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9,25,일/ 유 관순 열사 추모각 입구 탑골 삼일의 소리 천지를 흔드니 아우내 장터 놈들의 간담을 찌르고 대한독립만세 하늘도 흔들었다 무참히도 쓰러지고 밟혀도 잡초보다 더 강하고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열사의 저력을 보았으리라 머리 가죽을 벗기고 코와 귀를 자르고 달군 인두로 자궁을 지지며 손톱 발톱을 다 뽑는 만행에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셨다 태극광장 타임캡슐에 혼을 묻고 천세 만세 민족의 횃불이신 대한의 지도자 유관순 열사 영원히 민족의 가슴에 불타리라.
☆ 추모각 정문 앞
☆ 추모각 앞에서 바라본 전면광경
☆ 유 관순 열사의 영정을 모셔둔 추모각
☆ 유관순 열사의 유품을 모셔둔 기념관 앞에 보이는 타임켑술 지하에는 유관순열사가 당시에 독립운동에 사용하던 유품들로 100년후에 개봉할수있는 타임 켑술임
☆ 유 관순 열사의 실물 사진영정 형무소에에서 죄수로 있었을때 찍은 흑백 사진이고 일본경찰에 구타를 당하여 얼굴이 부어있었다고 기록됨 왜경이 시신을 파괴하여 훔쳐가서 지금을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함 산 정상에는 영혼을 모셔둔 영혼탑이 있다고 함
☆ 당시에 사용하던 태극기와 현제 사용하는 태극기의비교 두쩨줄 왼편에있는것이 현제의 태극기
☆ 유관순 열사가 살고있던 보존된 자택
☆ 독립운동 을 상의하는 회원들
☆ 유 관순 열사가 다니던 매봉교회
유 관순 열사는 매봉교회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에 참여 하게되며 파고다공원 만세사건을 보고 고향에 내려와 독립운동하게 된다.
☆ 유 관순 열사는 1902,12,16,일에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919,4,1,일 3000여 군중이 참여했던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을 주도 하였다 이후 일본경찰에 채포되어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중 끊임없는 옥중만세 시위운동을 주도 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9,28,일 순국 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3,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을 추서 하였다.
♡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 ♡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 어머니.
제 앞길만 가리며
바삐 사는 자식들에게
더러는 잊혀지면서도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바람처럼
끝없는 용서로
우리를 감싸안은 어머니
당신의 고통 속에 생명을 받아
이만큼 자라 온 날들을
깊이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기쁨보다는 근심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은
어머니의 언덕길에선
하얗게 머리 푼 억새풀처럼
흔들리는 슬픔도 모두 기도가 됩니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서 불러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집은 있어도
사랑이 없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어머니.
아름답게 열려 있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어제의 기억을 묻고
우리도 이제는 어머니처럼
살아있는 강이 되겠습니다.
목마른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푸른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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