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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물굿의 구성

花受紛-동아줄 2008. 12. 28. 20:44
 
구성악기

- 꽹과리

풍물굿의 리더 구실을 하는 악기로 흔히 '쇠'라고 하며 '매구', '깽매기' 등으로도 일컫는다. 쇠는 풍물굿판에서 자극적이면서도 충동적인 가락으로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데, 풍물패의 선두에서 치배들을 이끌어가며 쇠는 치는 사람을 '상쇠'라 한다.

쇠는 음색에 따라 숫쇠와 암쇠로 구별할 수 있는데, 숫쇠는 소리가 야물고 높으며 암쇠는 소리가 부드럽고 얕다. 숫쇠와 암쇠가 서로 받아치며 하는 놀이는 마치 암새와 숫새가 서로 이야기하듯 잘 어우러져 풍물굿의 가락을 한층 더 풍성하게 한다.


- 징

금속 타악기의 하나로 본래의 소리는 '정'이나 징으로 굳어졌다. 징은 원박을 정확하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사물의 가락을 모두 감싸서 멀리 울려 퍼지게 한다. 풍물악기 가운데 가장 은은한 소리를 내며, 포용력이 있는 악기라 할 수 있다.

징은 연주가 다양하지 못한 단점이 있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발림이 다양하고 여유가 있어 춤으로 신명을 표출하기가 좋다. 쓰임새가 비교적 넓은 편이며, 풍물굿보다는 오히려 무악에서 더 많이 쓰인다.


- 장고

장구라고도 불리는 장고는 풍물굿의 악기 가운데 유일하게 음양성을 낼 수 있는 악기이며, 양편의 머리가 크고 허리가 가늘어서 '세요고'라고도 한다. 장고의 왼쪽(궁편)은 가죽이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풍물굿판에서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당악과 향악(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음악)에 처음 쓰였으며, 지금은 정악, 산조, 잡가, 민요, 풍물굿, 무악 등 거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 북

북은 구조가 간단하여 손쉽게 다룰 수 있으며, 풍물굿의 악기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세계 어디에서나 그 발생을 볼 수 있는 악기이다. 북은 다양한 가락을 연주하기보다는 박을 힘있게 짚어가면서 다른 가락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치는 방법에 따라 외북(춤 위주)과 쌍북(가락 위주 : 북채 2개 - 진도, 금릉, 김해 등지)으로 나누어진다.


- 소고

풍물굿에 쓰이는 작은북으로 '법고', '버꾸', '매구북'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소고는 옛날보다 크기가 작아져서 장단마다 첫 박에 한 번씩 치며 춤을 추는 것이 고작이다.
소고잽이들은 보통 상모를 쓰는데, 호남우도와 강원도에서는 고깔을 쓴다. 고깔을 쓰는 경우에는 소고잽이가 멋드러진 춤가락을 보이고, 채상모가 달린 전립을 쓰는 경우에는 힘찬 춤가락과 함께 상모놀음을 벌인다.


- 나발

나발은 길이가 약 115cm이며 원래는 군악기로 쓰였다. 풍물패가 어떤 마을에 들어갈 때(마을에 들어간다는 신호로 나발을 3번 분 다음 당산굿을 치고 들어간다.) 또는 풍물패를 모아 출발할 때, 그 밖에 신호용으로 많이 쓰인다.

나발은 대포수, 상쇠, 설장고 중 어느 한 사람이 부는데, 먼저 1초를 울리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치배들에게 준비를 하라는 뜻이 되고, 2초를 울리면 모두 모여 떠날 채비를 하라는 뜻이며, 3초를 울리면 출발하라는 뜻이다.


- 태평소

태평소는 전체 길이 약 30cm의 원추형으로 '날라리', '새납', '호적'이라고도 부른다. 선율악기 가운데 성량이 가장 높으며, 지공(구멍)은 모두 8개이고 그 중 첫 번째 구멍은 뒷면에 있다. 태평소는 본래 궁중의 대취타에 쓰였는데, 걸립형태 때 들어와 풍물굿을 한층 더 풍성하게 해주었으리라 본다.


풍물패의 짜임

풍물패의 인원은 지역이나 연희형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20∼30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연희자나 구경꾼이 많을수록 굿이 풍성하고 힘이 넘치게 된다. 풍물패는 보통 기수(용당기-영기-농기), 취군(나발-태평소), 앞치배(쇠-징-장고-북-소고), 뒷치배(잡색) 등의 순서로 짜여지며, 잡색의 경우는 치배와 구경꾼 사이를 이어주면서 일정한 대열없이 흥겨운 춤으로 신명을 돋운다.

풍물패의 복색은 흰 평복에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의 삼색띠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뒤에 와서 전문풍물패의 등장과 각종 민속경연대회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풍물굿의 구성원리

쇠, 징, 장고, 북 등의 타악기와 태평소가 어우러지면 자지러지고 푸지면서 신명을 이끌어내고, 발과 몸을 저절로 놀리는 충동이 일어난다. 쇠가 '자갈자갈'하면서 끊으면 징은 묵직하게 '징∼'하며 쇠를 푸지고 촉촉하게 감싸주고, 거기에 또 가죽소리가 달라붙어 장고가 '콩박콩박'하면 북이 '쿠웅쿵'하며 깊이를 더해준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뒷골이 허전하여 신명이 동하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가 신명조립을 위해 꽉 차게끔 구성되어 있어서 정적인 감상이 도저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잘된 풍물판굿을 보면 이 악기들 소리 외에도 그 풍물소리를 보다 신명나게 받쳐주는 소리가 있으니 바로 여러 사람들의 소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명을 돋우려고 또는 신명을 못 이겨서 여기저기서 불규칙하게 내던지는 단순한 고함, 추임새, 박수소리, 환호성소리, 거기에 줄창 쉬지 않고 몰아대는 거친 숨소리 등의 소리가 규칙적인 흐름의 가락이 되면서 탁월한 풍물굿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백기완

세계에 내세울 예술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그 민족을 대표하는 문화의 얼굴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여러 말 하지 않고 우리의 풍물이라고 들이대 본다. 건축물로는 국보 제1호라고 하는 '남대문'이 있어 나무로 된 집으로서는 그 정교함이 세계적으로 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기면 그 규모에 있어 너무나 떨어져 그 집 모양새의 정교함만 따로 내세우기엔 사뭇 답답하다. 또 석굴암이 있어 조형예술을 자랑할만 하긴 하다. 그러나 서양의 돌로 된 큰 집들 조각물에 비하면 우리의 그 빼어난 예술성에도 매이지 않고 어딘가 옹색함이 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어 ······.

그 밖에 씩씩한 벽그림, 청자 백자 질그릇 등 무엇보다도 먼저 손꼽아야 할 우리 민족문화의 위대한 유산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세계에 으뜸으로 내세울 것은 역시 우리의 위대한 풍물이 그 하나가 아니겠는가 자부해본다. 얼굴로서가 아니라 두근대는 가슴으로 치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위대한 대예술 풍물이 요즈음은 여러가지로 화를 입고 있다. 우선 동네에서 한번 치면 대개가 시끄럽다고 삿대질이 나오기가 일쑤다. 언제부터 길들여졌는지 서양의 실내악기는 아무리 동당거려도 시비를 하질 않고 우리의 풍물만 두들기면 시끄럽다고 야단들이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전통문화가 바탕에서부터 배척을 받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우리 풍물이 당하고 있는 화의 실상은 정부의 시책이 그것을 문화유산으로써 껍질만 남기고자 함으로써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있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결국 우리 풍물을 동네에서 두들기기만 하면 이를 예전처럼 신나게 생각하질 않고 놀랍게도 이를 시끄럽다고 하는 풍토란 사실 우리 것을 차단 파괴한 비자주적인 사회변혁과 그것을 바탕으로 지배체재만 강화하려는 억압통치에 의한 상처인 셈이다. 여기에다 풍물을 잡는 일부 풍물잽이들의 문화주의적 망동은 우리 풍물의 세계적 품격을 일그러뜨리는데 일조가 되고 있는 점 실로 기가 막힌 사실이다.

가령 우리 풍물은 그것을 듣고 즐기는 이가 군사독재자가 됐던 썩어 빠진 재벌이 됐던지간에 그냥 그저 연주하면 되고 또 그러는 가운데 그 기교만 높이 갖추면 되는 양 도락화되고 있고 또 한편 자못 기능주의에 빠져가고 있는 측면은 우리 풍물이 우리 풍물에게 가하는 뼈아픈 상처라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하여튼 우리 풍물은 그 문화성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 음악성에 있어서도 세계의 으뜸임은 그것이 어느 개인의 주관적 견해에 의한 것만은 아닐 터이다.

잘 아는 바 우리 풍물은 한편 풍장이라고도 하거니와 그 주된 악기는 꾕쇠, 징, 장고, 북등 이른바 사물로 되어있긴 하지만 원래 날라리, 젓대, 피리, 취타 등이 한데 어울어지는 것을 뜻해왔다. 그러나 요즘은 풍물, 하게 되면 이른바 사물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우선 그것만 갖고 이야기 한다 치더라도 그것이 세계에 으뜸가는 악기임은 누가 감히 이를 부언할건가 묻고 싶다.

우선 한번 내갈기기만 하면 세상의 다른 악기들은 제아무리 그 옆에서 울고 불고 짖고 야단들이래도 이내 조용히 잠재울 뿐만 아니라 그 주위까지를 몽땅 잠재워버린다. 그리고 홀로 깨어있다. 이래서 일찍이 깨어있지 않은 풍물은 제아무리 제 몸을 운다 해도 죽은 소리라고 해왔다. 그러나 우리 풍물은 그저 모두를 잠재우고 홀로 깨어있는 것으로 곧 풍물일까. 아니다. 우리 풍물은 끊임없이 주위 사방을 잠재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끊임없이 잠재우면서 늘 깨어나야 하고 나아가서 주위 사방을 일깨울 때 비로소 풍물로써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니, 그래서 옛부터 천지의 바람은 잠이 들더라도 풍물, 위대한 풍물은 영원히 잠들지 않는 바람을 타고 났다고 했던 것이다.

풍물의 경지가 이 경지이고 보면 풍물은 햇빛과 바람과 비와 계절이라는 자연 현상이 못다하고 또 천지조화가 못 다할 뿐만 아니라 사람도 못 다하는 것을 해내는 또 하나의 사람의 예술적 능력이라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면 무한한 사람의 능력, 사람 속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달구고 을러대는 영원한 달구질이라 할 것이니 그러면 그러한 풍물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오는 것일까.

옛말에 풍물의 참맛을 알려면 농사를 지어 보아야 안다고 했다. 농사란 무엇인가. 자기 속에 있는 마지막 땀방울까지 달구 맷고 메마른 땅을 흥건히 적실 만고 강산에 비를 몰고 와야 할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사회 구성체 잘못과의 싸움까지 몰아서 모두 농사짓기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관계 속에 있는 우리의 풍물 그래서 소리 위주가 아니라 장단이 위주가 되어있는 우리 풍물은 자즌모리 장단을 몰아친다고 했고 휘몰이 장단은 감아친다고 했다.

무슨 소린가. 몰아친다는 건 농사에 방해가 되는 무리, 노동과 삶을 망치고자 하는 무리를 몰아쳐 버린다는 것이요, 감아친다는 것은 만일 수풀이 우거져 이를 헤쳐 나가고자 했을 때는 한손으로 수풀을 감아 쥐고 또 한손의 낫으로는 감아치듯이 모든 억압과 착취 등 구질 구질한 것들을 감아치는 온 노동의 율동이 예술적으로 전개되는 과정 바로 그 장단이다. 아, 이 위대한 장단이 세계의 어느 타악기 장단에 있을까. 설사 있다고 한들 우리 장단처럼 수백가지로 그 변형이 가능한가. 또 가능하다고 한들 우리 풍물처럼 마치 땅이 갈라지는 것 같고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실바람 흐느끼는 시냇물 같은 소리 다독거리는 소리, 이와같이 그 우람한 것과 섬세한 것의 통일이, 그 통일을 향한 끝없는 전개 과정이 그렇게 가능할까. 실로 우리 풍물만이 가능한 줄 안다.

그래서 우리 풍물이야말로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감히 자부하는데 이를 보고 시끄러워 하는 자, 그 누구인가. 아니 그 위대한 소리를 다만 문화유산으로 유폐시켜 공기층을 가르는 소리로만 앉아 있게 하여 실지로는 잠을 자는 풍물 죽은 풍물로 변질시키고 있는 자 그 누구인가.

꾕쇠에 대하여

이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으뜸인 우리 풍물의 악기들은 각기 어떤 소리를 내며 그 가운데서도 먼저 꾕쇠는 어떤 소리를 낼까. 우선 꾕쇠가 잡혀지는 상황을 보면 첫째 농사일을 할 때, 둘째 판굿, 세째 일련의 싸움터, 이렇게 세가지 경우가 있다 하겠다. 그 악기가 놋(유기)으로 된걸 보면 어느 고을 어느 집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그래서 쇠가 없으면 세수대야로 대신하고 그것도 없으면 요강(놋으로 된 것) 그것마저도 없으면 엉덩이 장단으로 대신한다고 해 왔은즉 이를 찬찬히 따져볼 것이면, 쇠란 그것을 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때 친다는 것, 따라서 그 소리는 그것을 치는 사람이 소리를 내게 하는데 달렸다는 것을 의미하긴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쇳소리는 쇠를 치는 사람에 달렸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진정 살아있는 쇳소리는 자기 소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러면 그것은 어떤 소리일까? 농사일 마당에서 치는 소리는 천상 즉 하늘을 거두어다 마당에다 터는 소리이다. 가령 '퀭'하는 그 한 소리는 탱탱 익은 곡식이 그 껍질을 벗는 소리다. 즉 콩깍지를 마당에 널어놓고 도리깨로 내려치면 탱탱 여물은 알맹이가 터지는 그 소리가 '퀭'하는 한 소리다. 그러니까 그 소리는 곡식을 터는 소리요 나아가서는 씨앗이 끊임없이 그 껍질을 벗고 터져 나오는 소리 곧 농사일터에서 나는 쇳소리라고 보아온 것이 우리네 조상들의 예술적 지향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판굿에서 치는 쇳소리는 또 어떻게 들려 왔다고 했던가. '쨍'하는 한소리로 주어지는 판을 가르고 새로운 판을 여는 소리라고 했다. 가령 남들은 한참 김을 메고 있는데 산모퉁이에서 난데없이 쇳소리가 돌아 나온다. 이 때 밭머리에서 진땀을 빼고 있던 농사꾼은 그 노라리에 대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수작을 아니 걸 수가 없다.
'야, 임마 그것도 쇠라고 치냐?'
'그렇다 임마. 네놈의 안사람 엉덩이 소리 보다야 낫지 않겠어.'
'무엇이 어째 이놈', 호미를 들고 달겨들면
'그럼 네가 한번 쳐본 듯 네놈인들 무슨 소리가 나나.' 하고

쇠를 던져주면 이번엔 화를 낸 그 녀석이 호미를 놓고 대신 쇠를 잡으니 애초의 쇠잽이는 그 뒤에 따라붙는다. 이렇게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 들면 벌써 한떼 거리의 풍물패가 어울어지고 그리하면 그날은 한판 벌어지는 날이다. 이렇게 판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굿에서는 작살판이라 하거니와 어쨌든 이 때 나는 쇳소리는 무엇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주어진 판, 농사꾼들은 일터로만 몰아 넣고 제놈들은 대낮부터 기생과 소리꾼 들을 불러 즐기는 땅가진 놈들의 지배 착취, 이를테면 봉건적 지배계층의 부패와 향락이 강요하는 노동판, 굴레의 판을 한소리로 가르고 일꾼들의 판을 새롭게 일구는 해방의 소리가 곧 쇳소리다.

그러면 일련의 싸움터에서 있어지는 쇳소리는 어떤 것일까? 사람의 맨 밑두리에서 몽클하게 치미는 분노, 침략자에 대한 온몸의 육중한 노여움이 칼날로 날카롭게 갈리는 소리다. 이와 같이 쇳소리는 날이 섰을 때 그리하여 거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을 때 비로소 지기소리를 얻거니와, 여기서 꾕쇠는 무엇 때문에 풍물 가운데 이물(앞장)인가가 자리매김되는 것이며 나아가서 자기치장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꾕쇳소리 가운데 가장 으뜸의 경지는 역시 자기 속에 잦아드는 소리가 있어야 하고 마침내 그렇게 잦아들던 것이 자기 소리로 터져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 속에 잦아들다니 무슨 소린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속에 끊임없이 자기생명을 배는 소리가 있어 그 생명을 다시 알까야 한다는 것, 바로 그 생명의 잉태와 함께 태어남의 소리가 아울러 나오는 것이라야만 그 꾕쇠는 제대로 구어진 것으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이런즉 그래 우리 풍물이 음악으로서 그 으뜸의 경지가 제 아니 거창하지 않은가. 실로 경탄할 일이라고 자부해 본다.

징에 대하여

꾕쇠는 이렇다 치고 그러면 우리 풍물 가운데 징소리는 또 무엇일까? 우리 꾕쇠 가운데 이주 잘된 놈은 역시 자기 생명을 배는 소리와 함께 그 생명을 알까는 소리가나는 것이라야 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참으로 잘된 징이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한번 '쩡'하고 우는 소리가 나아가다가 산자락에 부딪친다고 하면 이를 넌지시 넘고 다시 펼쳐진 강바람을 타고 넘을 수 있어야 하며 만약에 그 소리가 산자락에 부딪쳐 깨진다던가 혹은 느닷없이 숨을 거둘 것이면 그러한 징은 별로 치지 않았으니, 이때 징이란 자기 중심됨을 끊임없이 펼치는 소리의 주인공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의 장막을 열어 버린다.

꾕쇠가 창을 여는 소리를 낸다면 징은 대문을 여는 소리요 또 꾕쇠가 주어진 마당판이나 가르는 소리라면 징은 세상을 한번 크게 뱃다가 한번 ㈖구i 낳는 소리다. 꾕쇠가 칼을 가는 소리라면 징은 세상을 갈고, 꾕쇠가 끊임없이 나아가는 소리라면 징은 흩어졌던 힘을 모두어 다시 터뜨리는 소리, 풍물의 중심을 잡아 온 천상천하를 풍물로 잠재우고 일깨우는 세움과 뻗어 나아감의 끊임없는 불길의 쏘시개다. 그런 쏘시개 음악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만 있는 줄 안다.

장고에 대하여

그러면 장고는 또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풍물 가운데 예술성의 중심이다. 원래 노랫소리의 음조를 대신할 수 없는 우리 풍물악기의 특징과 멋이 장단에 있거나 이때 그 장단의 중심됨이 바로 장고다. 그 점으로 장고가 빠진 풍물은 음악으로서 풍물, 예술로서의 풍물로 생각할 수없을 정도다.

그러면 장고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 지게장단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것도 없으면 손장단으로라도 대신한다. 그러나 장고의 참된 멋은 그 장단의 중심됨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풍물이 다 그렇긴 하지만 특히 장고의 경우 그것은 채로 치고 손으로 치고 어깨로 치고, 다시 말하면 온몸으로 친다. 그러니까 장고는 곧 완벽한 춤이라는 말이다. 우리 판굿의 중심이 춤이라면 따라서 장고가 없고 보면 판이 안서는 것이며 제멋에 겨운 신바람이란게 있지를 않게 마련이다.

모든 표현양식 모든 예술이라는 것이 일하는 사람의 동작 나아가 일의 성과를 일의 주인공이 차지하려는 올바른 사회적 싸움까지 합친 풍물은 노동의 예술적 승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온몸으로 해대는 장고야말로 우리 악기 가운데 으뜸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가는 악기임이 분명하다.

물론 세계 여러 종족의 토속악기에는 우리 장고와 엇비슷한 것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한 율동의 표현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우리 장고는 음악적으로 완벽에 가깝고 그 예술적 기능이 극에 달해 있다. 가령 우리의 유명한 장단 자즌모리의 몰아치는 분위기도 사실 장고가 아니면 아니되고, 감아 치는 휘몰이 장단도 장고가 아니면 제대로 안된다.따라서 살(죽음의 맺힘)을 푸는 사람의 몸뚱아리, 저항하는 몸뚱아리에서만 나온다는 갈라 치는 장단도 이 장고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특징적 영역인즉, 아 그래서 우리 조상네는 이 장고만 보아도 어깨가 들썩인다고 했던가.

북에 대하여

다섯살박이 꼬마가 꾕쇠소리를 처음 듣고 하는 소리다. '엄마, 저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애.' 그리고 이어서 징소리를 듣고 나서는 '오줌이 쫑깃쫑깃 나올라고 해.' 했단다. 왜 그럴까? 어떤이들은 다섯살 짜리 꼬마가 대체 무엇을 알아서 그러겠느냐 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그 꾕쇠 소리를 듣고 나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것은 그 어린것의 응석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또 징소리를 듣고 나서 오줌이 나올라고 한다는 소리는 그만 그 소리로 하여 젖먹이적 힘마저 솟구친다는 바로 그 소리다.

그러면 북소리를 들었을 땐 과연 무엇을 느낄까? 모르기는 하되 그의 표현력이 가능하다면 아마 번쩍번쩍 정신이 들고 힘이 난다고 할게다. 쿵하는 소리를 들을 양이면 우선 눈에 힘이 가고 가슴이 펴지고 주먹이 쥐어지며 발바닥에 남 모를 땀이 베는 것 같다고 할거다. 그렇다. 꾕쇠가 제 아무리 앞장을 서고 징이 울려주고 장고가 제아무리 신바람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만 갖고는 풍물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만 갖고는 판이 어느 정도 익어가다가도 자못 시들해지고 일단 시들해지면 그것을 다시 일으키는 스스로의 힘이 안된다. 이 때 가뭇가뭇 시들어 가는 판을 돋구는건 역시 북의 힘이다. 판에서의 북은 밀어주고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징이 꾕쇠를 받쳐주듯이 북이 장고를 받쳐주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사물 전체를 판으로 받쳐준다는 뜻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풍물 속에서의 북은 밑에서 치솟는 밑두리의 맨밑 힘이다. 그러나 끝내에는 북이 맨앞에 서는 것이 우리 풍물의 묘미임을 놓쳐서는 결코 안된다. 무슨 말인가. 북은 혼자 운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까. 여하튼 그런 소리를 들었거나 못 들었거나 우리 북은 혼자 우는게 사실이다. 가령 싸움터에서 화살을 맞고 찢어진 북은 그 주인이 치지 않더라도 바람에 저절로 운다. 그러니 홀로 운다는 말이 나온 것이지만 사실은 북잽이 하나만 있으면 판소리도 되고 육자배기도 되고 타령도 된다는 뜻으로 해온 것이며, 따라서 북은 어떤 판 어떤 경우에서고 결국은 맨앞에 서서 까마득히 먼저 가며 풍물과 어울린다는 말을 화려하게 색칠한 것이 그 말뜻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로서는 못다 표현할 우리 풍물의 예술적 품격을 이렇게도 찔러보고 저렇게도 찔러보는 말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작이요, 따라서 우리 풍물은 꾕쇠고 징이고 장고이고 북이고 간에 모두 한소리 위대한 한소리라는 뜻이다. 침체된 판을 새판으로 일구는 남도의 새뚝이 올립니다.

끝머리에

그러면 우리 민족은 이 풍물로 무엇을 연주해 왔을까. 크게 이야기하면 백성의 염원을 연주해 왔다고 할 수가 있겠다. 모든 자연의 심통 맞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게 만들기 위해 싸우고 그리하여 일군 세상이건만, 그러나 자연의 현상은 자연의 현상대로 심통이 계속되고 또 세상은 세상대로 백성의 노동의 의도와는 달리 노동의 결과는 착취당하고 만다. 이때 백성의 염원은 처참히 짓밟히고 만다. 그러나 짓밟히고 찢기면 찢길수록 일어나는 것이 백성이고 보면 바로 그 백성의 염원을, 그리고 또 그것을 실지로 관철하는데 중점을 둔 소재로 우리 풍물은 있어 왔으니, 우리 풍물이야말로 유유히 굽이치는 민중의 내력에 맺힌 꽃 즉 민중해방의 정서의 알짜라고 자신한다. 이것으로 봉건 압제를 뚫고 살아나온 것이 우리 민중인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유사이래 봉건압제뿐만 아니라 이천 여번에 걸쳐 외간 것들(외래침략세력)의 침입이 있어 왔는데 그것을 모두 물리쳐왔고 이 때 그 싸움을 맨 앞장서서 달구어 온 것은 역시 우리의 풍물이었음을 상기할 때, 우리 풍물은 이른바 민족정서의 정수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겠다. 그런데 아뿔싸, 이 위대한 우리 풍물이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뿌리가 뽑히고 싹이 밑둥채 밟혀지고 있다. 그것은 풍물만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 위기는 분단의 현실을 최선의 것으로 강요하는 거짓된 문화, 제국주의 분단 억압이 판을 치는 것과 정비례하여 민중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모순이 깊어가는 현상, 그것의 가장 민감한 반응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 오늘 여러 곳의 농촌 그리고 많은 공장과 배움터에서 풍물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의 민중시대의 자기표현으로써 대단히 반가운 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아직은 몇몇 뜻있는 이들의 민중문화 애호 차원을 넘는 것을 못 본다. 이제 이름 그대로 민중의 시대가 와서 우리 민중이 스스로의 욕구를 정치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역사적 요청이라면 이와 아울러 우리 민중의 자기표현, 자기 정서인 풍물은 마땅히 되살려야 하되, 그것은

첫째로 우리 민중의 삶의 현장인 농촌과 공장에서 살아나야 하고 또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불과 몇 사람의 민족문화에 대한 향수나 취향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실제로써 힘차게 일어나야 한다.

둘째로 모든 교육기관에서 모든 음악교육 문화교육에 대한 내용을 이 풍물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육까지 모두의 기초예능으로써 우리의 풍물을 배우고 익히게 해야 한다.

세째로 우리들 안방까지 쳐들어온 전파매체(TV, 라디오)의 음악, 이를테면 영상의 주제음악과 배경음악까지를 우리 풍물에 기초하여 새롭게 꾸미고 그것을 매일 매 때에 방송하도록 해야 한다.

네째로 여타 음악 교육을 위한 사설 강습소 못지 않게 골목마다 강습소가 생겨나야 하고 또 이것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골목마다 거리마다 농촌과 어촌, 공장과 학교, 모든 직장과 집안에서까지 이 위대한 민중해방의 정서 민족문화의 알짜인 풍물을 앞세워 해방의 신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남이 덤테기로 씌운 덮개에 가리운 알맹이, 우리가 피땀으로 키운 알맹이를 타작하는 도리깨질 옹헤야, 민중의 해방 신바람이 이 풍물로 이물을 잡혀 어기차게 일어나야 한다. 진정 살아있는 풍물은 잠들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민중을 오히려 잠을 재우고 그 대신 우리 민중을 빨아대고 깔아 뭉게는 악덕지배 독재체재의 세를 돋구는 반역적 음악으로 우리 풍물의 생명을 박탈하는 자 그 누구인가. 아니 그 풍물을 기능적으로 받아들여, 세상을 타작하던 그 본래의 기능을 망치는 문화주의적 속배들은 그 누구인가.

이제 우리 풍물은 도리깨처럼 들고 일어나서 자기 껍질부터 타작을 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이제 우리 풍물은 찢어져도 우는 음악으로 신바람나게 이 반역의 현실을 때려 깨뜨리게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정원기의 국악 아카데미
글쓴이 : 사물노리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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