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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주의 신학에서 살펴본 음악치료

花受紛-동아줄 2010. 3. 28. 00:02

개혁주의 신학에서 살펴본 음악치료




 


이 연구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음악치료의 학문을 개혁주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 음악치료가 신학과 신앙에 관련한 접근에 필요한 부분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국내의 많은 연구들이 음악치료라는 주제로 작성이 되었다. 그 작성의 주체가 음악치료를 전공했거나, 신학교에서 음악치료에 대한 주제로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음악치료와 신학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구들이 대부분이다. 우선 교회라는 공동체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세상의 학문을 바라봐야 한다. 이것은 성경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며, 그 성경적 패러다임으로 모든 삶을 접근해야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이 된다. 개혁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여기며, 수직적으로는 Soli Deo Gloria, 수평적으로는 Theologia pro ecclesia를 목적을 한다. 성경을 가장 성경적으로 인정하는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이기 때문에 성경적이라는 용어 대신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성경해석상의 문제로 인해 신학적인 접근이 대두되기 때문에 신학적 입장에서 음악치료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살펴보면 우선 음악과 인간에 대한 개념이 음악치료와 다른 철학적 차이가 있으며, 나아가 음악치료가 교회에 적용되기 위한 선과제를 제시하였고, 교회가 음악치료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언급하였다.


주제어: 성경적 음악치료,


서론


 음악치료는 1950년대에 미국에서 그 전문영역으로 정착하게 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시대적인 치료방법 중에 하나이다(Alicia Ann Clair, 1996). 국내에서도 1997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음악치료대학원으로 개설한 것이 그 공식적인 시작이다. 이처럼 짧은 기간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강윤희, 2006; 서려원. 2007). 이러한 음악치료라는 용어가 정규과정에 생성된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그 적용이나 생성은 인류 역사와 함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선행 연구들을 살펴보면, 음악치료사들의 연구물이다. 이들은 음악치료사로서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음악치료를 교회에 적용할 것들에 대해 연구하였다. 다른 측면은 신학도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 음악치료의 개론을 정리하고, 그 연구들을 자신의 신학적 견지에서 살펴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대부분은 음악치료를 실시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래서 갖게 되는 약점은 서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음악치료는 신학을 하지 않았고, 신학자들은 음악치료를 경험하지 않았다.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된 본 연구와 주제가 비슷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음악치료의 신학적 조명이나, 개념의 정리없이 받아들여짐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정성기, 2003; 박영호, 2003; 소재열, 2000). 개혁주의 교회는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표방하고 있다(손재익, 2006). “개혁된 교회”는 이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전체 역사 속에 있는 신실한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주의 나라가 다시 온전하게 임하실 때까지 늘 개혁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예배당이라는 공간적 개념과 함께 교회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세상을 향한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위의 연구들은 신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음악의 치료적인 기능을 전재하였다. 다만, 그 치료적인 적용이 과연 보통의 음악이냐 교회음악이냐의 관점에서 나누어지기도 하고, 치유는 찬양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는 대부분 음악치료의 개념을 잘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난 음악치료를 소개하는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음악치료의 연구 방법과 연구의 한계를 제언하거나, 성경신학적으로 잘못 적용된 성경을 인용하여 음악이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언급한다(소재열, 2000).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한 쪽으로 편중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음악치료사들에 의해 시행된 연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음악치료라는 학문이 생성되고 국내에도 발전하고 있다. 그 발전 중에 교회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경적인 조명이나 신학적인 관찰 없이 적용하고 있는 것의 위험성을 알리고, 이러한 연구가 지속적이며 전문적으로 시행되어야 함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는 것과 그러한 이해를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 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라 할 것이다.



본론


일반음악치료의 개념


  음악이 치료로 사용된 것은 인류의 역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고대 사람들은 음악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문헌을 살펴보면 4000년 전 이집트에서는 음악가와 제사장을 겸한 Shehuntmut라는 사제들이 의사를 겸하였고(최옥경, 1999), 엔케두안나는 아카두의 임금 사르곤의 딸이자 우르 지방에서 달의 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여사제였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4200년 전 수메르-아카드 시대, 엔케두안나는 신저에서 쓰는 42편의 찬가를 지어 음악을 치료에 적용한 사례가 쐐기 문자와 점토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Deest, V. Hinrich., 1998).

  이와 같이 오래 전에 근동지방에서는 치료를 위해 음악을 작곡하는 것과 같이 능동적이고 실질적인 음악치료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음악치료가 종교적인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박희봉, 2001).

 이러한 음악의 기능은 공자의 시대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적용되었다. 공자는 음악이 생활의 조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음악의 윤리성, 즉 “Ethos이론”을 주장하며 음악의 영향력에 대해 강조하였다. Ethos이론은 음악이 사람의 정신과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그리이스 철학자 Plato와 Aristotle에 의해 주장되었다(채경수, 2001). 이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자신의 성격과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좋은 인격이 형성되고 나쁜 음악을 들으면 나쁜 인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Ethos이론”은 엇갈린 견해를 갖는다. 최혁은 헬라 사람들이 음악을 감정표현의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고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고, 음악이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음악에 대한 율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최혁, 2000). 여러 학자들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 거론하면서 Ethos이론에 대해 배제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Pythagoras는 그리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다. 그는 ‘피타고라스 음계’를 만들 정도였고, 음악과 수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숫자를 이해하는 것이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여 음악과 리듬의 체계는 숫자에 의해 정리되어 우주의 조화를 예증하고 이에 상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건강은 육체와 마음의 조화된 하모니에 의존된다고 믿어 특별히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주는 음악의 기능을 강조하였다(정현주 외, 2006).  

 이렇듯 예로부터 인간은 음이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며, 그것은 언어의 형태를 갖춘 대자연의 요소라고 믿고 있었다. 태초의 창조설과 연관되어진 음은 신묘한 영감을 부여받은 인간만이 들을 수 있다는 신비적 요소로 믿어졌으며, 음(音)은 원시인들에게는 주술적, 종교적인 영혼과의 교류수단으로 이해하였다(최옥경, 1999). 고대의 음악치료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Aulus Gellius, Celsus, Herophilus 등이 있다. Aulus Gellius는 통풍에 의한 엉덩이의 통증은 프리지아 선법으로 플루트로 연주하는 음악을 들음으로써 없앨 수 있다고 했다. Celsus는 정신병 치료를 위하여 심벌과 같은 음악을 추천하기도 하였고, Herophilus는 환자의 나이와 일치하는 음계에 따라 동맥 박동을 조절할 수 있었다고 한다(손창옥, 1998).  

  15-16세기에는 무도병이 유행하였는데 이 병의 유일한 치료법은 음악과 춤이었다. 이 병에 걸리면 갑자기 잠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음란행위를 하며 포도나 갈대의 꽃부리를 가지고 자기의 몸을 치장했다. 그런 그들의 병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음악과 춤이었다는 것이다. 음악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질병 때문에 죽어버린다고 한다. 이 병은 진달할 수 없는 신비한 질환으로서 유럽의 학계에 커다란 흥미를 일으킨 후 16세기에 사라져 버린 것도 있다(Julet Alvin, 1980).

 이와 같이 음악의 치료적 사용은 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대두된 것은 아니다. 일련의 흐름은 결국 1950년에 미국음악치료협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50년의 세월이 흘러 국내에는 (사)한국음악치료학회가 설립되어 음악치료의 학문을 국내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600여명의 음악치료사들이 각 대학원을 졸업하고 활동 중에 있다.

 박희봉(2001)은 음악치료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흐름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음악치료가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진 것에서부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진 것 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되어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음악을 이용해서 치료를 하는 행위가 종교적 행위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대나 중세 시대에 있어서는 더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치료에 있어서 음악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서부터 다른 여러 가지 치료에 보조적인 위치로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희봉은 인간의 과학적 사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인정하는 풍토 아래 있기 때문에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실질적으로 음악치료를 시행하며 현재 적용하고 있는 전문가로서 답변을 한다면 음악치료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 음악치료만의 독특성과 음악치료가 실시되는 영역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은 음악치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인데, Bruscia는 이것을 'Field theory'라고 했다. 음악치료만의 독특함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음악치료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음악치료는 음악이 치료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만이 사람에게 이끌어내는 신체, 심리, 사회적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음악치료는 실제 치료라는 적용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Bruscia, 2003).

 즉 음악치료는 음악을 주요 치료의 중재로 음악을 사용한다. 그 음악은 문화적 생산물로서 인간행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시대의 문화와 연관되어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음악치료의 발전에 있어 음악에 집중된 시기를 거쳐 과학적 접근으로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종교적인 접근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지금도 고대나 중세시대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여전히 종교와 밀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음악치료의 보조적이라는 입장은 음악치료의 방법에 따라 다르다. 신경생리적 음악치료 같은 경우는 음악치료가 적극적이며 주도적으로 이용되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그러니 보조적이라는 경우는 치료 영역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음악치료는 한마디로 치료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하기위해서는 사람과 음악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음악치료가 적용되는 대상이고, 음악은 치료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악치료를 시행함에 있어서 전제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음악성은 선천적으로 내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철학에 근거한 바가 아니라 여러 연구와 임상을 통해 얻어진 잠정적인 결론이다. 왜 음악치료냐는 질문에 둘째로 답하는 것은 음악치료활동에서 보인 행동이 음악외적인 상황, 즉 음악치료적 환경이 없어도 전이가 된다는 것이다. 실험실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닌 실제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언급한다. 세 번째로 음악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다룰 수 있는 힘이 있고, 인간 행동의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음악적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관념적인 주장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근거로 해서 주장하는 것들이다(정현주, 2007).

 이러한 전제 속에서 음악치료는 시행된다. 치료를 위해서 음악 전반적인 것을 사용한다. 그래서 음악치료는 목적 중심적인 접근법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음악을 사용하는가 라는 질문에 음악치료는 치료를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그 치료가 무엇을 의미할까? 치료라는 개념이 현대는 많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그 범주를 “사람의 신체와 정신기능을 향상시켜 개인의 삶의 질을 추구하고 보다 나은 행동의 변화”라는 문장으로 요약했다(최병철, 2007).

 이렇듯 음악치료는 치료라는 목적을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럼 누가 사용하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바로 음악치료사, 훈련받은 치료사에 의해 이러한 음악치료가 시행된다. 모두가 다 말씀을 들고 전할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모두 목사는 아니듯, 모든 사람이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치료사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발달은 음악치료의 방법과 사상의 다양한 전개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델을 제시한다. 모델이란 철학적 사고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료 개념을 이끌어 내고, 이를 토대로 음악을 적용한 체계화된 치료 방법론을 의미한다(정현주 외, 2006).

 이 분류는 Evan Ruud에 의해 음악치료의 관련된 네 가지 철학을 언급하였는데, 이 네 가지는 각각 다른 치료적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였다(Ruud, 1995). ‘치료’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바와 같이 음악을 치료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문제’에 대한 원인과 이를 보는 시각을 정확히 규정함으로써 적절한 치료 전략이 결정되기 때문에 음악치료의 철학적 기반에 관한 고찰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정리해보면 흔히 말하는 음악치료는 음악을 치료라는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으로, 음악을 담는 철학적 사고와 이론을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어내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과 함께 각 모델의 철학적 사고의 바탕을 살펴봄으로, 성경이 음악치료를 어떻게 말하는지 조명해볼 수 있겠다.


음악치료의 신학적 조명


 음악치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보통 5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최병철, 2006). 치료목적을 포함한 치료계획, 훈련된 치료사, 클라이언트, 음악적 경험, 건강을 증진하는 목적 달성이 그것이다. 치료 계획은 음악치료의 모델에 따라 다르게 계획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 모델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치료사나 클라이언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기독교적 인간론에 의거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음악적 경험은 음악치료가 단순히 음악의 사용이기보다는 음악경험의 사용이라는 점을 명시한다(Bruscia, 2003). 그렇기에 기독교적 세계관, 인간관, 음악관에 의해 위의 영역을 살펴볼 것이다.


 각 접근 철학에 대한 고찰


 음악치료 철학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과 개념들이 소개되면서 달라지고 있다. 시대적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문제에 대한 원인을 해석하는 시각이 변하고, 이에 대한 음악치료 접근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도 한다. 다시 말해 문제를 보는 시각과 이에 대한 음악의 치료적 활용, 그리고 치료사의 가치관 등이 치료 철학을 세우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정현주, 2006). 그렇기 때문에 각 철학에 대한 성경적 고찰 또한 중요하다 하겠다.

 음악치료에서 선택되는 치료 모델들을 보면 크게 생의학, 행동주의, 정신 역동, 인지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전체적 모델로 나누어진다(정현주, 2006). 치료 철학이 음악치료 실제에 적용되면서 기본적 개념과 접근이 학문의 특성과 치료 대상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반드시 한 가지 만을 고집하여 적용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적용에 있어 그 철학적 기반에 근거해서 실질적인 방법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철학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하겠다.

 실증주의(Positivism)의 영향으로 행동주의심리학이 등장하였다. 행동주의 음악치료라는 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을 그 기본 철학으로 한다. 행동주의는 인간의 문제행동을 현재의 행동에서 문제행동을 선정하되, 관찰이 가능하고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정현주, 2006; 최병철, 2006). 이러한 행동주의 음악치료의 장점은 음악적 보상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어 음악이 치료적 매개체로서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자체에 대한 외적인 모습만을 분석함으로써 내면에 관련된 부분을 외면하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인간의 행동이 자극과 반응이라는 단순한 매카니즘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기에 행동주의 음악치료가 비판을 받는 것이다(정현주, 2006).

 인지적 모델은 본인 자신과 환경에 대한 비이성적인 사고에서 문제가 기인한다고 본다. 그리고 문제행동은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며, 비이성적인 사고는 부적절한 감정과 스트레스를 일으킨다는 것을 강조한다(정현주, 2006). 인지적 입장은 사람의 마음이 행동의 주체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발달의 문화적이고 생물학적인 제약을 인정하며 사람을 특정반응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로 본다. 또한 정신분석의 결정론적 견해와 Adler의 “사람은 누구든 아무 일안 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노래심리치료가 주로 사용되는데, 대부분의 인지적 접근은 인가의 행동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원호택, 2001).

 정신 역동적인 음악치료는 정서에 대한 기본 전제를 모든 인간은 영유아기 때부터 잠재되어 온 무의식적 사고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무의식적인 사고와 생각이 의식적인 사고와 갈등 상태에 놓이게 되면 정서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정현주, 2006). 정신 역동 모델은 근본적으로 Freud의 정신분석이론에 그 뿌리를 두지만, 기존의 기본 전제들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오면서 현대 정신역동적 치료접근에서는 조금씩 바뀌었다(Wheeler, 1981). 이러한 연구가 ‘정신역동’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양한 이론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인간의 행동이 성격구조(Psychic structure)의 역동적 상호작용에서 기인하며 이러한 역동들이 현재의 대인관계와 개인으로서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Rezneck, 1991). 이 정신 역동적 음악치료의 기본 전제는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무의식의 영역은 우리의 욕구나 충동이 담겨있는 깊은 저장고로 본인은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인간 행동의 근원은 무의식적 본능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치료사들은 무의식에 대한 탐색을 계속해 이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정현주, 2006).

 실험적 설계나 행동주의적 접근이 인간 현상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큰 한계가 있고, 과학적 접근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 방법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발달한 학문이 인본주의 심리학이다. 이 인본주의 음악치료에서는 수동적이건 능동적이건 음악적 경험은 내제된 ‘욕구’의 투사, 통찰 등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과, Maslow의 주장대로 절정의 경험을 강조하여 음악이 주는 절정의 경험을 전제로 한다(정현주, 2006).  

 인간의 건강은 몸, 마음, 정신의 조화와 융화로 인해 유지됨을 주장하는 전체적 모델(Holistic model)은 병을 치료하기 보다는 인간을 치료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Mattson, 1982). 이 모델에서 인간은 몸, 마음, 정신,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고, 이들은 상호 작용하므로 이 중 하나의 변화는 곧 다른 부분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접근으로는 음악과 이완, 음악과 심상, GIM 같은 방법들이 사용된다.  

 이외에 매란토에 의하면 미국 내에서만도 무려 100여 개 이상의 음악치료 모델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최병철, 2006). 음악치료가 구성되는 철학이나 그에 따른 모델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음악치료의 모델이 심리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심리학은 기독교를 공격해왔다. 심리학에 있어서 3대 주류학파의 창시자들은 무신론자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공공연하게 혹은 사설 기관지를 통해 기독인의 신앙을 공격해왔다. Watson은 기독교를 “신화”라고 불렀고, Freud는 “신경증”으로, 그리고 Maslow는 “배설물”이라고 불렀다(Roland, 1992). 물론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를수록 심리학과 기독교의 통합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Mark R, 1996; Len, 2007).

 위와 같이 각 모델을 살펴보았지만, 모델은 치료적인 방법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와 지침을 제공한다. 그리고 치료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한 가지 모델로만 해결될 수 없다(정현주, 2006). 어떠한 모델이든 문제에 대한 원인을 제공하고, 어떻게 치료할지에 대한 가능한 모든 접근들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 따라 결정이 이루어지면, 치료사가 선택한 치료 모델을 중심으로 가장 적합한 접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크리스챤 음악치료사들은 이러한 접근에 관련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심리학을 바라볼 때, 기독교가 취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부분은 성경을 심리학 이론에 맞춰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기독교 심리학이라고 하는 많은 경우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성경 말씀을 심리학 이론에 맞추기 위해 왜곡 또는 과장하게 되는 위험에 직면한다는 사실이다(옥성호, 2007). 이러한 것이 음악치료에도 당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철학과 이론의 바탕이 심리학에서 대부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각 접근들이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에 관한 이해가 기독교의 인간관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해

  

 음악치료에서의 인간론은 다양하게 전개된다. 의학적 음악치료는 그 철학적 근간이 모든 인간 행동은 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최근의 뇌과학은 마음의 영역도 뇌 기능의 한 분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뇌가 인간의 중추라는 것이고, 그 중추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부터 행동까지 통제한다는 것을 전제하려고 하는 시도를 볼 수 있다(이영돈, 2006).

 행동주의 음악치료에서는 기계론적 그리고 환원론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내면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외적으로 표현되는 행동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정신역동적 음악치료는 그 전제를 심층심리학의 정신분석적 관점에 두고 있다. 정신분석의 기초를 둔 Freud는 인간을 어린 시절부터 쌓인 억압들에 의해 자신도 자기를 모르는 수수께끼적인 존재로 인간을 보았다. 이것은 무의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간행동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보았다(옥성호, 2007).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은 자기규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정신분석이나 행동주의는 인간을 단지 하나의 반응체로 보지만,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능동적이며 선택에 대한 판단력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기체로 보았다. 즉 자기 사랑을 극대화시키게 하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다(정현주 외, 2006). 즉 인간의 한계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옥성호, 2007). 그에 반해 성경에서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바는 현상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귀납법적이라기 보다 연역적인(a priori) 성격을 지닌다. 이는 권위에 의존하는 방법을 취하는데, 그 권위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 즉 성경이다(최홍석, 2005).

 인간론은 일반적으로 세 방면에서 연구된다. 자연과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론으로 구분될 수 있다. 자연과학적인 인간론은 사실적 진술이나 그 묘사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험 과학적인 면을 벗어나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은 이성의 소산물로 광범위할 것 같지만, 실제 이성이라는 피조물로써의 인식론적 한계를 늘 가지고 있다. 음악치료에서 제시하는 인간론의 대부분이 이런 범주에 속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을 탐구하므로 자연이성으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서철원, 2000). 즉 이성으로서는 하나님을 탐구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서 인간을 고려하는 것이 신학적 인간론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명백하게 제시한다(창1:27). 이것은 인간에게 그 근본적인 위치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으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로 특별한 은총과 축복의 대상임을,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상임을 말하는 것이다(박영호, 2002).

 창세기 1:26절에서 나타나는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의 의미는 원문을 살펴 “우리의 형상 곧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의미이므로 형상과 모양은 강조를 위해 사용한 반복적 용법이며, 결국 창세기 1:26에서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은 원형이시고 인간은 그의 모형이라는 사실과 ‘모양’이라는 말이 강조하는 바는 그 상이 모든 면에서 원형과 일치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최홍석, 1991).

 그럼 이런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드러난다. 인간의 영혼이 지닌 속성들, 즉 영성, 불가견성, 통일성, 단순성, 불멸성 등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심리적인 기능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성경에 의하면 마음은 생명의 기관으로서 먼저는 육체적인 생명의 중심이고, 모든 심리의 초석이요 원천이다. 마음을 근원으로 하는 생명은 두 흐름으로 나타나는데, 말과 언어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는 것이다(최홍석, 2005).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함축해보면 전인적인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을 닮은 성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인간의 모습, 인격적 존재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갖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부패한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것과 성경에서는 과연 인간을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가라는 문제이다.

 우선 인간이 부패한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더럽혀졌다(창6:5, 롬7:18)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전적으로 상실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최홍석, 1991).

 왜냐하면 창세기 5장 1절에서 3절에 타락 이후의 계보가 소개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9장 6절에도 살펴볼 수 있다. 이 구절은 홍수가 끝나고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인에 대해 규범을 주시면서 이유를 설명하시기를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본다.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 개혁신학자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인 면과 협의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타락 후에도 광의적인 신형상이라고 불리워지는 이성, 도덕, 감성이나 의지등과 같은 구조적인 능력들은 남아있다. 그러나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과 같은 협의의 신형상이 상실됨으로써 구조적인 능력들의 기능이 왜곡되고 말았다. 결국 이 말은 협의의 신형상이 상실될 때에 남아 있는 부분에 치명적인 영향이 미쳐졌다는 의미이며, 설령 광의의 신형상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전적으로 죄에 오염되고 말았다는 것을 뜻한다(최홍석, 1991).

 우리가 인간을 볼 때, 칭의된 죄인으로 보는 것은 한 측면이다. 이와 같이 살펴야 할 주제가 인간이 과연 이원론적인 존재인지, 삼분적인 존재인지 하는 것이다. 간단히 보면 우리 인간은 단일체, 즉 전인으로 봐야 한다.

 삼분적인 인간관이 기독교 역사 초기의 희랍 및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성경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는 명백히 전인적이다(L. Berkoff, 1991). A, 하지도 인간의 본성이 두 가지의 구별된 본질로 구성되어 있는 전인체라고 설명하고 있다(A. Hodge, 1994). 이러한 주장은 성경과 여러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인간관은 분리되어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인적인 단일체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분리되어서는 인간의 전체적인 면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음악치료에서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클라이언트를 볼 때, 행동과학이나 정신분석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의 원리를 왜곡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에 대한 고찰


 다윗에 대한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 다윗의 사무엘 성경을 통해 비쳐진 것을 음악치료사의 근거로 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다윗의 행위가 음악치료의 행위였을까?

 여러 연구자(Alvin, 1980; 권재환, 1988; 이희경, 1997; 임정양, 1993)는 사무엘상 16장의 사례를 들어, 다윗이 사울의 신경증적 우울증을 음악을 이용하여 회복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빈번하게 이러한 주장은 여과되어짐이 없이 많은 이들이 다윗의 음악행위가 음악치료인 것처럼 그려지는 것을 본다.

 그에 반해 근본적으로 사울을 번뇌케 한 것은 사단의 활동이기에 음악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이것은 성령론 적으로 설명해야 하며, 음악적 치료를 논하는 것의 성질이 아니라고 하는 입장도 있다(노주하, 1997). 음악자체의 힘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이었기에 치료가 일어났다는 절충적 입장을 취한다(이광재, 1997).

 사울의 경우는 우리가 말하는 정신과적인 우울증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신에게 당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통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과 귀신들림은 다른 것이다(김진. 1997). 음악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다윗이 했던 행위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다. 사울에게는 악신이 임했다. 이것은 성경해석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우울증보다는 악신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악신이 떠나갔다. 왜냐하면 다윗이 수금을 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악신이 떠나가는 이유에 대한 근거를 알아야 한다. 이 구절은 악신이 임했을 때, 다윗이 찬송을 하였기에 그 악신이 떠난 것이다. 성경 시편 22편 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찬송 중에 하나님께서는 거하신다. 그 찬송을 다윗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말씀 따라 이루어졌고, 그 임재 장소에 악신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울에게서 떠난 것이다. 물론 악신에게 시달렸던 사울이 악신이 떠남으로 인해 상쾌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몸은 분리된 몸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다윗이 실시했던 찬양은 음악적인 행위라는 것이다(Bibleworks. Version 7.0). 그러나 그것은 형태론적인 찬송이 아니다. 다시 말해 찬송가인가 아니면 복음성가인가라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그 찬송행위를 하는 사람에 달려있다. 아모스 5장 21절에서 24절까지 중 2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겉으로 나타나는 형태에 집중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시편 34:18; 막2:8; 삼상 16:7). 그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지가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큼 음악의 미가 발휘되는 곡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그저 중심만 살핀다는 것을 전제로 음악적 미를 무시하는 것은 이미 그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과 동일하다 하겠다. 시편 33편 3절에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라고 제시한다. 여기에서 “공교히”를 개역 4판에는 “아름답게”로 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음악적으로 아름답게’, ‘음악적 완성도를 갖추어’라는 뜻이다. 어떤 형태의 연주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까? 그것은 음악적인 음악이 아름답다.

 온전히 찬양한다는 것은 단지 전심으로 힘을 다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찬양을 하고 그에 따른 음악도 음악다운 것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다윗이 연주하여 사울의 악신을 쫓아낸 것은 음악치료의 사례로 보기엔 부적합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가 음악이라는 요소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통의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역사가였던 요세프스는 유대인의 고대 풍습에서 다윗은 사울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고 찬송가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옥경, 1999).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섭리의 신비함 때문에 일반적인 음악치료사역이 가능하다면 오직 하나님께만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 목회자들도 일반적으로 음악을 통해 치료가 된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강조해야 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음악을 통한 찬양은 예수를 믿는 고백적 표현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 음악을 통한 찬양은 아무 의미가 없다(소재열, 2000).

 

  음악치료에 대한 성경적 이해

  

  많은 자료에서 언급하는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성경에 음악치료가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치료는 비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음악치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인의 음악치료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성경이다. 또한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도 일반음악치료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의 음악의 기원을 언급한다(최병철, 2007). 그러나 성경은 음악의 기원에 대해 하나님에 둔다(김정우, 2003). 음악의 기원은 여러 고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음악치료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성경적 이해를 살펴보자.

 무엇보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다윗의 행위가 묘사된 성경 구절을 토대로 음악치료의 근거를 삼는 것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음악치료는 심리학과 음악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심리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기에 성경에서 인간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미 성경적 인간관에 대해 전인적인 접근을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음악치료의 대상자인 사람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 대상자에게 치료의 목적으로 음악이 사용되는 것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연구자의 이전 연구에서 알아본 바, 대부분의 교회에서 음악을 다양한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채경수, 2001). 그 사용 중에 하나가 치료적인 기능이다. 치료라는 결과가 나오기 까지 사용된 것은 찬양과 음악이었다. 여기에서 굳이 용어상 구분하는 것은 음악의 형태를 통한 찬양과 찬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음악이라고 구별하고 싶어서다. 여러 자료에서 언급한 것들은 찬양과 음악을 혼용하고 있다. 찬양은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찬양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목적이 전부다. 찬양을 받으시고 치료라는 반응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기도 하지만, 찬양의 목적은 치료가 아니다(박명섭, 1999). 그리고 교회에서 음악활동으로 치료라는 결과를 찾을 수 있는 여러 자료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권재환, 1998; 서은성, 1993; 박희봉, 2001; 임정양, 1993).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삶을 살아간다. 음악치료 또한 예외는 아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창조의 회복(우리의 표현으로는 일상성의 회복)을 통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문화의 문제를 그래도 가장 균형있게 볼 수 있고 성경의 어떤 한 구절을 해석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전,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사고의 틀이라고 볼 수 있다(임성빈, 2000).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협소한 개념이 아니다. 삶의 전반에 적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음악치료에 관련해서도 이 틀을 이용해서 적용해야 한다. 찬양으로서의 음악과 찬양 이외로서의 음악이 교회 공동체에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음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Musica est sceintia bene moduland" 이것을 풀이하면 ‘음악이란 올바르게 음을 움직이는 학문이다’라는 뜻이다. 개혁교회의 큰 줄기를 만들고 있는 어거시틴의 사상을 살펴보면 음악에 대해 노래와 찬양에 대해 구분한 것을 볼 수 있다(김상태, 1981). 교회에서도 음악과 교회음악에 대한 구분과 교육이 필요하며, 그 개념의 정리로부터 음악치료의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채경수, 2001).  

 음악치료가 대부분 심리학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웠다면 신학과 심리학의 통합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Jones와 Butman은 통합을 위해 학자들 간의 대화와 통합이라는 학문적 과업을 지지해주고 검증해주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음악치료의 부분에서도 학자들 간의 대화와 협력,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하겠다(문희경, 2007). 우리가 음악치료를 이해할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일반은총적 차원에서의 이해이다. 성경의 원리 아래 조명되고 여과되는 음악치료학을 활용해야 한다. 성경이 모든 학문의 근본적 원리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선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정정숙, 1993).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용어의 구분이 필요하겠다.

 음악치료관련 연구들은 연구자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다. 연구들을 살펴보면 연구 대상자가 교인이기 때문에, 사용된 노래를 찬양이라고 명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교회라는 장소 개념으로 인해 용어의 선택에 있어 치유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마치 치료는 세상에서 사용하는 말이고, 치유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정은주, 2004; 최윤정, 2007). 음악치료에서는 치료라는 용어와 치유라는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치료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것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고, 치유는 내부적인 기능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Bruscia, 2003; 최병철, 2007). 이와 같은 용어의 사용도 작게나마 교회에서 언급하는 내용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음악치료, 그리고 성경적 음악치료의 구별


 치료라는 용어를 주로 ‘therapy'라고 하는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 ‘요법과’ ‘치료’로 나누어졌다. ‘요법’은 극히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접근인 반면, ‘치료’는 연구를 통해 그 결과가 입증된 개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정현주 외, 2006).

 많은 연구는 용어에서 혼란을 갖고 있다. 음악치료는 철저하게 인본주의적 이론을 근거로 치료 방법이 구성되어져 있고 전문적 음악치료사의 주관 아래 치료가 성립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구분되어지는 음악치료와 음악치유는 혼용되어 사용될 수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정성기, 2003).

 또한 ‘치료’와 ‘치유’라는 용어에 있어서 어떤 이는 이것을 분명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치료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치유는 영적인 부분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면 상태와 결과의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국어대사전, 1984). 이것을 사전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간단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치료라는 개념이 실제 임상에서는 넓은 의미로 확대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한국노인복지학회, 2004).  

 음악치료에서는 치료와 치유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고 있다. 치료에서는 변화의 매개체를 대상자, 치료사, 음악인 반면에 치유에서 매개체는 음악, 소리, 그리고 우주 에너지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우주 에너지의 근거를 McClellan의 주장에 두고 있는데, McClellan은 모든 창작물이 소리나 진동적 형식에 의해 조직되고, 또한 무엇인가에 의해 지배되어진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우주의 모든 것이 음악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유동하여 스스로의 형태를 이루어가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음악은 개인과 우주간의 조화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쉽게 표현하면 음악과 우주는 진동(vibration)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상호간의 에너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조금 더 설명한다면, 음악치료는 어떠한 세팅 속에서 치료사의 개입이 치료에 도움이 되지만, 음악치유는 이미 사람 인체 속에 자체적 보호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어떤 치료사의 개입없이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을 치유라고 한다(Bruscia, 2003).

 그래서 음악치유를 음악경험과 그 속에 내재된 우주 에너지 형태를 정신, 육체 그리고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변형된 음악심리치료와 매우 유사하다. 음악심리치료는 대상자를 도와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만족을 채우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 즉 두 개의 접근은 모두 음악이라는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매우 비슷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련이 있는 음악심리치료는 대부분 이론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그 이론적 배경은 공통적으로 정신역동, 실존-인본주의, 게슈탈트, 인식적, 행동적 등 다양하며, 따라서 강조되는 것은 의식이나 무의식적 동기, 나타나거나 숨겨진 이슈들, 그리고 대상자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Bruscia, 2003).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많이 진행되고 있는 ‘내적치유’에서 치유의 개념은 무엇일까? ‘내적치유’는 그 정의에 대한 표현이 다르다. 내적치유라는 것을 인간의 영적 문제, 심리적인 마음의 문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결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기억과 관련된 마음 밭의 독이든 씨앗이든 제거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김현진, 2006). 치료에 대한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주장하나,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적 치유’라는 말에는  ‘기독교적’이라는 말을 뜻한다는 것이다(옥성호, 2007).

 ‘찬양 치유’ 또는 ‘찬양 치료’라는 용어 사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일반적인 음악치료와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정성기, 2003). 우리는 용어의 혼재(混在)가 가져오는 어려움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 중에 하나이다. 음악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정의와 의미성, 그리고 그 범위에 대해 한국교회가 제시를 해야한다. 이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져왔으나, 각자의 견해가 여전히 공통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채경수, 200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찬양과 음악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많은 부분이 찬양과 음악을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찬양과 음악은 그 구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강신의, 1999). 그래서 일반 음악치료에 대해 기독교적 음악치료를 이야기하면서 찬양치료라고 명명하는 것은 편협한 개념으로 귀결되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다. 또한 기독교적 음악치료와 일반적 음악치료는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결론


 성경적 음악치료라고 명명한 것은 음악치료를 어떠한 점검 없이 모두를 수용하기에는 기독교정신에 이미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Albert M, 2004). 여러 연구들은 성경적이라는 범주를 성경의 사례로 국한시킨다. 또한 치료의 본체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출 15:26)에 대해 자의적 해석을 행함으로 치료에 대한 일반적인 적용에 대해 이분법적인 접근이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은 창조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적 특별계시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창조와 인간의 도덕적 구조와 종족들의 생에 나타난 계시를 지시하고 있다(서철원, 2003).

 세상의 학문들을 사탄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는 단순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접근 태도는 개혁주의 신학의 태도가 아니다. 특별계시와 일반은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계시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역사성을 가지고 전수되어진 정통신학의 관점에서 음악치료의 이론을 조명, 평가, 비판하는 작업을 통해 얻어진 것을 ‘성경적 음악치료’라고 명명하는 것이다(이관직, 2007).

        

 제언


 C. S. Lewis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Modern)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Modernism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기독교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옥성호, 2007). 이것은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찾아다니는 실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벧전 5:8).

 이것은 비단 음악치료라는 한 분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문화 매체가 음악이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음악치료의 사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또한 문화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한 삶과 타인을 위한 삶을 분리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이 때문에 이러한 것에 더 책임을 갖어야 하는 것이다(임성빈, 2000).

 이미 음악치료 분야에서는 종교 또는 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찾아가고 있다(Helen L. Bonny & Louis M. Savary, 2006; Bruscia, 2003, 2006; 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편, 2007). 숙명여대 음악치료대학원에도 ‘치유음악목회전공’이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그 커리큘럼을 살펴보면 보통의 음악치료와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적인 삶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특별히 성경을 기초로 삶의 전 영역에 성경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Albert M., 2004) 치료에 매료되어 그것을 완전히 비평 없이 그대로 교회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나, 성경을 음악치료의 이론에 맞추어 왜곡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이관직, 2007; 옥성호, 2007).

 음악치료는 보통 음악경험을 강조한다(Bruscia, 2003). 이 말은 음악치료는 관념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경험적’인 치료 방식이라는 것이다. 현대 목회자들이 갖어야 할 주의점 중에 하나가 자신이 경험해서 갖는 정서적 결과로 인해 음악을 판단하고 수용한다는 것이다(채경수, 2001). 특별히 음악치료가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치료 접근이기 때문에 경험적 수용이라는 것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바른 성경적 음악치료의 적용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첫째, 인간론과 음악의 바른 성경적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음악치료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론에 관한 성경적 명제를 분명히 하고 접근해야 한다. 또한 음악에 대해서도 바른 정립이 신학적인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 많은 자료가 설명하듯, 아직도 교회에서는 교회음악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학적인 접근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통에 의존하여 설명하고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형태로서의 음악과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음악에 대해 모호한 해석을 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이분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교회음악에 대한 신학적인 조명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접근이 바로 이루어져야 성경적 음악치료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이해가 이루어 질 것이다.  

 둘째, 음악치료에 대한 바른 개념이 교육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단 차원에서 바른 성경적 음악치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여, 공통된 용어 사용과 함께 바른 개념을 형성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또한 출판이나 인터넷을 활용한 문서 사역을 통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일선 목회자나 목회자 후보생에게 개혁주의적 음악치료에 대해 교육되어야 한다.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한 바른 정착이 교회에 뿌리 내려야 할 것이다.

 셋째, 성경적 음악치료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보급할 수 있는 전문 기관을 육성해야 한다. 음악치료나 목회는 모두가 임상의 영역이며 전문분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듯, 성경적 음악치료를 펼쳐나갈 수 있는 이론적 토대와 사례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공동체의 건강 유지와 지역사회 연계라는 다양한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음악의 기능적인 면을 종합하여 조명하여 보는 기구가 설립되어야 한다. 음악의 여러 기능적인 면이 있다. 그 다양한 기능적 사용에 효과적으로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는 기구가 필요하다.


출처 : 행복한 찬양사역자
글쓴이 : 샬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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