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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타악속에담긴철학과음악이야기/이론과실기는상호보완관계[모셔온글]

花受紛-동아줄 2008. 12. 28. 20:15

주인장의 허락 없이 이 글을 이렇게 올려도 될지 좀은 염려되기도 합니다.
혹여 실례가 되었다면 가차 없이 삭제 바랍니다.
제가 이곳에 발을 들인 때는 작년, 독일 함부르크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곳 한인들과 풍물을 가르치고자 꼭 1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시다시피 작년 독일에서는 월드컵이 개최되었더랬지요.
경기장을 돌아다닌 건 아니지만 함부르크의 대형 전광판 아래에서
서구 사람들 귀따갑도록 작신 풍물을 쳐댔더랬지요.
한인회의 추석잔치, 설잔치 때에도 풍물패가 활약한 것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구러 지내던 중 독일인 한 분이 배우겠다고 오더니
제 설장구 연주를 보고서는 함부르크 음대에서 콘서트와 워크숍을 잠깐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후일에 알고 보니 그분은 쿠바에서 삼바음악과 비슷해보이는 바타음악을 전공하고
함부르크 음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일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바타음악에는 삼분박이 있더군요)
여튼 좋은 기회를 얻었노라며 쾌재를 부르면서 준비를 했는데,
짧은 시간에 콘서트와 워크숍 만으로는 한국의 음악을 소개하는 것이
미흡하겠다 싶어서 읽을 거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 보니 분량이 많아져서 일부분만 번역할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이 글은 제가 그동안 배우고 나름 연구한 것들을 정리한 글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곳 아카데미를 찾아 자료를 구하고자 했는데
흔쾌히 등업을 시켜주셔서 여러 자료를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었던 지라 이곳에 이 글을 올리는 것도 예의겠다 싶어 올립니다.
다만, 이 내용이 얼마나 대중적으로 공감할 만한 것인가? 그리고
풍물 연희를 업으로 삼고 계신 분들에게 누가 되는 글은 아닐까? 이런 저런 걱정이 됩니다.
하여, 재차 말씀드리는 바, 이 글이 실례가 된다면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향후 교회에 몸을 담고 일할 작정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다 풍물소리에 흠뻑 빠져들어서 여적 꽹과리를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관심이 동양과 한국철학에 편중돼 있기로 대학원 논문도
우리 고대 경전인 천부경을 신학적으로 조명해보자는 흑심을 품고
아무도 터치 못할 썰을 풀어낸 것이었습니다.
하여, 이 글에는 풍물에 담긴 사상과 의미를 신학적 바탕 아래,
그야말로 쬐끔 공부한 한국철학을 주요 댓거리로 의미화한 것입니다.
말이 좋아서 의미화이지 삐딱하면 말껴맞추기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 선생님(서울풍물굿회 노수환)께로부터 들은 이야기들 속에서
많은 상상의 날개를 폈습니다.
선생님께 들은 가르침과, 10여년이 넘도록 집착하고 있는 풍물을
정말 제 방식대로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소박한 제 심정입니다.
이런 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글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님들도 제 심정을 이해해 주시고 읽으신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 글을 올리게 된 경위는
흔쾌히 등업시켜주셨던 인연의 결과임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그때, 참 고마웠더랬습니다.
아참, 그리고...
이 글에 대한 실랄한 비판은 제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러고저 하신다면, 리플을 통해 주저말고 해주십시요.



한국의 타악 속에 담긴 철학과 음악 이야기

서울풍물굿회 회원 김지목

한국인의 고대철학 이야기
한국인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천지인(天地人) 합일(合一)사상이다. 이 말을 한 줄로 풀면, 성통광명(性通光明),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개인은 하늘과 통하여 빛을 발하고, 공동체는 하늘의 뜻으로 교화하여 이 세상을 하늘의 세상으로 창조해나가며, 마침내 삼라만상 모든 것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우주에 신이 있다. 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의 한계는 무엇인지, 그를 어떻게 규명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 ‘알 수 없음’이 바로 신의 개념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분은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끊임없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다. 인간은 그 알 수 없는 분에 대해서 감지할 수는 있고, 그 뜻을 좇아갈 수 있다는 점이 다른 생명체와 구분점이다.
사회 안에는 인간이 있고 인간의 도리가 있고 인간의 법칙이 있듯이, 우주에는 질서로서 신이 있다.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인 하늘에도 있고, 이 땅 인간 세계 속에도 있으며, 또 인간 안에, 그리고 인간관계에도 있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그의 의지를 펼치며, 그가 하고자하는 바를 실현해간다. 결국 신이 해내고자 하는 바를 감히 적는다면, 진(眞, 진리를 구현함), 선(善, 좋은 것, 정의), 미(美, 아름다움)이다. 한국인이 지닌 철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늘에도, 땅에도, 인간 안에도 있는 신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과 땅의 힘으로 꽃이 핀다. 지구 안에 모든 존재가 가진 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이라는 학설이 있다. 어떤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를 하나씩 떼어내면 결국에 남는 것은 태양이 보내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가 왜 우리에게 오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에너지가 어떻게 오는지, 어떤 현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과학이 잘 규명해줄 수는 있으나, 왜, 어째서 태양이 존재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해명할 수는 없다. 그 에너지와 땅이 작용하여 꽃씨를 자라게 한다. 한편, 땅에서 꽃씨를 자라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도, 씨앗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그런 종자가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인간은, 씨앗이라는 것이 땅에 심겨지면 삼투압 작용 등 생명현상에 따라 싹을 내며 자란다는 사실만 보도할 수 있을 뿐이다.
태양과 땅이 가진 힘, 그리고 씨앗의 의지에 대해, 인간이 그 근본의 이유를 알 수 없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다.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고, 또 땅위에 존재하는 꽃에도 있다. 이 세 존재는 무언가를 이루어간다. 씨앗이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의 껍질을 찢고 싹을 낸다. 그리고 줄기를 기르고 잎을 키우며 마침내 꽃을 피운다. 꽃을 통해 종자를 번식하고 그것을 위해 열매를 내거나 꿀을 만들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근원의 힘이 작용하여 줄기를 내고 꽃을 피우고 종자를 번식하고자 애를 쓰는 것, 이것이 신이 가진 의지 곧 진, 선, 미인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법칙을 관찰한 한국인은 그 우주의 법칙을 일컬어 신이라 말하기 시작했고 인간 또한 그 법칙을 따라 살기를 바랬다. 이것을 한국인의 철학적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인의 고대문헌인 삼일신고에는, ‘하늘님이 인간의 머리(뇌) 속에 내려와 계시다’는 가르침이 있다. 씨앗이 싹을 내고, 줄기와 잎을 기르며, 꽃과 열매를 맺으려한다는 신의 의지가 있듯이, 인간의 머릿속에도 그와 같은 신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있기에 인간은 신(진리, 변함없음)을 찾고자 애쓰며, 신(좋은 것, 정의, 풍요)을 따르고자 하며, 신(아름다움)의 의지를 구현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우주, 곧 신에 대해 규명해낸 인간은 이제 자기가 처한 현실을 본다. 처음에는 황량하기만 했던 인간 세계에 실망한다. 생존을 유지할 먹을 것이 없으며, 인간됨을 보호받을 길이 없으며, 우주의 질서에 대한 무지함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바탕에서 인간은 신의 본성을 따라 의식주를 확보하며 조금씩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진리를 좇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나가며, 정의를 구현하고자 애쓰며,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나간다.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한국철학의 바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어떻게 해야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 방법론은 천지인(天地人) 합일(合一)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 속에 존재하는 신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본래 하나인 그 세 존재를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 태양이 가진 의도, 땅이 가진 의도에 맞추어 사람 역시 그에 따라 알 수 없는 신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그 방법론인 것이다.
한국의 고대문헌 중에는 세 가지의 경전이 있다.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 바로 그것이다. 천부경은 우주의 질서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마치 부적처럼 만들어졌다. 삼일신고는 그 우주의 법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며, 참전계경은 가르침을 따라 살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행실이 요구되는지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한국인의 고대철학 또는 신앙을 증명하는 세 경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천지인이 하나가 되어(性通) 우주의 질서인 신의 의지를 구현해나가는 것(空完)이라 할 수 있다.

음악 이야기를 시작하며
음악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인간의 영혼을 순화하여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신과 소통하게 한다. 한국의 타악에서도 우리는 한국철학의 미묘한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또 음악을 따라 진리를 수련할 수 있다. 한국 타악을 통해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은, 타악 속에서 한국철학의 법칙을 발견하며 진리를 향한 조상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한국 타악을 통해 진리를 수련할 수 있다는 말은, 타악을 통해 한국의 철학을 배우고, 그 신앙을 수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한국의 타악이 가진 철학, 법칙, 음악적 원리에 대해 서술하며 그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맨 처음에 어떤 의지가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 진리로부터 나온 의지이다. 어떤 의지이냐 하면, 생명을 살리고 더불어 공생하는 것을 완성하려는 의지이다. 이 의지의 특성은, 끊임없이 운동한다는 것과 밝아진다는 것이다. 그 의지를 일컬어 ‘신명(神明)’이라 하자. 신명은 본래 하늘에서 온 것이고 삼라만상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속에 있음도 당연하다. 인간 속에도 분명히 있으며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그를 품고 있는 인간의 몸 또는 감정이 상하면 그도 함께 주눅이 든다. 없는 듯 사라지고 그 밝음을 상실한다. 인간 밖인 하늘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분명히 인간 속에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이 상하면 그도 주눅 드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한 맺힌’ 상태라 하자. 한 맺힘은 신명을 낳은 진리, 어쩌면 신이라 말할 수도 있는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명은 지속적으로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 또 힘들지만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신명의 애씀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힘이 더 커서 결국 인간이 죽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면 그 신명도 함께 죽는다. 신명을 낳은 하늘도, 신명을 보호하고 있는 땅의 어머니도 함께 통곡한다.

인간이 진리로부터 신명을 받았듯이, 땅은 ‘어머니(母性)’를 받았다. 땅은 인간이 서 있는 세계를 상징한다. 신명에게 있어서 자연, 사회, 가족, 공동체라 불리는 땅의 세계에는 어머니가 계시다. 어머니는 신명이 제 의지를 펼쳐낼 수 있도록 바탕이 되어주고 재료를 공급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한다. 조건 없이 제공하는 그녀의 의지는 역시 진리에서 나온 것, 곧 진리를 닮았다.
신명이 어머니의 봉사와 희생에 덕을 받아 제 본래의 뜻을 구현해나간다. 이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상처를 받아 생긴 한 맺힘과 반대되는 상태이다. 이것을 ‘신명난다’라고 말하도록 하자. 진리의 원래 속성을 따르고, 또 어머니의 정성으로 신명은 ‘난다!’ 나는 신명을 품고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 진리를 좇는 존재가 되며, 일체만물과 한 가족이 된 듯 하며, 인간 몸이 가진 무기질의 한계에서 벗어난 듯, 자유와 해방의 기분을 만끽한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영원할 수는 없다. 땅이라는 세계는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 그 양극성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품은 땅이라는 세계는 본래 황량하고 냉정하며 때로는 인간에 잔인하기도 하다. 본래 인간도 진리에서 태생된 존재인지라 항상 신명남 속에 살고 싶지만 인간은 땅 위에 살고 있기에 그럴 수만도 없다. 먹기 위해 일해야 하며, 종족 번식을 위해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 자연재해의 횡포에 무기력하며 인간 속에 내재한 이기적 욕망,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더욱 증폭되는 폭력이, 진리의 정의와 평화를 해치고 만다. 그래서 한이 맺힌다. 스트레스, 억울함, 소외, 무기력...
한을 맺히게 하는 것을 죄라 하며 또 한 맺혀 신명을 죽게 하는 것 또한 죄라 한다. 결국 죄의 상태는 신명과 어머니를 낳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있는 셈이며, 인간으로서 제 자리에 서있지 못한 셈이 된다.
신명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신명은 한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진리의 뜻을 품은 제 의지를 펼쳐내고 인간을 인간답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좋지 않은 것(不善)을 던지는 땅을 개간한다. 황량한 곳에 물을 대고 냉정한 곳에 풍요를 주며 잔인한 곳에 질서를 꾀한다. 이것이 인류역사의 긍정적인 면이다. 그렇게 진리(하늘)와 세계(땅)과 신명(인간)은 하나가 되기를 꿈꾼다. 이것이 신명의 의지이다.

신명은 진리인 하늘에서 나와서 인간 속에 머무는데, 인간이란 존재는 땅의 재료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땅의 횡포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신명이 흙인 인간의 몸에 들어왔을 때, 끊임없이 운동하며 심장을 가동하고 또 숨을 들이켰다. 신명이 신명하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가 가장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심장의 박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신명의 속성을 빼닮았다. 심장을 가동한 신명은 그를 낸 진리로부터 숨을 받았다. 이로써 박동과 숨으로 생명이 시작되었다.
이제 땅에서 유래한 몸에 뼈와 살과 물을 조화로이 배치하여 몸을 완성했다. 심장박동과 숨, 그리고 뼈와 살과 물, 이 다섯 가지가 몸을 구성하게 된 요소이다. 이것을 ‘오행(五行)’이라 일컫도록 하자. 이 오행은 하나의 질서를 필요로 했다. 기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역할분담과 상호작용에 있어서 어떤 계약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열 두 개의 큰 길과 여덟 개의 샛길을 내었고, 그 길을 따라 살은 살대로 물은 물대로 뼈는 뼈대로 제 자리를 잡았다.
열 두 개의 큰 길은 진리(하늘), 어머니(땅), 그리고 신명(인간)이 골고루 나누어 분담하였다. 그리고 여덟 개의 샛길은 신명 안에 있는 박동과 숨이 또 정확히 나누어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래서 모두 네 개씩 가지게 되었는데, 이 넷은 ‘질서’의 한 주기를 이루는 기점이 되었다. 그 주기는 역시 일정한 법칙으로 운용되었는데, 그것은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이라 하는 주기이다. 땅의 어머니도 그 주기를 자체 법칙으로 활용하는데 그 중에 4계절은 대표적이다. 하늘 역시 ‘건조’하고 ‘습’하고 ‘차갑’고 ‘뜨거운’ 것을 질서로 배치하여, 진리와 어머니와 신명이 서로 어울리도록 배려하였다.

음악을 창조한 ‘신명’
인간의 몸을 완성하기도 한 신명은 인간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고 인간됨의 목적을 성취해가도록 끊임없이 일한다. 물론 신명의 의지가 땅과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좌절될 때도 없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인간에 의해 신명이 억압당하는 일이 더 허다할 런지도...

신명음악의 총론
신명이 인간을 통해 일한 것 중에 음악을 만든 일도 있다. 이것을 편의상 ‘신명음악’이라 해두자. 신명이 음악을 만들 때도 자기의 근본을 잊은 일이 없다. 신명은 자기를 낳은 진리에 그 근원을 두었다. 진, 선, 미를 구현하는 일에 복무하는데 유용하도록 시도한 것이다. 결국 신명이 원하는 음악은 진리의 의도에 따라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맺힌 한을 풀고 사람 사이에 좋은 것, 정의와 평화가 깃들게 하고, 종국에 이 땅이 하늘의 세계, 곧 진리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 냄으로써 결국 진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명이 음악을 만드는 첫 번째 요소이자 신명음악의 총론이다.

신명음악의 목적
신명이 땅에서 유래한 인간의 몸속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심장이 ‘박동’하도록 하고, ‘숨’을 들이킨 것이다. 땅과 하늘 사이에서 신명은, 안에서 심장을 가동하고, 밖으로부터 숨을 받는 일을 하였다. 박동과 숨. 신명이 주체가 되어 심장을 가동했으니 박동을 ‘양’이라고 하고, 숨은 하늘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았으니 ‘음’이라 하자. 이렇게 신명이 인간의 몸에서 가장 처음으로 ‘음양’을 이루었다.
박동과 숨은, 각각 ‘부풀림’과 ‘수그러듦’ 두 가지로 운동한다. ‘부풀림’은 곧 ‘양’이고 ‘수그러듦’은 ‘음’이 된다. 이렇게 네 개의 질서 한 패턴이 이루어졌다. 양(박동)과 음(숨)이 각각 음양을 얻어 모두 넷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명이 했던 일을 따라 신명이 창조한 음악도 음과 양을 기본 주축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한 박자를 2개로 구분한 박자가 생겨났다. 이것을 ‘이분박’이라 하자. 이것은 직선의 양끝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음과 양이 각각 또 다른 음양을 내었으므로 사각형의 네 꼭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본래 두 개의 속성은, 하나는 ‘수그러듦(음)’이요, 다른 하나는 ‘부풀림(양)’이다. 음과 양 중에 음이 먼저 시작됐고, 음은 45%, 양은 55%로 음보다는 양이 조금 더 많다는 것이 둘의 특징이다.
음과 양이 서로 반복하면서 생기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생겼다. 음양이 반복하는 박동과 숨은, 한이 맺혀 주눅이 든 인간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것이 신명이 인간의 몸에서 했던 첫 번째 일이요, 신명을 창조한 진리가 의도하는 바이며, 어머니 역시 생명을 위해 이유 없이 봉사하는 일이다. 때문에 신명이 창조한 음악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음과 양, 수그러듦과 부풀림, 이완과 긴장.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신명의 음악 두 번째 요소이며 신명음악의 목적이다.

신명음악의 완성
신명이 음악을 창작하며 고려했던 세 번째 요소는, 진리(하늘)와 어머니(땅)와 신명(인간), 세 주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세 존재가 확실해야 한다. 하늘은 하늘로서, 땅은 땅으로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인정돼야 한다. 알 수 없는 존재의 힘, 그러나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자기의 계획을 실현해가는 존재인 하늘, 하늘에서 나왔으며 끊임없이 인간의 완성을 위해 도우며, 하늘로부터 받은 힘을 인간에게 공급해주는 땅,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의 의도와 땅의 베풂을 받아 진리의 본뜻을 구현해낼 주체로서 인간. 이들은 진리로부터 나왔고 진리의 일을 해나간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역할과 자리와 성격은 각각 다르다. 서로 독립된 존재가 돼야한다. 하늘의 무(無)가 위에서 내려오며, 땅은 그 힘을 받아 유지하여 유(有)가 되고, 사람은 그 위에 서 있으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진리를 구현함으로 태극(太極)이 된다. 이들은 그렇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존재론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관계한다. 독립되나 독립된 존재들이 묘하게 한 몸이 된다. 독립되지 않은 채 하나가 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만약 그러고자 한다면, 무엇하러 진리는 땅에 어머니를 내고 인간의 신명을 낳았겠는가? 하늘의 근원은 땅의 바탕과 인간의 노력으로 제 의지를 실현한다. 땅은 하늘에서 힘을 부여받고 저장 기능을 통해 인간을 도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구현케 돕는다. 하늘로부터 나온 신명과 땅의 무기질로 인간은 소생했으며 그의 역할은 홍익인간, 이 땅을 하늘의 원리로 이롭게 함으로써 진리를 완성한다. 세 독립된 존재들은 결국 진리의 의지에 종속되어 하나인 셈이다. 독립된 존재들이 신비하게 한 몸을 이루는 것, 이것이 신명이 음악을 낸 관심이자 신명음악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신명은 한 박자를 3개로 나눈 박자를 창조한다. 이것을 ‘삼분박’이라고 하자. 삼분박은 정삼각형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세 존재가 독립한 것을 상징한다. 이것이 미묘하게 하나가 되면 둥글게 되는데 이것을 원으로 표현한다.
신명은 박자의 길이를 원으로 구성하여 하늘, 땅, 인간이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직선의 개념으로 박자의 길이를 잰 것과 판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가 된 원,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박자의 개념인 것이다.

신명음악의 특징
신명이 음악을 창조하며 고려한 네 번째 요소는, 그렇게 생겨난 박자에게 질서와 함께 자유로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분박과 삼분박이 서로 엉켜 2박, 3박짜리 패턴은 물론 5박, 7박, 10박짜리 개념을 만들어 음악이 되게 한 것이다. 진리의 의도에 따르고, 음양의 원리와 4계절의 법칙을 지키며, 생명을 살려 하늘과 땅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한다는 대전제 아래, 모든 박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신명음악은 그 박자개념이 변화무쌍하며 음악을 연주하는 자들의 느낌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고 다양하게 창작될 수 있다. 이것이 신명음악의 특징이다.

신명음악의 체계, 구성원리
신명음악은 한 맺힌 인간이 처한 억압과 굴종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도록 하는 것이 그 목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박자의 활용 또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다만 자유로워서 무엇인지도 모르게 음악을 구성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몇 가지 법칙과 질서, 그 체계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신명이 음악을 창조하며 고려한 다섯 번째 요소이다.
질서의 대전제는 앞서 말한 대로 신명이 음악을 내게 한 목적이고, 기술적으로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이라는 구조를 형성하였다. 하늘이 건조하고, 습하고, 차갑고, 뜨거운 것을 하나의 질서로 가졌듯이, 땅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하나의 질서로 지녔듯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깨닫고, 죽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질서이듯이, 신명음악도 하나의 순환으로써 네 가지의 질서를 가진다.

‘냄’은 존재의 시작이다. 봄기운이 찾아들고 땅 속의 수분이 나무줄기를 거쳐 연두색 잎사귀에 점점 차오르듯이, ‘냄’은 은근하고 희망적이며 무언가 기대하는 기쁨이다. ‘달아 올림’은 내었던 생명의 기운이 왕성한 활동을 하며 푸르게 산새를 메우는 과정이다. 활기차고 빨라지며 기쁨 속에서 자기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단계이다. ‘맺음’은 생명운동의 휴식기를 준비하듯, 나무의 경우 서서히 수분을 잎에서 뿌리로 내려서 단풍이 들게 하고 열매는 그 당도를 강화하면서 그동안의 수고에 결실을 맺도록 한다. 맺을 때는 그동안의 수고를 칭찬하듯 옹골지게 맺는다. ‘풀어냄’은 완전한 휴식기에 접어든 상태로 다음 주기를 예비하는 단계이다. 그동안 달아 치며 수고한 것을 이완시키며 다시 안으로 접어들게 하는 정리와 사색의 과정이다. 이 과정이 없으면 광기는 방치되어 진리와 어긋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내일을 잊어버린 듯 범죄에 열광하는 광기를 예방하고 다음의 생명의 법칙을 지키고자하는 지혜의 과정이기도 하다.
앞에서 네 개의 순환 기점은 ‘박동인 양’과 ‘숨인 음’이 각각 또 한 번의 음양으로 나뉘어 생겼음을 말했다. 이를 다시 풀어 말하면, ‘음음’, ‘음양’, ‘양음’, ‘양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은 각각, ‘음양’, ‘양양’, ‘양음’, ‘음음’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냄’이 꼭 ‘음양’이 돼야하고 ‘풀어냄’이 꼭 ‘음음’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배치는 연주자의 해석에 달려 있지만, 이런 구분을 하려는 이유는, 주기가 부드럽게 흐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신명음악은, 마치 물이 흐르듯이 흘러가는 것을 좋은 음악이라 여긴다. 그렇게 자연과 닮고 하늘의 법칙과 닮는 것이 신명음악의 구성원리이다.

신명음악의 박자와 기호
신명음악의 박자개념을 기호로 표현하면, 첫째는 점이다. 점은 시작의 작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완성의 전체를 상징한다. 마치, 지구에 살고 있는 내가 종이 한 장에 작게 찍는 점일 수도 있고 우리의 전체가 되는 지구 자체, 또는 전체 우주를 상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신명음악에서 일분박을 의미한다. 한 박자를 1박으로 셈한 것이다. 음악을 시작하는 가장 작은 단위이지만, 음악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연주 한 곡은 하나와 같이, 물 흐르듯 연주해야 함은 바로 일분박의 원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신명음악의 박자개념 두 번째 기호표현은, 네 개의 직선으로 구성한 사각형이다. 이는 양극성을 뜻하며 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음과 양의 실제가 이 기호로 설명된다. 네 개의 직선은 음음, 음양, 양양, 양음이 각각 한 개씩 배당받으며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박자를 이루기도 하며, 음악을 구성하는 원리, 즉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의 근거가 된다.
이것은 이분박을 의미한다. 한 박자를 2박으로 나눈 것이다. 네 개의 직선으로 구성된 사각형은 두 박자로 형성된 것이며, 음과 양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것이므로 두 박자를 하나로 이해해야함이 옳다.

세 번째 기호표현으로는, 세 개의 꼭짓점을 가진 삼각형이 하나로 순환하여 둥글게 만들어지는 원이다. 천지인이 독립되면서도 하나가 된다는 역설이 드러난 박자개념이다. 이것은 점으로 시작하여, 사각형의 원리로 흐른 음악이 종국에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징으로 창조된 이것을 삼분박이라 한다. 한 박자를 3박으로 나눈 것이다. 천지인 세 꼭지가 하나를 이루는 것이 신명음악의 궁극적 목적임을 증명하려는 듯 삼분박은 그렇게 사용돼야 한다.
위의 세 가지는 각각, 삼원일심도, 양태극, 삼태극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가락의 배치와 연주
정리된 박자개념으로 신명음악은 음악의 패턴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가락’이라 한다. 가락이 가진 규칙적인 길이의 단위를 ‘배’라고 하며, 배는 ‘대’로 구분한다. 가령, 네 개의 대가 한 배를 이루고, 네 개의 배를 조합하여 한 가락을 구성한다. 연주곡의 경우는, 일단 일정한 대를 기준으로 두고, 여러 배를 다양한 수로 배치하여 한 가락을 구성하고, 다른 종류의 가락을 의미 있게 배치하여 연주곡을 형성한다. 이때 구성하고 배치하는 질서는 앞서 설명한 것에 벗어나지 않으며, 배치의 방법은 연주자의 느낌과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가능하다.

호흡에 대하여
이제 가락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으니 신명음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가락의 배열에 대해 알면 이것이 어떤 음악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개념이 있다. ‘호흡’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알아야 신명음악의 본질을 더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을 따라 일이 시작된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을 따른 실천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일은 비로소 시작이며 또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위에서 한국철학을 중심으로 알아본 것, 그리고 신명음악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어떻게 연주될 것인지를 살펴본 것은 생각에 불과하다. 이제 곧 실천을 해보일 때가 되었는데, 그 실천이란 가락을 듣고 경험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살펴보려고 하는 ‘호흡’이란 것은, 이를테면 생각과 실천 사이에 놓인 연결과도 같다. 호흡을 잘 습득해야만 신명음악의 철학적 의미와 연주를 서로 연관시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주자에겐 이것을 습득하고 익숙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면 호흡이란 무엇인가?
신명이 음악을 창조할 때 가졌던 의도, 그것을 음악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명은 자기를 낳은 진리를 생각하며 점으로 상징할 수 있는 1분박을 창조하였다. 또 음양의 원리에 따라 2분박을, 천지인 합일을 지향하며 3분박을 내었다. 여기에서 호흡은 아직 원리와 생각에 불과한 1분박, 2분박, 3분박을, 박자라는 음악의 개념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1분박은 1분박의 호흡이 있고, 2분박은 2분박의 호흡이 있으며, 3분박은 3분박의 호흡이 있다. 우선 호흡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고 각각의 호흡의 방법을 익히며 가락을 분석해보자.

‘호흡’이란 말의 사전적인 뜻은 ‘숨을 내쉬고 들이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흡은 단지 일반적인 숨쉬기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호흡은 앞서 언급한 음양(수그러듦과 부풀림)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호흡의 의미를 일반적인 숨쉬기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로 이해해야 옳다. 그런데 사실 생명은 숨쉬기는 연관이 있다. 호흡이란 단순히 숨쉬기만은 아니지만, 호흡 그 생명은 숨쉬기를 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호흡에 대해서 설명할 땐 숨쉬기를 매개로 할 수 있다. 그러나 호흡에 대한 더 적확한 의미는 생명의 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숨쉬기만으로 호흡을 다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먼저 차분히 숨을 내쉬는 데서부터 시작해보자. 내쉴 때는 입을 통하는 것도 좋다. 다시 숨을 들이쉬기 전까지 마음은 평안해진다. 이때 아랫배에 묵직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단전의 느낌을 잘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서히 코로 숨을 들이쉰다. 보통 숨쉬기는 폐호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숨을 천천히 들이쉬면, 아랫배의 묵직함은 이내 사라지고 가슴으로 집중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아랫배의 묵직함은 그대로하고 묵직한 그곳 아랫배로 숨을 밀어 넣는다.
아랫배로 밀려들어간 숨이 아랫배를 채우고 이내 항문을 지나 뒤 옆구리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리고 숨이 뒷옆구리의 횡경막까지 올라가게 하여 아랫배와 신장부근의 뒷옆구리까지 불룩하게 한다. 그리고 내쉴 때는 반대의 순서대로 숨을 내뱉되, 숨이 들어갈 때 숨을 밀어 넣은 힘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뒤로, 뒤에서 위로 힘을 주었던 것처럼, 뱉을 때는 반대의 과정으로 힘을 주어 내뱉도록 한다. 숨을 들이마시면 아랫배와 횡경막이 부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숨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호흡의 진정한 의미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숨을 내 뱉을 때는 내 몸이 흙과 같은 무기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며 모든 의지와 생각을 이완한다. 그저 아랫배에만 집중을 할 뿐이다. 숨을 들이쉴 때는, 숨은 내가 들이쉬더라도 생명의 또 다른 기운은 우주의 기운이 전해준다는 마음을 갖는다. 앞서 말한 대로 신명이 안으로는 박동은 뛰게 하고, 밖으로는 신명을 낳은 진리로부터 숨을 받았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숨을 들이 마실 때는 우주로부터 천지기운을 받는다. 우주가 내게 숨 쉴 때 들이키는 산소와는 좀 다른, 천지기운을 들이켜 준다는 마음이면 좋다.
그러면 실제로 코를 통해 가슴을 거쳐 천지기운이 밀려온다. 숨이 아랫배를 거쳐 항문 뒤로 이동할 때는 또 한 번 천지기운이 밑에서부터 밀려온다. 숨이 뒷옆구리 횡경막을 부풀릴 때는 또 한 번 천지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돌아 코 인중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되면 가슴의 뜨거운 기운이 아랫배로 내려가고, 횡경막 안쪽에 있는 신장의 차가운 기운이 머리에 이르며 수승화강(水承火降)을 경험하게 된다. 호흡을 이런 방식으로 진행해본다.
신명이 음양을 형성할 때 밖으로는 숨을 들이켰고 또 안으로는 심장을 박동시켰다. 박동을 하는 것이 호흡의 또 하나의 과제이다. 박동은 숨쉬기를 하는 가운데 주로 아랫배에서, 또는 때로 가슴에서 일정하게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연주하려는 곡의 박자가 느려서 박자 셈과 숨쉬기를 함께할 수도 있지만, 박자가 빠를 경우는 숨쉬기가 그 박자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숨쉬기를 통해서는 연주를 가능케 하는 힘이 전달되지만, 리듬을 맞추는 것은 박동의 반복으로 가능하다. 여느 음악이 나올 때 발이나 손으로 박자를 맞추듯, 아랫배 숨쉬기를 하는 중에 박동으로 박자를 맞출 수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비로소 호흡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호흡을 단순한 숨쉬기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을 느끼는, 천지기운을 느끼고 또 박동까지 느끼는 범위에까지 넓게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분박 호흡법
한 박자를 1박으로 나누었으니 사실, 1분박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2분박과 3분박과의 구분을 위해, 신명을 낳은 진리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구분한 것일 뿐이다. 1분박으로 구성된 가락은 일채(어룸굿)이라는 가락만 있다. 1분박이 가진 의미는, 하나의 ‘대’, 한 ‘배’, 한 ‘가락’, 그리고 연주 전체를 끊어뜨리지 않고 물 흐르듯 쳐야한다는 총론적 의미가 강하게 남는다. 이런 점에서 일채가 가락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일채는 어룸굿이라고 하는데, 고요한 가운데 점이 찍히듯 리듬이 하나씩 동(動)하기 시작하는 가락이다. 처음에는 약하고 천천히, 점점 빠르고 세게 달아치는 가락이다. 마음을 가다듬어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준비이다. 그때 어디선가 신명이 찾아와서는 박동을 치기 시작하며 연주자의 마음을 깨운다. 서서히 박동을 치다가 숨이 찾아들어 호흡이 시작된다. 그렇게 연주자의 몸과 마음을 어루기 시작한다, 이제 시작이라는 의미가 담긴 가락이 일채가락이다. 예상대로 이 가락은 연주 제일 처음에 시작한다.

2분박 호흡법
한 박자를 2박으로 나눈 것을 2분박이라 하는데, 보통 한 배에 두 박자가 배치되고 그 두 박자를 하나로 인식한다. 그래서 결국 4개의 분박을 하나로 본다. 두 박자 중 하나는 양의 박자이고 다른 하나는 음의 박자이다. 양의 박자도 음, 양 두 가지를 가지고, 음의 박자도 음, 양 두 가지를 분박으로 지니며 이것이 하나의 질서를 형성한다. 그렇게 한 배의 가락이 만들어진다.
이분박을 대표할 만한 가락은 휘모리이다.

배 1배, 4박 8분박
대 양 음 ①성음
구음 덩 덩 궁따궁
분박 양 음 양 음 ②호흡

①성음은 한 배의 가락을 음양으로 나눈 것이다. 악기를 칠 때, 앞의 한 박자를 양의 느낌으로 치고 뒤의 한 박자는 음의 느낌이 나도록 친다는 것이다. 양으로 친다는 말은, 대범하고 세게 치고 소리의 느낌이 사방으로 퍼지도록 치는 것을 의미한다. 음으로 친다는 말은, 비교적 작고 섬세하게 치고 그 느낌이 안으로 말리도록 치는 것이다.
②호흡에서는, 양은 단전이 크게 부풀린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몸은 수그린다. 몸을 수그리므로 해서 부풀어 오른 단전의 호흡을 응축시킨다. 그리고 응축된 단전을 압축시키며 응축됐던 기운을 아랫배에서 위로 솟구치도록 한다. 그래서 음을 칠 때는 몸이 솟아오른다. 이것을 일정하게 반복하면서 변화를 만드는 것이 이분박 가락인 휘모리를 치는 법이다.

3분박 호흡법
한 박자를 3개의 작은 박자로 나눈 3분박 호흡은 한국 타악의 특별한 성질을 담고 있다. 신나면서도 여유롭게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3분박은, 한국의 타악이 실내에 앉아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실외에서 뛰어노는 데서 발생한 것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뉜 3개의 분박도 자로 잰 듯 정확한 길이로 구분되지 않는다.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힘과 그것에 맞서 튀어 오르는 힘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3분박의 구분은 메트로놈과 같이 기계적인 박자가 아니고 오로지 연주자의 기분과 호흡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3분박의 호흡도 그 호흡이 음의 성향이 강하냐, 양의 성격이 강하냐에 따라 내리는 호흡이 있고 드는 호흡이다.
3개로 나뉜 세 개의 박자는 각각 천, 지, 인을 부여받는다. 내리는 호흡의 경우, 천은 하늘에서 중력에 의해 몸 앞으로 떨어지는 분박이다. 떨어지면서 단전에 기운이 응축된다. 지는 하늘에서 떨어져 응축된 기운을 정성스레 잘 받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서서히 뒤로 기운을 이동시킨다. 잘 담아 전달된 기운이 몸 앞에서 뒤인 제자리로 오는 도중에도 마치 땅의 기운을 보태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응축된다. 그렇게 충만해진 기운이 마침내 터져 단전의 공간은 압축되고 몸은 터진 기운에 의해 위로 솟는데 이것이 인의 분박이다. 인은 다시 내려올 천을 준비한다.
드는 호흡의 경우는 약간 달라서, 천의 박자에서 터져 지의 박자에 솟아오른다. 그리고 인분박에서는 몸이 내려온다. 그래서 드는 호흡은 빠르게 칠 때 사용하고 내리는 호흡은 느리게 칠 때 주로 사용하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박자의 운용, 혼합박자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타악은 박자의 구성과 운용이 비교적 자유롭다. 여럿이 함께 합주를 하는 경우에도 연주자들이 서로 호흡이 맞는다면, 박자의 배치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한국의 타악은 박자가 변화무쌍하고 신비롭게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 육채가 있다. 이 박자는 2+3+3+2분박으로 구성된 가락이다. 1배는 10박이며 5박짜리 박자 두 개로 구성된 것이다.

배 1배, 10박
양 음
구음 덩 덩 더궁 더궁
호흡 양음천지인천지인양음
분박 2 3 3 2

이렇게 10박으로 구성된 가락이 서서히 변형되어 6박(3+3)의 가락으로 변화한다. 변화하는 방법은 위 구음에서 빈칸을 서서히 줄이다가 종국에는 빈칸을 없앤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된다.

배 1배, 1가락, 6분박
양 음
구음 덩덩덩궁더궁
호흡 양천인천인양
분박 3 3

이렇게 변화시킨 3분박 가락을 또 다른 가락으로 변형하고 같은 가락일지라도 음양 배치를 자유롭게 하면서도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의 질서를 유지하며 연주를 한다. 이것이 한국 타악의 묘미이다.

가락의 질서
가락의 운용이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될지라도 지켜야 할 질서는 있다. 그 첫 번째는 호흡을 맞게 해야 함이다. 2분박에서 양은 양의 호흡으로, 음은 음의 호흡으로 하고, 3분박에서는 천, 지, 인 분박이 제 호흡의 자리에 알맞게 배치하고 그대로 행해야한다. 두 번째, 박자를 구분점인 대가 일정해야한다. 합주의 경우 서로 대를 맞추어 호흡해야한다. 서로 대가 맞아 연주할 때, ‘호흡이 맞는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세 번째, 가락은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을 기본 구조로 하여 해석해나간다는 것이다. 한 가락에서도 그 질서는 알맞게 배치돼야 한다. 드는 3분박 호흡의 덩덕궁이 기본가락을 보자.

배1배
대 냄 달아 맺음 풀어냄
호흡 천지인천지인천지인천지인
①덩 따덩 따덩 따궁따 냄
양 양 양 음
②더덩 덩 따덩 따궁따 달아올림
음 양 양 음
③덩 따궁따 덩 따궁따 맺음
양 음 양 음
④더덩 덩 따덩 따궁따 풀어냄
음 양 양 음

위 가락에서, ①②③④는 각각 네 개의 대로 구성된 배인데, 모든 배는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의 질서를 유지하고 연주해야 한다. 그리고 네 개의 배는 한 가락을 형성한다. 가락 안에서도 네 개의 배는 각각 ‘냄, 달아 올림, 맺음, 풀어냄’의 질서로 구성하며 연주도 그 느낌을 유지하고 연주한다. 따라서 ②와 ④의 구음이 같더라도 ②는 달아 올리는 느낌으로 연주하고, ④는 풀어내는 느낌으로 연주함으로써 질서를 완성한다.
덩덕궁이 기본가락을 보면, ‘덩-따○―○’, ‘더덩-(궁따-)○○―’의 조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음양의 조합이기도 하다. ‘덩-따’는 그 호흡의 느낌이 튀는 느낌, 즉 수직운동과 같고, ‘더덩-’은 미는 느낌, 즉 수평운동과 같다. 그래서 수직적인 느낌에 양을 부여하고, 수평적인 느낌에 음을 부여하여 세보면, 양은 아홉 개, 음은 일곱 개다.
한국 철학에서는 음보다 양이 조금 더 많아야한다고 본다. 음과 양이 절반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양은 55, 음은 45로 배치한다. 이유는 숨는 것보다 나는 것이 좀 더 많아야 존재가 성립이 되고,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본래 받은 목적을 인간을 통해 성취하고자 신명은 음악을 창조하였다. 음악을 통해 신의 완전한 뜻을 이루고, 생명을 생명답게 살리며, 천지인 합일을 완성하고자 한다. 자유로우면서도 질서를 가진 신명음악은 그렇게 법칙을 가진다.

한국인의 신명문화, 풍물놀이
한국인은 고대로부터 이런 목적을 가지고 신명나는 음악을 즐겼다. 인간 안에도 존재한 신(神)이 명(明)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신명난 상태를 ‘신난다, 신바람 난다’고 하기도 한다. 신이 명하면 기실 그 기분이란, 날아갈 것 같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바람을 상징하는 ‘풍(風)’자(字)도 사용하였다. 신명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풍악(風樂)이라 하였고, 신명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풍악대(風樂隊)라 하였고, 신명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를 풍물(風物), 신명음악이 연주되는 장소를 풍장(風場)이라 하였다.

한국인은 풍물을 치며 신명이 바라는 대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바랬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를 바란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한을 풀고 서로 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풍물을 쳤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게 된 한을 풀어 생명을 회복하고, 자유로움의 질서를 따라 서로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꿈꾸었다. 풍물을 치며 억울함을 달래고 마을 공동체에 잠재한 갈등, 모순, 소외를 풀어내고자 했다. 억울함, 갈등 등은 사람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래서 공동체 모두가 함께 모여 생명을 회복하고 서로가 하나가 되고자 했다. 이것이 풍물놀이, 곧 신명의 의도가 인간사회에 모습을 드러냄이다.
풍물놀이는 한국인이 살던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풍물놀이의 근본 목적은 앞서 말한 대로 이지만, 그 색깔과 음악적 구성, 또는 놀이적 성격은 각기 조금씩 다르다. 지방마다 그 인습적, 지리적, 사회적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발전해왔다는 말이다. 웅장함을 좋아하는 기질을 선호하는 지역에서는 웅장함을 표현하는 악기가 발달했고, 산간지방의 사람들은 단순하고 빠른 음악을 발전시켰으며, 사회적으로 시장과 거래가 풍성했던 지역에서는 유희문화로서 풍물음악이 발전했다. 또 일손을 함께 모아 두레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풍물이 사용되었으며, 외적의 침입에 항거하며 집단의 단결을 위해 풍물이 쓰이기도 했다. 천지인 합일 사상을 지향한 한국인의 본성을 따라 신앙의식에 많았는데, 그때의 종교의식에도 풍물이 사용되었다.
이렇듯 풍물이 한국인의 문화 전반에 활용되었다는 것은 신명이 한국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으로 의미한다. 즉, 우주의 질서인 신을 믿는 믿음과, 생명은 생명답게 살아야한다는 철학과, 인간은 하늘과 땅과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소망이 인간 생활 전반에 통틀어 담겨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속한 공동체 중에 인류라는 말은 가장 큰 단위이다. 그 다음 단위는 민족일 것이고, 그보다 좀 작은 단위는 나라일 것이며, 나라는 여러 지역공동체로 이루어진다. 지역공동체는 보다 작은 단위의 지역으로 재차 구성하고, 작은 지역공동체는 여러 마을공동체로 이루어지며, 인간이 가진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족이 마을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론 가족의 범위가 넓어져 씨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다.
한국인의 풍물놀이는 주로 가족공동체와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풍물놀이 중에는 마을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 많다. 농경이 주업이었던 한국인의 마을은 농업이라는 생계수단 때문에라도 마을 구성원들 간의 협력과 관계의 원활함이 절실했다. 그래서 풍물놀이는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 서로 협력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놀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놀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명문화의 쇠퇴와 사물놀이의 탄생
그러다가 일제시대를 겪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실로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삶의 문화를 지배하고 정화하던 풍물놀이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결정적으로 1960년대에 기본 생산방식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바뀌면서 대대적인 이농현상 가운데, 마을공동체는 점차 파괴되었다. 풍물놀이의 기반이 무너진 셈이다. 이제 한국의 사회가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바뀌는 중에 있으므로 풍물놀이가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되기를 바라며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풍물놀이의 역사가 꽤 오랫동안이나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여러 각도로 풍물놀이의 회복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사물놀이의 탄생과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사물놀이는 네 가지의 한국 타악기로 무대에서 연주하는 음악의 한 장르이다. 그러나 본래 사물놀이라는 말은 1980년대 태동한, 타악으로서 한국음악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등단한 음악그룹의 명칭이다. 사물놀이란 단어가 가진 뜻은 네 가지 악기로 어울려 논다는 의미이다. 네 가지 한국 타악기란, 꽹과리, 장구, 징, 북을 일컫는다. 이것은 풍물놀이에서 쓰인 악기 중에 음악적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악기를 선택한 것인데, 최근에는 풍물놀이에서 쓰인 음율 악기인 호적도 함께 사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전쟁과 빈곤으로 풍물놀이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던 무렵, 풍물놀이의 전문 연희꾼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꿈꾸었다. 풍물에서 사용한 음악적 단위인 가락을 집대성하여 음악적으로 완성한 것이 바로 사물놀이패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본래 풍물놀이는 한국인의 생활문화 전반을 감당하고 있던 문화자체였는데, 이 중에서 음악적인 부분을 특화 발전시켜 무대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물놀이패로 모여 새로운 음악을 창조한 사람은, 과거 풍물놀이 전문 연희패에서 오랫동안 실력을 쌓으며 교제한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네 사람이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문화예술을 요구하는 미명의 빛은 아직도 멀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또 전통문화예술의 명맥을 잇고자 헌신했던 순순한 열정, 광대들의 감각과 근성으로, 결국 전통문화인 풍물놀이를 음악적으로 완성하고 우리의 예술문화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새 시대, 사물놀이의 과제
이러한 시도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사회가 점점 서구화 되면서 자연히 문화예술에 대한 요구도 늘어나, 먹고 살기에도 시급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문화예술을 삶의 한 영역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 와중에 사물놀이는, 과도하게 서구 중심적이었던, 문화편향적 사고의 대안이 되었으며, 질적 가치에 있어서도 서구의 것에 못지않게 발전되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한국의 타악으로서 사물놀이가 한 부분으로 인정받아 특수화되어 있다. 또, 국내적으로는 공동체성을 강화하고 어울림을 도모하는 음악으로, 초등교육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부터 사랑 받음으로써 보편화를 이루었다.

이제 한국의 사회가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데, 이런 변화에 따라 사물놀이는 또 한 번의 변화를 요구한다. 본래 들문화였던 풍물놀이가 무대예술문화로 변신하여 사물놀이가 되었는데, 이제 다시 들문화의 속성을 회복하는 시도가 필요하다(김헌선 교수, 경기대).
여러 풍물굿 문화재 전수관은 고집스레 풍물놀이의 명맥을 이어왔다. 지금은 중년을 맞았을, 과거 80년대 민족문예부흥운동의 대학생들의 민족문화 선호는 지금 후손 교육에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다. 지난 포스트모던 사조의 흐름은 각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세계화였던 의식이 한편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은 그것의 전문성을 또한 요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배경을 재료로 삼아, 전통문화의 회복과 전문화를 더욱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국내적 명분을 강화할 우리들의 과제라 여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사물놀이가 다른 나라, 다른 특색의 음악과 만나 음악적 교감을 이루어냄으로써 우리 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가운데, 새로운 음악을 탄생하는 시도가 필요하다(최종실 교수, 중앙대).
과거 사물놀이패를 구성했던 김덕수, 최종실, 이광수는 각각의 자리에서 사물놀이의 보급, 세계화, 전문화, 그리고 끊임없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울림 사물놀이패, 전통문화 민족예술원과 여러 대학의 전통연희과 등에서 배출하는 인적자원과 새로움의 시도, 변화발전은 사물놀이가 다시 한 번 거듭나, 세계의 음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바탕이 되리라 확신한다.

사물놀이의 신명연주곡
이렇듯 지금 우리가 선 자리에서는 사물놀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신명음악을 계승하여 음악적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앞으로 대외적으로 세계의 다른 음악과 만날 때 교량역할을 하며, 국내적으로 들문화로 발전하는데 있어서도 사물놀이는 기본이 된다.
지금의 사물놀이의 연주에는 비나리, 삼도 설장구, 삼도 사물놀이, 사물판굿, 영남 사물놀이, 웃다리 사물놀이가 있다.
비나리는 마을과 가족에 안녕을 기원하며, 풍물의 반주로 부르는 소리(노래)이다. 집과 마을에 한을 맺게 하는 액을 물리치고 신명나도록 복을 빌어주며 부르던 조상들의 소리를 무대에서의 공연으로 각색한 것이다. 사물놀이 공연에 참가한 청중의 재수를 좋게 하는 복을 빌어줌에 한 의미를 가진다.
삼도 설장구는 한국 이남 지방의 경기, 충청지역과 호남지역, 영남지역에서 나온 장구 독주 연주가락을 집대성하여 재구성한 연주곡이다. 양편에 서로 다른 음색을 내는 두 개의 북면을 세로로 놓고 두 손으로 연주하는 장구는, 다양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장점을 살려 여러 소리를 다채롭게 구성하여 가락을 화려하게 연주할 수 있다. 때문에 사물 악기 중 유일하게 독주가 가능한 악기이며, 삼도 설장구는 최고의 기량으로 음양의 조화, 느리고 빠르게, 작고 크게 연주함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신명음악의 목적을 잘 표현해낼 수 있다.
삼도 사물놀이는 경기, 충청지역과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의 풍물가락을 모아 편집한 사물놀이 연주곡이다. 가락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며, 주로 호남 지방의 화려한 가락으로 구성되었다. 사물연주를 통해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고, 박자의 변화와 흐름이 최고의 경지를 자랑한다. 작아졌다가 커지고, 느렸다가 빨라지는 빠르기의 변화에 빠져들면 어느새 사물놀이의 강력한 힘에 매료되고 가락과 일체감을 느낄 수가 있다.
사물판굿은 무대에 서서 상모와 부포를 돌리며 춤과 함께 연주하는 사물놀이이다. 본래 사물놀이는 들과 마당에서 놀던 풍물놀이를 무대 안으로 가져오면서 앉아 치는 것을 위주로 삼았다. 그러나 풍물놀이의 윗놀음을 공연물로 재구성하여 사물판굿이 생겨났다. 윗놀음은 머리에 상모와 부포를 쓰고 돌리고, 서서 악기를 치며 기예를 보이는 것이다. 사물놀이에서는 음악적인 면뿐만 아니라, 관객과 함께 하나가 되며, 탄성을 자아내는 풍물놀이의 묘기를 무대화하여 사물판굿을 연주하게 된 것이다.
영남 사물놀이는 영남지방의 가락을 주로 모아 사물놀이로 연주한 것이며, 웃다리 사물놀이는 경기, 충청지역에서 사용했던 가락을 모아 사물놀이로 연주한 것이다. 한국 이남 지역에서 웃다리 지역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일컫는다. 웃다리 지방은 예로부터 금속이 발달하고 윗놀음이 성행했다. 다른 지방에 비해 꽹과리의 놀음이 돋보이는데, 특히 두 개의 꽹과리가 서로 어울려 연주하는 짝쇠는 사물놀이의 최고의 진수이다.
반면 한국 이남에서 아랫지방에 속하는 영남과 호남은 가죽악기가 보다 더 발전하였다. 호남의 경우 장구의 기술이, 영남 지방에서는 북이 각각 발달하여 그 놀음과 가락이 다채롭고 화려하다. 영남 사물놀이는 다른 지방에 비해 가락들이 패기가 있다. 비교적 힘주어 채를 쥐고 단순하되 힘차게 치는 특징이 있다. 장구의 가락과 기술이 발달한 호남지방의 가락은 느리고 화려하며 여성적인 반면, 영남 지방의 가락을 모아 재구성한 영남 사물놀이는 호남가락에 비해 남성적이다.
교통이 발전하기 전에는 지역 간의 교류가 빈번하지 않았으므로 지방의 가락이 지방색에 따라 차이점이 많았지만, 현대는 이미 가락이 소통되어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물놀이에서 그 결정체가 바로 삼도 사물놀이이다. 삼도 사물놀이는 호남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가락으로 시작하여 영남 지방의 가락으로 힘차게 맺고, 웃다리 지방의 짝쇠로 마무리하는 연주곡이다.

신명악기에 담긴 우주
사물놀이는 우주의 음악이라는 말을 한다. 사물놀이 속에는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이 철학과 신앙을 가지고 창조한 음악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음향학적으로 보더라도 균형 잡힌 음악이며, 음향 헤르쯔 정도에 따라 색깔을 대입했을 때, 사물놀이 음악은 무지개로 나타나는 특성을 지녔다(배명진 교수, 숭실대 창업지원센터 음향공학분석팀).
이제 마지막으로 사물놀이의 네 가지 악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외형적 특징을 나열하기 보다는 악기에 담긴 의미와 어떻게 상관성이 있는지, 사물놀이가 어째서 우주의 음악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증명을 위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지난 해, 라디오 광주 MBC의 연재방송(사물놀이, 그 조화의 비밀)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사물놀이의 네 가지 악기는 두 개의 가죽 악기와 두 개의 금속 악기로 이루어진다. 이 네 악기는 신명음악으로서 음양이 조화됨을 상징하고 있다. 가죽은 음(숨), 금속은 양(박동)에 속한다. 또 가죽 악기는 장구와 북인데, 또 다시 북은 음, 장구는 양을 상징하며, 금속 악기 역시 징은 음, 꽹과리는 양을 상징한다.
사물 악기 중에는 ‘소리 악기’와 ‘울림 악기’가 있다. ‘소리 악기’는 꽹과리와 장구로서 귀를 자극하며 들리는 것이다. ‘울림 악기’는 사람의 귀보다 울림으로 몸을 진동시키는 악기를 일컬으며 징과 북이 그것이다. 소리 악기 중에서도 장구는 꽹과리에 비해 울림의 성격을 지녔고, 울림 악기 중에서도 징은 북에 비해 소리로 사람의 귀를 자극한다.
이렇듯 네 가지의 악기는 신명이 박동과 숨을 내고 그것들이 각각 음과 양으로 운동하여 결국 네 가지의 질서를 이룬 것과 같이, 음양의 철학, 곧 생명을 살리는 철학이 내재된 악기이다.

사물놀이에는 천지인 합일 사상이 역시 자리한다. 호흡과 가락은 무형의 근본으로서 ‘천’, 악기인 금속과 가죽은 그 질료성으로서 ‘지’, 그리고 해석하며 창조하는 연주자로서 ‘인’이 하나가 되어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놀이를 연주함 자체에 천지인 합일 사상을 표현하며, 호흡이 맞게 좋은 연주를 할 때 합일의 경지를 맛본다. 악기별로는 꽹과리가 ‘천’, 북이 ‘지’, 장구가 ‘인’을 상징하며, 꼭짓점이 되는 이 세 주체를 둥글게 하나로 엮는 악기가 징이다.
꽹과리는 그 소리가 인간이 듣기에 헤르쯔가 높아 하늘로 퍼져 하늘에 이르는 소리로 여기고, 북소리는 소리가 들리기보다는 그 울림이 땅으로 스미고, 땅에서 유래한 우리의 몸을 울린다 하여 땅의 소리로 여긴다. 장구는 양편의 북면이 내는 소리가 마치 남자와 여자를 상징하여 인간의 소리이다. 실제로 장구의 궁편 소리는 남자의 성대에서 나는 소리의 헤르쯔와 비슷하고, 열편의 소리는 여성의 성대 떨림의 헤르쯔와 비슷하다. 그래서 사람이 듣기에도 장구의 소리는 거북함이 없는 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징이 가진 기본 헤르쯔는 남성의 성대 떨림과 가장 유사하나, 가장 편안한 소리로 모든 소리를 감싼다는 측면에서 천지인을 하나로 엮는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타악으로서 음악적으로 악기를 보면, 징은 원박을, 북은 대박을 짚어주며, 장구는 분산박으로 가락을 꾸미고, 꽹과리는 머릿박으로 가락을 이끈다. 징의 원박이라 함은, 가락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배를 시작하는 박을 뜻한다. 배의 처음 박자가 바로 원박인 것이다. 원박을 짚어주는 징이 배의 시작을 내주기 때문에 혹여 호흡이 뒤틀리고 음악의 흐름을 놓쳤을 경우, 징의 원박을 찾아 가락을 맞추면 된다.
북의 대박이라 함은, 징이 시작한 배에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대는 배를 나누는 박자의 단위이다. 북은 대박을 맞추어주며 음악의 기본을 지탱해준다. 가락이 음의 성격이 강하면 음의 대박을 짚고, 양의 성격이 강하면 양의 대박을 짚는다. 이렇듯 징과 북은 사물놀이에서 배의 시작과 끝을 잡아주며 그 사이의 큰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장구의 분산박이라 함은, 장구의 가락이 박자를 흩트리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징과 북과 함께 원박과 대박을 맞추다가 엇박과 꾸밈박으로 박자를 분산시킴으로써 가락을 다채롭고 신명나게 돋우는 역할을 한다.
양장구로서 장구는 치는 북면이 두 쪽이고, 양 손으로 두 개의 채를 쥐고 연주한다. 특히 궁채는 세로로 잡아서 양 쪽의 북면을 자유자재로 연주하기 때문에 변화와 기교의 기술을 보다 화려하게 부릴 수 있다. 이런 성격을 살려 자유롭게 연주함으로써 볼거리를 제공하고 귀를 즐겁게 함으로 신명을 불러일으키어, 삼도 설장구를 시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도 사물놀이에서도 중심이 된다.
꽹과리의 머릿박이라 함은, 꽹과리가 가락의 변화의 주체라는 말이다. 꽹과리의 신호에 따라서 가락의 길이와 반복 횟수가 결정된다. 또한 꽹과리는 사람의 귀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악기로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 때문에 꽹과리 연주자는 그 기량의 정도가 매우 중요하다. 꽹과리를 잘못 연주하게 되면, 사물놀이 음악을 자칫 시끄러운 음악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하고 위험한 물건은 숙련자가 보관하고 다루듯이 꽹과리 역시 그러하다. 때문에 풍물놀이에서도 꽹과리 연주자가 최고의 자리에 있으며, 박자에 있어서도 머릿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금속 악기로서 양에 속하는 꽹과리와 징은 처음과 끝을 지배한다. 가죽 악기로서 음에 속하는 장구와 북은 그 사이를 메꾸는, 비교적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사물놀이는 음양이 조화롭게 배치되는 악기관계를 가지고 있다.

음향학적으로 보면, 꽹과리의 기본 주파수는 800헤르쯔, 장구는 200헤르쯔, 징은 130헤르쯔, 북은 80헤르쯔, 호적은 500헤르쯔인데, 사물놀이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20에서 20000헤르쯔 사이를 충분히 소리 낼 수 있는 악기로, 사물놀이는 소리의 스펙트럼을 넓게 확보하고 있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이 실험을 통해서 사물놀이 음악이, 표현에 있어서 그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박자가 변화무쌍하다는 사실과 함께, 음색이 다채롭고, 강약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범위가 넓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물악기 만큼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타악기가 세계적으로 없다시피 한다. 그만큼 대중의 확보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악기이다.
사물놀이의 연주에서 사물 중에 한 가지의 악기라도 빠지면 그 균형을 잃는다. 더 이상 사물놀이의 연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의 질서에 맞도록 네 가지 악기가 배치된 것인데,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우주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글을 쓴 이유
이러한 사물놀이는, 신명이 우주의 모습을 빗대어 그려 놓은 음악이다. 생명을 살리고 천지인 합일을 목표로 하고 결국 인간이 완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진리의 한 방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사물놀이의 연주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고, 또 수련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보편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영혼을 자극해오던 음악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사물놀이라 하는 음악이 천지인 합일을 이루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글은 사물놀이의 음악적 가치 또는 그 이론의 정립을 위해서 썼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사물놀이 음악이 가진 바탕에 대해서, 그 바탕이 얼마나 철학적이며, 신앙적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수련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썼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나의 스승께 풍물을 배울 때 이런 가르침을 받았다.
“사람이 풍물을 치려면 세 가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자기의 수양을 위해서, 둘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셋은 연주를 위해서다. 사물을 치는 사람이 자체로 즐겁고 그 행위를 통해 자기가 밝아지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분노의 감정을 삭힐 수 있는 기술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목적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런 교제를 통해 즐거움도 나누기 위해서다. 누가 뭐래도 풍물은 서로의 교감과 하나됨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확대되면 연주자가 되어 청중들에게 하나의 기쁨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재수를 좋게 하고 복을 빌어주면 그것이 하나의 대동세상이 아니겠는가.” (서울풍물굿회, 노수환)

위 세 가지 중에 이 글은 첫 번째의 것에 해당한다.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자기를 수련할 수 있는 철학을 받았다. 그것을 한국의 고대철학이라 할 수 있는, 천지인 합일사상이다. 그런데 그 비밀을 우리의 음악에도 숨겨놓았다는 것은 자부심 가질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화려한 공연만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이것을 매개로 자기를 더 낳은 존재로, 신 앞에 가까이 서는 존재로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이 어찌 가치 있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 음악이 좋다는 말, 공동체성이 녹아있다는 말, 호흡을 잘 해야 하고 중요하다는 말이 내게 모호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고 그 근거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글로 그 대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글은 아직 생각에 불과하고 미완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연습함으로 수련해 나가고 연주를 해가며 사물놀이 음악에 담긴 한국철학의 비밀을 깨우쳐가길 기대한다.


북소리에 맞추어 우리는 땅을 밟고 오른다. 심장이 박동하듯 신명이 나기 시작한다. 이 사이에서 장구가락이 연주되는데 이는 마치 채색이 화려한 무지개가 팔짓하는 것 같다. 현란한 그 팔짓에 신명은 한껏 더 달아오르게 된다. 통통 뛰면서 위로는 팔짓을 하는 가운데, 징소리는 서서히 퍼져나가는 오로라처럼, 숨에 의해 부풀어지고 사그라지는 폐처럼, 부풀며 사그라지기가 반복된다. 그 와중에 꽹과리 소리는 우리를 이리저리로 이끌고 다닌다. 바람 부는 곳에 가서는 바람을 쐬고, 물가로 가서는 물소리를 들려준다.
연주의 해석자들은 그렇게 떠다니면서 신명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