이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것 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것은 없었다. 그렇게 헤어진 며칠 뒤 영철이는 세상을 떴다.

 영철이의 장례식장에 달려갔을 때 그의 아내가 달려와 말했다. 마지막 며칠 동안 많이 달라졌다고. 그리고 숨을 거둔 순간 아주 평안하게 갔다고 했다. 며칠 뒤 그는 내 꿈에 나를 찾아왔다. 꿈 속에서 찾아온 영철이는 빼빼 말라 비틀어진 말기암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빛에 싸인 모습으로 내게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그가 아름다운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환송으로 나조차 환희로와졌다.


 임사체험자들 하나같이 달라지는 그 후의 삶 

 죽은 자는 그 혼자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죽음이 이처럼 산 자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카타리나 수녀님은 열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꺼번에 자신을 떠나는 죽음을 경험했고, 선재 스님은 10년 전 간에 병을 얻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장을 받은 채로 살아왔다. 또 인신 교무님은 자신의 수도원에서 죽어가는 난치병 환자들을 보살펴왔다.

 죽은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산 자들에게도 더욱 큰 의미로 다가서기에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의 최고의 스승이다. 한 순간 자신이 죽었다고 여겼던 임사체험자들은 그 뒤로 삶이 획기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우리가 죽는다고 아는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안 그들은 이번 삶이 아름다워야 다음 삶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오직 돈을 벌거나 출세하기 위해 아등거리던 삶이 지금 사랑하고 베풀고 행복해지는 삶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 앞에 섰을 때, 부나 성취 등 물질과 형상은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가지 못한 채 오직 마음만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많이 이루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게 아니라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베풀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는 것을 실감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손잡고 사랑해야 할 산자들이 있는 땅으로 

 시바 신 같은 사두의 초월적 표정이 주는 변화였을까. 순례단도 죽은 자의 여행을 기꺼이 환송하고, 지금 내게 오는 자도 기꺼이 환영하는 마음이 된 것 같았다. 막막한 우주의 한 점인 지구에, 같은 시간에 태어나 함께 지구호를 타고 가는 여행의 동반자들이 더욱 소중해진 것이 분명했다.

 나룻배에서 내려 길을 걸을 때 지정 교무님과 베아타 수녀님이 손을 잡았고, 그 뒤로 더 늦기 전 누군가의 손을 잡겠다는 듯이 선재 스님과 마리 코오르 수녀님이 손을 잡고 따랐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사랑해야 할 산 자들이 있는 땅을 향해 걸었고, 그들 옆으로 들것에 실린 자들은 새로운 여행을 떠날 강가 강의 나루터로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 영전 앞에 두고 춤 춘 문익환 목사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고통과 행복의 정도는 천양지차입니다. 죽음을 새로운 여행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겐 장례는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이를 위한 환송연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는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영전을 앞에 두고 고은 시인과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고, 명진 스님(봉은사 주지)을 비롯한 선승들은 존경하는 춘성 선사의 장례식장에서 춘성이 평소 즐겨 부르던 ‘나그네 설움’ 한가락을 뽑은 다음, 상가를 ‘전국 수좌(선승) 노래자랑대회’와 춤판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끔 식사나 술자리에서 제 벗들을 보낸 얘기들을 해주곤 했는데, 이를 들은 이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달라지더군요. 지난해 제가 다니는 회사의 한 선배가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친상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까마득히 몰랐으니까요. 그 선배는 내가 일러준 대로 아름다운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리고 영정 사진 속의 어머니와 울고 웃으며 많은 얘기를 나눴고, 너무도 기쁘고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제 단골인 명동성당 건너편 백병원 앞 죽집인 죽향 주인 정명숙씨가 그랬습니다. 그는 여성으로선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산악인이기도 한데, 저와 죽음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면서 지난해 아버지를 보내면서 마지막 한달동안 모든 앙금을 씻는 해원의 기쁨 가운데 아버지를 보냈고, 병이 깊던 아버지도 마지막을 아주 평안한 가운데 가셨다면서 감격해했습니다. 엄마 아빠를 기쁘게 보낸 그들이 아름답습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