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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삼채를 "빠른삼채"라고 부르는 경향이 의미하는것은?

花受紛-동아줄 2008. 9. 13. 20:51

"땅도 땅도 내 땅이다. 조선땅도 내 땅이다." 많이 듣던 말이다. 풍물을 처음 접하면 바로 듣게 되는 구호소리. 아니 입장단 소리다. "삼채장단"이라고 하던가. 가장 흔하게 치는 장단이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장단. 그래서 우리에게 무천 친숙한 장단임에 틀림없다. 요즈음만 흔하게 이는 장단이 아니다. 예전에도 가장 많이 치던 장단이다.

그 분포지역도 전국을 망라하였다. 뛰어 놀기에는 가장 편하고 흥겨운 장단. 그래서 종류도 무척 많다. 다양한 변화가락이 많다는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독립된 장단의 기능과 역할을 하는 그런 종류가 많다는 의미이다. "긴삼채(느린삼채)", "중삼채", "잦은삼채", "된삼채", "당산삼채", "벙어리삼채", "무동삼채", "덧배기"등등.... 심지어 한 마을의 굿에 등장하는 삼채가 12종류나 된다고
자랑하는 동네도 있다.

아무리 적어도 한 동네에 2~3종류는 갖고 있고, 삼채를 치며 뛰아보면 흥이 오르고 흥이 고조되면 치던 삼채만으로 성이 안 차 좀더 진한 삼채로 넘어가거나, 회오리바람이 들이닥치듯 휘몰아치는 다드래기나 휘몰이장단으로 꼴딱 넘어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진한 감정과 열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삼채로는 "된삼채"나 "잦은삼채" 같은 삼채가 있다. 최근에 와서는 "된삼채"를 "빠른삼채"라고 모두들 부른다. "된삼채"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졌다. "된삼채"와 똑같은 장단을 똑같이 치면서도 이름표가 "빠른삼채" 로 슬그머니 바뀐 것이다. 왜 그럴까? 뭐 그게 그것 아냐? 똑같은 것아냐? 뭐 다른게 있어?...

[된삼채]라는 명칭은 [된]이라는 접두어와 [삼채]라는 명사가 결합된 합성어다. [된]이 명사 앞에서 접두어로 기능할 때는 "물기가 아주 적다"는 뜻과 "심하고 모질다"라는 뜻을 갖게 된다. [된밥][된장][된똥][된풀]등은 전자의 경우이고, [된바람][된서리]등은 후자의 경우다. 전자의 경우가 물기가 부족하여 "걸쭉하거나 질지 않아"서 "밥이 되다", "똥이 되다"는 뜻이기에 "뻑뻑하기는 하지만 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물리적 현상에만 적용될 성질이 아니리라. 인간의 감정에 대입해도 같은 질감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후자는 "심하고 모질게 부는 바람", "해를 줄 정도로 모진 서리"라는 뜻이므로 그 정도가 "강력하다"는 점이 전제 되며,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몰아치는" 형상이다. 이런 현상과 기운을 [된]+[삼채]에 적용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진 (긴)삼채의 감정과 기운이 고조되면 격한 감정이 되고, 격한 감정이 뿜어내는 강렬한 힘은 장단을 몰아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진삼채에 힘이 실리게 되어 기운이 묵직해지고 진해진다. 아울러 속도도 붙게 된다. 기운이 진삼채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된]상태가 되면, 이[된]삼채를 감당할 수 있는 장단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이를 담아낼 수 있는 장단이 [된삼채]나 [잦은삼채]인 셈이다.[빠른삼채]라는 명칭 엮시나 [빠른]+[삼채]의 복합어로 [접두어]+[명사]가 결합된 구조다. 이때 [빠른]은 말 그대로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다. "느리냐? 빠르냐?"의 문제다.

종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
[된]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름표는 그 장단을 치는 사람의 감정과 기운이 그 장단에 얼마나 실렸느냐에 따라 선택됐음을 알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된삼채를 제대로 치고, 잘친다"는 판단은 그 장단에서 "치는 사람의 감정과 기운을 다른 사람들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느냐"에 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속도는 부차적인 요소다. 다시 말하지만 속도란 감정과 기운이 변화함에 따라 나타나는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일 뿐이다. 속도가 장단의 발생과 성립을 결정하는 본질일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사람의 감정과 기운이 장단이 형성되는 본질이며, 장단의 특성을 파악하는 판단의 기준이며, 그 장단에 담긴 가치의 기준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빠른]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름표는 그 장단이 빠르냐 느리냐에 따라 선택됐음을 알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빠른삼채를 제대로 치고, 잘 친다"는 판단은 "속도가 빠르면 된다"에 달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자칫 "감정과 기운은 상관없고 그저 빠르기만 해도 제대로 치는 삼채"라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장단의 발생과 성립이 "속도"에 의하며,가치의 기준이 "속도"다. 달리기 경주를 하듯이 누가 더 빨리 칠 수 있느냐의 경쟁현상. 이를 위해 기계적인 반복연습과 기계적인 속도자랑. 점점 더 심화해갈 속도 중심의 경향성. 이는 자칫 그 장단을 치는 사람의 감정과 기운과 생각을 거세해 버릴 위험이 다분하다. "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현대사
회의 가치기준을 이 대목에서 연상케 된다.

[긴(진)]보다는[느린]이라는 말을 선호하여 자연스럽게 쓰게 되고, [된]이나 [잦은]이 아니고 [빠른]이라는 말을 더 선호할뿐더러 확고하게 정착하게 된 것은 분명 "속도"가 모든 사회현 상을 규정하는 이 시대의 가치개념이 만들어 낸 결과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속도"개념으로 장단을 이해하고 빠르기에 의해 장단을 소화하는 경향에 내포된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이런 경향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이가?


속도 중심으로 장단을 치게 되면 우선 장단의 맛이 변한다. 직선적이고 밋밋한 느낌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때는 침잠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학처럼 날라가고, 어떤 때는 능청거리고, 어떤 대목에서는 걸쭉해지는 그런 맛이 없어지고 단지 소리의 덤덤한 흐름만이 남게  된다. 장단을 치는 사람의 감정과 기운이 거세됨으로서 그 장단은 밋밋한 기계음으로 전락 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기계음이 된다는 것은 그 장단을 치는 사람이 기계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며, 기계가 된다는 것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표현하는 생명체일 수가 없고 "기구"나 "도구"라는 뜻이다. 즉 사람이 장구나 쇠나 북이나 징과 똑같은 "기구"일 뿐이라는 뜻이다.

사람과 악기(풍물)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상정해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악기는 사람의 감정과 기운을 받아 그대로 혹은 좀 더 극적으로 증폭시켜주는 객체이자 도구이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거침없이 토로해내고, 이를 공감하는 다른 존재와 막힘없이 서로 만나 토아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일 때, 악기로서의 존재의미가 있고 악기를 만져주는 "사람"의 생명 력과 비로소 일체가 될 수 있다. 사람이 만져주지 않으면 악기는 스스로를 표현해 낼 능력이 없다. 어간금을 주고산 최고의 명기(名器)를 애지중지 진열해 놓고 감상하고 자랑만 한다면, 그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잠자고 있는 쓸데없는 물건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 다. 만져줘야 한다. 만져주되 "장단"이라는 기운체(氣運體)를 통해서이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과 "악기"와의 사이에 "장단"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이 장단이라는 기운체가 사람과 악기를 만나게 하고 일체가 되도록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장단은 그 장단을 치는 순간에 오고 가는 그 사람(주체)의 감정과 기운이 그대로 악기(객체)에 묻어 나와야만 한다. 그렇치 못한 장단은 죽은 장단이다. 실제로 장단을 맛있게 치는 명인들의 모습속에서 악기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나 장구나 북이나 꽹과리가 "살아 숨을 쉰다"는 인상이나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아본 경험, 그런 짜릿함에 넋을 잃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속도중심으로 장단을 칠 경우에는 생명체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고, 주체가 아니고 객체로 절락하게 될 위험! 내가 악기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여 기계적으로 남이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데에 급급한 존재! 그런 위험에 빠지고 그런 노예적인 존재가 되도 좋단 말인가? 그저 남들보다 빨리 치는 것만이 캡이고, 그럴 때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자기를 기만해도 좋단 말인가?

감정과 기운이 거세된 속도 중심의 죽은 장단이 가져다 주는 폐해는 또 있다. 감정과 기운이 거세됨으로서 몸이라는 물질적인 신체에서 나타나는 장해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사람의 다양한 희로애락이란 감정의 변화는 결국 그 사람의 호흡작용에 바로 변화를 가져오며, 그 호흡작용의 변화는 기운(氣運)의 변화로 나타난다. 호흡이란 생명 그 자체이다. 호흡이 멈춘 상태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 생명체의 생사여부와 건강여부는 숨쉬는 상태에 거짓없이 나타난다. 한의학에서는 맥박(호흡작용)만으로도 병의 유무와 종류와 그 정도를 파악해내지 않는가. 이처럼 중요한 호흡에 직접적으로 작용을 하는 감정의 변화, 그 변화작용을 그대로 담아내는 "장단"이라는 기운체(氣運體)는 예술이나 문화론 측면에서만 이해될 성질이 아니다. 의학적인 측면에서,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시돼야한다는 뜻이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다. 장단의 구조도 "들숨"과 "날숨"의 구조를 갖을 수 밖에 없다. 장단은 "들숨"과 "날숨"이, "긴장"과 "이완"이 항상 한 몸처럼 함께 있어야만 한다. "들숨"만 있거나 "날숨"만 있으면 죽은 장단이다. 들어가면 나와야 한다. 나가버려 비었으면 빈자리를 채워야한다. 신진대사의 기본이다. 들어갈 때는 긴장이 되지만 나올때는 긴장이 풀린다. 풀릴 때 안온함과 쾌감이 생긴다. 제대로 치는 장단이란 감정과 기운을 제대로 발현시켜야 한다는 뜻이며, 이 또한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제대로 치지 않은 장단은 장단을 치는 사람의 건강한 호흡작용을 방해하고,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장단을 치는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단을 듣고 보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정도로 작용한다. 속도중심으로 장단을 치면 감정과 기운을 거세하기 쉽고 이는 건강한 호흡작용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호흡작용에 맞는 속도와 강도를 무시하고 힘에 버거운 빠른 속도만을 장시간 요구한다면, 항상 자극적인 것만을 감각적으로 요구한다면, 긴장과 이완이 항상 반복하면서 호흡작용을 강화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긴장만을 계속 선호한다면 몸에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 밖에 없다.

살아있음은 움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단을 치며, 장단을 들으면, 그래서 신명이 나고 흥이 오르면 생명체는 움직이게 돼있다. 밧줄로 꽁꽁묶어 놓는다고 하여도 막을 수가 있겠는가. 장단은 몸과 움직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몸에 생명력을 불어놓어주고 더욱 더 활력을 주는 그런 장단을 쳐야한다. 달리 표현하면 "살리는 장단"을 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활용할 수 있다.

우리의 장단은 소리로만 이해될 수 없다. 몸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다수의 우리 장단은 노동리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힘든 노역으로부터 몸을 사려내는 그런 장단이었다. 신나게 장단을 칠 때는 힘든 줄 모르는 경험(우리도 쉽게 경험하는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일단 풍물(악기)을 잡고 장단을 치면 젊은 사람 이상으로 날아 다니는 명인들의 믿기지 않는 모습을 이를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는 기분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 결론을 내릴 때다. 그렇다면 우리는 속도 중심의 장단이해와 속도중심의 장단연주를 어쩔수 없는, 필연적인 시대현상으로만 인식하여 당연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